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 아빠스가 광야의 은수 생활로
하느님을 섬기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의 모범과 전구로 저희 자신을 버리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제1독서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4,1-5.11
형제 여러분, 1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2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4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5 또 여기에서는,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11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복음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라고 합니다. 남녀 간의 만남을 다루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그 역사는 1990년대부터 있었습니다. 결혼이 목적인 청춘남녀들이 맞선을 하는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사랑의 스튜디오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형태의 프로그램 숫자도 늘어났고, 특히 비연예인 출연진으로 현실감을 높인 연애 프로그램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런 연애 프로그램이 왜 끊임없이 인기를 끌까요? 어차피 여기에 나오는 연애란 결국 나의 연애가 아니라, 남의 연애가 아닙니까? 남의 연애사에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질까요? 하긴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교생 선생님이 오시면 첫사랑 이야기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나네요.
이를 심리학자들은 ‘감정전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출연자가 매력적인 상대를 만나 느끼는 설렘이 말과 표정과 몸짓으로 모두 표현되니, 이에 시청자도 자연스럽게 설렘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쩌다 친구 따라 성당에 나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너무 좋다고 해서 왔는데, 너무 엄숙해서 자기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좋게 말해서 엄숙한 것이지, 어쩌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행복해 보이지도 않고, 기쁨도 없고, 그저 마지못해 자리만 지키는 신자들의 모습에 처음 온 사람들은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감정전이가 되지 않아, 전혀 설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자기 자리에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전교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거리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기의 표정 하나도 전교의 큰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표정만으로도 주님의 뜻에 함께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치유된 그를 돌려보내시면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면서 단단히 이르십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이후 행동에 대해 이렇게 복음은 전합니다.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마르 1,45)
나병의 치유를 널리 알려야 주님을 더 믿고 따를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널리 알리고 퍼뜨린 것은 오히려 잘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알린 것이 아니라, 자기의 건강을 알리는 것이 더 큰 목적이 아니었을까요?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 자체가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나의 표정 하나에서도 주님을 충분히 전할 수 있으며, 주님과 진심으로 함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