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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미카 예언서의 말씀 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
(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었듯이(창세 3,21) 아버지로부터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며,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더 큰 사랑에 감사하고>
오늘 비유는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하는데,
실은 자비의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자비가 주제이고, 그래서 자비의 하느님 비유가 제목으로 맞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비유에 나오는 세 사람을 소설이나 영화의 캐릭터 보듯 하나하나 다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비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캐릭터입니다.
작은아들은 눈치나 상황을 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굴곡 많은 캐릭터입니다.
큰아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과 요구되는 역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모범생이기에 굴곡은 없지만 억울한 캐릭터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자비는 큰아들에게보다는 작은아들에게 잘 나타납니다.
왜냐면 자비는 사랑 중에서도 죄인에 대한 은총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미사 때마다 통회의 기도 다음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자비송을 바치고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큰 죄를 지은 작은아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은총의 사랑인 자비를 받습니다.
반면 큰 죄를 짓지 않은, 아니, 어쩌면 아무 죄도 짓지 않은 큰아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또 늘 아버지 사랑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은총의 사랑인 아버지의 자비를 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고, 동생처럼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한 억울함, 동생처럼 방탕하게 살지 못한 억울함을 아버지에게 토로합니다.
이런 그에게 아버지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는 그 말을 제대로 잘 이해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 사랑에서 박차고 나날 용기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버지 사랑을 늘 느끼지도 못했으며,
아버지 사랑 안으로 달려들지도 못해 억울한데, 그런 그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입니다.
어쨌거나 아버지에게 큰아들은 애처롭고 안타깝기만 하지만
작은아들은 기쁨 곧 잃었던 아들을 되찾는 기쁨을 드립니다.
오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자기 몫을 챙겨 떠나는 작은아들을 붙잡지 않습니다.
강제로라도 자기 곁에 묶어두지 않고 자유롭게 떠나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 자유로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을 떠나는 죄를 짓지만, 이 자유로 하느님 사랑을 선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큰 죄인인 우리를 자비로이 받아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해야 하지만,
그 위험한 자유를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더 큰 사랑에 더 감사케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받은 사랑을 기억하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느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떨어졌을 때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벗어나 숨게 됩니다.
내가 그분을 멀리할 뿐입니다.
나를 애타게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램블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나 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 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방탕한 삶을 멀리하는 표현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매끈한 오른손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투박한 왼손이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지팡이를 쥔 채 멀뚱멀뚱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집의 처지가 밖에 보다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작은아들이 배고픔에 지쳐 돼지나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허기를 채우려고 하였을 때는 집 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회개한 것은 아마도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연습한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라고 하시며 먼저 받아주셨을 때일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랑을 느꼈을 때 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같았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 15,12) 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몸은 같이 있었으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큰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한다는 보상 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종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종처럼 살았으니 오랫동안 아비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사람을 살았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 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며 목을 뻣뻣이 하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교만함이 자리하고 있다면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인공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누군가가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명료하게 소개하는 성경 구절을 꼽으라 한다면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루카 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이른바 ‘탕자의 귀향’ ‘돌아온 둘째 아들의 비유’를 선택하겠습니다.
둘째 아들의 행실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 종종 있는가 봅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불구하고 나중에 받아야 할 유산을 미리 앞당겨 받는 그런...
둘째 아들은 재산을 분배 받자 마자 이게 웬떡이냐며 멀러 멀리 떠나 갔습니다.
갑작스레 생긴 돈은 그 행방이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흥청망청 유흥비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수중의 돈이 사라지자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친구들도 언제 그랬냐는듯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도움을 청해도 언제 봤냐는 얼굴입니다.
완전 상거지가 된 둘째 아들은 마침내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유다인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동물, 불경스러운 동물로 여겨지던 돼지 치는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만나면 드릴 사과의 말씀을 되내이면서 아버지께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저 멀리서 기진맥진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이지 감동적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죄인인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실 이 복음 구절의 주인공이요 주체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탕자의 귀향이라기보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 같은 제목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탕자에만 시선을 지나치게 고정시킵니다.
탕자가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동료 사제 한분이 이 복음 구절을 주제로 미사 강론을 하는 중이었는데, 탕자의 그릇된 행동에 필이 확 꽂혀 탕자 야단치느라 벌써 시간이 30분이나 흘렀습니다.
탕자가 돌아와야 강론이 마무리 될 텐데, 안 돌아오니 다들 마음을 졸이던 중, 한 형제가 외쳤습니다.
“신부님! 음식 다 식는데, 이제 그만 탕자 돌아오게 하시죠!”
우리도 많은 경우 그릇된 행동을 한 둘 때 아들에게만 시선을 집중합니다.
그의 죄목을 나열하는데 신경을 씁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주인공이신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은 보지 못합니다.
신구약 성경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비유의 주인공이신 자비하신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되찾은 아들의 비유, 화를 내는 큰아들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진짜 주인공은 ‘큰아들’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회개한 죄인’이고, 큰아들은 ‘회개해야 할 죄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고,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사람들의 회개와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고, “한 번 죄인이 되면 그걸로 끝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2절의 ‘투덜거렸다.’는 뜻으로는 ‘비판했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판하면서 한 말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니 당신도 죄인이다.”라는 뜻입니다.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안에’ 있고,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석하고 있는데,
큰아들은 화를 내면서 ‘밖에’ 있고,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작은아들은 ‘이미 되찾은 아들’이고, 큰아들은 아직 되찾지 못한 ‘잃은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찾으려고 가는데, 그 모습은 ‘잃은 양 하나’를 찾기 위해서 가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가 큰아들을 타이르는 말로 끝나기 때문에 아직도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큰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해서 ‘안으로’ 들어가고, 잔치에 참석해서 함께 기뻐해야만 이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그 완성은 곧 예수님의 구원사업의 완성입니다.
‘나의 일’로 좁혀서 생각하면, ‘나 자신’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은 그 완성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만일에 내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예수님의 구원사업이 마무리될 때, 남들은 모두 안에 있는데 나만 밖에 있게 될 것입니다.
29절과 30절에 있는 큰아들의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고, 동생을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저 아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은 내용으로도 아버지가 잘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말이고, 표현으로도 아버지를 비난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칭 의인들이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당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비난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인간이 감히 하느님을 비난할 수 있을까?
“여러 해 동안 종처럼 당신을 섬기며” 라는 큰아들의 말은 자기를 종처럼 부려먹었다고 아버지를 비난하는 말인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전락시킨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라는 말은 “나는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다.” 라고 주장하는 자칭 의인들, 즉 위선자들의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진짜 의인이 있을까?
진짜 의인이라면 그런 말 자체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선자들이나 그런 말을 합니다.
“이러한 저에게 당신은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라는 말은, 자기는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마땅히 주셔야 할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감히 비난하는 위선자들의 말입니다.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라는 말은 “죄인들은 그들의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도 처벌을 하지 않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느님을 비난하는 위선자들의 말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큰아들을 꾸짖지 않고 ‘사랑으로’ 타이르기만 합니다.
큰아들도, 작은아들도 모두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라는 말은 뜻으로는 “내가 늘 너와 함께 있고”인데,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복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그렇게 큰 복이 아닙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는 말은 작은아들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고 해서 큰아들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하나도 없음을 나타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집은 정원 제한이 없는 집입니다.
들어가기를 원하고,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집입니다(요한 14,2).
자리가 모자라서 못 들어가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32절의 아버지의 말은 함께 기뻐하자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지금 작은아들처럼 살고 있든지 큰아들처럼 살고 있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는 함께 기뻐하자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너무나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 - "나는 누구인가?">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시편 136,1)
아침 성무일도 독서기도시 시편 136장 26절까지 계속되는 후렴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말마디가 오늘 복음과 일치합니다.
요즘은 홈페이를 열어 뉴스 확인하기가 겁납니다.
어디나 어둡고 불길한 뉴스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더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느낌도 듭니다.
다만 교황님 홈페이지는 가장 먼저 열어보는 살아 있는 영성의 보물 창고입니다.
늘 어둔 세상에 길을 열어주는 희망과 지혜의 빛 가득한 뉴스와 기사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한눈에 들어오는 여러 말마디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그리고 그리스도를 선포하라 불림받은 사람들”
“오늘날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믿고 선포해야 할 진리가 되었다.”
“‘성 이념(Gender ideology)’은 우리 시대의 가장 추한 위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자와 여자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없애는 것은 인간성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대신 ‘남자와 여자는 풍요로운 ‘긴장’ 가운데 존재한다(Man and woman exist in a fruitful ‘tension’).”
성 이념에 종지부를 찍는 얼마나 지혜로운 통찰인지요!
오늘의 다산 어록과 맹자의 사단설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사랑은 고차원의 덕목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일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다산
“가엾이 여기는 마음,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이런 사랑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맹자
다산어록 3월의 모토인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뜻도 깊고 멋집니다.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같이한다”뜻으로, “물들이고 싶거든 먼저 물들어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늘 들어도 늘 새로운 복음 중의 복음, ‘순복음(pure Gospel)’이라 칭하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보다는 ‘너무나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비유’라함이 적절할 것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이처럼 감동적인 예화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묻고 싶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같은 복음이라 이 복음을 대하면 늘 넘치는 감동과 더불어 저절로 “나는 누구인가?” 묻게 되며 오늘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가득 들었습니다.
떠오르는 루카복음의 결론같은 가르침을 확인하게 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루카 6,36)
우리의 평생과제가 부여되니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며 우리는 형제”라고 아우구스티노는 갈파했습니다.
그러니 형제들인 우리가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겠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하면 정주와 환대의 요셉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이 생각납니다.
제 좋아하는 두 편의 자작시입니다. 24년 전 감동을 담은 “아버지 산처럼”이란 시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자비의 품으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아버지 산처럼!”
-2000.11.17.
늘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환대하는 아버지를 닮은 불암산같은 요셉 수도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의 짧은 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침묵의 저녁 불암산!”
한량없이 크고 깊고 고요한,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이 시를 썼을 때의 감동도 생생합니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의 자비하신 아버지는 이런 산같은 분입니다.
제1독서 미카 예언자가 고백하는 하느님도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와 일치합니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바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오늘 복음의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아버지입니다.
제 고백상담 집무실벽에 수십년 동안 걸려있는 바로 귀환한 작은 아들을 맞이하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렘브란트 그림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의 절정은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가 거지가 되어 생환한 작은 아들의 환대에서 감동적으로 드러납니다.
일체의 책임 추궁은 말끔히 사라지고 잃었던 아들을 찾음에 너무나 기뻐 얼싸안고 환호하는 아버지의 입에서 은총의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종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존재감 없는 거지같은 신분에서 왕자같은,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존엄한 품위의 신분을 회복한 작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비하신 아버지께 돌아오지 않고 존엄한 품위를 상실한채 존재감 없이 무명의 거지처럼 세상 속에 살다가 불쌍하게 죽어가는 작은 아들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 외아드님을 통해 날마다 작은 아들같은 우리의 귀환을, 생환을 환영하시며 미사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작은 아들의 환대 잔치에 불타오르는 질투에 제정신을 잃고 분노하는 큰 아들 역시 소위 잘 산다 자부하는 우리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우리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자녀답게 산 큰 아들이 아니라 종처럼 살았던, 마음은 아버지에게서 멀리 떠나 있던 아버지와의 신뢰 관계가 참으로 빈약했던 큰 아들입니다.
수십년간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정주가 아닌 생각없이 타성적으로 안주하다보면 우리 또한 이런 큰 아들이 될 위험성도 다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큰 아들의 속내가 환히 드러납니다.
너무 화가 나니 말에는 사실과 어긋난 과장과 왜곡도 심합니다.
아우가 아닌 저 아들이라 하며 아버지와 작은 아우를 하나로 몰아 붙입니다.
큰 아들의 태풍같은 분노를 미풍으로 바꿨을 다음 자비하신 아버지의 온유하고 진실한 말씀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복음사가는 큰 아들의 반응은 물음표로 남기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며 반응을 묻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큰 아들, 작은 아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참으로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은 자녀다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가장 효성스런 아들인 예수님 당신을 삶의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복음을 묵상할 때 마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효성스런 아들로서 자신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했을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자비하신 아버지의 효성스런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생명있는 모든 것에게 먹을 것을 주시나니,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시편 136,2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번번이 실패하는 사랑을 끝까지 지치지 않고 하시는 분>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대자 예수님께서 되찾은 양, 되찾은 은전,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유산을 미리 챙겨 떠난 뒤 방종하게 살던 둘째 아들이 모든 것을 탕진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일꾼으로라도 써 달랄 요량에 집으로 향합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20)
아버지의 이 행동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제 몸에서 난 소생의 부재 시기 동안 절절히 쌓였던 그리움과,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던 불안감이 단번에 풀린 반가움이었을 것이고, 제 몸같이 사랑하던 아들을 다시 끌어안고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입맞추면서 또 다른 자기 생명을 확인하는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고생했을 것이 뻔한 아들의 몰골에 안쓰러운 마음이 왈칵 쏟아져 서둘러 환영과 위로의 진심을 전한 것이고, 또 돌아가신 뒤의 유산이라면 모를까, 멀쩡히 살아 계신 아버지에게 제 몫을 졸라 길을 떠났던 소문이 이미 지역에 파다하게 퍼졌을 터라 이렇게 아버지 편에서 먼저 화해와 용서의 제스추어를 하지 않으면 이웃들이 그를 어떻게 대할지 모를 일이기에 미리 선수를 친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하느님을 담고 있지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죄악에 지쳐 당신 품으로 돌아오는 우리를 맞이하실 때 위에 나열한 이유들을 따져서 달려나오시는 걸까요?
돌아온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심경을 굳이 인간의 이해 반경 안에서 설명하자니 그렇다는 것일 뿐, 실상 하느님은 자동반사적으로, 무조건반사적으로 저 모든 이유를 다 담아 저렇게 행동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시기에 얼른 뛰어나와 얼싸안고 입맞추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복음에서 만난 아버지 하느님이 애처로울 정도로 얼마나 여리고 약하신지요.
그분은 상대를 추궁과 신문으로 몰아세우지 않으십니다.
혹 주눅들까 봐 오히려 어떤 질문도 삼가면서 다른 이들에게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4)고 반복합니다.
그분에게는 둘째 아들이 무절제한 욕망에 휩싸여 당신에게 저지른 일도, 이미 큰 아들은 들어 알고 있는 "창녀들과 어울려 가산을 들어먹은"(루카 15,30) 방종에 대해서도, 돌아올 마음을 먹었을 정도의 고생에 대해서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는"(화답송)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때에는 우리의 죄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 그분의 관심사는, '어찌되었든 지금 네가 내 앞에 돌아와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이 순간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십니다.
'함부로 떠나 죄짓다가 돌아온' 자의 과거 구체적 죄상보다 '내가 잃었다가 내가 도로 찾아서' 그저 기쁘실 뿐입니다.
용서의 주체는 하느님이십니다.
주인의 기쁨에 하인들은 덩달아 신이 났겠지만 큰 아들은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의 항변에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함께 느낍니다.
실상 큰 아들도 둘째 아들이 떠났을 당시 한몫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루카 15,12)고 복음사가는 분명 복수로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가산을 동생만큼 받았을 그가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루카 15,29) 주시길 내심 아버지에게 바라면서도 말도 솔직히 꺼내지 못했다는 것이 참 슬픕니다.
겉보기에 성실한 큰 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히 사랑과 신뢰를 받지 못하고, 방종한 둘째 아들과의 관계에서도 맘고생만 죽도록 한 아버지에게 연민이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이 아버지처럼 우리의 하느님도 사랑에 실패하신 분일까요?
아닐 겁니다.
사랑에 실패하신 분이 아니라 번번이 실패하는 사랑을 끝까지 지치지 않고 하시는 분이실 겁니다.
기약 없지만 그 사랑을 우리가 알아들을 때까지 쉬지 않고 지치지 않고...
아버지의 무절제하고 무분별한 사랑과 자비를 못마땅해하는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거의 울듯이 호소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루카 15,31)
큰 아들 마음에 감추어진 욕망을 읽은 그분은 염소 한 마리가 문제가 아니라 다 네 것이라고 통 큰 발언을 합니다.
용서가 필요한 이에게는 용서와 환대를, 아버지 사랑을 물질로 가늠하고 싶은 이에게는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는 마지막 말씀에 머무릅니다.
즐기고 기뻐하는 것은 그야말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외부에서 의무적으로 종용해 생성시킬 수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마지막 힘을 다해 형제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의 의무를 선포하십니다.
이 긴 비유를 들려주신 예수님의 목소리도 포함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사랑의 위엄이 담겨 있습니다.
힘과 권력에 의한 위엄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한없이 초라해지고 위신 없이 되어 버린, 약함에서 우러나는 위엄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복음사가는 이후에 큰 아들이 어떻게 행동했을지 침묵합니다.
이 결말은 예수님께 투덜거린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에게는 물론, 오늘 이 복음을 듣는 우리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였을까요?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의 업그레이드는 ‘회개’>
후배 신부님들과 뉴욕에서 댈러스까지 자동차 여행을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이 제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까지 가는 길에 동행해 주었습니다.
신부님들이 운전해 주었고, 가는 길에 숙소를 예약해 주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셨던 것처럼 먼 길을 가는 제게 신부님들이 함께 해주니 고맙고,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여행 중에 교회에 관한 이야기, 정치에 관한 이야기, 사제 생활에 관한 이야기, 문학에 관한 이야기,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먼저 생각했기에 여행은 순조로웠습니다.
숙소를 예약한 신부님은 그동안 쌓아 놓은 마일리지를 이용해서 저렴한 가격에 업그레이드된 숙소를 잡아 주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도 업그레이드된 항공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저의 마일리지를 보고서 저도 얼마든지 업그레이드된 숙소와 항공을 예약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비로소 보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에도 업그레이드 기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일리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저는 신앙의 업그레이드는 능력이나 재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업그레이드는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맬지라도 회개하면 밝은 광명에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방탕하여 하느님과 멀어졌을지라도 회개하면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오로 사도는 회개하였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니교에 심취했고,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회개하였고, 위대한 교회의 학자가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회개하였고, 쓰러져가는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상을 간직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회개하였던 죄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회개를 보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 모두 ‘회개’하여 업그레이드 된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면서 우리들 또한 우리의 이웃들에게 업그레이드된 신앙을 선물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주인공인 것 같습니까?
아들을 사랑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 돌아온 아들에게 잘못을 묻지 않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을 했고, 아버지의 집이 하느님 나라임을 알지 못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잘해 주시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큰아들이 있습니다.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던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큰아들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관심입니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들에 대한 외면입니다.
그것은 잘못한 이들에게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태도입니다.
아버지는 하느님 나라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몸은 비록 하느님 나라에 있었어도 마음은 둘째 아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것이 관심이며, 그것이 사랑입니다.
첫째 아들의 마음으로 사는 것은 몸은 천국에 있다고 해도 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멀리 떨어진 특별한 공간이 아닙니다.
천국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억울한 사람, 정의를 위해서 투신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방황을 멈추고 이제 주님을 바라봐야 할 때>
노인정에서 할머니들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아주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며느리가 요즘 성당에 다니는데, 글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고 하대.”
이 말을 들은 다른 할머니들이 “아이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험하게 죽었대?”라고 묻자, 할머니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어.
글쎄 우리 며느리가 매일 십자가 밑에서 가슴을 치면서 ‘제 탓이요’를 외치는 거야.
이 모습을 보니까 며느리가 이 죽음에 크게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하지? 신고해야 할까?”
잘 몰라서 하는 대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잘 아는 사람은 며느리의 모습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죄 많은 우리 역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스스로 당신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철저히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이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탓이지만, 주님께서는 자기 탓을 외치면서 울고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우리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죄에 쉽게 빠져드는지, 또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얼마나 방황을 많이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회개의 삶을 살 것을,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본받아 이웃에게 실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야 당신 십자가가 온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 말씀을 봅니다.
재산을 나누어 받고 나간 작은아들의 모습이 집중되어 있지만, 사실 이 비유 말씀에는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작은아들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집을 떠나서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큰아들 역시 방황 중입니다.
집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모르고 스스로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방황하는 우리입니다.
외적으로도 방황하지만, 내적으로도 큰 방황의 삶을 삽니다.
아버지 집이 그렇게 좋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삶만 살려고 하고 있으며,
아버지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황을 멈추고 이제 주님을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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