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배구 8강행 이끈 김연경, 女펜싱 단체전 銅 김지연
팀을 승리로 이끈 데에는 맏언니들의 투혼이 있었다. 김연경이 지난 31일 일본과의 여자배구 조별 예선 경기에서 득점을 거둔 후 환호하는 모습(왼쪽). 여자 펜싱 사브르 대표팀의 김지연이 8강 헝가리전에서 승리한 후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모습. /연합뉴스
“정신차려, 할수있어” 한일전 대역전 드라마 올림픽 첫 4경기 30점
일본 여자배구는 1964 도쿄올림픽 금메달 팀이다. 57년 만에 도쿄에서 다시 열리는 올림픽을 야심 차게 준비했다. 주 무기는 고가 사리나(25)-이시카와 마유(21)-구로고 아이(23)로 구성한 공격 삼각편대. 20대 초반 선수들로 세대교체까지 끝마친 세계 5위 일본은 지난달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한국을 3대0으로 완파하는 등 승승장구해왔다. 반면 세계 14위 한국은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자매가 학교 폭력 논란으로 대표팀에서 빠지는 등 내홍에 시달렸다. 그러나 한국엔 김연경이 있었다. 모두가 어려울 것이라고 고개를 저어도 김연경은 포기를 몰랐다. 한국이 일본을 이겼다. 이제 8강으로 간다.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은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조별리그 A조 4차전에서 일본을 세트스코어 3대2(25-19 19-25 25-22 15-25 16-14)로 눌렀다. 한국은 이날 승리로 세르비아전(2일) 결과와 관계없이 조 3위(3승1패)가 돼 8강 진출을 확정했다. 반면 일본은 2일 도미니카공화국과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면 8강에 못 갈 위기에 처했다.
상처투성이 김연경 허벅지 - 통증을 줄이기 위해 감았던 테이프를 떼어내면서 생긴 김연경의 허벅지 상처.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김연경은 일본과 만나면 가슴에 불이 난다. 스물넷, 경기력 절정이었던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에 진 게 한(恨)이다. 그날 라커룸에서 목 놓아 울었다. 2016 리우올림픽 조별리그에서 일본에 세트 스코어 3대1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그걸론 분이 안 풀렸다.
이날 김연경은 오른쪽 무릎을 미라처럼 붕대로 감싸고 도쿄 코트에 섰다. 브라질과 첫 경기 이후 생긴 무릎 통증을 줄여보려고 테이핑을 칭칭 둘렀다가 떼어낸 자국이 실핏줄 터진 것처럼 상처로 남았다. 그는 온 몸을 바닥에 던졌고, 온 힘을 다해 뛰었다. 홀로 해낸 것만 30득점, 서브 리시브 19회, 디그(수비) 18회. 수시로 “정신 차려, 할 수 있어!” 소리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김연경의 외침에 하나가 된 선수들은 눈물의 드라마를 완성했다. 5세트 12-14, 일본에 한 점만 더 내주면 끝나는 상황. 선수들이 마지막으로 둥글게 모였고,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은 “일본은 무조건 4번(이시카와 마유)에게 계속 공을 줄 것이다. 4번만 틀어막으면 기회가 온다”고 소리쳤다. 주문이 통했다. 이시카와의 스파이크를 김연경이 뒤에서 받아냈고, 박정아의 강타가 일본 코트에 꽂혔다. 이걸 또 한 번 반복했다. 14-14. 이시카와의 세번째 공격은 코트를 큼지막히 벗어났다. 15-14. 박정아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쳐낸 공이 일본 블로커의 손을 맞고 코트 밖으로 떨어졌다. 한국 선수단은 비명을 지르며 엉켰고, 일본 선수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발목을 접질렸지만 진통제 투혼을 불살랐던 일본 에이스 코가 사리나(27득점)는 “꼭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졌다”고 눈물을 보였다.
이날 승리로 한국 여자배구는 3회 연속 올림픽 8강 진출 역사를 썼다. 김연경은 역대 올림픽에서 30득점 이상 경기를 4차례 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김연경은 “일본의 질식 수비 때문에 정말 힘든 경기였는데, 선수들이 한 마음으로 뭉쳐줘서 마지막에 역전했다. 오늘 아침 런던 때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오늘 승리로 조금 갚았다”고 미소지었다.
세터 염혜선은 “일본을 오늘 처음 이겨봤다”며 펑펑 울었고, 박정아는 “우리가 더 간절해서 이겼다. 날아갈 것 같다”고 했다. 라바리니 감독은 “모든 선수가 자매처럼 뭉치니까 아주 특별한 힘을 내고 있다. 이 힘으로 우리는 한 계단씩 계속 올라갈 것”이라며 김연경을 향해 양손으로 하트 모양을 그렸다.
팀을 위대하게 만드는 선수가 있다. 김연경이 올여름 도쿄에서 증명하고 있다.
은퇴하려다 마지막 도전… 아킬레스건 파열 딛고 후배들과 눈물의 메달
“그동안 부상 때문에 무척 힘들었지만, 후배들과 올림픽 메달을 한 번 더 따서 기뻐요.”
지난달 31일 도쿄올림픽 단체전 동메달을 따낸 여자 사브르 대표팀 김지연(33·서울시청)은 “정말 간절했던 메달이라 의미가 크다”고 했다. 그동안 한국 여자 사브르를 이끌어온 김지연의 두 번째 올림픽 메달이자, 여자 사브르 사상 첫 단체전 메달이었다.
자랑스러운 동메달 - 동메달을 들고 기뻐하는 여자 펜싱 사브르 대표팀. 왼쪽부터 최수연·김지연·서지연·윤지수. /이태경 기자
대표팀은 이날 승리한 두 경기 모두 역전극을 펼쳤다. 8강전에선 헝가리를 상대로 7세트에 32-35로 역전당했지만 윤지수(28·서울시청)가 8세트에 다시 40-39를 만들었고, 김지연이 기세를 몰아 9세트를 5-1로 마무리했다.
동메달 결정전에선 한때 10점 차로 뒤졌으나 윤지수와 교체 선수 서지연(28·안산시청)이 6·7세트에 각각 6점씩 앞서 경기를 뒤집었고, 김지연이 9세트에서 45대42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아픔을 참으며 단체전 메달을 향해 뭉쳤던 대표팀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
사브르는 펜싱 종목 중 가장 빠르고 격렬하다. 여자부가 2004 아테네올림픽 때 비로소 정식으로 채택됐을 정도다. 대표팀은 저마다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린다. 올림픽 직전까지 의무팀을 자주 찾아서 촌외 훈련에서도 열외됐다. 윤지수는 무릎 수술을 받았고 최수연(31·안산시청)은 습관성 어깨 탈골을 안고 있다.
김지연도 고질적인 골반 부상 탓에 다른 선수처럼 검을 빠르고 깊게 찌르는 것이 어려워, 그 대신 천천히 땅따먹기 하듯 전진하다가 순간적으로 빠르게 찌르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대표팀은 최수연이 어깨 통증으로 준결승전 이후 교체되는 등 대회 당일에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투혼을 발휘해 결국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2 런던올림픽 개인전 금메달리스트인 김지연은 원래 이번 올림픽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4년 전 배우 겸 e스포츠 캐스터 이동진(39)씨와 결혼한 그는 남편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마치고 은퇴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표팀 한주열 코치가 서울시청 체육관에 직접 찾아가 ‘도쿄올림픽까지만 하자’고 설득했고, 김지연은 고민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지난해 2월 18일은 김지연과 한 코치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김지연은 이날 진천선수촌에서 민첩성 훈련을 하다가 넘어졌다. 진단 결과는 아킬레스건 파열, 예상 회복 시간은 반년 이상. 은퇴까지 번복하고 돌아왔는데, 올림픽 출전권을 얻기도 전에 위기가 찾아왔다.
김지연은 눈물을 닦고 다시 일어섰다. 다음 날인 19일 곧바로 수술대에 올랐고, 공격적으로 재활에 나서 3개월 만에 완치했다. 그새 올림픽은 1년 미뤄졌다. 김지연은 지난해 8월 대통령배에서 개인·단체전을 석권하며 복귀를 알렸고, 1년 뒤 후배들과 함께 올림픽 단체전 메달을 거머쥐었다.
김지연은 “남편 덕분에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 선수촌에만 코치님이 있는 게 아니라, 집에도 코치님(남편)이 있었다”며 웃었다. 이씨는 아내를 위로하면서도 가끔 따끔하게 혼내기도 했다. 결혼 후 아내를 위해 펜싱을 배워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했던 그는 아킬레스건 재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함께 운동을 하고 경기 영상 분석도 했다.
김지연은 원래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도쿄로 향했지만, 동메달 결정전을 마친 뒤엔 “마지막이 될 것 같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그는 “부상으로 힘들 때 가장 많이 힘이 돼 줬던 남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며 “두 달 뒤 결혼 4주년은 올림픽 메달 덕분에 한층 더 행복할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