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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왕적 권위 11:1~6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11:7~10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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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까이에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주가 쓰시겠다’고 하며 나귀 새끼를 끌고 옵니다. 그 위에 제자들이 겉옷을 얹고 예수님이 타시자, 무리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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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왕적 권위 11:1~6
사명을 이루실 때가 이르자 예수님은 그분의 왕적 권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제자 둘을 보내시며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명하십니다(2절). 당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는 신성한 목적에 사용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라고 묻는 나귀 주인에게는 “주님이 쓰시려 하십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게 하십니다(3절). 예수님은 이 일을 왕적 권한으로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요 주인이시기에 어떤 것이라도 그분이 필요로 하시는 때에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나귀 새끼를 끌어오는 과정에서 나귀 주인의 온전한 순종이 돋보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만물의 창조자로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기꺼이 그분께 바칩니다.
● 더 깊은 묵상
나귀 새끼를 끌어온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왕적 권위가 어떻게 드러났나요?
지금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주님께 기꺼이 드릴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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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11:7~10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예언의 성취입니다(슥 9:9). 고대에 왕은 즉위식 때 노새를 탔고(왕상 1:38), 승전 후 개선할 때는 말을 탔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그분의 나라가 로마 황제가 추구하는 ‘압제와 전쟁의 나라’가 아닌 겸손으로 세우는 ‘섬김과 평화의 나라’임을 나타냅니다.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길 위에 겉옷을 펴는 행동은 충성과 존경을 뜻하고, 손에 든 종려 가지는 승리와 번영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외쳐 부르는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시 118:25~26). 나귀를 타신 평화의 왕은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류의 구원자십니다.
● 더 깊은 묵상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말이 아닌 나귀를 타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는 평화의 왕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을 어떻게 표현하나요?
한절묵상:마가복음 11장 7절
겸손하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습니다(마 21:5; 속 9:9). 예수님의 입성은 자기 백성을 위한 왕의 행차라고 하기에는 볼품없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기까지 낮아지셨고, 죽음을 향해 순종의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낮아지신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이 높아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왕의 행차를 거절하신 예수님 모습은 우리가 따를 신앙 모범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헌신한다면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입은 일꾼으로 쓰임 받는다. - 캐럴 메이홀
오늘의 기도
겸손의 왕이신 주님,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인생을 구원하시는 크신 은혜를 찬송합니다. 오늘도 제 삶의 중심에 주님이 임하시도록 충성의 겉옷을 펼치고 기쁨의 가지를 흔들게 하소서. “주님이 쓰시겠다.”라고 하시면 어떤 것이라도 내어 드리며 왕이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겸손의 왕이신 주님,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인생을 구원하시는 크신 은혜를 찬송합니다. 오늘도 제 삶의 중심에 주님이 임하시도록 충성의 겉옷을 펼치고 기쁨의 가지를 흔들게 하소서. “주님이 쓰시겠다.”라고 하시면 어떤 것이라도 내어 드리며 왕이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찬송(새 37 주 예수 이름 높이어)
오늘 본문은 제자 두 사람을 보내어 나귀 새끼를 끌고 와 그것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의 모습과,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하는 군중을 그린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왕의 입성을 축하하는 것처럼 겉옷을 길에 깔거나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 길에 깝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예루살렘 근처에 당도하신 그리스도, 나귀새끼 주인과 제자들의 대화,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그리스도, 환호하는 무리 등입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 벳바게와 베다니는 예루살렘과는 불과 약 3~4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이 말은 예수그리스도의 일행이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 날 것을 암시한 말입니다. 여태껏 도보로 여행하시던 예수님은 갑자기 나귀를 타시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라는 스가랴 선지자 예언의 성취를 위함입니다. 아울러 왕으로 등극하시는 왕의 대관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은 군력의 왕으로 노새를 탔지만,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할 겸손한 왕으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보내 아직 한 번도 사람이 타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일은 순전하게 이루어집니다. 분명히 그 나귀는 주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전에 나귀 주인과 약속해 놓은 것이 아닌가? 아니면 예수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것인가? 그에 따라 학자들의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우선, 주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근거를 두는 설명입니다. 그리스도는 뛰어난 예지력으로, 맞은편 마을에 아직 사람이 타지 않은 나귀 새끼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나귀 임자들은 숨은 그리스도의 제자였다는 주장입니다. 그곳이 나사로의 동네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들도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 가족들의 영향을 받아 주님의 추종자였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예지력과 제자들의 행정력의 소산이었다는 견해입니다. 주님은 한 번도 사람이 탄 적이 없는 나귀새끼를 예지하셨고 이에 제자들이 가서 값을 치르고 갖고 왔다는 주장입니다. 주님의 인품으로 보아서 그냥 갖고 올 리 없다는 것에 근거를 둡니다. 아무래도 마지막 주장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듯싶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근거를 두는 견해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견해는 추측일 뿐 명백한 근거가 없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는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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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라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백성들이 옛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듯이 기뻐했다는 것으로, 그 까닭은 조상 다윗의 시대처럼 예수를 통하여 최강대국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낙관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비록 시각은 달랐지만 정말로 이 땅에 주님이 왕되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인류 대 구원의 장이 펼쳐진 것이지요. 그들은 기껏해야 유대 나라의 회복을 기대했지만 실은 그 나라는 온 세상 열방의 회복을 위해 개시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이제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심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우리는 그 하나님나라를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사이즈가 아닙니다. 광활한 우주 사이즈 그 이상일 것입니다. 사실 그 말도 꼭 맞는 말이 아니지요. 사람은 끽해야 물질로 판단하는데, 하나님나라는 그런 물질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감동입니다. 거기에 더 큰 감격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곳에 참고 견디고 이겨낸 우리의 상급이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분명히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그 나라에서는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단 한번으로 족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므로 우리도 단연코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선 모두 산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다 있을 것입니다. 먼저 간 믿음의 선배들, 사랑하는 부모님, 남편과 아내 그리고 먼저 간 자녀들까지 모두 그곳에 살아 있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 설레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치열한 삶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삶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젊음은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과 소유가 한계가 있듯이 우리의 시간도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이 있고,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을 때 그것으로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재물, 명예, 사업, 시간, 건강 등등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들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보다 좋은 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는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보다 좋은 삶, 영원한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나라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귀한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 나라는 소망하는 자의 것입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는 장차갈 나라이지만, 실은 이미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나라입니다.
1월31일 동인천 지하상가에서 전도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세상에서는 겸손을 무기력함으로 오해하여, 겸손한 자를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겸손은 무기력함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이 순종하는 권세입니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마8:27)
그래서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지만, 그 나귀 주인에게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막11:2~3)
그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도 단지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요21:22)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왕, 겸손의 왕 예수님 앞에 자기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막11:9~10)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주의 종들입니다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느1:10)
여호와를 송축할 여호와의 종들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34:1) 그
러나 주님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십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16)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친구로 여기신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주의 종이며 종은 주인보다 결코 크지 않습니다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요15:20)
따라서 주께서 부르시면 따르는 것이고, 쓰시겠다 하시면 쓰이는 것이고,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함을 깨닫고 순종하여 따르면 그 종은 복이 있습니다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6)
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자기 주인에게 시중드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잠27:18)
지금까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추적하고 다녔습니다.
잠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피하였지만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멈춰질 수 없는 놀라운 것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분이 이제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당당하게 입성할 때 많은 사람들이 불과 몇 세기 전 유대를 강한 힘으로 독립시키고 요압과 암몬, 에돔 족속까지 통합시키고 하스몬 왕조를 세워 지금의 성전을 건축하는 계기를 마련한 마카비 장군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또한 로마의 총독으로서 자신들을 압제하고 세금을 빼앗음으로 그들의 삶을 피해하게 만들었던 빌라도의 입성을 교차해서 떠올리며 이제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행하실 상상할 수 없는 기적과 범접할 수 없는 권세를 기대 하며
’호산나, 주님, 조상 다윗의 나라‘를 힘껏 외쳤을 것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선거하는 시절이 다가올때마다
모두 그들이 이 복잡한 현안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자신의 지지를 열렬하게 표현하다가
결국 실망하고 돌아서는 이들이 반복됩니다.
진정한 영적 회복과 각성을 이끄시고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다시 세우실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기다리는 남은 자로 보내주신 곳 가운데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루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10절 평화와 겸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슥 9:9,10). 애굽의 속박에서 자유케 된 일을 기념하는 유월절 축제에 다시 그들을 구원하실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유월절 순례자들은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보고 ‘호산나’ 외치며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드렸습니다. 겉옷을 펴는 것은 왕을 맞이하는 행위였고, 호산나는 왕의 자비를 구하는 찬송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무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만 아니라 만민의 왕으로서, 또 로마의 속박을 벗어나는 잠시의 평화가 아닌,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는 영원한 샬롬을 자기 백성에게 주실 것입니다.
기도
주님께서 칭찬할 만한 공동체를 이루며, 주님께 기쁘게 드릴 열매를 맺게 하소서.
✔ 진짜 믿음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 겸손과 의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1~10절).
‘...주가 쓰시겠다 하라...’(3절)...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승리를 상징하는 백마를 타고, 지배하고 정복하는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타시고 겸손과 섬김의 왕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유월절을 지키러 온 수 많은 사람들이 환영합니다. 자신들의 겉옷과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소리를 지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10절).. 유대인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나라는 다윗 왕 때의 번영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그들은 다윗의 나라를 회복할 메시아적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본받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겸손과 섬김의 삶입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라는 신분과 지위와 영광을 내려놓으신 겸손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내 자신이 세상적으로 잘되게 하시기 위해 오신분이 아니십니다. 죄에서 건져 내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피해가실 수도 있었지만, 철저하게 하나님의 기준과 일치하는 삶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내 입술의 찬양이 세상적인 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요, 내 자신을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한 그리고 주를 위해 온전히 쓰여 지는 사역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진짜 믿음의 사람인지는 나의 삶 가운데 예수님을 닮은 겸손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간절함이 있는 지로 알 수 있습니다.
1.참된 순종의 자세(1-6절)
예수님께서는 전지하신 분이시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타실 나귀새끼를 데리로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이 이해가 되어서가 행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순종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참된 순종의 자세는 내가 이해가 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순종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한 자에게는 그가 생각지도 못한 신령한 일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의 이해의 정도와 관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는 좋은 영성을 가지고 있는가?
2.성경을 이루신 예수님(7-11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이미 말씀하신 그대로 나귀새끼를 타시고 겸손의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의 초점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일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또는 그들이 예수님을 어떤 방식으로 높이려고 하든지 그러한 외적 상황과 환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본질적인 사명을 온전하게 이루시기 위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묵상하기
나는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제자 중 2명을 보내신다.(1)
맞은편 마을로 가라(2)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2)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3)
주가 쓰시겠다하라(3) 하시며 일러 주신다.
주가 쓰시겠다.
주님 앞에 조금이라도 쓰임받는 인생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무엇을 가졌느냐? 내가 얼마나 능력이 있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느냐? 없느냐?가 인생의 승패이다.
무명의 베드로가 주님이 쓰실 때 주님의 위대한 제자가 되었고
목동 다윗이 하나님이 쓰실 때에 위대한 왕이 되었고
미천한 계집종 마리아가 주님이 쓰실 때 위대한 성모 마리아가 된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은 주님이 쓰시는 자로
역사 속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자들이다.
주님이 쓰시는 인생되길 원합니다.
주님이 쓰시는 자는 어떤 자인가?
1. 예수께서 2명을 보내신다.(1) 즉 보냄을 받은 자가 주님의 쓰시는 자이다.
나는 어디로 무엇으로 보냄을 받았는가?
나의 일상의삶의 현장으로
2. 예수님은 제자를 보내신다.(1,4)
주님은 아무나 보내시지 않는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진다고 했다.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과 합숙 훈련을 하며 특별 강의를 들으며
특수 훈련을 받은 제자들을 보내신다.
3. 제자들이 가서 본즉(4)
주님이 쓰시는 자는 말씀을 따라 행동하는 자이다.
주님이 나귀새끼를 끌고오라면 끌려고 가는 자이다.
왜 가야합니까? 이유도 묻지 않았다.
염려도 걱정도 하지 않았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순종했다.
시도해 보지도 않고 안 될 것이다 못한다고
부정정이며 소극적인 태도와 생각이 얼마나 실 생활에 많은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실패했다고 하기 보다
위대한 일을 시도해 보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
주님이 말씀하실 때 거부하지 않고 순종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4. 섯던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이 나귀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5) 묻는다.
무슨 일을 하려든지 꼭 반대하는 세력은 있고 믿음의 일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고난과 핍박과 시험이 오더라도 뚜벅뚜벅 서두르지 않고
믿음과 성령의 방법으로 주님의 명하신 것을 행하는 자를
주님은 쓰신다.
5.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 지라.(6)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즉시 허락하는 자를 주님이 쓰신다.
성경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를 이끄시는 방법은 언제나
먼저 하나님이 요청하신다.
그리고 인간의 응답이 있었다
응답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
항상 이 3박자로 되어 있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부르셨고 다랐을 때 축복하신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하셨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축복을 얻었다.
주님은 이시간에도 나에게 시간과 물질과 사랑과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신다.
주님은 나를 위해 몸 전체를 주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드릴까?
6. 주님이 쓰시는 사람은 바로 나귀 새끼(2,4,5,7)같은 사람이다.
분명 나귀새끼와 어미가 함께 매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나귀 새끼를 사용하신다.
물론 나귀새끼는 구약 예언의 말씀의 성취이다.
그러나 나귀새끼는 33살의 청년 예수를 태우기에는 역부족이리라.
능력도 힘도 경험도 없지만 주님을 태우고 최선을 다해서 걸어가는 나귀
만약에 나귀가 예루살렘 입성에 수 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9)
찬송하리로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10)
소리지르며 환호하는 것을 자기를 향하여 하는 줄 알고 히히힝~~~하고
흔들어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다.
상상만 해봐도 웃음이 나는데 예수님을 길바닥에 내동댕이 쳐 버리지 않았을까?
나귀새끼는 묵묵히 모든 영광을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찬양처럼
끝까지 묵묵히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겸손한 자를 주님이 쓰신다.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세상이 원하고 눈에 보이는 나라의 회복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이 세상을 새롭게 하고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을 바라 보는 믿음의 자녀들 입니다.
매 순간 그분을 예배하고 구원을 노래하며
담대한 증인으로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이 여기시고
그 눈물을 닦아 주시며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에 백성들에게도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게 하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