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자 400만명 시대'가 임박했다. 신용불량자를 지칭하는 `신불자(信不者)'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용어로 자리매김 됐다.
지난 19일 20대 남자가 카드빚 때문에 자식을 키울 자신이 없다며 5세, 6세 된 딸과 아들을 한강에 내던지는 천인공로할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고교 졸업후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1998년부터 경마ㆍ경륜 등에 빠져 3000여만원의 카드 빚을 진 나머지 결국 지난 2000년부터 `신불자'로 낙인찍혀 사회의 낙오자가 되고 말았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활동 인구 2300여만명 가운데 6명중 한 명 꼴로 신불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인터넷상에는 `빚 갚지 않는 비법' `버티면 산다' 등의 `배 째라 식' 동호회 사이트가 수백개에 이를 정도로 사회적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지경이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작년말 263만5000명 수준이던 신용불량자가 지난 10월 말 기준으로 359만6168명으로 무려 36.4% 불어났고, 연말에는 그 수가 380만명에 이를 전망이다. 이같은 추세라면 2004년 2월쯤에는 신용불량자 수가 400만명을 돌파할 게 확실시된다. LG카드 사태 여파로 신용 경색이 심화되면서 개인 파산이 줄을 잇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말 현재 가계 빚이 총 472조6000억원으로 사상 최대이며, 가구당 평균 부채도 3138만원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이는 신용불량자 사태가 특정 가구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다.
신용불량의 위기는 정부, 카드사의 합작품 성격이 짙다. 하지만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돌려 막기의 늪에 빠져버린 카드 이용자들의 책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경기 부양을 위해 `카드장려'를 소리 높여 외치며 저금리정책을 밀어붙인 정부는 신용불량자 양산의 최대 책임자로 지목된다. 이같은 근시안적 정책에 장단을 맞추며 길거리 모집 등을 통해 미성년자와 실업자 등에게 마구잡이로 카드를 발급하면서 회원 수 불리기에 급급했던 카드사들은 정부 각본에 충실했던 주연일 따름이다. `일단 쓰고 보자'며 무절제의 수렁에 빠져버린 소비자들 또한 정부 정책에 휘둘린 조연이 되고 말았다.
특히 감독당국의 `방치'는 사태 악화를 앞당긴 촉매 구실을 했다는 평가다. 금융감독원ㆍ재정경제부 등은 올 들어 경기 침체가 심화되면서 신용카드 대금 연체율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부랴부랴 `건전성 규제'라는 미명아래 카드사와 은행을 옥죄는 정책을 펴기에 이르렀다. 다급해진 금융기관들이 현금 서비스 한도를 대폭 줄이는 극약처방을 내놓게 됐고, 결국 수십만명의 잠재 부실 고객이 졸지에 신불자 대열에 합류해야 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게 됐다.
게다가 정부가 지난 8월 각 금융기관을 상대로 대환대출ㆍ원리금 감면ㆍ만기 연장 등을 통해 채무자들의 신용회복 지원에 나서도록 독려한 것은 대표적 미봉책으로 꼽힌다.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구조적 모순을 모른 채 눈앞의 신불자 수만 줄이려는 졸속 정책은 국민적 모럴 해저드를 조장했고, 이는 결국 LG카드를 유동성 위기로 내모는 부메랑이 돼 신용사회를 덮치게 됐다는 지적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30만원 이상, 3개월 연체'의 덫에 걸리면 누구나 신불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세상인 만큼 이용자들의 `자기 분수 지키기'가 관건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신불자 수가 10대를 제외한 전 연령대에서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은행ㆍ보험ㆍ저축은행 등 모든 금융권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는 점은 카드사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카드론, 카드대금, 카드 관련 특수채권(1년 이상 장기연체) 등 신용카드 관련 개인 신용불량자 수가 매월 10만명 가까이 늘고 있는 실정이어서 대책 마련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미국ㆍ일본ㆍ영국 등은 신용불량자 제도가 아예 없지만 금융기관이나 민간신용정보회사간 정보교류를 통해 불량고객들을 걸러내는 장치를 운용하고 있는 점은 참고할 만 하다. 최근 한나라당이 `신용불량자 고용촉진 특별법' 제정과 `개인자산관리공사' 설립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결과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전문가들은 개인신용평가회사(CB) 설립을 활성화하는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또한 신용불량자들이 빚 갚을 능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일자리를 늘려주는 정책적 뒷받침도 필수 불가결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아울러 분수에 맞는 소비생활을 체질화하도록 가정교육 프로그램을 확산시키는 것도 장기적 대안으로 꼽힌다.
`신용회복'은 이제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새해의 첫 번째 과제인 동시에, 가장 헤쳐나가기 어려운 관문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