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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8일 토요일
제1독서 : 예레 23,5-8
복 음 : 마태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만 원을 투자해서 만 원을 버는 사람과 만 원을 투자해서 백만 원을 버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잘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큰 이익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능력 있고 지혜롭다는 평가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번에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백만 원을 투자해서 일주일의 행복을 얻는 사람과 한 푼도 쓰지 않고서
한 달 이상의 행복을 얻는 사람 중 누가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당연히 후자의 모습입니다.
행복은 물질적 가치가 아닌 영적인 가치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으로 그 가치를 채우기란 쉽지 않습니다.
행복 연구가 대니얼 길버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사소한 일을 쌓는 과정에서 나온다.”
감사의 인사하기,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기,
불필요한 소비재 사지 않기, 친절 베풀기, 밝게 웃어주기 등등….
돈 들이지 않고 행복할 방법이 참 많습니다.
소위 ‘명품’이란 이름이 붙은 물건을 산다고 해서 행복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나 자신이 소중한 ‘명품’이 될 때, 행복도 오래 지속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법대로 사는 올곧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 나오지요.
하지만 그의 약혼녀 마리아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크게 벌여서 마리아가 곤욕을 보는 역경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고
남모르게 파혼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22)
겉으로 보여지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면
당연히 사람들에게 ‘간음한 여자’로 신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의로운 요셉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소중한 ‘명품’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정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사랑에 기초한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그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주님의 오심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예레 23,5-6)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화답송을 바쳤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시편 72,7 참조)
복음은 태어날 아기가 예고된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그렇다면 요셉 그는 어떤 사람인가?
복음에서 그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되,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하되, 순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행하는 진정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마태 1,24)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협조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성령의 작용, 곧 은총에서 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모두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믿음과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마태 1,22)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성 요셉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조력자요 협력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곧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좋으신 계획이 완성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 1,23)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는지 안 오셨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깨달음의 축제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느님께서 정말 우리 가운데 계시구나' 느낀다면 그분이 이미 오신 것이고,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그분은 아직 오시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대림초를 다 켜고 판공성사도 열심히 보고 구유도 예쁘게 준비하고 캐롤도 신나게 불러보지만,
정작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느끼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아직 미완의 성탄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신다고 여기시나요?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 공동체에, 지금 우리 가정에 그분이 함께 계시나요?
축하합니다. 그렇다면 매일이 성탄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성탄의 신비를 기념한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마태 1,24)
살다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백번 천번 다시 생각을 고쳐먹어도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에 다 내려놓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때론 꿈에서조차 나타날 정도로 악몽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가 자기 아이가 아닌 아기를 가졌다니요!
내가 아는 마리아가 그럴리는 없다고 수없이 되새겨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게 자기나 마리아를 위해 최선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론 정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생각, 하느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사실 어처구니없기로서니 마리아가 더 했습니다.
그걸 깨우치는 순간 요셉은 마리아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마리아를 신뢰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어처구니없는 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나보다 더 어처구니없을 사람을 먼저 바라보세요.
그리고 나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이 있음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손해 보는 선택도 의지적으로 할 필요가 있답니다.
나의 그런 선택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는 데에
꼭 필요한 기여가 될 수도 있다면 그리 해야 되겠지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신비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서도
그것을 하느님의 알 수 없는 심오한 계획이라 믿고 받아들인
순박한 시골 처녀 마리아와 요셉의 겸손과 내려놓음을 통해 오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도 놀랍습니다.
우리도 이 놀라운 신비에 동참할 수 있답니다.
우리가 어처구니없는 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마태 1,22)고 받아들인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장 어처구니없는 일은 하느님이 우리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말구유에서 태어나다니요.
심판자요 주인인 하느님이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심판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다니요.
아니, 하느님이신 분이 그런 인간의 양식이 되시려
매일 성체의 형상으로 우리 입 안으로 들어오시다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 우리의 어처구니없음은 하느님의 어처구니없음에 비할 바가 아니죠.
하느님의 아드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좋은 선물을 준비하셔도
우리 인간이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면 하느님도 어찌할 수 없답니다.
무엇보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해야 한다는 소명에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한 마리아의 순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하기 위해 요셉의 고뇌와 순명이 필요했습니다.
요셉의 묵묵한 희생적인 받아들임이 없었더라면
마리아의 협력조차도 구원의 힘을 온전히 발휘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특별히 요셉처럼 묵묵히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인내하고 순응하는 이 시대의 모든 아버지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
리고 우리 남자벗님들을 기억합니다.
장하십니다! 아버지들이여!
여러분의 희생적인 봉사와 순응이 여러분 가정에 구원의 빛이 되었습니다.
돈을 많이 못 벌어다 준다고 실망하거나 쫄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보잘것없는 희생적 삶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장하십니다! 남자벗님들,
요셉처럼 그렇게 묵묵히 이게 하느님의 뜻이려니 하며 늘 겸손하게 순명 하시니 말입니다.
오늘 아버지들과 남자벗들에게 힘찬 격려와 감사의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여러분의 이러한 겸손과 순명은 '그날'이 오게 하는 숨은 동력입니다.
여러분 덕분에 '의로운 싹'이 돋아나고 이 세상이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이 된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예레 23,5)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친구’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복잡한 일이 생기자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잠시 하와이엘 다녀와라. 그러면 여기 일은 내가 처리할게!’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가 가라 하와이’
저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입니다.
친구가 병원으로 면회를 왔습니다. 당시는 서품받은 지 1달이 안 되었을 때입니다.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품받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성령이 충만할 거야! 죽으면 하늘나라 갈 거야!’
친구가 한 위로의 말이었지만 들으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좋으면 먼저 가라 하늘나라.’
벌써 30년이 지난 일입니다.
시장에 가면 덤으로 콩나물을 더 주듯이, 하느님께서는 제게 덤으로 시간을 주셨고,
아직까지는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제가 있는 뉴욕에는 한국에서 온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대전교구, 대구교구, 부산교구, 서울교구입니다.
연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것은 연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줄이 없으면, 연줄이 끊어지면 연은 곧 땅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신부님들이 뉴욕에서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교구라는 연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뉴욕에서 신문을 만들 수 있는 것도 본사에서 지원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면의 60%는 본사에서 보내 줍니다. 편집의 방향도 본사에서 정해 줍니다.
뉴욕에서는 본사에서 정해 준 방침을 중심으로 미주지역의 소식을 편집합니다.
본사의 지원이 없다면 신문을 만들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구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태양계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달이 없다면 지구의 생태계는 지금과는 무척 다를 것입니다.
태양이 없다면 지구의 아름다움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날이 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유배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 생활의 고단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날이 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그날이 오는 걸까? 아니면 내가 그날을 만드는 걸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날은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와 조용히 파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꿈에 천사를 만났고, 천사는 요셉에게 성령의 뜻이니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날은 도전에 굴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거센 도전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실천으로 그날은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내가 성탄을 향해 가야만 성탄은 나의 성탄이 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
조욱현 토마스 신부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은 시간이 생겨나기 전의 일이다.
그분은 육신으로는 동정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고,
그분께서 아드님이심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비롯한다.
주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여 주시려고 눈에 보이는 육신을 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1,1)으로 나셨고
우리가 태어나듯이 “여인에게서”(갈라 4,4) 태어나셨지만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으므로 우리의 태어남보다 위대한 태어남이다.
여기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가 담겨있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다.
성경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약혼한 동정 교회에서 태어나며
마리아는 그래서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동정 교회는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마리아의 표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질투심이 아닌, 남다른 자제심을 지닌 요셉을 볼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모르고 있던 요셉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마리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는 것은 마리아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었다.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셉은 율법보다 더 높은 법을 따르기로 한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19절)
이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주신 것이다.
요셉은 자신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치고 신비라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 이름은 어떤 죄와도 연관된 적이 없다.
‘요셉’이라는 말은 ‘흠잡을 데 없는’이란 뜻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 하셨기 때문이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23절)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분은 하느님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요셉은 기쁘게 천사의 말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따른다.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겠다.
소리기도와 관상기도 사이에서의 묵상기도의 역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와 결혼하라고 말하며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 말합니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태오는 이 예수라는 이름을 이사야서에 예언된 ‘임마누엘’과 연결합니다(이사 7,14 참조).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고 그 함께 계셔주심은
곧 우리를 죄에서 해방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예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와 함께 머물며 나를 바꾸려 한다면
나의 의지보다는 그 사람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자칫 이것은 의처증이나 의부증처럼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타인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피그말리온’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 키프로스의 조각가였습니다.
피그말리온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여사제들의 문란한 모습을 보고
여인과의 사랑에 환멸을 느낍니다.
그는 순결한 여성을 만들기를 원했고 상아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조각하여
갈라테이아로 이름까지 지어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면을 갖춘 여인이라 믿으며 갈라테이아를 사랑하였습니다.
그 조각상에 키스하거나 포옹하기도 했으며 비싼 옷과 꽃과 보석으로 장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상을 아내라 불렀습니다.
아프로디테를 위한 축제의 날,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의무를 다한 후
아프로디테에게 한 가지 청을 합니다.
‘상아로 만든 처녀’를 자기 아내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아프로디테는 그러겠다고 약속했고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에게 키스하자
갈라테이아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둘의 결혼을 축하해주었고,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훗날 파포스라는 이름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된 사랑의 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갈라테이아는 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이 되어서도 여전히 조각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녀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사랑 이야기가 제대로 완성되려면
인간이 된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 시간이란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를 혼자 남겨두어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의미합니다.
만약 피그말리온이 계속 눈앞에 있다면 갈라테이아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임마누엘’이 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잠시 떠나있으며
인간에게 묵상할 시간을 주시는 것이 맞습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함께 있어서 변화시킬 수 있는 한계는 육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육체의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계에서도 이런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감독이 여배우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요제프 폰 스턴버그’ 감독과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관계입니다.
스턴버그 감독은 당시 무명 배우였던 디트리히를 과감하게 ‘푸른 천사’의 롤라 역으로 캐스팅합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디트리히를 완벽하게 스타로 재탄생시킵니다.
스턴버그는 디트리히를 할리우드로 데려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변신시킵니다.
우선 몸무게를 13kg이나 빼게 했고 이를 뽑아 광대뼈가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습니다.
눈썹을 잡아당겨 높게 하고 코에 명암을 주어 콧방울이 좁아 보이도록 했으며
머리에는 금가루를 뿌려 빛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상도 손수 골라서 입혔습니다.
스턴버그는 카메라와 조명,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디트리히의 얼굴만 있으면
숨막히는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오래갔을까요? 그나마 오래갔습니다.
둘은 8년을 연애했습니다. 문제는 둘 다 유부남, 유부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녀에 대한 스턴버그의 소유욕과 집착이 둘의 관계를 파경으로 치닫게 하였습니다.
훗날 디트리히는 “그는 나를 자기의 갈라테이아로 만들 생각밖에 없었다”라고 토로하였습니다.
그녀가 떠나자 스턴버그는 불면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렸으며 감독으로서도 퇴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와 비교하여 닉 부이치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팔다리가 없었던 닉 부이치치는 8살 때 이미 자살 시도를 했고
아내의 손을 잡고 걸을 수도 없는 자신과 누가 결혼해 주겠느냐는 걱정을 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닉 부이치치’는 일본계 미국인 ‘카나에 미야하라’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미야하라에게 첫눈에 반하여 사랑을 고백했지만,
미야하라는 평생을 그 사람과 함께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때 닉 부이치치는 자신들의 사랑을 하느님께 맡겨보자고 합니다.
1년 동안 만나지 말고 1년 뒤에 다시 만났을 때 서로의 사랑이 더 증가하였다면
그것을 하느님께서 사랑을 허락해 주신 표징으로 믿자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미야하라는 단 몇 번 본 그 팔다리 없는 사람을
1년 뒤 더 사랑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년 뒤 그녀는 하루하루 닉에 대한 사랑이 더 증가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상대를 깊이 생각하며 내린 결정은 나중에 거의 바뀔 일이 없습니다.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도 묵상하여
주님을 자의로 받아들일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멀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사랑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사랑이 더 증가합니다.
만약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이 감소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기에 일찍 그 관계를 접는 게 낫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참사랑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