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에 눈물이 어려 있어'
(시라카바니 나미다 아리):
재일교포 2세 출신의 여걸가수
'미야코 하루미(한국명; 李春美)'의
서정성 짙은(슬프면서도 당찬)
숨겨진 명곡을 소개합니다.
都はるみ - 白樺に淚あり 미야코하루미 - 자작나무에 어린 눈물 - YouTube
白樺に涙あり / 都はるみ さん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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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はるみ~白樺に涙あり~ - YouTube
평가: 당당하면서도
유려한 리듬 속에
애잔한 슬픔이 깃들여 있죠.
가사내용
1.
자작나무 숲속의 이 오솔길은
이대로 이즈미로 이어지는 길.
추억뿐인 줄 알면서도 문득 오늘
또 여길 찾아왔네요.
그 사람을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요.
2.
남겨주신 목각인형을 가슴에 껴안고서,
낙엽 속에 이대로 파묻혀 잠들고 싶네요.
곧 좋은 일 있을 거라며
다정하게 속삭여 주시던
그 말씀은 그 말씀은
이제는 한낱 꿈이 되고 말았군요.
3.
이즈미 근처 하늘의 저 검붉은 구름도
잠시 빨갛게 불타오르더니
이네 사그러지고 마네요.
짧았던 작은 그 꿈을 소중히 소중히
담아 잠가 두고서,
아아 이제는 사요나라 사요오나라!
미야코 하루미(都 はるみ)
미야코 하루미의 아버지인
이종택(李鐘澤)은
경상도에서 태어나
일본 교토의 비단 명산지인
니시진(西陣)에 이주하여
직물 기술자가 되었다.
당시 그가 운영하던
작은 직물공장에
너무나 성실한 여공이었던
여성 ‘마츠시로’(松代)와 결혼하여
1948년
‘미야코 하루미’를 낳았으며,
하루미의 본명은
‘기타무라 하루미’(北村春美)이며
한국 이름은 이춘미(李春美)다.
하루미는 1964년 27살의 나이로
콜롬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가요콩쿠르에서 우승하여
‘곤란한 거예요’(困るのことヨ)라는
노래로 데뷔하였고,
같은 해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
(アンコ椿は 恋の花)이라는 노래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후 1965년 발표한
‘눈물의 연락선’(涙の連絡船)이
155만 장의 앨범판매를 기록하는
폭발적인 인기를 가져오면서,
그해 연말 일본 가수의 꿈에 무대인
제16회 NHK 홍백가합전에
나가게 되었다.
1969년
잡지에 미야코 하루미 어머니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내가 조선인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딸 하루미가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다면서,
이러한 세상을 보면서
재일 한국인 딸을
인기 가수로 키워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당시 하루미 어머니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딸이
재일 한국인임을
주변에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는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인기인의 도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한 것에 대하여
이를 비난하는 편지들이 쏟아져,
하루미 어머니는 물론
가수 하루미 본인도
이후 일체의 취재를 거부하며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1976년
‘북쪽의 집에서’(北の 宿から)로
제18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게 되자,
‘주간 산케이’는
하루미의 아버지는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의 대표적인 상을 줄 수 없다는
기사가 실리면서
이에 동조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하지만 인기는 계속 이어졌고
인기 절정의 상태에 있던
1984년 36살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자,
일본 엔카 가수 중
가장 유명한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 みそらひばり,
재일 한국인으로 추정)가,
‘너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니
꼭 행복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무대를 떠난 하루미는
1987년 프로듀서로 활동하였는데,
한국 가수 김연자(金蓮子)의
프로듀서가 되어
일본 가요계에 큰 바람을 일으켰다.
미야코 하루미
(일본어: 都 はるみ, 1948년 2월 22일 ~ )는
일본의 엔카 가수이다.
본명은 기타무라 하루미(北村春美).
생애
1948년
일본 교토부 교토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기타무라 하루미(北村春美)이다.
교토시에 있는
라쿠요 종합고등학교
(洛陽総合高等学校)를 다니다가
가수가 되고 싶다는 이유로 중퇴하였다.
1964년
'곤란해요'(困ることヨ)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같은 해 발표한
'앙코동백은 사랑의 꽃'
(アンコ椿は恋の花)이 히트하면서
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후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일본 가요계를 대표하는
대 스타가 되었다.
1984년
'보통의 아줌마가 되고 싶다.
(普通のおばさんになりたい。)'는
말을 남기고
NHK 홍백가합전을 끝으로
은퇴하였으나,
1987년
음악 프로듀서로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후 1989년
NHK 홍백가합전을 통해
가수로 복귀하였다.
이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2010년에는
자수 포장(紫綬褒章은
과학 기술 분야의 발명, 발견과 학술 및
스포츠,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 등을 달성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일본의 영전이다)을
수상하였다.
2015년 11월 24일,
전국 투어 마지막 날
2016년
활동을 휴업한다고
발표하였다.
2016년 2월 18일
TBS 라디오 프로그램을 끝으로
언론에 등장하지 않고
사실상 은퇴하였다.
2021년
배우 야자키 시게루와 함께
동북 지방에서
호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보도되었다.
독특한 꺾기 창법을
잘 구사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며,
독특한 꺾기는
여러 연예인에 의해
성대모사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주로 애수(哀愁)가 담긴
곡들을 많이 노래했으며,
이외에도 고향인
교토를 소재로 한
노래들을 취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엔카 이외의 장르의 곡들도
자주 부르기도 한다.
1989년에는
일본에서 데뷔한
김연자의 곡을
프로듀싱 하는 등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레코드 회사는
콜롬비아 뮤직 엔터테인먼트.
NHK 홍백가합전에는
1965년부터 1984년까지,
1989년부터 1997년까지
총 29회 출연했다.
이 글은
청남(晴南) 박수규 박사, 저술가님의
요청으로 게재합니다.
일부 글은 옮겨와 편집
첫댓글 일본의 국민가수 이춘미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박대 받았지만 일본인 엄마의 용감한 보살핌으로 인기 가수가 되었네요.
5월 가정의 달 시점에 일본인 어머니를 통해 빛나는 소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나라던 <어머니는 위대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