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2학년에 처음 읽은 책이 삼촌이 읽고 있던 책, 장덕조의 <광풍狂風>이었다. 그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강력한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내 기억 속에 깊이 새겨졌기 때문에 성장하면서 김시습에 대한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사숙私淑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곳 부여 무량사를 자주 찾았던 것이다.
조선초기의 학자이며 문장가로 당대를 풍미했던 김시습은 자는 열경이고 호는 매월당 법호는 설잠으로 1435년에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했던 김시습은 ‘한번 배우면 곧 익힌다’하여 이름도 시습으로 지어졌으며 당시의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에게 “장래에 크게 쓰겠다”라는 전지까지 받았다. 그는 13세까지 수찬 이재전과 성균관 대사성, 김반별 그리고 윤상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비롯 예기와 제자백가 등을 배우다가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방랑길에 접어들었다.
관동지방과 서북지방뿐만 아니라 만주벌판과 전주, 경주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전주에서도 그가 한겨울을 보냈다는 연유 탓인지 전주객사 동익헌쪽에 매월당이라는 누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헐린 채 흔적도 없다.
매월당 김시습이 입적한 부여 무량사
김시습은 31세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 용장사에 금오산실을 짓고, 그 집의 당호를 매월당이라 붙인 후 그곳에서 37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와 여러 책들을 지었다.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여러 절들을 전전하던 김시습은 47세 되던 해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아내를 맞기도 했으나 폐비윤씨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으로 방랑의 길에 나선다.
훗날 김시습전을 지은 율곡 이이는 김시습을 일컬어 “한번 기억하면 일생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읽거나 책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없었으며, 남의 물음을 받는 일에는 응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재주가 그릇 밖으로 흘러넘쳐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경청은 모자라게 마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윤기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융통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기에 남음이 있다.“라고 하였다. 다시 이이는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다”라면서 불우했던 그의 한평생을 애석해 했다.
김시습은 오십대에 이르러서야 인생에 대하여 초연해질 수 있었다. 그는 이 나라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떠 돌아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이 곳 무량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속에 버릴 지어다”라고 자신을 평가하였다. 무량사에는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불만이 가득한 김시습의 초상화가 지나는 길손들을 맞고 있다. 김시습은 59세에 이 절 무량사에서 쓸쓸히 병들어 죽었다.
그는 죽을 때에 화장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므로 그의 시신은 절 옆에 안치해 두었다. 삼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었다. 김시습의 안색은 생시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어 그의 유해를 불교식으로 다비를 하였다. 이 때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세웠다. 그 뒤 읍의 선비들은 김시습의 풍모와 절개를 사모하여 학긍 결에 사당을 지은 뒤 청일사라 이름을 짓고 그의 초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나하고 생각이 같으면 군자고,
나하고 생각이 다르면 소인이다.”
허균의 말과 같이 자신의 당파나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며 살기 때문에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조선의 아웃사이더 매월당 김시습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나의 그의 삶을 이해했고, 그래서 따르며 살고자 했다.
“우리는 수백만 금金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삶에 의문을 구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 미짜의 말이 인간의 삶에 기본이 되는 사회는 바랄 수 없는 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