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 1: 9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
욘 1: 9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 -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
사람들의 질문이 여러 가지였던 것과는 달리 요나의 대답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또한 그 대답에서 요나는 자신의 신관을 밝힌다.
요나는 이 대답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재인식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점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임을 밝힌다.
1]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히브리 사람이요"[이브-리](am an Hebrew)는 히브리, 히브리 사람은 강 저편에서 온 자로 아브라함 때 처음 쓰였다. 그러므로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라는 표현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외국인들에게 자신을 알릴 때 주로 사용된 표현이다.
* 창 40: 15 –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 출 2: 7 -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 삼상 4: 6, 9 – 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 삼상 14: 11 -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원래 여기에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업신여기는 뜻을 담고 있었다.
* 창 14: 13 -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 창 41: 12 -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 출 1: 16 -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요나의 신분을 말하게 하므로 요나 자신이 대답한 말을 통해서 반성하도록 하는 역사이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에서 히브리는 물 건너 온 사람이라는 말로서 히브리 민족의 조상 아브람은 본래 아람 족속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사람인데,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살았을 때에 유브라데 강을 건너 하란에 와서 살다가 아브라함 때에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을 물 건너 온 사람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요나도 물 건너 온 사람이라고 했다.
물 건너 온 사람이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세상의 강을 넘어온 사람을 말함이다.
이스라엘은 종교적 사회적 개념에서 쓰이는 말이고, 히브리는 민족적 인종적 개념으로 쓰이는데, 요나가 히브리 사람이라고 자기 민족을 고백함으로써 히브리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요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일깨워 준 것이다.
* 창 14: 13 -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에덴동산에서는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등 네 강이 흘러왔는데, 비손 강과 기혼 강은 땅 속으로 흐르고 있기에 알 수 없지만, 힛데겔 강은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고 있고, 유브라데 강은 소아시아의 큰 강 중의 하나로 메소보다미아의 2대강 중 하나였다.
힛데겔 강은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한 앗수르 사람의 성격과 같은 강물이고, 유브라데 강은 온 세상에 넘쳐흐른다는 뜻으로서 유브라데 강을 건너왔다는 것은, 온 세상을 넘어와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세상의 부귀영화나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들이 성도를 유혹한다. 또 세상의 충만한 것들이 성도를 유혹하는 가운데, 성도의 육신 속에는 이미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들어와 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 바다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되는데, 이와 같은 유혹에 빠지면 세상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된 히브리 사람은 이 세상 바다를 통과한 사람으로서 그들은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물질을 가지고 살지만, 물질에 이용당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의 이용물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을 이용하여 살면서 신령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로서 온 사람인 성도의 본향은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성도는 자신의 본향을 바로 알고, 장차 돌아갈 본향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요나는 이와 같은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 바다에 빠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즉 다시스로 도망가는 것은 세상 바다에 빠지는 것이며, 니느웨로 가는 것은 세상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다.
세상 바다를 건너온 사람인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길은 세상 바다에 침몰하는 길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무슨 세력에 침몰되고 있습니까?
진리가 교회에 차고 넘쳐 성도들을 신령한 세계로 이끌어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 안에 세상과 물질과 향락의 세력이 차고 넘치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찾아볼 수 없고 사람들만이 앞서서 활개치고 있습니까?
또 성도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세상의 온갖 것들이 들어와 있어서 욕심으로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하늘의 신령한 것이 성도들의 마음에 차고 넘칩니까?
성도들의 마음에 세상이 차고 넘친다면 이미 세상 바다에 빠진 자들이다.
신앙생활을 배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으로 비유한 곳이 많은데 성도가 세상을 살다간다는 의미이다. 물과 배는 피차 멀리할 수 없는 관계로서 물이 없으면 배는 무용지물이 되듯이 성도와 세상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물이 좋다고 하여 배가 물 속에 들어가면 배는 침몰 될 것이다.
배는 물이 차고 넘쳐도 그 물을 타고 갈 길을 헤쳐나가야 가치가 있는 것 같이 성도의 참 신앙도 세상의 모든 것을 이용하여 신령한 생활을 할 때 가치가 있으므로 그만큼 가치 있는 세상이 되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나가 물 건너온 사람이듯이 성도들도 세상 물에 빠지지 말고 이 세상을 건너가야 하는 것은 성도가 세상에 잡히면 신앙은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로는 세상에 빠지지 않고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이 세상이요, 자기 속에 들어있는 것 또한 세상이고, 생활하는 곳이 세상인데, 어떻게 세상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참 신앙은 살아나지 못한다.
성도가 세상에 충만한 모든 것을 그대로 가지게 되면 세상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진리와 영감 역사에 의하여 믿음으로 세상을 소유하면 세상에 빠지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용하여 신령한 생활을 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성도는 물 건너온 사람으로서 물 가운데 살면서도 물에 빠지지 아니하고, 도리어 물을 이용하여 사는 사람이 참 성도이다.
그러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이 있어야 하는데, 욕심이 있는 것만큼 활동하고 연구하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다리고 참고 힘을 다하여 수고하게 된다.
하지만 욕심이 약해지면 의욕을 상실하고 절망하고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만다. 세상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욕심이 있어야겠지만 신령한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욕심이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잡히게되고 하나님만 따르게 된다.
하늘의 신령한 것이 마음에 채워지면 세상에 대한 욕심이 생기지 않고 한낱 배설물로 여기게 되며, 따라서 세상을 통과한 자가 된다. 이런 사람이 바로 히브리 사람이요 물 건너온 사람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요 5: 2)라는 말씀에서 히브리 말이란 히브리 사람이 되어야 할 수 있는 말이며, 히브리 사람의 신앙을 가져야 히브리 말을 할 수 있다.
또한 히브리 사람의 신앙을 가지면 신령한 베데스다 못이 보이는데, 이 베데스다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는 집으로서, 베데스다 못을 보는 자에겐 행각 다섯 - 다섯은 성령을 상징한다. - 이 보이게 되고, 이 행각을 보게 되면 거기 있는 사람이 다 병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베데스다 못은 교회의 상징으로, 세상에 있는 교회 중에는 행각들을 만들어 놓은 교회가 있으며, 이 행각에 있는 자들은 병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신앙이 히브리 사람의 신앙이다.
이와 같은 히브리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오늘의 교회는 참 성도의 정신이 죽었고, 교회가 마치 창기처럼 되어서 권력에 아첨하고 물질에 아첨하므로 무능자가 되어서 세상을 비취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에 밟히고 있는 형편이다.
2]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요나는 자신이 믿는 여호와에 대한 신관을 피력한다.
여기서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당시에 페니키아인들이 '하늘의 바알'을 섬기고 있었던 사실(M. C. Griffiths)에 비추어, 그 선원들에게 상당히 도전적인 선포였을 것이다.
더욱이 요나가 여호와 하나님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창조주로 소개하였던 것은 당시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매우 설득력 있는 말이다.
(1)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바다와 육지를 지으셨다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말이다. 즉, 바다와 육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로서 만물이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니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이것이 바른 신앙생활이다.
세상 만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지 않고, 세상 법에 따라 사용하며 소유하려 하기에 세상 만물을 사용하면서도 유익을 얻지 못하고, 소유하면서도 참 자기 것은 안 되는 것이다.
(2) "하늘의 하나님"
"하늘"[쉬-마임](heaven)는 {남}{쌍}[명] 하늘, 창공, 천국이란 뜻으로 신령한 세계를 가리킨다.
"하나님"[엘로-힘](the God of)은 {남}{복}[명] 하나님, 신, 신들, 천사들이란 뜻으로 이는 요나의 신앙 고백으로 하늘의 영광을 입혀주시는 하나님이란 말이다.
하늘의 하나님은 신령한 하늘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로서,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은 이와 같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을 신령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서 섬기며,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요나는 세상에 맞추어 생각하고 있기에 신령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었다.
요나가 신령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따랐으면 도망갈 필요가 없는데, 땅에 계신 하나님을 찾고 있기에 도망가야 했다.
그러나 요나가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 자기의 행동을 살펴보므로 회개해야 될 자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가 하는 기도도 자세히 살펴보면 말만 하고 있지 실제는 기도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무엇이든 보는 대로 달라하고, 그것이 필요한 것인지 생각도 못하고 떼쓰기를 잘한다.
이처럼 하나님께 생각나는 대로 떼나 쓴다는 것은 그 신앙이 어린이와 같다는 것이다.
(3)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경외하는 자로라"[야-레](fear)는 {자} 위험하다, 놀라다, {타} 경외하다, 무서워하다, 엄위하다, 란 뜻으로 자신이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약속을 통해서 주셨고, 그 약속을 따라서 때가 되면 약속대로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약속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며, 하나님께 약속하신 대로 섬겨야 한다. 그러나 요나는 이러한 약속 이행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도망가고 있었다.
우리도 약속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 좋은 대로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가까이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것이 하나님과의 거리는 먼 상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자신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보고 자신을 돌아보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며, 진리 안에서 세상을 정복하고 자신을 다스리며, 하나님을 바로 섬기길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