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폰으로만 하기에 글이 이상하거나
오타가 있으면 지작해주세요.
유로파카페는 역사마니아가 뭉친곳이니 상식적으로 아시는분이 많을테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제대로 싸운것이 백년전쟁전에도 있었다.
유로파 메죽을 보면 아시겠지만 영국땅은
가스고뉴로 한정되있고 앙주나 브리타뉴에 작게 남아있는정도였다. 그치만 영국왕 헨리 2세때 지도를 보면

이러한데 보시면 알겠지만 프랑스의 50~60%이다.
그러한데 우리가 아는 백년전쟁전 영토는
이러한 지도에 비해 작은걸까를 생각하면
꽤나 큰 전쟁이 있다라는걸 깨닫게된다.
-필리프 2세는 누구이고 그당시 프랑스 상황-
부친-루이 7세 모친-상파뉴의 아델
재위기간 1180년 ~ 1223년
그는 루이 7세의 막둥이자 귀한아들이었고
그는 정치적감각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아직 어린나이 15세에 왕이 됬으나 상파뉴백작을
저지하고 왕령지를 늘리는것을 보아 어릴때부터 티고난것이라 해야겠다.
나중에 그의 업적을 기려서 '아우구스투스'랑 같은뜻인 아우게레라는 칭호를 받았다.
당시 프랑스는 중세유럽을 제대로 표현시키고있었고 매우 약한 왕권이란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있었다.
루이 7세때부터 천천히 올라온 왕권이라지만
지방분권화가 극심하고 영국의 지배령이 왕령지보다 큰판에 왕권이 올라갈리가 없었다.
영국은 아키텐 여공작이자 프랑스(전)왕비였던
엘라아노르가 헨리 2세와 재혼하면서 노르망디+아키텐+가스고뉴등 거대한영지를 얻고 그주변지방까지도 얻게되면서 프랑스보다 큰 프랑스영지를 가진나라가 된다
(주인보다 큰 하인)
-필리프 2세의 국토회복시도-
아버지 루이 7세가 엘레아노르와 이혼한덕분에
거대한 영지가 날라가게됬다.
일단 상황을 보면 필리프 2세가 즉위할때는
헨리 2세의 통치말기다.
근데 헨리 2세의 통치말기는 그다지 순탄치못했다.
일단 땅을 가져다준 엘레아노르와의 사이가 나빠졌고 차남 리처드와 3남 제프리간에 알력과
또 4남 존과의 알력으로 개판 5분전이었는데
필리프 2세는 그걸 이용했다.
처음에는 리처드를 도와 헨리 2세를 제거하는데 성공하고 나중에는 존을 이용해서 십자군원정에 갔던 리처드를 괴롭히는데 성공한다.
일단 헨리 2세가 죽고 리처드가 왕위에 오르면서
곧 터진 사건이 3차십자군원정이다.
우리가 잘아는 리처드는 십자군을 좋아했고
실제로도 리처드는 기사도나 십자군같은 모험에 심취해있었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참가했는데
또 필리프 2세는 이것을 노린다.
십자군원정은 한번 가면 매우 오래걸리기에
필리프 2세는 십자군원정에 가서
어느정도있다가 바로 병핑계로 몸을 빼낸다.
그이후 리처드는 십자군이 끝났으나 독일왕 하인리히 6세에게 억류됬고 그틈에 플랑도르지방과 존이 왕이 되기위해서 지원받는댓가로 많은 영지를 되찾았다. 그리고 엘레아노르(대단한여자다!)가
리처드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가 돌아온뒤부터가
제대로 된 전쟁의 시작이다.
-리처드 1세와 필리프의 전쟁
(여담이긴한데 리처드와 필리프의 전쟁은
국가대 국가도 맞지만 어찌보면 봉신이란 종주랑의 싸움이라해더 틀린표현은 아닐거같다)
리처드 1세는 영국으로 7년만에 돌아왔고
일단 '반역자'존일당을 개발살낸다.
존이 만든 왕위찬탈자모임은 리처드가 오니까 자연스럽게 분산되고 리처드는 빠르게 내부문제를 해결후 몃개월만에 다시그리고 영원히 영국을 나가 존이 트롤짓함 국토를 되찾으러갔다.
전쟁은 대부분이 지루한 공성전이 대부분이였지만
서로서로 지속적으로 한명이라도 상대의 반대파를 만들기위해 음모를 꾸며왔다.
리처드는 온지방을 휘누비며 필리프를 골치아프게 만들었으나 영국에서 나온지 5년 좀 지나서
전투중 화살에 맞고 사망한다.
그후 영국은 존이 왕이 되는데
존은 헨리나 리처드에 비해 능력이 떨어졌고
필리프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였다.
-존과 필리프 2세의 전쟁,그리고 부빈전투-
존은 별명그래도 '실지왕'(뜻은 그게아니다!)
처럼 병맛을 시전했다. 일단 형을 따라해보겠다며
군대를 이끌고 동맹인 플랑도르귀족,신롬황제 오토 4세의 군대까지 이끌고 부빈에서 격돌했다.
프랑스(7,000)군과 연합(9,000)군의 전투였는데
연합의 선제공격이였으나 중갑기병으로 무장한 프랑스군대에게 개발살이 나고 오토 4세와 존은 도주하고 다른 귀족들은 포로가 되면서
필리프 2세의 승리는 확정되다싶이했다.

「부빈전투기록화」1214.7.29
그 이후 존은 치욕적인 협상에 들어간다.
필리프가 점령한 모든 땅을 넘기고 배상금등을 지불하는것으로 전쟁은 일단락난다

-결과와 이후-
결과는 위 사진대로 영국의 프랑스영지는 매우 축소되고 프랑스는 중앙집권이 더 강해지면서
루이 1세이후 개판이였던 프랑스를 재통합하는데 성공한다. 그런반면에 영국은 주요수입원인 프랑스땅이 다털리고 존왕에 대한 귀족들의 불신이 커져갔고 결국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을 작성하게 된다.
또 필리프 2세는 국토회복에 모든것을 쏟아부었고 2배나 되는 영토를 회복했기에
그것에 알맞는 '아우게레'라는 별명을 얻게된다
(참고로 백년전쟁의 전쟁원인은 상속문제다!)
그 백년전쟁때 프랑스가 써왔던 전술이 중기병전술인데 그전술이 프랑스가 쓴건 부빈전투에서 시작됬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댓글 그 결과 필리프는 Auguste가 되고, 존은 Lackland가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ㅠ
참고로 아키텐은 백작령이 아닌 공작령이었어요. 그래서 헨리2세와 재혼한 Eleanor(Eleonore)는 countess(여백작)가 아닌 duchess(여공작) of aquitaine 이었어요.
@Caligula 수정했습니다.감사합니다!
그리고 가늘게 이어지던 카페왕가가 아들 숨풍숨풍 낳고 장족의 발전을(카페왕가가 신롬소속이면 벨붕인데ㄷㄷ)
그나저나 중세 최대의 전투 중 하나인 부빈전투의 동원규모를 보니 양측이 1~2만명 정도던데, 확실히 동시대 아시아에 비하면 카와이(???)한 규모인듯. 이전 시기 고려만 해도 몇만명 동원은 예사였으니(....)
그쵸 ㅋㅋ
근데 중국은 뻥튀기가 심해서.....
에매하죠 ㅋㅋ
프랑스 혼자서 9천명인데
이것도 프랑스가 국토가 좋고 인구도 많아서ㅡ...ㅡ
근데 당시 프랑스는 아직 중앙집권도 안됬고 프랑스 절반은 자기께 아니였으니요 ㅋㅋ
@럽라 좋은것 중국이 뻥튀기가 심하긴 해도, 비교하자면 월등히 중국이 많죠. 인구수로 밀어붙여!!!!
@럽라 좋은것 다만 일개 영주에 불과한 고드프루아 같은 사람들도 몇천명씩 병력을 거느렸던걸 보면 프랑스 전체 병력은 꽤 많았을것 같습니다. 단지 이 중 국왕이 통솔 가능한 병력이 적었다는게 문제겠죠(....)
@루테티아 실제로 중앙집권이후에는 상비군 10만씩 뽑고다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