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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용서 자판기’가 아니다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
“동상이 암살되는 나라가 있다.”
서해성 시인의 시 <동상 암살>의 한 구절이다. 8월 30일 한덕수 국무총리는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다른 데로 옮기는 계획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대체 무슨 짓인가. 그래서 홍범도 장군은 이동순 시인의 <홍범도 장군의 절규>에서 이렇게 울부짖는다.
해방조국은 허울 뿐
어딜 가나 왜.놈.들로 넘쳐나네
언제나 일본의 비위를 맞추는 나라
나, 더 이상 견딜 수 없네
귀국 때의 감격이 몇 해나 지났다고…
2021년 8월 15일,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고국으로 78년 만에 돌아왔을 때, 우리 전투기 조종사의 목소리가 한반도 상공에 울려 퍼졌다. “홍범도 장군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많은 국민들은 가슴이 벅차 눈물 흘렸다.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일주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9살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고아가 되었다. 머슴, 노동자, 포수로 생계를 잇던 장군은 1905년 을사늑약에 분노해 의병투쟁을 시작했다. 이완용 등 을사오적과 고관대작 대부분이 일본에 나라를 넘길 무렵이었다.
홍범도 장군의 아내 이옥녀는 남편에게 투항을 권유하라는 일제에 맞서 이렇게 말했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장군의 아내는 스스로 혀를 끊어 혹독한 고문에 맞섰고, 고문의 여파로 사망했다. 양순, 용환 두 아들도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다.
육군역사연구소장을 지낸 한설 예비역 육군 준장(육사 40기)에 따르면, 백선엽은 한국전쟁 초기 제1사단의 붕괴에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한국전쟁 초기 단계에서 부대가 철수하고 무너지는 상황에서, 자신이 지휘해야 할 1사단을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는 것이다. 백선엽은 부대를 버려두고 농부옷으로 갈아입고 사라졌다 3일 만에 나타났다. 그런 백선엽을 용서할 수 있는가. 박종선 육사 총동창회장은 “예수님도 회개하면 봐 주셨다. (…) 백선엽은 회개했는데, 홍범도는 안 했다”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싸구려 용서는 화를 부른다
여기서 예수 말씀이 떠오른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에게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시오.’”(마태 18,21-22)
예수의 이 말씀에 감동받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잖은 고뇌를 안겨주는 구절이기도 하다. 흉악범이라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이라도 우리가 용서해주라는 말인가. 회개하면, 있는 죄가 없어지고, 받아 마땅할 처벌도 사라지는가. 회개하면 무조건 용서받는가.
중국 작가 루쉰(魯迅 1881~1936)의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1933) 제목의 글이 우선 내 눈을 끈다.
“추근(秋槿: 중화민국 여성혁명가) 여사는 밀고로 죽었다. 혁명 후 그녀는 잠시 '여걸'이라고 불리더니, 지금은 입에 올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혁명이 일어나고, 그녀의 고향에 도독(都督: 군사 책임자)이 부임했는데, 그녀의 동지인 왕금발(王金發)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살해한 주모자를 체포하였고, 밀고 서류를 수집하고 조사하여 복수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주모자를 석방하였다. 이미 민국이 된 마당에 구원(舊怨)을 새삼스레 다시 들춰내 무엇하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2차 혁명이 실패한 뒤, 그 왕금발은 원세개의 앞잡이에게 총살 당하였다. 여기에 힘을 도운 자는 그가 석방해주었던, 추근을 살해하였던 바로 그 주모자였다. 그 자는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그러나 그 곳에 여전히 출몰하고 있는 자들 역시 그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다.
악인들은 구제되고 나서 자신들이 이익을 보았다고 생각할 뿐이지, 절대 회개하지 않는다. 순진한 사람이 사서 고생한다. 더욱이 교활한 그들은 얼마 안 가서 빛나는 명성을 되찾게 되며, 전과 마찬가지로 못된 짓을 한다.”
하느님은 ‘용서 자판기’가 아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 말은 어떤 배경과 의도에서 나왔을까. 그 말은 “어떤 형제가 당신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시오. 그가 말을 들으면 당신은 형제 하나를 얻는 셈입니다”(마태 18,15)와 연결된다. 내게 잘못한 사람에게 나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으냐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개인 사이에 일어난 갈등에 대해 개인이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예수는 조언하고 있을 뿐이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 말은 모든 경우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인 선언이나 명령이 아니다. 예수 말씀의 본래 의도와 다르게, 아무 데나 예수 말을 인용하거나 적용하면 안 된다. 회개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개인 사이에 일어난 갈등과 잘못에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예수 말씀이 그 본래 의도와 맥락에서 동떨어진 채 자주 오해되기도 했다. 자비로운 하느님이 악한 가해자들의 변호사인 것처럼 잘못 선전되기도 했다. 어떤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회개하기만 하면 하느님이 무조건 용서하신다고 잘못 해설되기도 했다.
집단 학살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
백선엽처럼 수많은 독립 투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간에게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실까? 백선엽이 회개했다면, 하느님은 백선엽을 용서하실까? 무자비한 인간들에게는 하느님 자비를 선사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무자비한 인간들이 하느님 자비를 조롱하고 악용하고 모욕하도록 그냥 놓아둘 수는 없다.
역사에서 생긴 집단 범죄나 인종 학살, 전쟁의 경우에 대해 예수가 분명한 처벌 또는 용서 기준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100년 전 일본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제주 4.3 사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 광주 5.18 민주화운동,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사례에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 말은 적용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백선엽이 혹시 회개했다 하더라도, 백선엽은 결코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없지 않을까. 백선엽이 회개한다고 해서, 백선엽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지도 않는다. 물론 하느님께서 최종 답을 하시리라.
출처 백선엽과 홍범도, 누가 회개하고 용서 받을 수 있는가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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