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조금 길지만 우리의 민속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 각합니다.
이 글의 내용 정도만 알아도, 답사를 가시면 전문가로 대접해 줍니다.
부계면 한밤 마을
군위 삼존석불상이 있는 골짜기의 마을이 부계면의 한밤 마을이고, 부림 홍씨의 집성촌이다. 군위군 효령면에서 본다면 남천이 발원하는 팔공산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이니까 첩첩 산골마을이다. 이곳은 난리나 역병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서 더 없이 좋은 곳이다. 그렇지만 땅이 척박하여 살아가기는 무척 힘 드는 마을이다.
예로부터 이 마을은 땅에 돌이 많아서 농사짓기에는 무척 힘들었다. 가난하다 보니 출세의욕이 남달라서인지 외지에 나가서 공부한 사람이 많다. 청년이 공부를 많이 하니, 산골 마을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어서 유명해진 마을이다. 마을을 안내하는 사람이 손꼽는 유명인사가 수두룩 하였다. 마을 사람의 학구열 때문이라지만 내 생각으로는 팔공산 신령님의 음덕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한밤 마을의 아래 마을은 평지 동네이다. 과수원 농사를 많이 짓고 농토도 넓어서 먹고 사는 데는 훨신 여유가 있다. 부자 동네인 것이다. 그날의 삶에 만족하다 보니 마을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않고 농사꾼으로 머물면서 살았다. 그래선지 외지에서 이름을 드날린 인물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한밤 마을에는 토속신을 모신 성지가 지금도 있다. 아랫마을은 토속신앙터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신령님의 음덕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말을 종합해보면 한밤 마을은 살기가 어려운 가난한 동네이다. 그만큼 생활이 고달팠다는 뜻이다. 삶이 고달프면 신령님을 찾는다. 팔공산에 산신제를 올리고 마을 동제도 더 많이 하였을 것이다. 마을 당신인 미륵님께도 빌었을 것이다.
군위 군청에서 나와서 우리를 안내하시는 분은 ‘보다시피 이 마을은 돌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이런 지형에서는 윗 집의 오물이 그대로 땅속으로 스며들어 아래 집 샘으로 흘러갑니다. 이 마을에는 역병이 돌면 순식간에 동네에 퍼집니다. 특히나 여름에 유행하는 수인성 전염병에 취약하였습니다.’
수인성 질환으로는 옛날에 ‘날 수 많은 병’이라고 불렀던 장티푸스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젊은 나이에 비명으로 간 억울한 영혼도 많았다. 굿도 성행하였다. 삼존불이 있는 곳도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틀림없이 굿터였을 것이다.
(수인성 질환이란 입으로 먹는 음식물이나 물로 전염된다. 오염된 물은 거의가 변소의 위생 시설이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인성 질환을 ‘항문에서 입으로’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질환이 장질부사 이다. 물이 좋기로 소문난 마을에서 수인성 질환이 대유행한다는 것이 조금은 아이러니이지만, 하수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묵직한 돌담이 그대로 남아 있는 마을 안길을 걸을 때는 마치 고향 마을에라도 온 듯이 아늑한 기분이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을 가로막고 있는 숲이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숲을 비보숲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수구막이라고도 하였다. 마을의 역병이나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비보숲 안에는 진동대라는 돌솟대가 있다. 솟대 위에는 새도 한 마리 조각해 두었다. 그리고 주변의 나무에는 울긋불긋한 헌겊을 메달아 두었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용화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전각이 있다. 용화전이라면 미륵불을 모시는 전각이다.(용화라는 말이 들어가면 미륵불과 관련이 있다.) 전각 안의 부처님도 미륵불이라고 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땅 속에 몸의 반쯤이 묻혀 있었다. 이처럼 이 마을에는 옛 기도처가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민간 속설에 미륵부처는 땅에서 솟아난다고 하였다.)
돌솟대 위에 앉아 있는 새도 거북이니, 새니 하면서 입씨름을 하였지만 오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거북은 용이 수신이 되기 전에 우리의 전통적인 수신이다. 오리는 가야 토기에서 흔히 보듯이 우리의 영혼을 하늘로 안내하는 신성한 존재로도 모셨다.
본래는 3년 마다 팔공산에선 자란 정결하고 곧은 나무를 잘라다가 오리를 만들어서 솟대 위에 모시고 ‘비신’이라 하였다. 3년 간격으로 제사를 지내려니 그때마다 새로이 솟대를 만들어야 하였다. 1966년에 번거롭게 솟대를 되풀이 하여 만드느니 아예 돌로 세워서 영구히 보존하자고 하였다. 집집마다 돈을 추렴하여 세운 것이 지금의 돌솟대라고 하였다. 돌솟대 주변에는 야외 극장처럼 돌로서 단을 만들어서 앉을 자리를 마련하였다. 동네사람들이 이 자리에 모여서 회의도 하였다. 한밤 마을은 고대 마을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솟대는 일반적으로 마을의 입구에 세운다. 홀로 세워지기도 하나 대부분은 장승, 선돌, 막돌탑(돌 무더기), 신목(神木-당나무) 등과 같이 세운다. 주로 정월 대보름 날에 마을 사람이 모여서 마을의 안녕과 수호를 빌고,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였다. 솟대 위의 새는 일반적으로 오리라고 말하지만, 지방에 따라서 까마귀, 기러기, 갈매기, 따오기, 까치 등이라고 말한다. 솟대의 뿌리는 아마도 북아시아의 샤머니즘 문화권에서 우주목과 물새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신앙 형태라고 한다.(가야 문화권에는 오리가 많이 나온다.)
신라 말 이후로 오면서 풍수지리사상과 결합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급제를 함으로 입신양명하는 풍조가 퍼지면서 풍수지리와 마을 신앙은 입신양명과 연관을 맺는다. 마을 신앙에서 보면 신앙 자체는 불변하고 사회적, 시대적 배경에 따라 신앙 형태가 변하였을 뿐이다. 새로운 종교사상이 유행하면 바로 마을 신앙에도 영향을 주었다.
솟대를 마을 입구에 세우는 이유는 마을의 문을 지킨다는 뜻이다. 흔히 동구(洞口)라고 말하는 곳은 마을 사람들만 드나드는 곳이 아니다. 손님도 찾아 온다. 역병이나 화적 떼 등, 온갖 재액도 동구를 통하여 마을에 들어온다. 액을 막기 위해서는 동구에 세운다. 액막이하는 것이 목적이다. 비보숲을 마을 앞에 만드는 것도 같은 뜻이다.
마을 입구에는 보통 개울이 흐른다. 개울을 건너야 마을로 들어온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있는 곳에 수구막이라고 하여 장승이나 벅수를 세운다. 그러나 마을 입구가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는 곳에서는 숲을 심어서 마을의 입구를 막는다. 수구막이 용 비보숲은 마을이라는 신성한 곳과 마을 밖이라는 부정한 곳을 구분 짓는다. 수구막이는 부정한 것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비보숲은 한밤 마을과 둔산동 옻골 최씨 마을에 잘 보존되어 있다.
솟대 신앙은 청동기 시대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유습이다. 나중에 풍수사상과 결합하면서 지형을 두고 돛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부계의 솟대를 그런 의미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풍수상으로 행주형(行舟形) 지형에는 돛대가 있어야 할 지역에 솟대를 세웠다. 솟대가 돛이 되는 것이다. 돛대는 홍수가 자주 일어나는 마을의 신앙 형태이다. 부계마을은 아마도 큰 비가 내리면 팔공산에서 쏟아지는 개울물로 홍수를 겪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솟대라고 부르는 장대는 신이 하강하는, 또는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소라고 한다.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손에 쥐고 흔드는 신내림 나무가 솟대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한밤 마을의 솟대와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솟대 신앙을 좀 더 살펴보자. 장대에 신이 더 잘 내리기 위해서 장대에서 바닥까지 긴 무명으로 연결하기도 한다. 바릿줄을 늘이거나 방을을 달기도 한다. 신이 울릴 때는 방울이 울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북과 방울이 무당들의 중요한 용구임을 생각하면 장대와 북 그리고 방울은 서로 긴밀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한밤 마을의 솟대를 찾아 갔을 때도 당줄과 긴 새끼줄이 돌기둥을 칭칭 감고 있었다.
솟대 위에 오리를 얹는 것은 시베리아와 몽고지역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우리 문화의 뿌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솟대와 오리는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우주수와 역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새가 서로 결합한 형태이다. 한밤의 솟대는 바로 이와 같은 형태를 보여준다.
오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새인 동시에 우리의 솟대 문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새이다. 오리는 거울이면 해마다 낙동강에 날아와서 한 철을 보낸다. 일년에 알을 300-400개나 낳는 다산성이다. 유물신앙에 의하면 다산성의 상징이기에 꼭 알맞은 새이다. 오리는 물과 관계가 깊으므로 농경사회에서 천둥새(비의 새)이 속성도 지닌다. 물속에 잠수하였다가 다시 떠오르므로 불멸 즉 장수의 의미도 지닌다.
오리는 철새이다. 여름 철에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돌아온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초자연적인 세계(영혼의 세계)로 여행하였다가 돌아온다고 믿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넘나드는 영혼의 순환적 여행을 뜻한다고 하였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마을 입구에 솟대를 세우고 마을의 수호를 빌었다. 그 해 농사의 풍년을 빌었다. 죽은 마을 사람의 안락을 빌었다. 솟대의 곁에는 일반적으로 당산목이 있다. 당산목은 마을 입구에 있는 노거수를 말한다. 평소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쉬는 곳이다. 일 년에 한 두 번식 동제를 지낸다. 쉼터 역할을 한 노거수가 이때는 신령스러운 나무가 되어서 당수나무라고 부른다. 이런 나무를 당수나무 이외에도 당산나무, 성황나무 등의 이름을 갖는다. 당산나무는 수령이 수 백 년 되었으므로 나이가 많은 것을 신성시하는 동양의 습속도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