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한국의 성씨(姓氏) 이야기 5]
32. 최씨의 유래 - 시조가 분명하게 확인된 본관은 43본 그중 대부분은 6부 촌장이었으며, 소벌도리와 그 24세손 최치원의 후손들 최씨는
최씨(崔氏)는 우리나라 성씨 중 김씨·이씨·박씨에 이어 4번째로 많은 인구가 있는 성씨이다. 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 결과에 따르면 최씨는 총 가구수 67만6773호가 있으며, 인구는 216만9704명으로 나타나 있다.
최씨의 시조는 신라를 건국한 6부족의 하나인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의 촌장이었던 ‘소벌도리(蘇伐都利)’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를 정씨의 시조라고 하고, 진지촌의 지백호를 최씨의 시조로 적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 외에 삼국사기 등 대부분의 정사서에서는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를 최씨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어, 최씨 문중에서는 소벌도리를 최씨의 시조로 삼고 있다.
최씨는 문헌에 387본까지 기록되어 있지만, 시조가 분명하게 확인된 본관은 43본이다. 그중 대부분은 신라 6부 촌장이었으며, 박혁거세의 양부였던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와 그 24세 손인 최치원(崔致遠)의 후손들이다. 즉, 소벌도리의 자손이면서 최치원의 윗대에서 갈라진 본관들과 최치원 아랫대에서 갈라진 후손들인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고구려 계통과 외래(중국) 이주민을 시조로 삼고 있는 본관도 있고, 김씨에서 최씨를 사성 받은 본관도 존재한다. 또한 같은 소벌도리의 후손이면서 최씨를 쓰지 않고, 다른 성씨(진주소씨·晉州蘇氏)를 쓰는 경우도 있다.
최씨의 주요 본관은 경주(慶州)를 비롯하여 전주(全州)·해주(海州)·강릉(江陵)·탐진(耽津)·수성(隋城)·삭녕(朔寧)·화순(和順)·초계(草溪)·월성(月城)·영천(永川)·수원(水原)·강화(江華)·충주(忠州)·낭주(朗州)·동주(東州) 등이 있다. 그중 김씨였다가 사성을 받아 최씨가 된 수성(수원)최씨가 있으며, 중국 계통의 충주최씨가 있다.
본관별 최씨 현황
현재 우리나라의 최씨는 신라 6촌의 하나인 돌산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로 전한다. 하지만, 신라 말까지 세계를 상고 할 수 없어, 대부분의 본관들은 신라 말에서 고려 중엽의 인물을 시조로 삼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은 인구가 있는 경주최씨의 시조는 신라 말의 학자인 최치원이다. 그의 8세손으로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최애(崔?)가 처음으로 경주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최치원과 함께 신라 말 3최의 하나이며 고려시대에 평장사를 지낸 언위(彦僞)를 시조로 하는 계통도 있다.
경주최씨 등의 실질적인 시조로 알려진 최치원 최치원의 후손으로 경주최씨에서 분파, 관향을 달리하는 계통으로는 월성최씨를 비롯하여 강화·흥해·통천·광주(廣州)·진주·청주·원주·계림·고부·태인·영흥·연풍최씨 등이 전한다. 월성최씨는 시조 최치원과의 계대를 헤아리기 어려우나 조선 선조 때 무과에 올라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낸 최진립(崔震立)을 시조로 삼아 경주에서 분적했다.
강화최씨는 고려시대에 상서좌복야를 지냈다는 시조 최익후(崔益厚)가 최치원의 10대손으로 경주에서 분파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역시 최치원의 후예로서 조선조의 최득보(崔得寶)를 시조로 하는 광주최씨는 득보가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뒤 평안북도 안주로 옮겨가 살면서 이전의 거주지였던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밖에 최치원의 15세손 최연(崔淵)이 흥해로, 최윤순(崔允順)이 계림으로 각각 분적했다.
전주최씨에는 본관은 동일하되 시조를 달리하면서 서로간의 소목을 밝힐 수 없는 4개의 계통이 있다. 최균(崔均·고려 인종 때 등과하여 명종 때 예부낭중을 지내고 完山府院君에 추봉됨)을 시조로 하는 사도공파(司徒公派)와 최순작(崔純爵·고려 정종 때 등과하여 문하시중을 지냄)을 시조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 최아(崔阿·고려 충숙왕 때 完山君에 봉해짐)를 시조로 하는 문성공파(文成公派), 그리고 최군옥(崔群玉·고려시대에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내고 完山府院君에 봉해짐)을 시조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가 있다.
대전 뿌리공원의 경주최씨 유래비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전주최씨에서 분파된 동성이본(同姓異本)으로 영천·흥해·순천 등이 있으며 초계·양천 등도 그 뿌리를 전주최씨에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한다. 문헌에 의하면 전주최씨 사도공파의 시조 최균의 후손 중 10세손 최한(崔漢)이 영천으로 분적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천최씨 족보에서는 선대가 진한(辰韓) 사량부(沙梁部) 대인(大人)으로 고려 명종 때 벼슬을 하고 연산군(燃山君·연산은 지금의 영천)에 봉해짐으로써 영천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전주최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흥해최씨는 최균의 10세손인 최호(崔湖)가 검교대장군을 지내고 곡강군(曲江君·곡강은 지금의 흥해)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 세거의 인연을 따라 흥해를 관향으로 삼아 분적했다.
초계최씨의 시조는 고려 충렬왕 때 충익대보조공신(忠翼戴補祚功臣)이 되고 팔계군(八溪君·팔계는 지금의 초계)에 봉해진 용궁(龍宮)으로 전한다. 그는 전주최씨 문열공파의 시조 최순작의 후예이다. 또 광양최씨의 선대는 초계최씨와 같으며, 시조는 최한영(崔漢英)이다.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崔沖)을 배출한 해주최씨의 시조는 최온(崔溫)이다. 해주는 최온의 선대부터의 세거지였으므로 관향이 되었다. 뒷날 청송·부안·아산·용궁최씨가 해주최씨로부터 분파한 것으로 전한다. 부안최씨의 시조로 전하는 최창일(崔昌一)은 고려시대에 공조전서를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부안으로 낙향했다.
동주최씨는 태사공 최준옹(崔俊邕·고려 태조를 도와 三韓功臣이 됨)을 시조로 하고 있다. 최준옹의 증손 최석(崔奭)이 관직에서 물러나 동주에 정착한 것이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 목종 때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해동공자 최충(해주최씨)의 영정
강릉최씨는 본은 같되 시조를 달리하는 3개 계통이 있다. 최필달(崔必達·고려 태조를 도와 삼중대광으로 慶興府院君에 봉해짐)을 시조로 하는 경주계, 최문한(崔文漢·고려 충숙왕의 부마로 뒷날 강릉으로 은거함)을 시조로 하는 강화계, 대경공(大卿公) 최흔봉(崔欣奉)을 시조로 하는 전주계가 있다.
삭녕최씨의 시조는 평장사 최천로(崔天老)의 후손으로 고려 명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최유가(崔兪嘉)로 전한다. 다른 문헌에서는 최천로와 최유가를 원조(遠祖)로 하나 그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친어모군낭장(新禦侮軍郎將)을 지낸 최선보(崔善甫)와 함경전부사(含慶殿副使)를 지낸 최연(崔?)을 각각 1세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는 2개의 계통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이들이 선대의 세거지였던 삭녕을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화순최씨의 시조는 서북면도감판관을 지낸 최언(崔堰)으로 전하나, 다른 문헌에는 그의 선대로서 고려시대에 평장사를 지내고 오산군(烏山君·오산은 지금의 화순)에 봉해진 최세기(崔世基)를 시조로 전하기도 한다. 또 다른 계통으로는 최윤의(崔允儀)를 기세조(起世祖)로 하는 계통도 있다.
낭주(朗州·지금의 영암)를 관향으로 하는 낭주최씨의 시조는 신라말의 최흔(崔昕)이라고 한다. 그는 영암 사람으로 오랫동안 그곳에서 세거해온 것으로 전하는데 후손들이 선대의 세거지를 관향으로 삼아 계대를 이어온 듯하다. 최흔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말엽의 인물 최희소(崔希沼)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수성최씨는 신라 고허촌장 소벌도리의 후손이 아니라 최씨를 사성 받은 영규(永奎)를 시조로 한다. 영규는 본래 김씨로 신라 경순왕의 16대손인데 고려 원종 때 수주호장(隋州戶長)으로 있으면서 효제(孝悌)로써 백성을 잘 다스려 충렬왕이 그를 수성백(隋城伯·수성은 지금의 수원)으로 봉하고 최씨 성을 하사했다. 이에 따라 후손들이 본관을 수성으로 삼았다.
충주최씨의 시조는 중국 청하(淸河) 사람으로 당 소종(昭宗)의 명을 받아 신라 말 원종과 애노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왔다가 그대로 예성(蘂城·지금의 충주)에 눌러 살았다는 최승(崔陞)으로 전한다. 그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충선왕 때 인물로 중원백(中原伯)에 봉해진 최공의(崔公義)와 최고(崔暠)를 1세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그 밖에도 간성·양주·개성·나주·용주·직산·황주·안동·영암·완산·정주·죽산·진산·우봉·상원·하양·하음·한남·풍천 등을 본관으로 하는 최씨가 있다.
최씨의 기원과 유래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최씨는 신라 6부족의 하나인 돌산 고허촌의 촌장이었던 소벌도리를 시조로 하고 있다. 신라 6부족은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 취산 진지촌(?山珍支村),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 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다.
하지만, 신라에서는 3대 유리이사금 때 6부족에게 사성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소벌도리의 성씨가 최씨는 아니었다. 즉, 돌산 고허촌이 최씨성을 하사받고, 그 시조로 소벌도리를 모시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부에 성씨를 하사한 왕은 3대 임금인 유리 이사금이다. 유리왕은 6부의 지명을 개칭하여, 알천 양산촌을 급량부(及梁部), 돌산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 무산 대수촌을 잠량부, 취산 진지촌을 본피부(本皮部), 금산 가리촌을 한저부(漢저部), 명활 산고야촌을 습비부(習比部)로 하면서 6부의 촌장에게 성을 내렸다.
양산촌의 알평에게는 이씨, 고허촌의 소벌도리에게는 최씨, 대수촌의 구례마에게는 손(孫)씨, 진지촌의 지백호에게는 정(鄭)씨, 가리촌의 기타에게는 배(裵)씨, 명활촌의 호진에게는 설(薛)씨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소벌도리는 정씨로, 지백호에게는 최씨를 하사했다고 다르게 적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른 계통의 최씨에 대한 이야기도 전한다. 최치원의 금석문으로 알려진 쌍계사 진감선사비에 ‘진감선사’의 속명이 최씨임을 밝히며, 고향은 전주 근처의 금마로 적고 있다. 또 진감선사의 선조에 대해선 수나라 때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포로가 되어 고구려에 눌러 살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금마로 내려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신라 외에 고구려 계통에서도 최씨가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최씨 기록을 보면, ‘낙랑의 최리(崔理)’가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왕자 호동을 사모해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의 아버지 이름이 최리이다. 그래서 일부 역사가들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과 구분하여 대동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최씨 낙랑’을 거론하기도 한다.
소벌도리의 후손으로 알려진 진주소씨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蘇城)의 하백(河伯)에 봉해지고 기원전 2266년 소성이 단군조선에 영속되면서 기씨를 소씨로 고쳤다. 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따라서 최씨의 기원은 산둥반도 근처에 살다가 고조선에 소속된 제후라는 설과 신라 박혁거세의 양부인 소벌도리라는 설, 낙랑공주의 아버지 이름이 최리였던 점을 볼 때 낙랑 태수의 성씨라는 설, 또는 고구려 계통에서 내려온 최씨(최치원의 진감선사비문) 등의 다양한 계통이 존재하는 셈이다.
하지만, 13대 미추왕과 17대 내물왕, 23대 법흥왕을 전후하여 신라 내부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신라는 이 시기에 고대국가의 기틀과 신분제적 질서가 확립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26대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김씨라는 성이 쓰인 것을 감안할 때, 최씨라는 성이 탄생된 것은 3대 유리왕 때가 아니라, 그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 33. 경주 최씨(崔氏) 신분제에 가로막힌 비운의 천재 최치원- 고려 건국의 이념을 쓰다
경주최씨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씨는 모두 43본에 216만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그중 김씨였다가 최씨 성을 하사받은 수성최씨나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파악되는 충주최씨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은 신라 건국 시기에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왕위에 올린 소벌도리를 원조로 하고 있다.
그중 소벌도리의 24대 손인 최치원의 윗대에서 분적된 본관과 그의 아랫대에서 분적된 본관으로 크게 나뉜다. ‘경주최씨상계세보’의 기록에 따르면, 최치원의 윗대(선대)에서 분파된 본관으로 개성 동주(철원) 전주(군옥파)가 있고, 최치원의 아랫대(후대)에서 분적된 본관은 함양 청주 영흥 충주 용강 수원 부안(扶安)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해주 진주 탐진 전주(순작, 균)가 분파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 진주소씨도 소벌도리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중 최씨의 대종가를 이루는 경주최씨(慶州崔氏)는 문창후 최치원의 후대에서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를 비롯하여 광정공파(匡靖公派)와 계림군파·충렬공파(忠烈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사성공파(司成公派)·문밀공파(文密公派)·문정공파(文正公派)·화숙공파(和淑公派) 등 크게 26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중 관가정공파·광정공파·정랑공파·사성공파·화숙공파·충렬공파 등 6대파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경주최씨는 30만4722가구 총 97만68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주최씨의 시조 최치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최씨의 원조인 소벌도리는 사로국(斯盧國) 6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의 촌장이다. 그는 우물가(나정)에서 박혁거세를 발견하여 거두어 기른 후에 알천양산촌의 촌장 알평 등과 협의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 공으로 유리왕(32년)에게서 최씨(崔氏)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이때 돌산고허촌이 사량부로 개칭되었다. 또, 516년에는 사량부 대인(大人)에서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諡號)되었으며, 문무왕 대(658년)에는 소벌도리를 문열왕(文烈王)에 추봉했다고 한다. 지금도 경주 양산재에서는 매년 가을 6부 대부족장들의 개국원훈에 감은하는 향사인 신라대제가 국가 문화제 행사로 봉행 되고 있다.
최씨의 대종가를 이루는 경주최씨는 소벌도리의 24대손인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한문학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함께 유학한 최승우 등과 함께 신라 하대를 빛낸 인물이다. 그는 857년(신라 헌안왕1) 신라의 사량부(沙粱部)에서 출생했으며, 호는 고운이다.
어려서부터 총명·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13세 때 혼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가 되는 해에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 후 당나라에서 선주 율수현위를 시작으로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879년(헌강왕5)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이름을 떨쳤다.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혼비백산하여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그는 28세가 되던 해 당나라 희종의 조서를 들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국정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태산(太山·지금의 태인)·함양(咸陽)·부성(富城·지금의 서산) 등지의 태수로 나갔다.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10여조를 상소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려 했으나 6두품이라는 골품제도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산천을 떠돌았다.
그 후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에 은거하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신라의 천재였으나, 6두품 출신으로 아찬 이상의 벼슬을 할 수 없었다. 시문학에 뛰어나 토황소격문뿐 아니라 ‘계원필경’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산천을 떠돌면서 쌍계사 진감선사비문 등 국보급의 금석문을 남겼다.
사상적으로는 유교·불교·선교 통합을 시도했고, 그의 사상은 증손인 최승로를 통해 고려 건국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와 종형제 간인 최승우도 최치원과 함께 유학한 뒤 890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최언위 역시 885년에 급제한 뒤 집사성시랑을 지냈다.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태자사부·문한·평장사를 역임했으며, 삼한벽상공신에 올랐다. 이들 3명을 가리켜 신라 3최라고 일컫는다. 이들 외에도 최씨는 신라인으로는 당나라의 과거에 가장 많은 급제자를 낸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해운대 최치원 동상 앞에서 제향을 올리는 경주이씨 문중. 해운대는 최치원이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 최치원 동상이 있다. 매년 경주최씨 문중에서는 이 동상 앞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고려시대 맹위 떨친 경주최씨
이렇게 신라 하대에 많은 인재를 배출한 최씨가문은 고려에 들어와서 맹위를 떨쳤다. 선·후 안동김씨가 맹위를 떨친 조선을 ‘안동김씨의 나라’라고 별칭하는 것처럼, 고려시대를 ‘최씨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경주최씨나 경주최씨로부터 분적한 최씨가문에서 수많은 인물이 나왔다.
고운 최치원의 증손인 최승로(崔承老·최치원의 손자 최은함의 아들)는 재능이 특출하여 왕건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는 12살에 태조 앞에서 논어를 암송하였으며, 태조는 그를 원봉성(元鳳省)의 학사로 보냈다.
그 후 최승로는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惠宗)을 비롯하여 정종(定宗)·광종(光宗)·경종(景宗)을 거쳐 6대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모셨다. 그 과정에서 새로 창업한 고려의 각종 문물제도를 마련하고, 군제를 개편하는 내용의 ‘시무28조’를 상소하여 시행케 했다.
이를 통해 고려의 국가 기틀을 정비하였다. 이는 조선의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국가의 기틀을 정비한 정도전의 역할에 비견될 만한 일이다. 이렇듯 경주최씨는 고려시대 들어와서 가문이 크게 흥하면서 각 파가 형성되었는데, 각 분파별로 가문을 빛낸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최치원이 지은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 적조탑비(국보 315호), 이 외에도 최치원은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 등 수많은 국보급 금석문을 남겼다 먼저 화숙공파에서는 최치원의 9세손으로 충숙왕 때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지냈던 화숙공 최현우(崔玄祐)는 명망이 두터웠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의 자손으로 6세손인 최형손(崔亨孫)은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내고 적개공신(摘慨功臣)에 올라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최한홍(崔漢洪)은 병마절도사를 지낸 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올랐다. 그의 종질인 최호(崔湖)는 무과에 장원하고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올라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했고, 정유재란 때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청난2등공신(淸難二等功臣)으로 계성군에 추봉되었다.
최현우의 8세손인 최숙생(崔淑生)은 성종 때 장원급제를 하고, 벼슬이 대사간과 대사헌을 거쳐 우찬성에 이르렀으며, 1594년(선조27) 무과에 급제했던 최진립(崔震立)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최계종(崔繼宗)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인솔하여 서생포(西生浦)에서 적을 대파했으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순절하였다.
관가정파(觀稼亭派)의 파조는 최청(崔淸)이다. 그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권신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신주감무관(信州監務官)으로 좌천되었다.
1374년(공민왕23)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제수받았으며, 우왕(禑王)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어 명나라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조선 개국 이후 은거하자 태조 이성계가 좌찬성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이에 태조는 그의 절의를 높이 기려 송산(松山)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그가 살던 가옥에 관가정(觀稼亭)이란 제호(題號)를 내렸기 때문에 관가정파가 생겨났다.
계림군파의 파조 최탁(崔倬)은 문하시중이었던 최제안(崔齊顔)의 증손이다. 그는 고려말에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충열공파조 최광위(崔光位)는 최제안의 손자로 고려 명종(明宗) 때 왜적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의 원래 이름(초명 初名)은 최광훈(崔光勳)이었으나, 왕이 그의 공을 높이 사 광위(光位)로 지어줬다. 벽상삼한 삼중대광으로 내사령에 이르러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정랑공파조 최호(崔灝)는 고려 정종 때 왕명을 받아 ‘전후한서(前後漢書)’와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을 저술하였다. 사성공파 최예(崔汭)는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성균관의 사성(司成)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밀직공 최선지의 5세손이며, 문숙공 최선의 아우인 문밀공 최제(崔堤)는 충선왕(忠宣王) 때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문정공 최해(崔瀣)는 원나라에서 제과에 급제한 후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을 지냈다. 그 후 귀국하여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동인명현문(東人名賢文)’과 ‘졸고천백(拙藁千百)’을 저술하여 문호로 이름을 떨쳤다.
그 외 경주최씨에서 분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우봉최씨의 최충헌과 최우 등은 4대에 걸쳐 무인정권을 장악함으로써 60여 년간 고려를 통치하며 30년에 걸쳐 대몽항쟁을 이끌기도 했다.
조선후기 경주최씨의 부활
이렇게 고려시대에 명성을 떨치던 경주최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급격하게 쇠락했다. 경주최씨 가문에서 조선시대 전체 과거급제자는 모두 669명이지만, 문과급제자는 42명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명문가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상신과 대제학 등의 벼슬에는 1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는 고려시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던 거대 명문집안의 위상에 비해 많이 쇠락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와 현대에 들어와 경주최씨 가문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천도교인 동학을 일으켰던 수운 최제우(崔濟愚)가 있다. 그는 경주 귀미산(龜尾山) 용담(龍潭)에서 득도하여 동학을 창설했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기반으로 인본주의를 실천하였다. 그의 제자 해월 최시형(崔時亨)은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었다.
한말(韓末)에는 이항로의 제자로 위정척사를 주장한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유명하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정책을 탄핵하였으며, 항일구국 항쟁의 선봉에 나섰던 유학자였다.
그는 1855년(철종6)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 때 호조 및 공조판서와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지내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팔도사민(八道士民)에게 포고문을 보내어 왜적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궐기와 투쟁을 촉구했다. 일제가 그를 대마도에 귀양 보내고 단발을 강요하자, 단식으로 순절하였다.
그 외 한글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외솔 최현배(崔鉉培)가 있으며,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가 된 경주 최부잣집도 유명하다. 경주 최부잣집은 12대 만석꾼, 10대 진사의 벼슬을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현대 인물 중에는 최문환 전 서울대총장이 있으며, 최용덕(전 체신부장관)·최인규(전 내무부장관)·최형섭(전 과기처장관)이 있으며, 재계에서는 최종환(삼환기업회장)·최준문(동아그룹 명예회장) 등이, 정치권에서는 최형우(5선 국회의원·전 내무부장관)가 있다. 그 외 최씨는 방송연예계에서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그 중 최민수·최수종 등이 경주최씨로 알려져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34. 전주최씨 -인조반정 공신 최명길, 영의정 6번 한 최석정 -조선시대 명문가 명성
전주최씨(全州崔氏)에는 4개 계통이 있는데, 최순작(崔純爵)을 시조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 최균(崔均)을 시조로 하는 사도공파(司徒公派), 최아(崔阿)를 시조로 하는 문성공파(文成公派),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가 그것이다.
이들의 상계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적인 고증이 없어 통일된 시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일부에서는 경주최씨(慶州崔氏) 시조 최치원(崔致遠)의 상계에서 갈라진 계통(최군옥을 시조로 하는 문충공파)과 최치원 이후에서 갈라진 계통(최순작과 최균을 시조로하는 문열공파와 사도공파)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또다른 계통(최아를 시조로 하는 문성공파)에서는 중국 전래설이 거론되는 형편이다. 따라서 전주최씨는 하나의 본관을 사용하고는 있으나 같은 시조의 자손으로 여기기엔 무리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주최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3명, 대제학 2명, 청백리 3명, 문과급제자 109명을 배출하였다. 특히 최균의 자손인 사도공파의 인물들이 많다.
전주최씨를 명문가 반열로 일으킨 사람은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된 최유경(崔有慶)을 들 수 있다. 상신·대제학·청백리가 모두 그의 자손에서 나왔다. 대표적 인물은 최명길(崔鳴吉)이 있다. 그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1등공신으로 대제학과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그의 손자 최석정(崔錫鼎·숙종 때 영의정), 최석항(崔錫恒·경종 때 좌의정) 형제도 정승을 지냈다.
특히 최석정은 당시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6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또 최군옥의 후손인 문충공파에서는 고려 말기에 ‘두문동(杜門洞 72현’에 들어 있는 최양(崔瀁)이 있다.
그 외에도 고려 말기에 좌참찬을 지낸 최부(崔府), 태종 때의 예문관직제학을 지낸 최덕지(崔德之), 선조 때의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최철견(崔鐵堅)과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최기필(崔琦弼)·최균(崔均)·최경행(崔敬行) 등도 있다.
전주최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 총 12만2147가구에 39만2548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전체 최씨의 18%를 차지하는 숫자다.
또한 전주최씨에서 분적된 본관들도 다수 존재한다. 최흔봉(崔欣奉)을 시조로 하는 강릉최씨, 최호를 시조로 하는 곡강최씨, 최원을 시조로 하는 양천최씨와 양천최씨에서 갈라진 금천최씨, 최한을 시조로 하는 영천최씨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완산최씨, 진산최씨, 초계최씨, 황주최씨, 흥해최씨 등도 전주최씨에서 분적한 본관들이라고 알려진다.
전주최씨 4계통의 연혁과 인물
문열공파
전주최씨 문열공파의 시조인 최순작은 조선 초기(태종)에 청백리로 녹선된 평도공 최유경의 7세조이다. 그는 고려 정종 때 벼슬에 나가고 고려 문종 때 중서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그는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병부상서 겸 신호위 상장군이 되었으며, 완주개국백(完州開國伯)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이로써 그의 후손들이 전주를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행적을 기록한 문열공 사적에는 “최순작은 완산 사람으로 신라시대 3최의 하나이면서 고려 초기에 평장사를 지낸 완산백 최언위의 후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경주최씨였던 최언위의 후손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최언위로부터 최순작까지의 계보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의 아들 최숭은 이부시랑에, 최공은 개성소윤에 올랐다.
문열공파는 다시 안렴사공파, 중랑장공파, 별장공파, 좌윤공파, 판윤공파, 양도공파, 경절공파, 검추공파, 감무공파 등으로 갈라진다. 그 후손으로는 고려 의종과 문종 때 공부상서와 수문전태학 겸 대장군을 역임한 최남부(崔南敷), 청백리 최유경과 그의 조부인 선부전서를 지낸 최득평이며, 아버지는 감찰대부를 지낸 문정공 최재(崔宰)가 있다.
특히 최유경의 집안은 고려말과 조선초기에 크게 흥해 그의 아들들이 모두 큰 벼슬을 지냈다. 한성부판윤을 지낸 최사위(崔士威), 청백리에 녹선되고 판돈령부사를 지낸 최사의(崔士儀), 사헌부 지평을 지낸 최사규, 우찬성을 지낸 최사강(崔士康), 첨중추원사를 지낸 최사용(崔士庸), 그리고 막내인 최사흥이 있다.
넷째인 최사강은 3남4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좌참찬을 지낸 최승녕이고, 차남은 군수를 지낸 최승정, 그리고 막내는 첨정을 지낸 최승종이다. 그의 딸들도 태종의 서자인 성녕군 이인과 혼인하고,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 이유와 혼인하였다. 또 장남 최승녕의 딸은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과 혼인하였고, 증손녀가 예종의 후궁이었던 공빈최씨이다.
그리고 최유경·최사강의 직계 후손들은 인조반정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청나라와 화해할 것을 주장하던 주화론의 대표주자인 문충공 최명길(영의정)이 최사강의 7대손이다. 또한 최명길의 손자로는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과 좌의정을 지낸 최석항도 있다.
사도공파
전주최씨 사도공파는 최균을 시조로 하고 있다. 사도공 최균은 고려 중기의 충신으로 완산군에 봉해졌다. 그는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의종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제수되었으며, 명종 때에는 예부낭중 겸 태자문학을 역임했다. 하지만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다가 패하여 살해되었다. 그래서 훗날 예부상서에 이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최균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경주최씨의 시조인 최치원의 지손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최치원의 몇 대손인지 그의 상계가 어떤지에 대해선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전주최씨 가운데에서 최균의 후손인 사도공파가 가장 숫자가 많고 인물도 많이 배출했다. 시조 최균의 아들이 최보순(崔甫淳)이다. 그는 참지정사와 형부상서를 지내고 수태사 판이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최보연(崔甫延)은 형부상서를 지냈다.
최균의 손자인 최비일(崔毗一)은 대제학과 첨의찬성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최성지(崔誠之)는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다. 대사헌을 거쳐 첨의찬성사에 이르고 광양군에 봉해졌다. 그는 충선왕을 도와 개혁정치를 주도했는데, 조정의 기강 확립·조세 공평·농잠업 장려·동성결혼 금지와 귀족횡포를 엄단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그가 원나라에서 배워온 역학(易學)과 수학(數學)은 고려시대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조선시대에 들어와 최문도(崔文度)는 전법판서와 첨의참리를 지냈으며, 최용의 아들 최부(崔府)는 세종 때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명나라에 다녀온 후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리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최현(崔晛)은 병조참지와 대사성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대사헌에 증직된 최명룡(崔命龍)은 역학과 음양은 물론 불교경전에도 정통해서 전주의 인산서원과 부안의 옹정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성공파
전주최씨 문성공파의 시조는 문성공 최아이다. 그는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하나 자세한 행적에 대해선 전해지고 있지 않다. 그의 아들들이 크게 이름을 떨쳤다.
큰아들 최용생(崔龍生)은 경상도 안렴사(按廉使)를 지내 안렴사공파의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아들 최용각(崔龍角)은 검교대호군을 지내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의 시조가 되었고, 셋째아들 최용갑(崔龍甲)은 원나라의 과거에 합격하여 판사공파(判事公)의 시조가 되었다. 또 막내인 최용봉은 중랑장을 지냈다.
최아를 시조로 한 것은 조선후기 감찰공 최세영(監察公 崔世榮)이 전주최씨 문성공계 족보를 발간하면서 고증을 통해 시조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는 “최씨 각 계파(系派)의 역사를 전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성공의 선조는 최균이라고 하기도 하고 최순작이라고 하기도 하며…”라고 적어놓았다. 또 문성공 제단 비문에는 “전주최씨는 문성공을 시조로 하니 공의 선조는 전해오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문성공파에서는 문성공의 막내아들인 중랑장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그중 공민왕 때 공조참의를 역임했던 월당공 최담(月塘公 崔?)이 유명하다. 그는 세상이 혼탁함을 비관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냈으나 아들 4형제가 모두 큰 벼슬을 하였다.
첫째인 최광지(崔匡之)는 조선 태종 때 집현전 제학을 역임했고, 그의 아우 최직지(崔直之)는 나주판관과 순창도사를, 셋째 최득지(崔得之)는 사헌부 감찰을, 막내 최덕지(崔德之)는 남원부사를 역임했다.
그 외에도 ‘동국통감’ 편찬에 관여했던 최명손, 세조 때 호조참판과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최한경, 충청감사와 형조참판을 지낸 최응룡, 청백리에 녹선된 최여림 등이 유명하다. 또 최운철의 아들 최균과 최강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최기필은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여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또 영조 때 최광벽은 돈령부 도정과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문충공파
전주최씨 문충공파의 시조는 최군옥이다. 문충공 최군옥은 동주최씨(철원최씨)의 시조 최준옹의 후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고로 동주최씨는 경주최씨의 시조 최치원의 윗대에서 갈라진 본관이다. 최군옥은 고려 선종 때 삼중대광에 올라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르고 보국승록대부로 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전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맏아들 최송년(崔松年)은 의종 때 밀직사사를 역임했고, 둘째 최구년(崔龜年)은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문하찬성을 역임한 후 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문숙공 최유의 아들인 최선능(崔善能)은 삼중대광 문하찬성사에 올라 상산부원군에 봉작되었고, 그의 둘째아들인 최칠석(崔七夕)은 정남대장군 겸 원수가 되어 칠월칠석에 대마도정벌을 함으로써 칠석(七夕)이라는 이름을 사명받았다. 조선개국 후에도 경기우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했다.
문충공파에서는 정몽주의 생질로 우왕 때 이부상서와 대제학을 역임했던 만육당 최양(崔瀁)이 특히 유명하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전주 봉강리에 은거하며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태조 이성계는 물론 태종이 친구의 예로 대하며 전답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고, 끝까지 절개를 지켜 ‘최고집’이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시호는 충익공이며 두문 72현록에 기재되었다.
그 후손으로는 인조 때 이괄의 난을 평정한 최응일이 진무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그의 아우 최응수는 결성군에 봉해진 후 선천부사를 역임했다. 문충공계는 최여징의 부사공파, 최진강의 목사공파, 최여녕의 군수공파, 최여정의 도사공파, 최여관의 현감공파, 최여달의 판서공파, 최만득의 교위공파 등이 있다.
전주최씨의 근현대 인물
전주최씨에서 현대의 정관계 인물 중에는 최재유 전 보사부장관, 최광수 전 외무부장관과 최동규 전 산자부장관이 있으며, 전·현직 국회의원으로 최순주 전 국회부의장, 최병국 최갑환 최석림 최경식 최치환 등이 있다. 또 재계와 학계에서는 최주호(우성산업회장), 최정호(연세대 교수) 등이 있고, 연예계에서는 최진실과 최재성이 전주최씨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35. 해주최씨 - 해동공자 최충의 아버지 최온 시조…고려시대 최고의 문인 명가
해주최씨(海州崔氏)는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알려진 최충(崔沖)의 아버지 최온(崔溫)을 시조로 한다. 최온은 해주에서 오랫동안 세거한 호족출신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최온의 선대에 대한 기록이 없고, 최온의 초기 벼슬이 호장이었던 것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지방 호족으로 목민관을 대신하는 경우에 호장이라는 직책을 주었는데, 최온의 첫 번째 벼슬이 호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려 제4대 광종(光宗) 때 태어나 현종(顯宗)과 덕종(德宗)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온은 해주(海州)에서 목민관(牧民官)이 되고, 이후에는 판리부사(判吏部事)를 역임했다.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삼고 수양산 아래서 세거(世居)하였기 때문에 해주최씨가 되었다.
해주최씨는 고려시대에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였고,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45명을 냈다. 해주최씨의 대표적 인물은 동방 유학의 비조(鼻祖)로 추앙받고 있는 최충(崔沖)이다. 그는 문하시중을 역임한 후 벼슬에서 물러나와 최초의 사학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었는데, 그곳에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이로 인해 최충은 ‘해동공자’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아들인 최유선(崔惟善), 최유길(崔惟吉) 형제도 뛰어난 인물로 칭송받고 있다. 또한 5대손 최윤의(崔允儀)는 예학(禮學)에 밝아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을 편찬하였다고 하나, 전해지진 않고 있다.
이렇듯 해주최씨는 학자나 문인들을 배출한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문인가문 중의 하나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인물로는 세종 때의 학자요 청백리였던 최만리(崔萬理)가 있으며, 그밖에 시와 문장에 뛰어났던 최경창(崔慶昌),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최황(崔滉) 등이 있고, 영조 때 영의정을 역임했던 최규서(崔奎瑞)가 있다. 또한 3·1운동을 일으켰던 33인의 한 사람이었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최린(崔麟)도 해주최씨 문중이다.
해주최씨는 주로 황해도에서 세거했으나, 이후에는 27개 파가 전국 각 지역에 퍼져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7개 지파에는 사정공파(司正公派) 교리공파(校理公派)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문정공파(文貞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대녕군파(大寧君派) 서운부정공파(書雲副正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현감공각파(縣監公?派) 좌랑공파(佐郞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전한공파(典翰公派) 판사복시공파(判司僕寺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사평공파(司評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해릉군파(海陵君派) 복야공파(僕射公派) 등이 있다.
해주최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 총 5만6592가구에 18만1840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전체 최씨의 8.4%를 차지하는 것이다. 물론 북한 지방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만큼 북한에도 많은 인구가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
해동공자 최충과 문인(文人) 명문 해주최씨
해동공자 문헌공(文憲公) 최충의 후예를 내세우는 해주최씨는 총 인구 18만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는 본관성씨 인구 순위에서 43위에 위치하는 것이며, 최씨 가운데서도 경주최씨(慶州崔氏)·전주최씨(全州崔氏)에 이어 세 번째이다.
해주최씨의 시조는 최온이며, 그의 아들이 고려의 명재상이며, 석학이었던 해동공자 최충이다. 최충 이후 해주최씨 가문은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학문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구재학당이라는 사학을 세워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해동공자로 추앙받고 있는 문헌공 최충의 영정. 해주최씨에서는 시조 최온보다도 그의 아들인 최충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최충은 고려 성종 5년에 황해도 대령군(大寧郡·지금의 海州)에서 향리(호장)였던 최온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상황에서 보잘것없는 향리 집안 출신인 최충이 벼슬을 하게 된 것은 광종 때 시행된 과거제도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22세에 장원급제를 하고 좌습유(左拾遺)를 시발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역임했으며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등을 거쳐 62세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고, 9년 후인 70세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 구재학당을 세우고 83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인재를 양성했다. 그 후 구재학당을 본떠 많은 사람이 사학을 세우게 되었고, 고려시대 유학발전에 기반이 되었다.
그는 슬하에 최유선과 최유길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재상에 올라 해주최씨를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최유선은 형부상서(刑部上書)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문종묘정에 배향되고 문화(文和)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최유길은 호부상서(戶部上書)를 거쳐 수사공섭상서령(守司空攝尙書令)에 올랐다.
최충이 두 아들에게 내린 유훈으로 ‘계이자시(戒二子詩)’가 전해지는데, 이것이 해주최씨의 정신적 규범이 되고 있다고 한다.
“…(상략) 청렴하고 검소함을 몸에 새기고 문장으로 한 몸을 수놓아라…(중략) 문장은 비단이요 덕행은 구슬이라. 오늘 이르는 말을 뒷날 잊지 않으면, 나라의 기둥이 되어 길이 흥창하리라.” 이렇듯 해주최씨는 ‘문장’과 ‘덕행’을 중시하는 가문이다. 고려사(高麗史)에도 ‘최충(崔沖)의 자손에 문행(文行)으로 재상에 오른 자가 수십 인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사 명신전에 수록된 문헌공 최충 열전
최충의 손자인 최사추(崔思諏)는 이부상서(吏部尙書)·추밀원사(樞密院使)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숙종 8년에 고문개(高文盖)의 반란음모를 적발, 처리한 공으로 보정공신(輔正功臣)이 되고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의 형 최사량(崔思諒)도 서경유수(西京留守)와 좌복야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를 역임했다.
의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윤의(崔允儀)는 학문에도 뛰어나 ‘상정고금예문(祥定古今禮文)’을 저술했다. 이 책의 간행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최충(崔沖) 이후 무신란이 일어나기까지 100여년이 해주최씨 최전성기였다.
하지만, 무인시대가 도래하자 문장을 중시여기는 해주최씨 집안에도 어려움이 닥쳤다. 정중부(鄭仲夫)-경대승(慶大升)-이의민(李義旼)-최충헌(崔忠獻)으로 이어지는 20여 년간 무인정변시대는 문인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세월이었다. 최충헌에 이어 최우(崔瑀)시대에 와서야 무인들의 전횡을 피해 중앙을 등진 문인, 학자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이규보(李奎報) 이인로(李仁老) 등이 바로 그들인데, 이때 해주최씨 가문에서도 최자(崔滋)가 초빙되었다. 그는 충청, 전라안찰사(按察使)를 거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한림학사(翰林學士)·승지(承旨)를 역임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른다. 그는 ‘유가집(有家集) 10권’ ‘보한집(補閑集)’ 등 저술을 남겼고, 그의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 문인집안인 해주최씨에서 무인도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최춘명(崔椿命)이다. 그는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평안도의 자주부사(慈州府使)로 몽골장수 살리타이(撒禮塔)에 맞선다. 인근의 모든 성이 다 함락되고 끝내 고려는 몽골과 강화했으나, 그는 끝까지 성을 지켰다.
그로 인해 조정의 명령에 불복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오히려 살리타이가 나서서 ‘몽골에는 거역했지만, 고려에는 충신’이라고 하며 구명을 해서 살아났다고 한다. 그 후 1등 공신에 오르고 벼슬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다.
조선조 해주최씨 연혁과 인물
조선조에서 해주최씨는 4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하지만, 고려 중기를 풍미했던 명문가 해주최씨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또 조선조 해주최씨의 인물로는 최만리가 있다. 그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완고한 유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세종이 믿고 의지할 정도로 청렴하고 강직한 청백리(淸白吏)로 평가받고 있다.
최만리 외에도 조선 중기 해주최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시인이자 풍류아였던 고죽(孤竹) 최경창이 있다. 그는 기생 홍랑과의 일화로 유명한데, 홍랑이 그에게 선사했다는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라는 시조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그는 선조 때 종성부사(鍾城府史)를 지냈는데, 시인이면서도 글씨를 잘 쓰고 피리를 잘 불며 활쏘기에도 명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고죽집(孤竹集)’으로 엮어져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숙종 때에는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했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충의공 최경회의 묘와 사당. 촉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는 단순한 기생이 아니라, 최경회의 둘째 부인이다
또 조선조의 해주최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국한 최경회(崔慶會)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영해군수(寧海郡守) 등을 지내다 부모의 상을 당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능주(綾州·전남 화순)에 돌아가 있던 중, 전쟁이 터지자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錦山)·성주(星州) 등에서 왜군을 무찔러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됐고,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했다. 후에 좌찬성(左贊成)이 추증(追增)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촉성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論介)가 그의 둘째 부인(후실)이다.
최만리의 현손인 최황은 함경도 암행어사로 실적을 올렸으며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좌찬성을 지냈다. 그의 아들 최유원(崔有源)은 광해군 때 대사헌으로 인목대비 폐모를 극력 반대했다.
영조 때 영의정 최규서(崔奎瑞)는 최경창의 후손이다. 그는 대사간에 있을 때 장희빈을 왕비로 맞으려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대사헌·대제학과 이조판서를 거치고,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모두 역임했다. 그는 소론(少論)의 영수였다.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영조로부터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친필을 하사받았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고 영조묘정에 배향됐다. 문집으로 ‘간재집’이 전한다.
최운서(崔雲瑞)는 현종 때 문과·무과에 모두 급제,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그의 후손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명문의 전통을 이었다.
연기자 최불암 해주최씨의 근현대 인물
해주최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3·1운동 33인 중 한 사람인 최린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함흥에서 출생하였으며, 메이지법과대학에 유학할 때 조선인유학생회를 결성하여 회장이 되었다. 이후 귀국하여 동학에 귀의하고, 보성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신민회에서도 활동하였다.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1933년 이후에는 대동방주의를 부르짖으며 친일로 변절하여 중추원 참의가 되었으며, 매일신보사장을 역임하였다. 광복이 되고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58년에 사망하였다.
현대인물로는 법조계와 정관계에 최명헌(전 노동부장관, 전 국회의원)·최윤모(대법관)가 있고, 학계에서는 최동(연세대 학장)·최애경(홍익대재단 이사장) 등이 있으며, 재계에서는 최수일(전 인천제철 사장), 최용주(삼양물산 회장)가 있고, 연예계에서는 탤런트 최불암씨가 있다.
36. 강릉최씨 -본관 같으나 시조 다른 3계통 있어… 강릉 등지서 문벌 형성한 명문가 강릉최씨는
강릉최씨(江陵崔氏)에는 본관을 같이하면서도 시조를 달리하는 3계통이 있다. 경주최씨 계통에서 갈라져 나온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고, 전주최씨 계통에서 갈라져 나온 대경공(大卿公) 최흔봉(崔欣奉)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또한 상계 계통은 알 수 없으나, 고려 충숙왕의 부마로 화성도위(華城都尉)에 봉해지고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른 충재(忠齋) 최문한(崔文漢)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그중 경주최씨 계통은 고려시대의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이었던 최필달을 시조로 하고 있다. 경주최씨 상계보에 따르면 그는 경주최씨의 시조 최치원의 후손인 최승로(崔承老)의 증손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치운(崔致雲)과 최수성(崔壽城)을 들 수 있다.
최치운은 시조 필달의 16대손으로 세종 때 명신이었으며, 형옥(刑獄)에 밝아 ‘무원록(無寃錄)’을 주석하였다. 최수성은 최치운의 증손으로 성리학의 대가였으며, 시문·서화·음률·수리 등 다방면에 뛰어났다.
경주계 강릉최씨는 낭장공파 양근파 비인공파 용연동파 행정파 안동파 수헌공파 문정공파 해창공파 춘천파 황주파 고성파 정선파 생원공파 신리파 경성파 태안파 제학공파 충주파 장단파 냉정파 의주파 덕원파 능주파 사간공파 등이 있다.
그 외 고려 충숙왕의 부마인 최문한을 시조로 하는 강화계(江華系)가 있다. 최문한은 삼중대광 벼슬을 지내다 말기에 강릉으로 낙향했는데, 그 자손들이 강릉과 충북 충주에 문호(門戶)를 열고, 현재는 삼척·양양·평창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최문한계에는 부사공파 통정공파 참봉공파 훈도공파 참의공파 충순위공파 진사공파(형) 판서공파 교수공파 부정공파 진사공파(호) 참판공파 등이 있다.
또 대경 최흔봉을 시조로 하는 전주계(全州系)가 있다. 그는 전주최씨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구체적인 상계가 고증되지 않고 있다. 전주계 강릉최씨의 주요 인물로는 조선 세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최자점(崔自霑),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최세건(崔世楗), 인조 때 진주목사를 지낸 최응천(崔應天) 등이 있다.
이들 전주계는 희경공파 대사간공파 예성공파 전서공파 등으로 나뉘어 있다. 강릉최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 4만4704가구에 총 14만8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전체 최씨의 6.6%를 차지하는 숫치이다.
강릉최씨 경주계의 연혁과 인물
시조는 고려 때 삼중대광으로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에 책록되어 경흥부원군에 봉해진 충무공 최필달이다.
그의 증손인 최숭언(崔崇彦)은 고려 때 삼중대광으로 명주부원군(溟州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세손인 최한주(崔漢柱)는 충렬왕 때 대중대부(大中大夫)로 종정경(宗正卿)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주군(溟州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강릉최씨 경주계에서는 최필달·최숭언·최한주를 가리켜 강릉최씨가 자랑하는 삼군(三君)이라고 칭하고 있다.
고려말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삼사 좌윤(三司左尹)을 역임했던 동강(東崗) 최원량(崔元亮)의 손자 최치운(최안린의 아들)은 조선 전기의 명신으로 세종 때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고려말인 1390년(공양왕2)에 태어난 그는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두루 관직을 역임하며 덕망과 식견을 인정받았다.
또한 다섯 차례나 명나라를 다녀오는 등 외교면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왕명을 받아 대명률(大明律)을 참고하여 ‘무원록’을 주석하여 억울한 옥사(獄事)가 없도록 하였다. 술을 좋아했는데, 세종이 그의 건강을 걱정하여 친필로 계주(戒酒) 어찰(御札)을 내리기도 했다.
최치운의 둘째 아들 최응현(崔應賢)은 단종 때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으나 고향의 노모 봉양을 위해 지방 수령직을 자청하였다. 성종 때 모친상을 당하고 나서야 중앙 관직에 나서 예조 참의(禮曹參議),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역임했다.
최응현의 셋째 아들인 최세절(崔世節)은 연산군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급제를 했다. 하지만 중종반정으로 발표가 보류되자 후에 상소를 올려 장원급제를 추인받게 되었다. 그후 벼슬길에 올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좌우부승지(左右副承旨)·황해도와 경상도 관찰사·대사헌·형조·호조판서를 지냈다.
최응현의 손자로 최세효의 아들인 최수성(崔壽城)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조광조·김정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그는 학문이 뛰어났고 문장과 서예·미술·음악 등에 출중하여 ‘사절(四絶)’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혼탁한 세태를 개탄하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명산대천을 돌며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하지만 남곤의 미움을 샀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모함을 받아 35세라는 짧은 나이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최세절의 증손자인 최기벽(崔基?)은 광해군 때 성균관에서 교수하고 있을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극력 반대했으며, 조카인 최문한으로 하여금 전횡을 일삼던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목을 베라는 항소문을 올리도록 했다. 그 일로 동생인 최기백(崔基?)과 함께 금고형을 받아 원주에서 살다가 인조반정 후에 복권되었다.
그의 아들 최문오(崔文澳)는 군수(郡守)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했고, 둘째 최문활(崔文活)은 군수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셋째 최문발(崔文潑)은 시문에 능하여 ‘취석시집(醉石詩集)’을 남겼다. 또 막내 최문식(崔文湜)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 숙종 때 황해도 관찰사·대사간(大司諫)·예조참판·도승지(都承旨)등을 역임했다.
강릉최씨 전주계의 연혁과 인물
강릉최씨 전주계의 시조 대경공 최흔봉은 고려태조인 왕건의 딸인 옥경대주를 맞아 부마가 되었다. 고려개국공신록에 의하면 최흔봉은 개국공신 사등십사원 중의 한 사람으로 명주인관대경(溟州人官大卿)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전주(완산) 최씨였지만, 사는 고장이 강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흔봉에 대한 고증은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즉, 태조가 궁예 휘하에서 군대를 이끌고 원주와 강릉(명주)를 장악할 때 그 휘하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설과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할 때 전주지역에 세거하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다는 설, 그 자손(11세 휘능공)이 상당부원군에 훈봉되었음을 볼 때 청주지역 호족이었을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따라서 강릉최씨 전주계가 전주최씨로부터 분적된 것은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나, 정확한 상계는 고증되지 않고 있다. 다만, 최흔봉의 12세손인 충숙공(忠淑公) 최입지(崔立之)가 강릉군에 봉해지고, 최안소(崔安沼), 최유련(崔有漣) 등 삼대에 걸쳐 평장사를 지내고, 모두 강릉군에 봉해진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강릉최씨로 분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입지·최안소·최유련뿐 아니라, 최안소의 동생인 최안빈(崔安頻)은 판서직을 역임한 후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지고, 셋째인 최안언(崔安彦)은 예의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로써 강릉최씨 전주계는 명문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강릉최씨 전주계의 중시조격인 충숙공 최입지는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은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匡靖大夫門下平理上護軍)을 거쳐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올랐으며, 조선 개국 후 수태사태상(守太師太常)으로 증직되었고, 세종 때에는 영의정에 가증(加贈)되었다.
그의 세 아들이 모두 출중하였는데, 맏아들 최안소는 충숙왕 때 경상도 존무사에 임명되었고, 충목왕 때는 통정대부 안동판관에 임명되었다. 벼슬이 삼중대광 문하시중 동중서평장사에 올라 강릉군에 봉해졌고, 공민왕 때에 순성보리공신(純性輔理功臣)에 책봉되었다.
최안소의 장남 최유련은 공민왕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공신으로 강릉군에 봉해졌다.
최유련의 아들 최이(崔?)는 공양왕 때 사헌집의(司憲執義)가 되었다.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있을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으로 있던 태종 이방원과 친교를 맺어 조선 개국에 기여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 우부승지(中樞院右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태조 때는 중추원부사가 되었으며, 정종 때는 좌군총제와 대사헌을 겸직하였다. 또 공조,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세종 때는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명나라 태종이 죽자 진향사로 연경에 다녀온 뒤 숭록대부(종1품)이 되었다.
최수(崔洙)는 최입지의 5세손인데, 세조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성종 때 진잠현감(鎭岑縣監)에 제수되었다. 이어 박천(博川)과 서천군수(舒川郡守)를 지냈으며, 그 뒤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강릉최씨 강화계의 연혁과 인물
강릉최씨 강화계의 시조 충재 최문한은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부마가 되어 삼중대광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역임했다. 충숙왕의 딸 선덕공주와 혼인한 그는 고려의 국운을 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자신의 애마가 강릉 용지에 빠졌다가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강릉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후손에서는 손자 최윤(崔允)이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를 역임한 후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그의 아들 3형제 중 둘째 최자호(崔自湖)는 세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대사간과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막내 최자점(崔自霑)은 성종 때 등과하여 감찰과 정언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管校理)를 지내고 평강·고성·금성 등지의 군수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최자점의 손자 최연(崔演)은 홍문관 제학과 수찬·장령·필선 등을 거쳐 충청도 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폈고,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를 지낸 후 중종의 ‘애책문(哀冊文)’과 ‘시책문(諡冊文)’을 지었다. 그의 조카 최운우(崔雲遇)는 명종 때 횡성현감을 역임했고, 최응천(崔鷹天)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목사를 역임했다.
강릉최씨 근현대 인물
강릉최씨는 지금도 강릉 등지에서 주요 문벌을 형성하고 있는 명문가 중의 하나이다. 근현대에도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는데, 그중 최규하 전 대통령이 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외무부 통상국장을 시작으로 외무부장관을 지내고 국무총리·대통령 서리가 되었다가, 대한민국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79년 10·26, 1980년 5·18 등 역사적 격랑을 겪으며, 원만한 성격으로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지만, 역사적 반동(전두환 집권)을 물리칠만한 확고한 리더십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외 강릉최씨의 근현대 인물 중에서는 최종영 전 대법원장과 최각규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최돈웅 전 의원, 최종찬 전 건교부 장관, 최문순 강원도지사 등이 있다.
[출처] :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