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탈출기의 말씀 20,1-17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22-25
형제 여러분,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13-25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3월의 첫 주일입니다.
이제 봄이 오려나봅니다.
우리 영혼의 봄도 피어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멀지 않아 부활로 피어오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광야를 지나면서 살아가야 할 계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제2독서는 십자가가 하느님의 힘과 지혜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지어지는 새 성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를 잘 드러내줍니다.
“하느님,
저희 마음이 주님의 계명을 따르게 하시고,
저희가 십자가의 지혜로 죄에서 해방되어
주님 사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첫 번째로 하신 일이 바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또 환전상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요한 2,15)
거룩한 성전이 형식적 예배와 인간의 탐욕으로 부패되고,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다' 함은 곧 당신께서 처벌하시고 심판하시는 권한을 가지셨음을 나타내줍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통해서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해 주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16)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요한 2,18) 하고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해 보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새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새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먼저 당신의 몸이 허물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이제, 성전의 숨겨진 신령한 의미가 드러나는 때가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하느님 현존의 가시적 상징이었던 성전을 파기하고 온전한 '새 성전'이 드러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이 세워질 참된 성전, '새 성전'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건물로써 신축될 ‘성전’이 아니라, 제2독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워질 '새 성전', 곧 부활로 세워지는 참 성전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제 새로 탄생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렇게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1코린 3,16-17)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1코린 6,20),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타인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몸은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교회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혜로운 사순시기에, '헌 성전'을 허물고 '새 성전'을 지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 말씀의 끈으로 만드신 '채찍'을 달게 받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편리와 이기를 채우기 위한 가축들과 돈을 쏟아버리고, 그릇된 마음의 '탁자'들을 뒤엎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16)
주님!
성령의 채찍을 휘두르소서.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키게 하소서.
당신이 세우신 성전의 뜰이 장사치와 도둑들의 소굴이 아닌, 사랑의 열매를 나누는 나눔 터가 되게 하소서.
저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경배하는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경배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치울 것인가? 허물 것인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성전을 정화하신 얘기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특별한 장소이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이 성전 안에 가득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잡놈들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의 경우 성당에 무엇이 많은 것이 싫습니다.
성상이나 성화같은 예술품이 많은 것도 싫습니다.
그것들이 제가 하느님 만나는 것에 도움을 주면 좋겠는데, 도움을 준다고 하는 것이 제게는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성당을 간 분들에게 이런 심한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예술품을 보러 간 것입니까?
주님을 만나러 간 것입니까?
주님을 만나러 꼭 거기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의 이런 도발적인 말은 주님을 만남에 있어서 정말 성화나 성상의 도움받는 분들에게도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상은 그것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우상이 아니라 성상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통해 주님을 만나지 못하거나 방해받는 사람에게는 그저 예술품이거나 심지어 우상일 뿐일 겁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은 성전에서 잡다한 것과 잡놈들을 다 치워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아주 과격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위선자들을 말로 세게 질타하신 적이 있으셔도 이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셔야만 했나 봅니다.
말로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하셨는데 말로는 안 됐나 봅니다.
그들의 돈 줄 그래서 그들이 결코 놓을 수 없고 그래서 꽉 움켜쥐고 있는 것,
그래서 치워버리라고 말로 해서 안 되는 것은 주님께서 과격하게 치워버리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폭삭 잃은 것도, 실은 내가 주님 대신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치워버리신 것들일 겁니다.
아무튼 이 정화사건 때문에 주님께 죽음이 닥쳐옵니다.
저라도 그러지 않겠습니까?
내 모든 것을 뺏어간 주님을 그냥 놔두고 싶겠습니까?
당대 기득권자들도 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이런 주님을 그냥 놔두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무슨 권한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고,
이에 주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성전을 허물다가 당신 몸이 허물어지십니다.
아니, 당신 몸을 허물어서라도 성전을 허물려고 하신 것이고,
역사적으로도 로마의 침략으로 결국 파괴되고 맙니다.
이제 우리가 남았습니다.
우리도 허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당신 몸인 성전을 허무셨는데,
이것은 우리 안에서 잡것들을 치우라는 명령을 실행치 않으면 우리도 우리 몸인 성전을 허물어야 한다는 주님의 표징입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치울 것인가?
허물 것인가?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만든 한 주간을 감사하며, 또 새로운 한 주간을 살아갈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성전 정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 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23)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거룩한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습니다.(요한 2,14-1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셨을까요?
이스라엘 성인 남성들은 해마다 성전세로 유다 돈, 반세켈을 내야 했으므로 이방인 지역에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돈을 환전해 주는 일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희생제물용 짐승을 팔고 돈으로 바꾸어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잇속에 눈이 어두워 상인들과 제사장이 결탁하여 이윤을 챙기는 부정과 비리가 생겼고 이권 다툼의 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경배의 본질적인 의미가 왜곡된 모습에 경고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성전의 기능은 주님께 드리는 희생제물보다 주님의 사랑과 생명을 전달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길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하고 집안 정돈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아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닙니다.
우리 성당이 참으로 아름다운 성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앞날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당신의 몸을 십자가상 제물로 바치시고 부활하심으로 짐승을 잡아 바치는 구약의 제사를 새롭게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미사 안에서 성체를 축성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와 의식만을 강조하는 예배는 사라지고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체험하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게 되고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의 몸은 분명 성전입니다.
혹시라도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적개심,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이라는 집의 주인과 그에 따른 손님들>
사람은 관계 맺는 동물입니다.
예전에 군대에서 귀신을 본다는 청년에게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귀신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건 귀신 때문이 아니라 귀신을 맞아들일 만한 집을 만든 자신 때문이라 말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어 본성 상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관계는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저의 어렸을 때 집에, 이사 간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가 본 적이 있는데 지붕까지 내려앉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쥐나 뱀, 벌레들이 사는 곳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집의 주인을 누구로 삼느냐에 따라 관계 맺는 대상이 달라집니다.
관계 맺는 대상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든 나의 집이 결정합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 정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만들어 아버지 집을 장사꾼들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을 쫓아내십니다.
장사꾼이 주인이 되면 그 집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외면하는 곳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성전은 모든 인간을 맞아 들일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1970년대에 미국 뉴욕주 아미티빌 한 저택에서 무서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집에서는 이전에 로널드 디페오 주니어가 자기 가족 여섯 명을 살해한 끔찍한 범죄가 발생했습니다.
그는 엽총으로 일가족 모두를 쏘아서 죽였지만, 각 방에 돌아다니면서 총을 쐈는데도 아무도 총소리에 깨거나 저항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로널드는 자신이 집에 들어왔을 때 두 명이 자신에게 그러한 일을 하라고 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조지와 캐시 루츠 가족이 싼 가격에 집을 구입하여 들어왔습니다.
루츠 가족은 이사 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이상한 현상들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집이 귀신 들린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사제를 불러 성수를 뿌리려고 할 때 갑자기 정전이 되더니 날카로운 소리로 “다 나가!”라는 비명이 들렸습니다.
그 이후로도 물건이 움직인다던가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과 대화하고 친구라고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노린다는 말을 듣고는 짐도 챙기지 않고 도망을 쳤습니다.
사람들이 그 아무도 없는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밤에도 계속 찍었습니다.
그런데 전에 죽었던 아이와 비슷한 아이의 얼굴이 찍히기도 하였습니다.
집은 이전 죽은 이들을 주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들은 죽은 존재들입니다.
죽은 존재는 살아있는 존재들을 시기하여 죽이거나 쫓아내려 합니다.
그러면 산 이들은 그 집에서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사람을 미워하는 어떤 것이 주인이 되면 그 사람은 타인과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처럼 뱀이 아니라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성전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웃을 받아들이는 집이 되기 위해서 입니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39세에 아기를 낳다가 사망한 여왕 뭄테츠 마할을 위한 무덤입니다.
왕은 여왕을 그리워하여 그녀의 집을 그녀가 살기를 원할 만하게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수많은 사람이 와서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듭니다.
만약 뭄테즈 마할이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였다면 사람을 받아들일 만한 집이 지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 피라미드를 생각해 봅시다.
피라미드는 죽은 왕을 매장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왕이 저승에서 살 수 있는 금은보화를 많이 저장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만 아는 죽은 인간이 왕이 되면 그 공간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탈리아 오르비에또나 피렌체에 가면 아름다운 두오모 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좀 특이합니다.
이슬람식의 문양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은 터키를 점령하고 성 소피아 성당을 부수기가 아까워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성당들을 지을 때도 당시 이슬람 세력이 강력할 때 혹시 점령 당하더라도 이슬람 사원으로 쓸 수 있도록 성당을 만든 것입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신 성전은 이렇듯 종교가 달라도 인종이 달라도 모두를 포함할 수 있는 집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모든 존재의 창조자를 모실 성전이 되어야 모든 이를 사랑할 존재로 구원받게 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종교 정화>
구약성경 즈카르야서에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그날에는 말방울에도 ‘주님께 성별된 것’이라고 새겨지고, 주님의 집에 있는 솥들은 제단 앞에 있는 그릇들처럼 될 것이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모든 솥도 만군의 주님께 성별된 것이 되어, 제물을 바치려는 이들이 모두 와서, 그 솥들을 가져다가 고기를 삶을 것이다.
그날에는 만군의 주님의 집 안에 더 이상 장사꾼들이 없을 것이다."
(즈카 14,20-21)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이 예언이 실현된 일입니다.
‘그날’이 시작되었음을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그날’은 ‘메시아의 날’, 즉 메시아의 구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구원의 반대쪽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심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보면서 시편 69편 10절,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를 생각했습니다.
원래 시편 69편은 ‘의인의 수난’에 대한 시편이고, 초대교회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적용하던 시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시편 69편 10절을 생각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열정이 죽음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즉 성전 정화 때문에 수난과 죽음이 닥치게 될 것이라고 예감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의 마당은 ‘안마당’과 ‘바깥마당’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안마당’은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었고, ‘바깥마당’은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바깥마당’에서 장사꾼들이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팔았습니다.
아주 비싼 가격으로...
그리고 봉헌금을 바치려는 사람들이 가지고 온 외국 돈을 이스라엘 돈으로 환전해 주는 환전상들도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그렇게 사고파는 일이 이루어졌는데, 파스카 축제처럼 큰 축일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몹시 붐비는 장터가 되었습니다.
‘바깥마당’이라고 해도 그곳도 분명히 성전에 속한 곳이었고 거룩함이 지켜져야 하는 곳이었는데,
거룩함이 지켜지기는커녕 세속의 장터처럼 혼잡하고 탁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본래의 거룩함을 회복시키신 일입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것은 사람들을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짐승들을 성전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채찍이라는 말만 보고서 예수님의 행동이 너무 지나치게 폭력적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사실상 종교 정화이고, 종교 개혁입니다.
장사꾼들의 뒤에는 사제들이 있었고, 장사꾼들은 장사를 해서 번 돈의 일부를 사제들에게 ‘자릿세’나 ‘뇌물’로 주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어쩌면 진짜 장사꾼들은 사제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그랬다면, 장사꾼들은 물품 판매를 대행하기만 하고, 대부분의 이익금은 사제들이 차지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 일은 성전이라는 특정 장소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 전반에 관한 문제입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척 하는 것, 그것은 심각한 신성 모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안 된다.” 라고 가르치시는데, 유대인들은 “그래도 된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해 왔던 일이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던 일인데, 왜 갑자기 시끄럽게 소동을 일으키느냐고 따집니다.
어떤 일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는 이사야서 56장 7절의 말씀을 성전 정화의 근거로 삼으셨습니다(마르 11,17).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준이 됩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잘못된 일을 하면서도,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을 하면서도 “그렇게 해도 된다.” 라고 주장했던 일들이 많았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는 그런 일이 없는가?
정말로 없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가?
‘성전 정화 이야기’를 대할 때, ‘파는 쪽’의 문제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사는 쪽’에는 문제가 없을까?
돈을 많이 바치면 그것에 비례해서 복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비싼 값으로 물품을 사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을 받고 구원을 파는 것도 나쁜 범죄이고, 돈으로 구원을 사는 것도 나쁜 범죄입니다.
굳이 따진다면 사는 쪽이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잘못된 신앙과 잘못된 사고방식과 분위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더 종교생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에서 소외당하는 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 성전 사랑, 계명 준수, 지혜 추구>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시편 19,8)
신자가, 수도자가, 사제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일은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참된 신자라면 참된 사람이겠고 이또한 평생과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참사람되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을 것입니다.
89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참신자이자 참사람의 모범입니다.
하루하루 100%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세상에서 교황님보다 부지런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교황님이 어제 접견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좋으실대로(please)’ 그리고 ‘감사합니다(thank you).’두 말마디입니다.”
어린이들 접견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평범하나 친절한 말마디가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용기의 덕을 요구한다.”
교황청 사법의 해를 맞이하여 교황청 법조인들 알현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교황님과 함께 광범위한 대화를 나눴음에 감사한다.”
교황님 알현 후 하신 독일의 수상이자 사회민주당 정치가인 올라흐(Olaf)의 말입니다.
또 교황님은 사별가족들과의 접견중에는 이들이 기도중에 위로를 발견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과 공자의 말씀이 참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진심을 다할 때, 상대에 대한 진심도 흘러나온다.”
-다산
자로가 군주를 섬기는 자세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속이지도 숨기지도 말고, 바른말을 하는 것이다.”
-공자
아주 예전 변호사 사무소를 찾았을 때 벽에 걸려있던 액자 안에 ‘공선사후(私先公後)’라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아마도 그 변호사의 좌우명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요즘 공천파동중 회자되는 말마디가 ‘선당후사(先黨後私)’입니다.
모두가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선을 우선시하는 분별의 지혜를, 참사람의 도리를 알려주는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참신자와 참사람이 분리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며칠전 병원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던중 1회용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탔을 때 녹지 않아 웬일인가 당황했는데 무심코 찬물 꼭지를 눌렀던 것입니다.
좀 멀리서 노모와 함께 기다리던 젊은 자매가 급히 오더니 조용히 다시 다른 컵 따뜻한 물에 믹스커피를 타주고 앞서의 커피를 내다 버리고 제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사소한 일 같지만 얼마나 고맙던지 그 친절한 배려의 사랑에 제가 미혼의 젊은 사람이었다면 프로포즈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아들이 있다면 며느리로 삼고 싶을 정도로 감동했습니다.
이런 깨어 있는 친절한 배려의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자 참신자의 모범이겠습니다.
무엇보다 잘 떠나는, 마지막 잘 떠나는 죽음에서 드러나는 삶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은 떠나셨지만 온 인류에게 미사라는 참좋은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남기셨고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참으로 잘 떠남의 모범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잘 떠나는 참된신자로서의 삶이라면 그대로 참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첫째, “성전 사랑”의 삶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성전을 사랑합니다.
성전 사랑은 성전 정화로 자연스럽게 표현됩니다.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성전은 주님이 삶의 중심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주님을 사랑하듯 주님의 집이자, 기도의 집, 환대의 집, 평화의 집인 성전을 사랑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의 성전정화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출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꾼들을 내쫓으시고 비둘기 파는 가난한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즉시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을 알아 챘기에 저절로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는 성경 말씀을 연상합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 할, 세상의 마지막 영적 보루인 거룩한 성전이 속화(俗化)된다면 정말 대책이 없을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안에 다시 세우겠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마침내 당신 몸이 영원한 성전이 될 날을 내다보는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 성전에 머뭄으로 이미 그 혜택을 풍성히 누리고 있습니다.
건물의 성전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인 교회공동체가,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성전이니 성전정화의 개념은 참 넓습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이자 성전정화의 시기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보이는 성전정화는 물론 공동체 성전의 정화로, 그리고 극기, 절제, 선행, 단식, 기도, 자선 활동을 통해 각자 자기 성전정화로 드러나야 함을 봅니다.
둘째, “계명 준수”의 삶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사랑함과 동시의 하느님의 계명을 사랑합니다.
십계명은 물론 주님의 계명은 한결같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사랑 역시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계명준수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온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사랑 선물인 십계명을 소개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십계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1.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3.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
4.부모에게 효도하라.
5.사람을 죽이지 마라.
6.간음하지 마라.
7.도둑질을 하지 마라.
8.거짓증언을 하지 마라.
9.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10.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예나 이제나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공동체에 적용되는 참신자는 물론 참사람이 되기 위한 삶의 기본 자세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이 십계명입니다.
무엇보다 십계명을 포괄하는 사랑의 이중계명인 경천애인과 황금률, 그리고 마태복음 산상설교 중 진복팔단의 실천에까지 이른다면 말 그대로 금상첨화, 사랑의 완성이자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 될 것입니다.
셋째, “지혜 추구”의 삶입니다.
자비와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삶의 지혜, 분별의 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이 지혜요, 지혜 또한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은총의 선물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교회학자 축일시 새벽 독서기도 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과 아침기도시 성경소구도 은혜롭습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 드리세.”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고,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남에게 주겠다.
나는 지혜가 주는 재물을 하나도 감추지 않는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세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된다.”
(지혜 7,13-14)
하느님과 우정이 깊어지면서 지혜의 사람이 됩니다.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혜가 좋아서 교회학자임임을 깨닫습니다.
지혜 중의 지혜가, 지혜의 결정체가, 하느님의 지혜가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하느님의 지혜라 일컫는 예수님과 우정이 깊어질수록 지혜로움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1. 한결같은 성전 사랑의 삶입니다.
2. 한결같은 계명 준수의 삶입니다.
3. 한결같은 지혜 추구의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신자의 삶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의 규정은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시편 19,9)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진정한 성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Failure is a part of life.
If you don’t fail, you don’t learn.
If you don’t learn, you will never change.
(실패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만일 당신이 실패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배울 수 없습니다.
당신이 배울 수 없다면 당신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제 삶에도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실패와 좌절은 제 삶의 새로운 변곡점이 되곤 했습니다.
33년 전에 저는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처음 본당으로 가서 보좌신부로 지내는 중에 ‘유행성 출혈열’에 걸렸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었고, 당시 교구장이셨던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병원엘 찾아 왔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병원에서 입원하고, 퇴원할 때까지 잠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에 저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저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덤’으로 주어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늘 감사합니다.
그러기에 늘 새롭습니다.
30년 전에 주교님께서는 제게 미국에서 사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준비를 하면서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그래야 했습니다.
저는 매일 송별식을 한다고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제가 술을 가까이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교님께서는 미국으로 가는 것을 취소하였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술을 가까이 한다는 것을 주교님께 전한 사람에 대해서 원망의 마음도 생겼습니다.
돌아보면 주교님의 따끔한 질책이 제게는 좋은 약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뒤로 술에 대한 절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술자리가 있어도 10시 전에는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새로운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산보하고, 책을 읽으니 하루가 즐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변화 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가 습관을 하나 가지면, 그 습관이 나를 변화시켜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25년 전에 주교님께서는 제게 적성성당으로 갈 수 있는지 저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제 손을 꼭 잡고 본당신부로 잘 지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적성성당은 땅은 넓었지만 교우들의 수는 적었습니다.
평일미사에 나오는 교우는 10명 미만이었습니다.
주일 미사에 나오는 교우도 100명 미만이었습니다.
당연히 주일헌금도 적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3년을 지냈습니다.
33년에 3년이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
저는 그곳에서 행복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고, 농산물 직거래도 하였고, 서울에서 오는 학생들의 농촌봉사 활동도 받았습니다.
차가 없어서 성당에 못 나오는 분들을 위해서 차량 봉사단을 만들었습니다.
4대의 봉고차가 교우들의 집으로 가서 모셔왔습니다.
여름에는 전 신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여름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에 큰 본당에 있는 동창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공기 좋은 곳에서 자연과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혈압도 있었는데 적성성당에 있으면서 모두 좋아졌습니다.
저의 건강을 위해서 배려해 주신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를 하십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머무시는 감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사순시기는 바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 미국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오히려 죄인으로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황>
지난달 학생 복사단 회식이 있었습니다.
고3이 되는 학생들이 복사를 졸업하고 마지막으로 후배 복사들과 식사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날의 메뉴는 자장면과 짬뽕이었지요.
그런데 한 친구가 너무 조심스럽게 먹는 것입니다.
보통 아이들은 급하게 먹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아이에게 “왜 이렇게 조심스럽게 먹어?”라고 물으니, “흰색 티셔츠를 입었거든요.”라고 답합니다.
저는 아이에게 “어머니가 빨래해 주시잖아. 더러워지면 빨래하면 되니까, 음식이 흰색 티셔츠에 조금 묻으면 어때?”라고 하니, 아이는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보기 싫잖아요.”
묵상 중에 이 아이의 말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음식 묻으면 빨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음식 묻은 옷을 입고서 돌아다닐 자기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이 보기 싫다는 것이지요.
이 말에 우리 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죄를 더 짓지 않으려는 노력보다, ‘나중에 고해성사 보면 되지.’라는 안일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이 죄를 짓는 내 모습이 과연 예쁠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보기 싫은 모습이고 그래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한데, 너무 쉽게 죄에 무감각해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쓸데없는 것에만 집중하면서 정작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보면 너무 화가 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를 정도로 화가 나셨을까요?
이 성전 안에 하느님의 사랑보다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난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죄를 씻기 위해 희생 제물을 봉헌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양과 소, 비둘기 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봉헌물을 판매하면서 누군가는 자기 탐욕을 채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그 돈을 낼 수가 없어서 죄스러운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오히려 죄인으로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황이 과연 예수님 보시기에 좋았을까요?
이런 탐욕과 이기심이 난무하는 곳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과 나눔을 통해서만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