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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 11:11~14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 11:15~19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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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을 둘러보시고는 베다니로 가십니다. 이튿날 베다니에서 나오셨을 때 시장해 무화과나무에 가까이 가셨다가 잎사귀만 있고 열매 없는 그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 장사꾼들을 내쫓으시자, 종교 지도자들이 듣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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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 11:11~14
예수님이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마가는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을 때가 아니라고 기록합니다(13절). 무화과나무는 3월에 싹이 나고 4월에 잎이 피며 5월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간혹 잎이 무성한 나무는 4월(유월절)에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기대하신 것이 4월의 열매였습니다. 예수님은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통해 경건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대교와 성전의 실상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내리신 “이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라는 저주 선언은 타락한 유대교에 대한 심판 선언이자 오염된 성전 제도에 대한 폐지 선언입니다(14절).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빛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데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예수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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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깨끗하게 하심 11:15~19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첫날 성전을 둘러보신 예수님은 둘째 날 다시 성전을 방문하십니다(11, 15절). 예수님은 이방인의 뜰에서 제물 매매와 환전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시고 분노하십니다. 제물을 매매하거나 세겔로 환전하는 일 자체가 불법은 아닙니다. 문제는 제사장들이 그들 배후에서 막대한 수수료를 챙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물 매매꾼과 환전상을 추방하십니다(15절). 그리고 제사를 빙자해 성전에서 막대한 이권을 취하는 이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이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성전(교회)은 하나님의 집이요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성전에서 제물 매매꾼과 환전상에게 분노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생각하는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한절묵상:마가복음 11장 17절
우리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고전 3:16). 우리 몸과 마음에 채우는 것을 확인하면, 무엇으로 하나님 성전을 채우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무성한 잎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처럼(13절), 어떤 믿음의 열매도 맺지 못한 채 성전의 허울만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외적 화려함을 보시지 않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담아내는 질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으로 귀착되지 않은 신앙은 참된 신앙이라고 보기 어렵다. - 케이 워렌
오늘의 기도
주님! 신앙의 연수는 쌓여 가고 사역의 모습은 화려하지만, 경건의 능력과 성령의 열매는 점점 옅어지는 제 모습을 봅니다. 세속적인 가치와 타협하며 안일하고 무감각해진 제 마음과 우리 교회를 고쳐 주소서.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기도의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 주소서.
오늘의 찬송(새 424 아버지여 나의 맘을)
오늘 본문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 쫓으며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역정을 내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타락한 유대교와 부패한 성전을 심판하신 것과 같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기도 없는 성전, 성전의 본질적 기능,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살해모의 등입니다.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 멀리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주께서 가서 보셨는데 열매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으로, 이때는 무화과 철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무화과의 때’는 무화과가 한창 열리는 9월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때는 4월경인 유월절 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3월에 무화과나무에 먹을 수 있는 조그마한 열매가 열리고 곧 이어 4월에는 크고 무성한 잎들이 나옵니다. 따라서 3월에 나오는 조그만 열매들이 없으면 아무리 잎들이 무성하다고 하더라도 9월의 정상적인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무화과 철이 아니더라도 그 전에 열리는 조그만 열매들을 바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했다는 말입니다. 주로 소나 양 같은 짐승들을 잡아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이 성전제사입니다. 따라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동물을 성전으로 끌고 와야 합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 오는 도중에 짐승들이 죽을 수도 있고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동물을 사는 것이 편리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점들을 이용하여 성전의 관리들이 장사를 하였다는 점입니다.
우선 절차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쓰는 돈을 일단 성전에서 쓰는 돈으로 바꿔야 합니다. 즉, 환전상을 거쳐야 제사를 드리기 위한 짐승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억지와 속임이 행해 진 것입니다. 일종의 독과점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꼼짝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은 당연히 대 제사장의 금고로 들어감은 물론입니다. 결국 제사를 빌미로 돈을 갈취하는 것이지요. 강도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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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향해 하신 말씀으로, 이를 제자들이 다 들었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화과나무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본래 꽃이라는 것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피는 것인바, 만약 꽃이 없는 나무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과일나무가 아니지요. 무화과나무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만 꽃이 작아 안보일 뿐이지 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즉, 커다란 잎사귀에 파묻혀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자상하시고 인정이 많신 예수님이 그런 무화과나무 하나를 저주하셨다는 점입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열매가 없었다고요.
문맥 속에서 이 사건을 보면 매우 뜻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일과 성전 정화사건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매우 한탄하십니다. 성전에 들어와선 불같이 화를 내십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입니다. 유대교는 끝났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곳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복음 외에는 하나님나라의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 선포입니다. 이는 신앙적으로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말씀은 실현되어 그 다음날 아침에 뿌리째 말라 버립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달란트가 있습니다. 받은 사명도 있고, 비전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없다고 해도 우리들 손에는 갖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없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냥 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열매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런 나무를 저주하신 것을 보면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이 귀한 것은 조건 없는 은혜가 있기 때문이고, 사명이 귀한 것은 값진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에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하늘나라에 올라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아름다운 열매로 칭찬받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 열매는 주님 앞에서 맺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맺는 것입니다.
뜨거운 태양,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그리고 태풍과 폭풍을 견뎌 맺은 열매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제주도 감귤은 원래 노란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파랗지만 따가운 태양 볕을 참아 아름다운 황금색을 입는 것입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면 농부에게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사람들과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니 뿌리째 말라 죽었습니다 왜 저주하셨을까요?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확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 합니다 그러나 무화과는 두 번의 수확이 이루어집니다 본 수확은 여름이 지난 후 이루어지지만, 여름 전 유월절 쯤에 상품성 없는 작은 무화과가 먼저 나는데 이것을 따주어야 좋은 무화과가 맺히기 때문에 일손을 덜 겸 나그네가 따먹는 것이 장려되었는데, 이것을
"처음 익은 무화과"라고 합니다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사28:4)
또한 작은 충격에도 낙과됩니다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나3:12)
그러나 굶주린 나그네에게는 사모할 만한 것이었기에 없다면 큰 실망이었던 것입니다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미7:1)
그래서 주님은 무화과 없는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기에 찍어버리시는 겁니다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눅13:7)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성도는 없고 강도들만 가득한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기 때문에 엎어버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대에게 재앙이 있습니다 무화과 없는 나무처럼, 경건하고 정직한 성도가 없는 성전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앙이로다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미7:1~2)
그러나 주님은 종교 강도들이 다시는 더럽히지 못하도록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을 성전이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어린양이신 자신을 완전한 성전으로 세우셨습니다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
사실 무화과는 과일이 아니라, 안으로 피는 꽃입니다 껍질은 꽃받침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화과는 성도입니다 성도는 안으로 피는 꽃이라,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이 아름답고 강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3:16)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
그러므로 참 성전이신 주 안에서 우리는 안으로 피는 꽃, 속사람이 아름다운 성도,
나그네에게 자기를 거저주는 사모할 만한 처음 익은 무화과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5-19절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뒤엎으십니다. 당시 성전의 바깥뜰(이방인의 뜰)은 제물을 파는 상인들과 돈을 환전하는 이들로 북적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수십만의 순례자들이 영업 상대자였을 것입니다. 그들과 깊이 유착된 성전 당국자들 역시 이들의 독점을 묵인하고 막대한 이익을 챙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인들의 상을 뒤엎고 채찍을 휘두르시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을 “강도의 소굴”(렘 7:11)로 만든 성전 권력에 도전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참여할 예배 공간을 예배자의 주머니를 약탈하는 장소로 바꾸고, 불의와 불법을 행하는 이들을 거짓 제사 뒤에 숨겨주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파괴적인 행위는 기능을 상실한 성전 종교에 대한 심판 행위였습니다(13:2). 성전을 향한 예수님의 척결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역시 예배 공동체가 이익 집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2-14절 잎만 무성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너무 가혹한 일인 것 같지만, 사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외적 종교 행위는 많지만 하나님께 드릴 삶의 열매가 없는(미 7:1)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호 9:10). 기능을 상실한 성전 제사 제도, 외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종교 지도자들, 정의와 공의를 결실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한탄과 분노의 말씀인 것입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무엇이 있을까?’ 하여 기대하시는 주님께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기도
주님께서 칭찬할 만한 공동체를 이루며, 주님께 기쁘게 드릴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제 앞으로 행하실 일들을 생각하시며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보셨고 다시 베다니로 나가셨고
다음날 아침 출발할 때 시장하시므로 겉모습으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그 철이 아니라도 열리는 첫 열매 ‘빠게’를 드시려 했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나무를 저주했고 주님의 제자들도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전으로 향하시며 이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결국 화려한 헤롯의 성전에서 겉모습은 비교할 수 없이 거룩하게 차려입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포함한 종교지도자들이 결코 행해서는 안되는 부정한 제사의식을 행하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거짓된 형식적 종교행위만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여호와께로 제대로 이끌고 있지 못하는 영적 가난에 대해 우회적으로 질책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정성스럽게 각 집에서 가져온 제물들을 받아주지 않아
기존에는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인증한 가축들만 사용하도록 허락한 뒤
비싸게 팔아 이익을 챙겼고 그 사실을 알고
제물을 가지고 오지 않고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이들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예배하는 것이 마치 돈을 쓰려 오는 형식적 면피 행위뿐이었고
결국 주님의 거룩한 분노를 일으킬 수 밖에 없는
깊은 영적 타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깨우치고 가르치시며
결국 종교지도자들의 표적이 되는 일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일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 열매가 맺어지는 풍성한 주님의 가지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 경건과 삶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11~14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 보셨습니다(11절).
이는 다음날 있을 성전 정화를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이튿날 베다니에서 나오셨을 때에 예수님은 시장하셨고, 멀리서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무엇이 있을까 하여..’(13절)가셨더니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14절) 저주하십니다. 이때는 무화과의 때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는 겉만 화려하고는 믿음이 없이 형식주의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책망과 탄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의 기준은 능력이 아니라 나의 삶 가운데 맺는 열매입니다. 오늘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특별한 능력을 행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척’병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경건한 척 할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겉은 화려하고, 요란하지만 경건의 능력과 복음의 능력은 얻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신앙인의 모습을 잘 갖추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이 원하시는 경건한 삶에서 비롯된 거룩한 삶의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있을까 하여...가서 보신즉...영원토록...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나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를 날마다 점검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정결과 선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15~19절).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7절)... 성전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희생 제물을 판매하는 사람들이나 환전하는 사람들, 비둘기들을 파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그들의 좌판대를 뒤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강도의 굴혈이라는 표현은 성전 내에서 이루어진 거래에 대한 책망 보다는 그것을 주도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자기 의와 탐욕에 사로잡혀 수많은 순례자들을 그리고 이방인들과 가난한 자들을 상대로 약탈하는 그들의 악행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다른 어떤 곳보다 깨끗하고, 정결해야 할 곳이 악행과 탐욕에 젖어 있는 곳으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피땀 흘려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과 의로움과 거룩함은 내가 밤낮 쉬지 않고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워 사람들의 주머니를 약탈하여 자신의 배만 채우는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보며 분노합니다.
오늘 교회가 마치 헌금이나 뜯어내기 위해 그리고 목사들 배만 채우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음에 참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어찌됐든 교회는 지금의 상황을 반면교사삼아 교회의 정결함과 거룩함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와 교회의 선한 행실을 통해 사람들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복음 아래서 정결한 삶과 선한 행실로 진짜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만왕의 왕으로 예수님께만 집중하여 순종하고 그 이름을 높이며 찬양하는 삶을 통해 모양만 그럴싸한 속 빈 강정과 같은 믿음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충만하여 믿음의 선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막 11~1~19절)...
1.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최후(12-14절)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다가가서 그 속에서 열매를 구하시려다 열매가 없자 그 나무에 대하여 다시는 열매 맺지 못하도록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무화과 철이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무화과철이 아님을 모르신것이 아니라 그 나무와 같이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자들에 대한 영적인 교훈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열매는 없으면서 잎만 무성한 자들에 대하여 어떠한 심판이 있는지도 무화과 나무를 통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 무화과 나무와 같이 잎만 무성하고 겉으로 드러내기는 좋아하지만 실상은 열매가 없는 성도들이 적지 않음은 참으로 안타가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주한 무화과나무와 같이 말만 무성하고 형식만 무성하되 진정한 열매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지 않도록 항상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묵상하기
나의 영적 나무는 열매가 풍성히 맺혀 있는가?
2.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15-18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뜰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장사하던 이들을 다 내어 쫓으셨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화를 내시면서까지 내어 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행하는 잘못된 일에 대하여 아주 단호하게 바로 잡으셨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자신들이 잘못행하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고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곳으로 세워졌음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곳은 세우신 목적에 합당할 때에 참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여 그러한 몸된 성전으로 세움바 된 우리의 성전에는 고쳐야 할 부분들이 없는지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된 성전속에 혹시 예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과감하게 고쳐 나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묵상하기
나의 몸된 성전은 거룩함을 유지하고 있는가?
오늘의 말씀요약
예수님이 성전을 둘러보시고 베다니로 가셨다가 이튿날 나오십니다.
시장하신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 잎사귀만 있자 영원히 열매가 없겠다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저주받은 무화과나무(11:11~14)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던 예수님은 시장하시자 무화과나무에서 먹을 것이 있나 찾으십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도 했지만, 그 나무는 잎이 무성함에도 열매 맺을 조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무화과나무는 형식주의에 빠진 유대교와 외식하는 유대인, 특히 종교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때’로 옮긴 헬라어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개입’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유대교를 통해 역사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기 전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유대교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지 못함을 드러내시고, 유대교의 종말과 무익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 적용 질문: 열매 없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 생활을 하고 있다면 어떤 각성이 필요할까요?
성전 정화 사건(11:15~19)
먼 지역에서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들의 불편함을 덜어 주기 위해 성전 마당에 개설된 제물 시장과 환전 시장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이방인의 뜰을 장사꾼들이 차지함으로써 이방인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길을 차단해 버렸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사람들을 예수님이
내쫓으신 것은 타락한 성전을 다시금 정결하게 하신 작업입니다. 또한 메시아로서 성전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신 것이기도 합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행태를 용납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 사건 때문에 예수님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만민이 기도하는 곳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왜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을까요?
- 적용 질문: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
나 자신과 공동체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주님이 오심을 통해 익숙하고 관습적인 것들이 완전히 새롭게 개편되었음을 봅니다.
어느새 제 신앙이 타성에 젖어 있다면 주님의 엄준한 꾸짖음을 달게 듣고 회개하게 하시고,
그럼으로 영육의 성전이 깨끗해지게 하소서.
마가복음 11:11~19 열매 없는 나무의 결말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일주일간의 사건이 스가랴 선지자 예언(슥9:9)의 말씀처럼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의 입성으로 부터 시작 되었다.
오늘의 본문은 고난주간 2일째에 행하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두 가지 일이 기록되어 있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성전을 정화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튼날 예수님게서 사장하셨다.(12)
잎사귀 있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13)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13)
무화과는 꽃이 피지 않는 것 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무화과는 3~4월에 열매를 맺기 시작해서
8월 중순에서 10월 중순 사이에 익는 과일이다.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시기는 유대력으로 니산월(3~4월) 유월절 기간이다.
그러니 당연히 무화가 열매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나무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니라.(14)
대단한 저주의 말씀이다.
상식과 이성과 논리에 맞지 않는 말씀이다.
왜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 하신 것일까?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이유는
배가 고픈데 열매가 없자 괜한 분 풀이를 나무에 하신 것이 아니다.
상징적인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무화과 나무가 저주 받은 것 처럼 참 신앙을 갖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에 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아마도 무화과 나무를 보셨을 때 어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둘러 보실 때
생명없는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과 비슷한 상상이 떠 오르셨는지도 모른다.
주님은 내용없는 종교 의식과 생명 없는 종교적 제도를 주님이 미워하신다.
주께서 요구하시는 열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열매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의 증거를 요구하신다.
열매없는 나무의 뿌리에 심판의 도끼를 두신 것 처럼
잎 사귀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와 같지 말고
주님께 드릴 삶의 열매를 맺자.
두번째 예루살렘 성전에 다시 들어 가신다.(15)
1.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으신다.(15)
2.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신다.(15)
3.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어 버리신다.(15)
4. 아무도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신다.(16)
예수님이 일찌기 이렇게 화를 내신 것을 별로 본적이 없다.
왜 이렇게 화를 내셨을까?
예수님은 하나님도 없고 예배도 없으며 권력과 술수
상업주의로 타락한 성전의 모습에 분노하신 것이다.
성전의 장사치들은 대제사장에게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영업을 했고
환전을 하면서 매매를 하면서 부당한 수수료를 챙겼고
성전을 시장화하여 개인적으로 부정직한 이익을 챙기는 것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을 모욕하는 것으로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시다.
뿐만아니라 예루살렘 성전과 감람산 사이의 지름길로서 성전을 이용하는 것
편리한 일이긴 하지만 성전을 가로질러 함부로 다니지 못하게 금하신다.
그렇게 하신 분명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기(17) 때문이다.
성전을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거하시는 또 다른 하나의 거룩한 성전 바로 나의 마음이다.
나의 몸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고
세속의 잡념으로 채우지 말고 매일매일 주님의 말씀으로 깨끗게하자.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거룩한 주님께로 초청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날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참 제자 되도록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때론 세상의 유혹과 고난 가운데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가
허탄한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믿음으로
그 너머의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의 백성들에게 주님의 선하심을 보여주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높이고 맡겨주신
거룩한 사명 넉넉히 감당하도록 그 강한 팔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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