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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 9,4ㄴ-10
4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5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6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7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유다 사람, 예루살렘 주민들, 그리고 가까이 살든 멀리 살든,
당신께 저지른 배신 때문에 당신께서 내쫓으신 그 모든 나라에 사는 이스라엘인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8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9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10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36-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그러니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로마 10,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니 우리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자비 남용, 용서 남용>
오늘 독서와 복음 모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저도 자비와 용서에 관해 얘기하고자 하는데, 오늘은 하느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집중코자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제가 남용하고 있다는 반성 때문입니다.
자비 남용, 용서 남용, 이것이 저의 태도입니다.
자비란 죄를 지었는데 죄지은 나를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때 그 용서하시는 사랑을 특별히 일컬어 자비라고 하고,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용서해 주시는 사랑을 일컬어 자비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용서하실 때 저의 태도는 어떠해야겠습니까?
하느님께는 감사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반복하지 않는 것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용서하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이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잘못된 태도들이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우습게 여기는 가장 나쁜 태도가 있습니다.
교만한 자의 태도이거나 세상 권력자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하지 하느님 자비와 용서는 필요 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로 교만하지 않고, 세상 권력자들을 제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하거나 용서할 사람이지, 그들의 자비와 용서를 구할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을 정도로 저는 도도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해 다음으로 잘못된 태도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그것이 감사로 이어지지 않는 태도입니다.
복음에서 열 나병환자가 같이 치유 받았지만 이방인들은 주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과 달리,
정작 이스라엘 사람은 당연하게 여겼기에 아무 감사를 드리지 않았지요.
저의 잘못된 태도는 이런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긴 합니다.
그러나 잘못에서 돌아서지 않는 잘못을 또 범하는 것입니다.
저의 자비 남용과 용서 남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약의 남용과 비유하면 좋을 것입니다.
약이 좋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니, 믿는 정도가 아니라 과신합니다.
그래서 약만 믿고 나쁜 짓을 계속합니다.
간에 좋은 약을 믿고 술을 계속 먹는 다시 말해서 끊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계속 용서하실 거라고 하느님 자비를 믿습니다.
이 믿음은 철석같고 찰떡같고 확고하지만, 과신이고 잘못된 믿음입니다.
과신이고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분명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내가 뉘우치지 않고 고치지 않는 것이 과신이고 잘못입니다.
이는 부모의 사랑을 믿고 흥청망청 돈을 쓰고 나쁜 짓을 계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다니엘서는 이런 저와 같은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한 반성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고,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잘못된 또 다른 태도는 이웃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위로부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았으면 옆으로 그 자비와 용서를 이웃에게 베풀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것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자비를 그렇게 받았어도 아직도 하느님 자비가 부족한 것처럼 자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께서 더 자비를 베푸셔야 내가 자비로 가득 찰지!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자를 거꾸로 하면 ‘푹’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백성을 위한 봉사자를 뽑는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의대 정원 문제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의료진은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요?
기득권을 유지하고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을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고 말씀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하신 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남을 되질할 되를 깨버린 이의 행복>
오늘 복음은 남을 심판하지 않으면 나도 심판 받지 않는다는 주제입니다.
내가 자비로울 때 자비로운 기준으로 심판 받습니다.
주는 대로 받습니다.
반면 남을 단죄하면 그것으로 나도 단죄받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와 엘레우시스 사이의 성스러운 길에 살았던 불량 대장장이이자 산적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손님에게도 완벽하게 맞을 것이라고 주장한 침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잔인했습니다.
여행자가 침대에 비해 키가 너무 작으면 선반에 눕혀 잡아 늘여 펴곤 했습니다.
여행자의 키가 너무 크면 다리를 잘라서 몸에 맞도록 만들었습니다.
테세우스는 처음으로 아테네를 여행하던 중 프로크루스테스를 만났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이 다른 많은 사람에게 가했던 것과 똑같은 잔인한 대우를 테세우스에게도 가할 생각으로 테세우스를 침대에 누워 쉬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제압하고 그를 자신의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런 다음 프로크루스테스를 같은 방식으로 대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손님을 괴롭히던 바로 그 방법으로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며 나는 얼마나 부자유스럽습니까?
자기도 그렇게 못하면서 남에게 하도록 강요하면 다른 사람들 눈치가 있으므로 말도 실수할까 봐 제대로 못 하고 행동도 경직됩니다.
자기 판단의 감옥에 자신이 갇히는 것입니다.
자유로워하고 싶으면, 자비를 원하면, 남을 판단하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우리 속담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진리를 압니다.
내가 외로우면 다른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고 있고, 내가 짜증 나면 분명 다른 사람들을 짜증 나게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영화 <셰임(Shame)>에서 주인공 브랜든은 평범한 직장인지만 성에 대한 강박적인 중독으로 비밀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당연히 그는 항상 고독하고 공허하고 외롭습니다.
여자를 자기 욕구의 충족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세상도 그를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브랜든의 여동생 시씨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브랜든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브랜든은 시씨의 삶을 응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상사 데이비드와 술집에 들렀을 때 시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데이비드는 그녀를 원하게 됩니다.
데이비드는 유부남임에도 브랜든의 집에서 그의 동생과 잠자리를 가집니다.
데이비드는 구토가 날 정도로 직장 상사가 밉지만, 그 화풀이를 동생에게 합니다.
오빠에게 쫓겨난 동생은 오빠에게 계속 전화하다가 자살 시도를 합니다.
동생을 품어줄 수 없었던 이유는 유부녀를 막론하고 흑심을 품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가 직장 상사와 동생에게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이유는 자기를 먼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이 갈등의 굴레 안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받고 싶거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영화 <극한 직업>에서는 형사들이 잠복근무하기 위해 치킨집을 차렸는데 의외로 장사가 잘된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왜 장사가 잘됐을까요?
사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돈 벌려고 한 게 아니니 아무 생각 없이 퍼주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주방장이 주인이 미워서 양념을 팍팍 썼더니 장사가 더 잘되더라는 것입니다.
더 주려 하니까 더 받습니다.
이 진리를 알면 세상에서 인정받지 않을 수 없고 가난할 수도 없습니다.
남을 건강하게 하는 트레이너가 몸이 안 좋아지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돈을 떼먹으려 하고 남의 명예를 도둑질하며 남을 아프게 합니다.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몇 배로 돌아올 줄 모르면서 말입니다.
행복해지고 싶거든 우리 안에 사랑을 방해하는 남을 심판하는 되를 깨버립시다.
저절로 심판하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죄와 싸웁시다.
이웃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지만 생각합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 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주어라. 너희가 이미 받았으니.>
오늘 복음 말씀은 “받고 싶으면 먼저 주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싶으면 이웃을 용서하고, 심판을 안 받고 싶으면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황금률’과 비슷한 가르침이 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마태 7,12)
여기서 ‘남’은 하느님과 이웃을 모두 가리킵니다.
그리고 “해 주어라.”는 사실상 “먼저 해 주어라.”입니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어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주시는 그것을 잘 받기 위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는 “주어라. 너희가 이미 받았으니.”가 됩니다(마태 10,8).
‘매정한 종의 비유’를 보면 바로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마태 18,32-33)
내가 ‘먼저’ 자비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응답으로 나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어라.” 라는 가르침과 “너희가 이미 받았으니 너희도 남에게 주어라.” 라는 가르침이 실제로는, 즉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실천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없는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마음가짐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아직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받기를 기대하면서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웃에게 베푸는 것, 둘 중 어느 쪽에 해당되든지 간에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푼다는 점에서는 똑같이 선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내가 아직 받은 것이 없는데, 남에게 무엇을 주란 말인가?” 라는 반응을 보일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에 먼저 받아야만 남에게 주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이 부족한 것이고, 속이 아주 좁은 것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한 경우에도, “그것은 내가 애써 노력해서 받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저 사람에게 무엇을 주란 말인가? 받고 싶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속이 좁은 태도인데, 그 경우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정말로 은총과 사랑을 체험한 것인지, 은총과 사랑을 체험했다면서 마음이 너그러워지지 않고 왜 속이 좁은 채로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입니다.
하여간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베푸는 일은, 받는 쪽의 태도를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자비’는 아무 조건도 없이 무조건 베푸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의 이 말씀과 베드로 사도에게 매고 푸는 권한을 주신 일은 모순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신 ‘매고 푸는 권한’은 마음대로 사람들을 심판하고 단죄해도 되는 권한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임무입니다.
아무도, 사도들도, 어떤 사람을 구원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권한은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시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임무만 받았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하려고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구원, 심판, 단죄는 주님만의 권한입니다.
인간은 아무도 남을 구원하지 못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만 할 수 있습니다.
남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권한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9) 라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단죄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에서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자기들은 틀림없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저 군중’은 율법을 모르니 구원받지 못한다고 멸시한 것인데, 그것은 교만죄를 짓는 말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죄를 짓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죄가 너무 커서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말하면서 회개, 용서, 구원을 미리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인간이 스스로 포기해버리면, 주님께서도 그 사람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와 구원받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 자체도 주님의 권한과 사랑을 침해하는 큰 죄가 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 평생 과제 -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근래 ‘시대의 스승’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장일순((1928-2010)과 신영복(1941-2016)을 꼽고 싶습니다.
두 분의 글씨도 참 깊고 독특하고 향기로운 예술입니다.
두 분의 평전도 감동적이라 보관중이며 가끔 읽고 있습니다.
장일순에 대한 평과 사례를 소개합니다.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었고, <녹색평론>발행인 김종철이 단 한 번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없는 집안의 맏형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은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고 꼽았던 사람, '사상의 은사'라는 리영희가 존경했던 분..' ”
무위당 장일순에게 감화를 받은 분들은 얼마나 많은지 모르며 이분에 대한 찬사글도 끝없이 많습니다.
그의 감동적인 소개글 하나 나눕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할 지를 소중하게 여기라 하며, 공무원에게는 민(民)을, 장사꾼에게는 손님을 하늘처럼 섬기며 정성을 다하라고 말했다.'
"자네 집에 밥 잡수러 오신 분들이 자네의 하느님이여.
그런 줄 알고 진짜 하느님이 오신 것처럼 요리를 해서 대접해야 해."
장사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은 일절 할 필요가 없어요.
하느님처럼 섬기면 하느님들이 알아서 다 먹여주신다 이 말이야."
'장일순은 길을 가다가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세세한 가정사를 묻고 어른들의 안부를 살폈다.
리어카를 끄는 사람이든 바구니 장사든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여러 가지 사연도 따랐다.
김지하의 말에 따르면 봉산동 집에서 2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보통 2시간씩 걸리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다운 참으로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는 경청의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이분의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생 과제를 제시합니다.
아버지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에 이은 결정판 같은 말씀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우리의 ‘거룩함(holiness)’은 하느님의 ‘온전함(wholeness)“을 보여줘야 합니다.
거룩함이 온전함이며 영어발음도 같습니다.
참으로 자비로운 삶이 거룩한, 온전한 삶입니다.
<둥근 마음, 둥근 삶> 제 책명이 가리키는 바역시 자비로움입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은 평지설교의 결론이자 우리의 평생과제를 제시합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하느님의 얼굴도, 이름도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비”입니다.
하느님을 닮을수록 자비로운 사람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자비의 화신입니다.
그러니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의 궁극 목표는 주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지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가르침에서 자비행의 구체적 지침을 주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바로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단죄하지 않는 사람이, 끊임없이 용서하고, 주는(giving) 사람이, 섬기는(serving) 사람이, 돌보는(caring) 사람이, 나누는(sharing) 사람이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교만하고 인색한 사람이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지, 정말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관대한, 지혜로운 자비의 사람은 결코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고 주고 나누고 돌보고 섬깁니다.
새삼 자비로운 삶도 영적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자비로운 삶을 선택하여 평생 훈련으로 습관화할 때 비로소 아버지를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 합니다
마지막 천국문 통과 시 주님께서 검사할 마음의 얼굴입니다.
얼마나 아버지를 닮은 자비로운 얼굴인지 말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다니엘의 동포를 위한 기도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자비행에 앞서 이런 진실한 기도와 회개의 실천이, 훈련이 우리를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그러니 한결같은 자발적 자비행과 기도와 회개의 훈련 및 습관화입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훈련에 앞서 이런 철저한 기도와 회개가 우선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우러러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우선입니다.
하느님을 우러러 회개가 없기에,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내로남불, 인면수심(人面獸心), 후안무치(厚顔無恥)의 괴물같은,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기본적 정서인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자기인식을 전제로 한 겸손하고 자비로운 삶, 바로 이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중 날로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요 이런 사람이 진정 참사람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은 자비의 훈련에 항구함으로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하느님께로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나무를 옮겨 심으면 몇 달은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적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댈러스로 오면서 저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지리를 파악해야 합니다.
성당까지는 걸어서 40분이면 가기에 걸어 다니려고 합니다.
꼭 가야 할 곳을 알아야 합니다.
마트, 은행, 주유소, 식당, 미장원, 병원, 차량 정비소, 산책로 등을 알아 두면 좋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입니다.
본당의 봉사자들을 파악해야 합니다.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전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으니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직원들을 알아야 합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고, 슬플 때 함께 마음 아파해 줄 사람을 아는 것은 복입니다.
셋째는 업무를 숙지해야 합니다.
12년 만에 본당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기에 미국 교회와도 소통을 해야 합니다.
33년을 사제로 지내고 있지만 본당 사목은 늘 새롭고, 긴장이 됩니다.
본당 사목은 장기계획과 단기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댈러스 성당은 3년 후면 설립 50주년이 되기에 그에 맞는 계획을 세워야 하고, 매년 본당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내년쯤에는 저도 이곳 댈러스에 뿌리를 내리고, 여유 있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국에서 오지 않고, 뉴욕에서 왔기에 좀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민등록과 비슷한 쇼셜넘버를 이미 받았기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운전면허증도 뉴욕에서 이미 받았기에 텍사스 면허로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은행 계좌도 이미 개설했기에 이용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린카드를 받았기에 비자 때문에 한국에 다녀오지 않아도 됩니다.
5년 전에 동창 신부님의 초대로 2달을 지냈습니다.
그때 만났던 분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니 마치 집에 온 것처럼 낯설지 않았습니다.
뉴욕에서 자동차로 여행을 하면서 왔기 때문에 시차도 느끼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바로 옆 본당에 서울 교구에서 파견된 신부님이 있어서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사순특강을 서로 바꾸어서 하기로 했습니다.
작년부터 서울 교구에서 보좌신부님을 파견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영어도 잘 하시고, 겸손하십니다.
부모님이 미국에서 살기 때문에 부모님을 만나기도 좋다고 합니다.
뉴욕에서 함께 온 신부님들이 사제관의 불편함을 모두 해결해 주었습니다.
인터넷을 업그레이드 했습니다.
문도 열쇠 키에서 번호 키로 바꾸었습니다.
컴퓨터의 선도 모두 정리해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하느님께로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둘째는 ‘청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셋째는 ‘선행’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두운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세상은 선한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간다면 어떤 악의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바람둥이 남자가 있습니다.
워낙 여자 문제를 많이 일으킨, 어느 날 동생이 형에게 “제발 정신 차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은 어릴 때, 동생에게 엄마의 사랑을 빼앗긴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엄마가 동생만 챙기는 바람에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고, 결국 지금의 인간관계까지 망치고 있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이 남자의 바람기가 과연 어머니 때문일까요?
어떤 형제님은 어린 자녀에게 폭력을 자주 씁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주변에서 말리자, 어렸을 때 자기 부모님께 맞았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많이 맞은 경험이 자기 역시도 그렇게 폭력을 쓰는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의 폭력성이 과연 부모 때문일까요?
이 두 사례 말고도 ‘~탓’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를 탓하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로써 자기의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났고 절대 바꿀 수가 없으니, 자신의 문제도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나의 모든 문제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자기는 늘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지금 모습을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탓’만 하면서 지금 모습을 계속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문제 없으니 그냥 이대로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의 문제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도 문제를 넘기게 되어서 모두 힘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고 선포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하지 않는 삶, 단죄하지 않는 삶, 용서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앞선 예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탓’을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면 자기도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랑의 삶을 그대로 되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그저 따를 뿐인데도, 그런 삶을 살 때 더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탓’을 하는 삶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에 집중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보고 또 이를 따르는 데 철저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문제 되는 것들을 과거의 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지금, 그리고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에 매이지 않고 올바르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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