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인의 지도자로서, 나누어져있던 2개의 이란왕국을 통합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세웠다. 그의 치세 동안 페르시아는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29년 동안 통치하면서 당대의 제국들 - 메디아, 신 바빌로니아, 리디아 제국을 굴복시켰고 이집트만 정복하지 못했는데 이집트 정복을 시도하다가 죽었지만 나중에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
초기와 집권과정
"키루스"라는 그의 이름이 단순히 개인의 이름인지 제왕의 칭호인지 불문명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고대 페르시아어로 "태양"이라는 단어가 그 어원이라고 한다.
그는 기원전 576년 또는 기원전 590년 경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지방의 군주 캄비세스 1세와 메디아의 마지막 황제인 아스티아게스기원전 554년 자신의 외할아버지이며 황제인 아스티아게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기원전 549년 엑바타나를 정복함으로써 메디아 제국을 정복하고 나라의 이름을 메디아에서 페르시아로 바꾸었다.
키루는 종교적 관용과 다른 민족에 대한 배려가 뛰어난 관대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구약성경에스라(공동번역 에즈라)(1:1~4)에는 "고레스"로 나오는데 바빌론 유수로 바빌로니아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다니엘
키루스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물론이고 그리스에서도 이상적인 군주이자 자비한 대왕으로 존경을 받았는데 크세노폰아스티아게스키루스의 교육
그의 통치기간 동안 그는 다민족국가인 페르시아 대제국의 융화를 위해 종교적 관용정책과 포용정책을 표방했으며 피정복민들에게서 기꺼이 배우는 자세를 취했다. 정부형태와 통치방식에서도 다른 민족의 것을 차용하여 그것을 새로운 제국에 맞게 응용했는데 이것이 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등에게 까지 전해져서 페르시아 제국의 문화와 문명을 형성해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근대에 와서도 키루스는 마키아벨리키루스의 교육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히는 고전 그리스의 저술이어서, 크세노폰에 의해 다시 서술된 그의 일대기는 근대에까지 큰 영향을 끼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