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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이성 도피 아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힘”
크리스천투데이 : 2015.02.17 20:28
[이어령 박사를 만나다 ①] 긴장 속 문지방에 서 있었던 ‘세례 후 7년’
이어령 박사는 지난 2010년부터 5년간 양화진문화원에서 매달 한 차례씩 강연 또는 대담을 진행했다. 삶과 가족, 교육에서부터 사회와 경제, 문화를 논했고, 문화와 인물 등을 통한 성경 읽기, 그리고 전공인 소설과 인문학을 통한 ‘영성’ 탐구를 했다. 인생을 회고하는 대담도 진행했다. 본지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인 이어령 박사를 최근 서울 평창동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만나, ‘7년차 기독교인’으로서의 소감을 비롯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음력 설을 맞아, 이를 두 차례로 나눠 게재한다.
[대담=류재광 편집국장, 사진=김진영 기자, 정리=이대웅 기자]
▲이어령 박사는 “세례를 받고 ‘문지방에 서 있다’고 말했는데, 7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여전히 죄인인 채로 문지방 위에 서 있다”며 “들어온 것도 나간 것도 아닌, 그 문지방 위의 긴장이 존재하는 한 죄인인 채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진영 기자 |
아무리 바뀌고 변해도 신 앞에선 피조물일 뿐
자신의 죄 인정 않는 사람이 대역죄 짓는 것
-‘세례’를 받으신지 벌써 7년째가 되셨습니다. 소감이 있으신지요.
“기독교에 입문하고 ‘문지방’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문이 열린 것인지, 더 큰 문이 내 앞에서 닫힌 것인지 모르겠다고. 세례를 받은 사람의 말로는 격에 맞지 않지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문지방을 넘었다는 증거이고 이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인데, 세례를 받고서도 저는 여전히 열린 문으로 들어가 있지 않고 문지방 위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나 마더 테레사의 서한을 보면, 저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음을 아실 수 있습니다. ‘내가 크리스천이다’, ‘나는 이제부터 무죄한 자이다’는 말은 바로 피조물(被造物)이 조물이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바뀌고 변해도 신(神) 앞에서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피조물은 에덴에서 추방된, 신과 끊긴 상태로, 누구에게나 원죄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선악과를 따 먹은 원죄를 그대로 가중하는 일입니다.
기독교적 논리에 의하면, 최후 심판날에 비로소 심판을 받는 것이지, 면죄부를 받았다거나 세례를 받았다거나 해서 절대로 원죄가 씻길 순 없지요. 단지 덮어줄 뿐, 죄를 심판해서 옳다 그르다 하는 게 아니지요.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인간이 먼저 취한 행동이 앞을 가리고, 하나님 목소리가 나니 덤불에 가서 숨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게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려집니까? 덤불 속에 숨는다고 숨겨집디까?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피조물인 인간이 원죄를 저지른 순간,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초라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덮어주신 것이지요. 그게 가죽옷을 입혔다는 대목인데, 가죽옷은 어디서 났습니까? 인간들은 무화과 잎을 땄지만, ‘가죽옷’이라는 건 벌써 동물의 생명을 전제로 하지요. 피 흘리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를 덮어주기 위해 피가 필요한 것이지요. 대속과 희생, 그게 바로 예수님입니다.
과학에서는 프랙탈(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구조)이라는 게 있습니다. 성서에서도 끝없는 프랙탈로 우주가, 신과 인간의 관계가 설명돼 있습니다. 아담에서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예수님까지, 아주 작게는 교회 목사에 이르기까지, 중재자·대속자로서의 존재가 되풀이돼 나옵니다.
이렇듯 7년 동안의 제 이야기도 그날 세례받고 기자들과 대담한 것이나, 오늘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나 같은 프랙탈인데, 스케일이 커진 것 뿐입니다. 그러니 아직도 저는 문지방 위에, 죄인인 채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크리스천이다’ 하는 말조차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변명이 아니라, 그 마음을 잃으면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이 혼란과 혼돈과 모순, 들어온 것도 아니고 나간 것도 아닌, 그 문지방 위의 긴장이 존재하는 한 저는 죄인인 채로 신 앞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잘 알려졌듯, 이어령 박사는 딸인 故 이민아 목사의 치유를 계기로 2007년 봄 영성의 세계에 들어섰다.
▲이어령 박사는 과학 이론인 ‘프랙탈’로 자신의 지난 7년을 설명했다. “고사리를 보면, 전체의 모습이 작은 이파리 속에도 들어 있습니다. 눈(snow) 결정이나 들쭉날쭉한 해안도 그렇지요. 그걸 프랙탈이라고 하는데, 성경도 신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우주가 끝없는 프랙탈로 설명돼 있습니다. 7년간의 제 이야기도 그날 세례받은 때나 지금 이 자리나 똑같은 프랙탈인데 스케일만 커진 것입니다.” ⓒ김진영 기자 |
“그러나 ‘나는 크리스천이야, (원죄를) 극복했어, 벗어났어’ 하는 순간 그야말로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위선자들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천사들 중에는 사탄이 참 많고, 사탄이라 생각했던 이들 중에는 천사들이 참 많다고 할까요? 이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나오는 인간들입니다.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아버지를 죽인 혐의를 받은 사람들. 이 사람들의 영혼은 한없이 죄에 물들어 있지만, 끝없이 하나님을 향해 가려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조지마 신부처럼 완전한 사람도, 죽으면 시체가 썩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나는 죄인이 아니야. 나는 무죄해, 나는 하나님의 착한 성도로서 어린 양들을 끌고 가는 지도자야’라고 자부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는 신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하는 대역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오해를 받을까 봐 (기독교에 대한)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그 당시 사탄 취급을 받으셨지요. 자신을 ‘하나님’이라 칭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로마인들이 죽였다지만, 사실 빌라도 총독은 풀어 주려고 했습니다. ‘죽이라’고 외쳤던 군중들은 모두 유대인들, 존경받는 제사장들이었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재림하셔도, 다시 잡아서 심판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 동안 제가 (세례받기 전) 비판하던 말과 같은 말로 착각하겠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강연했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도스토예프스키, <말테의 수기>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탕자, 돌아오다>의 앙드레 지드 같은 사람들, 심지어 파문당하고 개종까지 했지만 어떤 목사님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글보다 그들의 책이 더 많이 읽히고 성서에도 가깝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들처럼, 지금도 체계화되고 소위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에서는 진짜 예수님 말씀이 그대로 현현됐을 때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용기가 없으니 그냥 있지요(웃음).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면 ‘저 사람 예수 믿는다더니, 맞아?’ 할 정도의 말도 해야 하는데, 한국 기독교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저까지 나서 비판적 입장에 서는 것은 사랑도 아니고 크리스천의 길도 아닙니다.”
-‘문지방’을 언제 넘어서실 것 같으신지요.
“저는 문지방에 서 있는 긴장으로 7년간 계속 왔습니다. 남들은 저를 욕할지 몰라도, 처음 세례를 받았던 그 날을 잊지 않는…. 그리고 제가 크리스천과 넌크리스천의 경계선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음을 숨기지 않고 모든 분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정직한 모습이며, 저와 같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이 언젠가 문지방을 넘어가는 힘이 되어 주는 게 제 역할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죽을 때까지 문지방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웃음). 아까 말씀드렸듯, <고백록>처럼 저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의 깊은 고백을 읽어 보면 저보다 10배는 더 그런 긴장 속에 사셨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맨 끝에 ‘나를 구하소서’라고 합니다. 한없이 흔들립니다. 예수님께서도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나이다’ 라고 하셨지요. 원죄를 짊어진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것을 넘어서신 분이시지요.
▲이 박사는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교회에 간다면, 그것은 성서를 전혀 읽지 않은 분들”이라며 “예수님은 분명히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이미 해답을 주셨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
우리도 그분을 따라가야 하는데, 부활 이후 40일간 천국 가시기 전 달라진 예수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는 그 40일이 우리가 기껏 갈 수 있는 길인데….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고 밤길을 함께 걷는 건, 1백만, 1천만 명 중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이지요. ‘그분이 예수님이셨구나’ 그런 기적 말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달리다쿰’으로 죽은 소녀를 일으키신 것은 기적이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비밀로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능력만 보이신 것입니다. 그 능력을 어디에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돌을 빵으로 만들고, 탑에서 떨어지고, 사람이 왕이 되는 기적의 능력으로 썼다면 예수님은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능력으로 사람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셨습니까? 영혼을 구하는 일에 쓰셨지요.”
생명 주러 오셨는데, 우린 왜 빵에 연연하나
-평소 ‘돌을 빵(떡)으로 만드는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시는데요.
“오늘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니 ‘돌로 빵 만드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게 바로 이단이고,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를 어떤 신학자 앞에서도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빵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빵을 부정한 게 아니지만, 말씀은 제쳐 놓고 빵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빵이지, 말씀입니까? 예수님 입장에서 오병이어를 하시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말씀을 전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런데 말씀은 듣지 않고, 오병이어 이야기만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얼마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팔고 있습니까? 성서 보십시오. 예수님은 군중이 몰려오니 산으로 도망치십니다. 얼마나 외로우셨겠어요? 여기 먹으면 죽지 않는 빵이 있는데, 말씀으로 오셨는데, 말씀은 듣지 않고…. 저 오병이어, 먹으면 배부르지만 금방 꺼지는 그것 만들어 줬다고 아우성을 치느냐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능력?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4-5천명을 먹인 것이 뭐 대단하냐 이겁니다. 제자들이 그걸 보고서도 먹을 걸 걱정하니,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보다 몇십 배 중요한 생명을 주러 온 것인데, 먹어도 죽는 빵에 왜 그리 연연하냐’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연연한다면, 그 기적을 보고 교회에 간다면, 그것은 성서를 전혀 읽지 않은 분들이지요. 신학이 아니라도, 저는 문학평론하는 사람으로서, 성서가 어찌 그렇게 읽힙니까? 돌로 빵을 안 만드셨는데, 왜 돌로 빵을 만들라고 합니까? 그러니 자꾸 말씀의 교회가 아니라, ‘의식주 교회’가 되는 겁니다.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이미 해답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광야의 마지막 시험에서 합격하셨지요. 우리가 시험 치면 다 떨어질 걸요(웃음). 목사님이고 교인이고, 교황도 떨어질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걸 덮어주시는 것이지요. 이런 인간의 한계를 알아야지요. 잘난 사람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다 덮어주세요. 정말 착실하게 믿는 목사님들이 잘못 아는 것 있어도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덮는 것과 하나님께서 덮어주시는 것이 같습니까? 다르지요. 하지만 우리는 자꾸 자신을 덮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게 덮어집니까? 우리는 자꾸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덮어주시지요. 그런 의미에서 최후의 심판이 언제 오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오는 것이지요. 그게 프랙탈이구요.”
로고스, 지성과 영성 모두 있어야만 성립돼
-박사님은 ‘지성’의 상징과 같은 분이셨는데, 요즘 강연에서는 ‘영성’을 더 강조하고 계십니다.
“당연하지요. 지성은 제가 할 수 있는 몫이고 50년간 책을 읽으며 가르치고 배워온 것이지만, 제게 가장 결여돼 있는 부분이 영성입니다. 근대 합리주의를 뛰어넘지 못하면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가 ‘무한정신’이라고 한 것이 하나님인데, 인간 정신은 ‘유한정신’이지요. 다음에 물체들과 기계들은 ‘확충’만 있지 ‘생식’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무한정신’, 즉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의 ‘생각’은 무한정신이 아니라 ‘유한정신’입니다. 그러니 신을 인정한 것이지요.
▲그는 “원죄라는 것은 신이 되려 했던 욕망, 지적 오만”이라며 “하나님이 인간을 질투한 것이 아니다. 아들이 아비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은 우주의 질서이자 법칙”이라고 말했다. ⓒ김진영 기자 |
그런데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시계 태엽을 감지만, 움직이는 것은 시계입니다. 그러니 처음에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시고 인간이라는 유한존재를 만드셨지만, 다음에는 간섭하지 않고 우리의 법칙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시계 태엽을 감으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돌아가는 건 우리라는 것이지요. 관여하지 않으신다. 시계가 안 가면 ‘시계 죽었네’ 하고 다시 돌리잖아요?
이것은 유신론(有神論·Theism)이라 하지 않고, 이신론(理神論·Deism)이라고 합니다. 이치로 따진 신, 생각 속에 있는(thinking) 신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무신론보다 더 나쁩니다. 신을 인정하면서도 나와 관계 없다는, ‘죽은 신(Dying God)’이니까요. 그러므로 근대 합리주의 지성을 버리는 게 아니라 그 데카르트적 지성을 넘어서는 것, 우리가 이성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라 이성에서 자유로워지고 이성을 넘어설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숫자나 언어가 아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힘 말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 ‘인간이 신 되는 이야기’
기독교만은 어디까지나 피조물로서 가는 것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
“그러니까 성서를 보면, 우리가 다 알아듣기 쉬운 말로 돼 있습니다. 이것은 지성의 언어이지요. 로고스, 말씀은 지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멘, 할렐루야, 호산나, 달리다쿰’처럼, 번역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전 세계가 다 번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멘’ 대신 ‘예, 믿습니다’ 해도 통할 텐데, 왜 안 했을까요? 영성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말로는 번역이 불가능합니다. 그건 지적 언어가 아니라, 영성이 붙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지적인 걸 다 빼내면, 주문(呪文)이 돼 버려요.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지성과 영성이 함께하는 것이 ‘로고스’입니다. 말씀은 지성과 영성이 한 몸 되는 것으로, 둘 중 하나를 빼내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 인간이 신 되는 이야기이지요. 나도 믿으면 신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최후 심판에서 영성을 얻는다 해도, 어디까지나 피조물로서, 아들로서 가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친구, 동격(同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게 다른 종교와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신의 입장이 되려는 것이 바로 원죄이고 쫓겨난 이유인데, ‘나는 무죄하고 모든 것이 신과 같다, 그렇게 깨끗한 자다’ 이렇게 원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최후 심판 때 구원을 못 받는 것이지요.
원죄라는 게 무엇입니까? ‘신이 되려 했던 욕망’ 아닙니까? 사람들이 자꾸 원죄가 뭔지 모르는데, 딱 하나입니다.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인간이 신처럼 되는 걸 질투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인데, 자격 없는 이들이 조물이 되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비와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싫다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우주 질서를 거역하는 것이지요. 인간이 완전하면 모르겠지만, 자기 판단으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물을 담으려 만든 이 컵이 말하는 능력을 가져서 ‘뜨거운 건 넣지 마’ 하는 것 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컵을 예로 들며 설명하고 있는 이어령 박사. ⓒ김진영 기자 |
지성은 이미 50년간 제가 쓴 글에 다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영성의 세계가 붙음으로써, 제가 옛날에 신을 욕하고 무신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들도 다 해석과 모든 논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같은 성서이지만, 이전에 무신론자로서 읽었을 때와, 영성 있는 크리스천이 되어 읽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마치 시커멓고 괴상해 보이는 네거티브(negative) 필름을 인화시켜 아름다운 포지티브(positive) 필름으로 바꾸듯 말입니다. 영성은 인화지에 자신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해골처럼 찍혔던 것이 제대로 모습을 갖춥니다. 천국은 사진을 인화하는 곳과 같습니다. 거기에 나를 맡기면, 내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게 신은 아닙니다. 어디까지 ‘아담’이지요.”
-얼마 전에도 교회에서 강연을 하신 것으로 아는데, 목회자나 신학교수과 만나면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시는지요.
“저는 그분들과 충돌하거나 서로 의견이 다른 게 아닙니다. 그분들은 ‘신학(神學)’을 하시고, 저는 거기서 니은(ㄴ)을 뺀 ‘시학(詩學)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텍스트 읽기를 하고, 그분들은 실천하고 봉사하는, 분류하고 적용하고 요리해 내는 역할이시지요.
제가 문학작품에서 보통 독자들이 못 읽어내는 뜻을 발견해 주듯, 신학에서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플라톤도 같은 이야기를 했지요. 시인들은 공화국에서 내쫓아야 할 존재들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이데아’의 세계를 가장 실감 있게 말해줄 사람은 시 쓰는 사람들이라구요.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데(실낙원), 에덴동산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일은, 시인이기 때문에 어느 목사님들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자본주의, 반응 적지만… 실패할수록 희망적”
크리스천투데이 : 2015.02.19 18:25
[이어령 박사를 만나다 ②] 사랑과 정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된다
이어령 박사는 지난 2010년부터 5년간 양화진문화원에서 매달 한 차례씩 강연 또는 대담을 진행했다. 삶과 가족, 교육에서부터 사회와 경제, 문화를 논했고, 문화와 인물 등을 통한 성경 읽기, 그리고 전공인 소설과 인문학을 통한 ‘영성’ 탐구를 했다. 인생을 회고하는 대담도 진행했다. 본지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인 이어령 박사를 최근 서울 평창동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만나, ‘오늘의 기독교’를 비롯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청취했다. 그 두 번째이자 마지막 이야기.
[대담=류재광 편집국장, 사진=김진영 기자, 정리=이대웅 기자]
▲이어령 박사는 “사랑 없는 정의도, 정의 없는 사랑도 온전한 기독교가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위험은 이 두 가지”라며 “이 둘이 합쳐져 함께 있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고 말했다. ⓒ김진영 기자 |
한국교회의 위기 아니라 문명에 위기가 온 것
과학·정치·경제가 교회의 역할 대신하고 있어
-많은 이들이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원인과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한국교회가 위기가 아니라, 문명에 위기가 온 것이지요. 바이오테크놀로지가 와서, 생명을 물질적으로, 과학으로, 인공적으로 만들고, 교회의 역할을 과학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면 듣지 않지만, 과학적이라고 하면 다 들어요. ‘이거 먹으면 암 걸린다’고 하면 시장에서 그 물건이 싹 없어집니다(웃음).
하지만 이게 얼마나 틀린 것입니까? 먹으면 암 걸린다고 해서 사카린이 자취를 감췄는데, 이제 괜찮다고 하질 않습니까.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도 먹는 인간들이, 과학자들이 먹지 말라면 안 먹습니다. 이렇게 과학이 세졌어요.
다음은 정치와 경제입니다. 의(義)를 말하는 정치, 풍요를 말하는 경제가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마저 정치적 의로움과 이념에 말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정의’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판을 칩니다. 사랑을 잃고 소금 맛을 잃은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으로 행할 때, 그건 거짓이고 반(反)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굉장한 세력을 갖고 있고, 대중들도 그들을 따릅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정의 없는 사랑’보다 더 나쁩니다. 그 뜻을 아시겠지요? ‘아이고 내 새끼’ 하면서 감싸는 것도 잘못이지만, 애를 바로잡는다며 매질로 죽이는 부모도 곤란합니다. ‘정의 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정의’도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위험은 이 두 가지입니다. 서로 끌어안고 내 편만을 위한 사랑은 있으되 정의는 없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내 편은 정의이므로 다른 편에게는 모질게 비판만 하는 종교도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가 합쳐져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지금 십자가 없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정의와 사랑이 함께 있어야지, 바리새인처럼 율법만 지키고 사람들의 편을 가르는 이것이, 저는 교회의 큰 위기라고 봅니다. 과학과 정치·경제가 신의 입장을 찬탈해 버린 이 시대는 기독교가 기독교로 살아남기가 참 힘든데, 기독교가 과학이 되고 정치가 되고 경제가 되려 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자멸이지요.
기독교가 복지사회를 만들어 가난한 사람, 고아와 과부를 끌어안는 것은 분명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 없이 사회정의로만 저들을 끌어안는 쪽으로 간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불의한 자들을 만들어 가차 없이 인정사정없이 내몰게 됩니다. 그 자체가 사랑이 없기 때문에 덮어줄 줄 모르는 것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했을 때 막 까발린 자식과 보지 않고 덮어준 자식이 있었지요. 지금 사회정의라는 건 모두 까발리는 정의입니다. 원죄를 지은 인간들, 죄 짓고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며 죽어가는 이들에게, 보지 않고 이불을 덮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죄는 덮으려 하지만, 남의 죄는 덮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게 정의인 줄 알면 큰일이지요. 사랑 없는 그런 정의라면, 벌써 저 로마 시대와 사회주의 등에서부터 많이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비로소 정의와 사랑이 함께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있는 모습이 실현됐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종교는 어머니적인 것만 강조하거나, 율법처럼 아버지적인 것만 강조하려 합니다. 헤겔은 유대교의 가장 부족한 점으로 사랑과 관용을 지적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오신 분이시지요. 그것을 빼면 그냥 유대교일 뿐이고, 구약만 읽는 종교가 되고 맙니다. 가톨릭이든 개혁주의이든,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 이전의 종교와는 달라야 합니다.”
형이 아버지 되려 하나… 지도자들 새겨들어야
▲이 박사는 “나는 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그냥 머리에 집어넣을 수 없고, 머리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내 호주머니를 뒤지는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내 머리를 뒤지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
-예전에는 사회의 지성인들이 교회로 몰려왔는데, 요즘은 오히려 지성인일수록 교회를 떠나고 비판하는 추세입니다. 한때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서 계셨던 분으로서 조언을 해주신다면.
“그래야 인텔리이고, 비판정신이 있고, 사회의 존경도 받기 때문이지요. 솔직하게 저는 기독교에 입문하는 그 순간부터 제 독자들의 삼분의 일은 떨어져 나갔습니다. 인터넷만 봐도 알아요(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지요. 손해 봐도 믿어야지요.
포퓰리즘은 안 그래요. 인기 발언으로 교회를 비판합니다. 그러면 ‘역시 이 아무개는 다르구나. 역시 맹목적으로 믿지 않아. 대형교회 들이받고 평신도들 데리고 데모해서 목사 내쫓고, 역시 달라’ 하면서 독자들이 또 붙겠지만… 그거 안 하는 게 참 어려운 거예요.
비판은 쉽습니다.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는데도 ‘내가 과연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을까?’ 그걸 생각하는 것이지요. 함부로 심판하는 게 소위 ‘지적 오만’입니다. 가장 큰 죄악이지요, 신이 될 수 있다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신이 행하는 것입니다.
<탕자, 돌아오다>를 보면 기가 막힙니다.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 어머니에게 다 무릎을 꿇지만, 형에게는 꿇지 않아요. 형이 상속자 행세, 아버지 노릇을 한다는 것이지요. ‘나는 아버지를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지만, 형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합니다. 형들이 문제입니다. 형이 형 노릇을 해야지, 왜 아버지처럼 되려 합니까. 교회 지도자들이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으시자마자 거의 항상 교인들을 가르치는 일만 해 오셨는데, 본인의 신앙 성숙을 위해서는 어떤 일들을 하시는지요.
“저는 한 번도 가르친 일이 없어요. 같이 아파했지. ‘왜 아파하지 않느냐? 왜 생각하지 않느냐?’ 했던 것입니다. 제 생각을 주입한다면, 저는 벌써 ‘해결한 사람’입니다. 제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채 문지방에 있는데, 누구에게 넘어오라고 하겠습니까? 양화진문화원에서 강연한 내용들 가만히 들어보세요. 내 아픔을 이야기한 거예요. ‘같이 아파하자. 그런데 왜 아파함을 모르고, 교회만 오면 다 구제받는 줄 아느냐’는 겁니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을 욕했지, 배우는 사람을 욕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글을 쓰면서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나’를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기 자식들에게도 ‘기독교 믿으라’고 강요하는 거 아닙니다. 자식은 하나님이 만드신 ‘유일자’입니다. 그의 형상 속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지요. 그걸 왜 인간이 마음대로 이래라저래라 합니까? 그러니 목사님 아들들이 보면 범죄도 저지르고, 가장 불쌍할 때가 있어요. 목사님 아들도 같은 사람인데, ‘목사님 아들이 저런다’고 하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어요?
‘놔둬’라는 말이 있지요. 애가 울면 ‘그냥 놔둬’ 하잖아요? 좀 놔두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인도하세요(웃음). 완전하지 않은 자기 머리로 자식을, 학생을 만들어내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만드시지, 인간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면서요? 그런데 왜 자꾸 인간이 만들려 합니까?”
-양화진문화원 강연에서 다루신 작품들 중에서는 교회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파이 이야기>는 다원주의 성향의 작품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는데요.
▲이 박사의 양화진문화원 강연을 토대로 정리된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왼쪽)>와 <지성과 영성의 만남>. 그는 “<파이 이야기>에는 제가 이야기하는 생명자본주의의 내용이 다 들어 있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
“<파이 이야기>처럼 기독교적인 작품이 없습니다. 인도의 힌두교인들을 어떤 설득으로 캐나다까지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인도에서 영국과 프랑스 교육을 받은 주인공이 일본 선박을 타고 마지막에 캐나다로 갑니다. 도중에 모두 죽고 주인공 소년만 살아남지요. 캐나다는 뭡니까? ‘유럽’에서 ‘새로워진 유럽’으로 가는 것입니다. ‘새로워진 서양’, ‘새로워진 기독교’입니다. 주인공이 토론토를 향해 갔는데, 기독교인들이 제일 많은 곳이라고 합니다. 주인공이 기독교 국가에 가서 살지 않습니까.
<파이 이야기>가 기독교를 반대한다면, 제가 되레 묻고 싶습니다. ‘이교들까지 품는 저 작품은 안 되겠다’며 <파이 이야기>를 읽지 말라고 한다면, 예수 믿지 마셔야지요. 왜 그렇습니까? 강도 만나 쓰러진 자를 대제사장과 레위인 모두 그냥 지나쳤는데, 전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마리아인이 살려줬습니다. 예수님이 ‘누가 이웃인가?’ 하고 물으십니다. 기독교인입니까, 아니면 유대인입니까.
이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에 탄 전부가 이웃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잡아먹을지 모르는 호랑이까지도. 거기서 신을 찾으며 호랑이를 구제합니다. 그게 사랑이지요. 나를 잡아먹을 호랑이를 구제하는 것, 기독교 정신을 가장 잘 나타냅니다. 이래야 기독교가 살아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새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인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힌두교인이 동물원에서 생명과 사랑과 용서를 배우고, 심지어 어떻게 조그마한 보트를 타고 호랑이와 함께 타고 거기까지 갔습니까? 이 작품을 쓰고 영화화한 감독의 종교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크리스천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작품을 읽지 않고,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크리스천의 영역을 없애고 예수님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고 문명화된 사회 이야기하면서
최고의 과학기술을 가졌던 나라가 대학살 자행
기독교적 사랑만이 답… 그러니 예수님 오신 것
-언론인으로 프랑스 특파원도 지내셨는데, 얼마 전 프랑스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극단적인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 간 충돌이라는 반응도 있었는데요.
“아까 ‘사랑 없는 정의’를 말했습니다. 그들은 민족과 이념을 위한다지만, 사실 사랑 없는 정의일 뿐입니다. 그게 테러입니다. 죽이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살리는 걸 가르치셨지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요. 하지만 그들은 죽이는 것이 ‘지상명령’이니 자폭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의롭다고 여깁니다. 그런 민족주의가 얼마나 많은 죄 없는 이들을 죽이고 있습니까? 그 대가로는 돈을 받아갑니다. 무슨 명목으로 이것이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테러를 잠재우는 것은 반테러작전이 아닙니다. 기독교적 사랑입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쓰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생명의 귀중함과 이웃에 대한 사랑, 이념이 달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거꾸로 묻겠습니다. 유다가 배신하고 떠날 때 예수님께서 유다를 벌하셨습니까, 아니면 용서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유다를 꾸짖고 ‘내 제자가 아니다’ 하시며 징벌하시고 다른 제자들에게만 사랑을 주셨습니까? 그를 심판하셨나요? 아니면 자신을 파는 사탄까지도 사랑으로 끌어안으셨을까요? 성서에는 ‘빵을 찢어서 주셨다’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나눠줬다고 읽지만, 빵을 찢어서 주셨습니다. 자신의 육신을 찢어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같이 먹는다는 건, 용서했다는 뜻이지요. 그러면서 ‘네 할 바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후 ‘나는 절대로 배신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예수님은 ‘닭 울기 전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 답하십니다. 남아 있던 제자들이나 유다나, 예수님 눈에는 똑같은 사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너희들도 팔아넘길 역할이었으면 나를 팔았어’라는 것이지요. 베드로도 결국 세 번 부인합니다. 그런데도 고기 잡던 시몬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앙들을 맡기십니다. 용서하신 것이지요. 그러니 배신했던 유다인들 용서하지 않으셨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죗값을 치르지요. 예수님이 벼락 쳐서 죽이신 게 아닙니다.
▲이어령 박사는 “기독교를 왜 그렇게 어렵게들 믿는가. 예수님 눈에는 제자건 아니건 다 죄인, 약한 인간이었다”며 “그래서 피 흘려 우리를 구하셨고 부활하셨다. 다른 것은 그냥 능력을 보이신 것이고, 그것이 단 하나의 기적”이라고 말했다. ⓒ김진영 기자 |
기독교를 왜 그렇게 어렵게들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써 있잖아요? 베드로 이야기가 왜 나오겠습니까? 베드로의 맹세에 ‘너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눈에는 제자이건 아니건 모두 죄인입니다. 약한 인간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피 흘려 저들을 구하리라. 저들이 부활을 절대 믿지 못할 테니 내가 그걸 보여주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적은 딱 하나 뿐입니다. 부활의 기적만 보이셨지요. 다른 것들은 능력을 보이신 것에 불과합니다. 기적은 단 하나, 인간이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지요.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저런 참담한 테러를 보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저런 게 말세(末世)이지요. 사람을 돈 얼마에 공공연하게 인질로 잡아다 죽이는 것입니다. 과학과 문명이 그렇게 발달했다는데, 그 옛날부터 있던 해적이 아직도 있습니다. 몸값 내놓으라는 놈들도 있지요. 구약에서 번제 지낼 때랑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계속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낙원을 만들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없어도 됩니다. 하지만 ‘신은 죽었다’며 문명화된 사회를 이야기하는 속에서, 최고의 과학기술을 가졌던 나라(나치 독일)가 유대인 600만 명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필요한 거예요. 600만 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과학이 못 죽이게 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은 원자폭탄 투하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걸 저는 지성의 한계라고, 데카르트가 ‘유한정신’이라 부른 것에 찬동합니다. 이 유한정신에 ‘영성’이 오면, 무한정신과 통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게 교회와 기독교의 역할입니다. 과학자, 정치가, 경제가의 몫을 다 합쳐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말입니다. 정치나 경제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을 기독교가 왜 하겠습니까.”
정말 기독교라면 ‘정의’와 ‘사랑’이 함께 있어야
-기독교 내에서도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첨예합니다.
“저는 자유주의이고 보수주의이고 간에, 아까처럼 한 마디로 말하고 싶어요. 두 파가 싸울 때 보면, 틀림없이 한 쪽에는 사랑이 없고 다른 쪽에는 정의가 없습니다. 그걸 보수니 자유니 이야기하지만, 제 눈으로 보면 ‘사랑 없는 정의’, ‘정의 없는 사랑’이라는 두 파가 싸우는 것 같습니다. 정말 기독교라면, 그 둘을 합해서 정의와 사랑이 함께 있는 교회가 돼야지요. 그것이 제가 꿈꾸는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고 파벌이 생기면, 바리새인들처럼 또 예수님을 죽이게 됩니다. 종교에 ‘도그마(dogma)’가 생겨선 안 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도그마와 싸우셨습니까? 바울도 ‘의문(문자)은 죽음을 낳고 말씀은 생명을 낳는다’는 기가 막힌 말을 하지 않습니까.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있었다(요 1:1)’고 했는데, 이 로고스의 뜻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원래 로고스는 ‘이성’과 ‘말’이라는 양면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말은 ‘육체’처럼 구체적이지만 이성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 둘이 함께 있었는데 라틴어로 쪼개 놓았습니다. 원래는 영과 육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성육신(incarnation)하신, 말씀이 육신 되신 것 아니겠습니까.”
-최근 펴내신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를 보면, 원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계획하셨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가셔서 무엇을 보고 싶으셨는지요.
“그건 출판사에서 그렇게 계획한 것이구요(웃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나 여기 서울에 계신 것이 아니지요. 인간의 생명이 있는 곳에 존재하십니다. 성지순례 가 봐야 아까 말씀드린 대로 발자국이나 따라다닐 뿐입니다. 말씀은 편재(偏在)하지 않지요. 그러니 땅끝까지 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곳이 예루살렘이고, 저기가 서울이에요.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또 서로 민족주의로 싸우게 되지요. 600만 명 죽이는 그 짓을 또 해야겠어요?
▲그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말씀하신 야곱의 우물에 한번 가 보고 싶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
예수님께서 왜 사마리아 그 험한 길로 다니셨습니까. 유다 지방에서 갈릴리로 가는 다른 길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데로 다니셨어요, 잠도 안 재워주는 곳으로. 기독교인들이 그걸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하신 곳이,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으러 온 그곳입니다. 그 여인은 그 동네에서도 인종지말(人種之末)이라 혼자 물 길러 오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던 그 여인을 붙잡고 말씀하십니다. 그걸 깨뜨리시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왜 예루살렘으로 가겠습니까? 차라리 제가 가고 싶은 곳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그 야곱의 우물입니다. 소도 양도 사람도 키우던 물이 아직 있다는데, 마시면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있다는 그곳 말입니다. 가 봐야 그저 우물일 뿐이겠지만, 그런 곳을 가고 싶습니다. 물론 예루살렘도 그런 면에서 굳이 가지 않을 이유는 없지요. 최후의 모습이 담긴 그 성전을…….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시지 않습니까.”
과학 지식에서 신의 촉수 느끼지 못한다면 바보
공평하게 주신 것을 소유하려 하다 하나님 떠나
-생명자본주의를 주창하셨는데, ‘디지로그’ 등과 달리 반응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반응이 별로 없어요. 그게 반응이 있다면, 제가 책을 쓴 의미가 없지요(웃음). 생명이 자본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이들에게 그게 먹힌다면 우습지요. 그걸 여러 사람에게 먹히게 하려면 포퓰리즘 식으로 썼겠지요. 가장 매력 없고 흔해 빠진 생명과 자본이라는 말을, 가장 반대되는 말에 서로 갖다 붙였습니다. 그러니 역설적이지만, 실패할수록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사람들이 알아듣는 말을 해서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이제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지성에서 영성으로>가 제 첫걸음이라면, <생명이 자본이다>의 ‘생명자본주의’야말로 기독교로 들어가는 정말 큰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았을 때의 논리들부터 토포필리아(장소愛), 바이오필리아(생명愛), 네오필리아(창조愛)입니다. 사랑을 에로스와 아가페 등으로 많이 이야기했지만, 기독교이든 마르크시즘이든 필리아(philia)를 3개로 설명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세 개도 대부분 과학자들, 비기독교인들이 말하던 것을 기독교적 해석을 통해 업그레이드시킨 것이지요.
그래서 금붕어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70대에 와서 기독교를 믿은 게 아니라, 20대 때 그 추운 방에서 금붕어를 살려줬던 그게 뭐냐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그 많은 사람이 죽어갈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는데, 꽁꽁 얼어 있던 금붕어에 물을 부었더니 살아나는 게 뭐냐 이겁니다.
하나님 잘 믿는 분들, 그거 생각해 보신 적 있어요? 왜 영하 4도의 물이 가장 무거울까요? 왜 뜨뜻한 물이 차가운 물보다 밑에 있습니까? 물이 얼면 무거워져야 하는데, 얼음이 물에 뜨지요. 그렇지 않으면 물고기는 겨울에 살 수 없습니다. 어떻게 펭귄들은 영하 40도에서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거기서 신의 의지를 발견하지 못하면 바보입니다. 왜 100도에서 물이 끓을까요? 비등점(沸騰點)이 조금만 달라져도, 세상은 안개에 휩싸여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과학적 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신의 음성과 촉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물만 갖다 놓고 봐도 신비합니다. 세상에 물처럼 이상한 게 없지요. 액체도, 고체도, 기체도 되는 것이 물 말고 있나요? 제일 희귀한 물질이, 제일 풍부합니다. 공기도 없으면 못 살지만, 제일 풍부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이 공짜입니다. 이제 물을 사 먹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정말 멀어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똑같이 살 수 있게 준 물질들이 공기와 물과 흙입니다. 그런데 흙(땅)을 소유하기 시작했지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지요. 그때부터 하늘을 배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 살라고 준 흙인데, 흙 자체도 생명이 죽어서 되는 것인데, 그걸 소유하고 내 것이라 말하는 순간 인류의 생명들에게 공평하게 주신 하늘의 권능을 자신의 권능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신이 되려 하는 것이지요.
불완전한 인간들이 자연과 동떨어진 인간 문명을 자기 것인 양 통치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 하늘이 아니라 자신이 먹을거리를 주겠다는 경제인, 그게 모두 신이 되겠다는 것 아닌가요?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 먹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뱀은 계속해서 유혹하고, 우리는 선악과를 따 먹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 그 옛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이야기입니다. 이곳 서울이 에덴동산일까요? 에덴동산 공기가 이렇게 더러울 수 있습니까? 배추 하나 심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발가벗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정치학과 경제학, 과학과 문명 아니겠습니까.
▲이 박사는 “하늘에도 땅에도 안 계셨던 부활 후 40일, 그게 바로 부활의 증거”라며 “부활하지 않았으면 십자가는 그저 형틀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못자국을 갖고 나타나시지 않았나. 부활 없이 성육신의 예수님만 믿는 것은 과정만 있지 결론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김진영 기자 |
그런 우리가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못 갑니다. 선악과를 따 먹었잖아요. 그러니 무화과로라도 가려야 합니다. 과학을 부정할 수 없고, 덮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덮어주는 일, 그게 목회자가 할 일입니다. 원죄를 지었지만, 죄인으로라도 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랑으로 덮어줘야 합니다. 원폭을, 공해를 덮어주고, 원폭을 쓰지 못하도록 증오를 덮어줘야 합니다.
증오를 덮어주면, 과학이 아무리 만들어 준다 한들 폭탄을 갖고 테러를 하겠습니까? 사랑이 있으면 쓰지 않습니다. 식칼이 있다고 다 찔러 죽이는 게 아닙니다. 그걸로 과일도 깎아 먹고, 요리도 하지요. 칼이 죽이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죽이는 것이지요. 그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이, 영성과 영혼을 구제한다는 것이 기독교 아닙니까. 그러면 기독교인이 늘어날 때 살인 건수가 줄어야 하는데, 되레 늘어납니다. 기독교가 ‘기독교 짓’을 제대로 못했다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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