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시대를 살면서 ‘넷플렉스’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무심코 보는 영상물인데 넷플렉스는 정보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메일을 보내줍니다. 예전에 보던 것을 다시 추천하기도 하고, 제가 좋아할 만한 영상물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은 넷플렉스를 이용하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같은 정보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작은 것일지라도 자료를 모으고 분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빅벨리 솔라’는 쓰레기통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단순히 쓰레기통만 파는 것이 아니라 모든 쓰레기통에 센서를 달았다고 합니다. 센서가 달린 쓰레기통은 쓰레기의 양을 중앙의 서버로 보내줍니다. 이렇게 모인 정보는 시의 환경미화 담당 부서로 보내집니다. 그러면 쓰레기를 수거할 쓰레기통의 정보를 알게 되고 쓰레기를 수거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쓰레기를 수거하면 정해진 날에 쓰레기를 수거하던 방식보다 70%의 비용이 절감된다고 합니다. 어느덧 우리는 이렇게 모든 자료와 정보가 연결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여러분야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힘든 곳은 항공업계와 여행업계입니다. 입국을 제한하는 나라가 있고, 여행계획을 취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가 취소되었습니다. 멕시코 청년 캠프도 취소되었습니다. 독일의 음악회도 취소되었습니다. 2019년에는 14억 명 정도가 해외여행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2020년은 11억 명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사업이나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의 여행은 취소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1억 명이 여행을 가지 않았으니 여행업계와 항공업계의 어려움을 쉽게 예상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국의 한 여행사에서 제주도 상공을 경유하는 여행상품을 출시했다고 합니다. 비행기 안에서 ‘치맥 파티’를 하고, 게임도하고, 한국영화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항공권은 1년 동안 사용가능하게 판매했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내리지 않는 제주도 여행상품이 매진될 정도로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 코로나19는 분명 위기입니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있는 퀸즈의 한인성당은 코로나19가 길어지면서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라디오 주파수를 이용해서 주차장에서 미사참례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은 영상을 통해서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주일미사를 영상으로 제작해서 본당 홈페이지와 유튜브에 올리고 있습니다. 주일학교도, 한국학교도 모두 영상을 통해서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임신부님은 매일 사목단상을 카톡을 통해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신부님의 글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비대면의 시대를 살면서 교회도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찾아가서 도와주는 교회도 있습니다. 박해시대에 한국의 교우들은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교우촌은 박해받는 교우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사제들은 교우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촌이 발각되면 또 다른 교우촌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비대면 시대의 교우촌은 인터넷을 통한 신앙공간입니다. 본당의 홈페이지, 교구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영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찾으면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슬픔과 고통이라는 손님을 잘 맞이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욥과 아브라함’입니다. 욥은 재산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가족들도 잃어버리고, 건강까지도 상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드렸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다고 해도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주님께서 거두어 가신다고 해도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설계자가 있음을 믿으며, 설계자는 충분히 자비하다는 것을 믿으면 슬픔 속에서도, 고통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여인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여인의 병을 낳게 해 주셨습니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충족하게 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랑, 희망,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는 우리를 어둠의 세계로 끌고 갑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은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 옵니다. 사랑과 희망, 믿음은 하느님의 축복을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보여 주신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조재형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dSwpnLA2kgM&feature=youtu.be
2020년 가해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은총이 무용지물이 되게 하지 않으려면>
복음: 루카 13,10-1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마침 열여덟 해를 앓는 허리가 굽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라고 하십니다. 직역하면 “병의 영”에서 풀려났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병의 영에서 풀려나게 하시는 방법은 성령을 부어주심을 통해서입니다. 오직 ‘거룩한 영’만이 병의 영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을 통하여 세속-육신-마귀의 압제에서 인간을 해방해 하느님의 지배를 받는 하느님 나라의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 안식일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목격한 회당장은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병을 고치는 행위는 ‘일’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라며 그들의 위선을 꼬집으십니다.
안식일은 분명 사탄의 압제에서 인간을 풀어주시기 위해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오용하여 자기 영광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면 주님은 그 선물을 거두십니다. 만약 청년이 된 자녀에게 자동차를 선물해 주었는데 계속 과속과 신호 위반을 하며 사고를 낸다면 자녀를 위해 그 차를 우선 빼앗지 않겠습니까? 안식일의 선물을 올바로 사용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안식일에 사탄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도 빼앗깁니다. 혹시 우리도 은총을 사용하기에 합당하지 않으면서 계속 은총만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류시화’의 『인생 우화』는 폴란드의 ‘바보들의 마을, 헤움’에서 일어난 일들을 우화로 엮은 책입니다. 우화의 형태로 세상에 존재하는데 잘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이야기들입니다. 여기에 「해를 보여주지 않는 이유」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근처의 상업 도시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마을 의회 대표 ‘베렉’이 그 도시 시청 벽에 걸린 해시계에 대해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침 그 동네에 시간의 기준이 될 해시계가 없어서 각자 조금씩 차이가 나는 시계들을 맞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만들어 마을 중앙 광장에 설치하기로 결의합니다.
해시계가 완성되었을 때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과 재정을 들여 만든 해시계가 진흙 웅덩이 속에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또 해시계는 이미 그 마을의 자랑이 되었기에 혹시 다른 마을 사람들이 해시계가 그렇게 취급되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이미지가 안 좋아질 것이 두려웠습니다.
헤움 사람들은 다시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어떻게 보호하면 좋을지 상의하였습니다. 그들은 해시계 옆에 벽을 만들어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게 하고 지붕을 씌워 비를 맞지 않게 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또 막대한 재정을 들여 누가 보아도 자랑스러운 해시계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마을 중앙에 세워진 어떤 도시에도 없는 해시계 박물관을 보며 내심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해시계는 은총입니다. 은총은 은총을 주시는 분의 목적에 의해 쓰여야 합니다. 그러나 은총을 받은 사람이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 은총 주인의 의도대로가 아니라 그 은총을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주어진 은총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않게 됩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보시면 앞으로 은총을 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신 은총도 빼앗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안식일의 은총을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하려 했기 때문에 그 주인이 참 은총으로 오셨을 때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많은 은총을 받을 방법은 무엇일까요? 교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은총의 목적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행해져야 하는 것이 ‘규칙적인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 때는 이미 주어진 은총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그 은총들을 통해 어떻게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지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이때도 이것, 저것 다른 것만을 주님께 청한다면 이는 자기 영광만 추구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십니다. 지금 받은 은총에 감사하고 주님 영광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에게는 그분께서 알아서 합당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니 미사 때 이것저것 청하는 것보다 먼저 받은 은총에 감사합시다. 이것이 다른 은총도 받을 방법입니다. 성당이 성황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책에 제가 볼 때는 유일하게 현명한 판단을 내린 사건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의회를 찾아와 집이 비좁아 죽겠다고 호소하였습니다. 단칸방에 사는데 잠깐 들른 친척들이 아예 눌러앉겠다고 그 집에 짐을 푼 것입니다. 의회는 그러면 소를 한 마리 집에 들여놓으라고 합니다. 분명 의회가 현인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믿은 그 사람은 그렇게 했습니다. 다음날 방도 좁은데 소 때문에 더 좁아졌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닭을 몇 마리 들여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습니다. 그다음 날 또 하소연하였더니 닭을 쫓는 개 한 마리를 들여놓으라고 했습니다.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그제야 의회는 개를 빼면 닭이 날아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은 닭을 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조용해졌습니다. 다음은 소를 빼라고 했습니다. 소똥 냄새로부터 해방되고 큰 공간이 생기자 그 사람은 크게 고마워했습니다. 그렇게 넓은 집에서 사는 것은 축복이라고 여겼습니다.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이런 똑같은 일이 전례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이 사람은 더 큰 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진 것에 감사하면 그 가진 것을 더 많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례는 이것을 목적으로 존재합니다. 특별히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봉헌하며 주님을 찬미한다면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은총들을 그 목적대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졌다고 믿는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전삼용신부)
2020년 10월 26일 월요일
[녹]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입당송
시편 105(104),3-4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신자들에게 주님 안에 있는 빛이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를 고쳐 주시고, 이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망신을 주신다(복음).
제1독서
<그리스도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32─5,8
형제 여러분,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3 성도들에게 걸맞게, 여러분 사이에서는
불륜이나 온갖 더러움이나 탐욕은 입에 올리는 일조차 없어야 합니다.
4 추잡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상스러운 농담처럼
온당치 못한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감사의 말만 해야 합니다.
5 이것을 꼭 알아 두십시오.
불륜을 저지르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에서 받을 몫이 없습니다.
6 여러분은 어느 누구의 허황한 말에도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러한 것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립니다.
7 그러므로 그런 자들과 상종하지 마십시오.
8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2.3.4와 6(◎ 에페 5,1)
◎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라.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17,1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0-17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주님께 올리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고
저희가 바치는 제사가 주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0(19),6 참조
당신의 구원에 우리가 환호하며,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을 높이리이다.
<또는>
에페 5,2 참조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셨네.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놓으시어, 하느님께 향기로운 예물로 바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체성사의 은혜를 풍부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거행하는 이 신비를 그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왜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될까요?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탈출 20,11ㄱ). 그런데 피곤을 모르시는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휴식을 취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를 알려면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왜 창조하셨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안에 넘치는 사랑을 아끼지 않으시고 누군가에게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창조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먼저 창조하신 것은 인간에게 풍요로운 환경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이렛날, 그분께서는 그 인간을 드디어 만나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분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온전히 만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안식일은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과 일치’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율법은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허리 굽은 여인은 안식일에 회당에 있었는데도 도저히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사정을 헤아리셔서 그 여인에게 손을 얹으시어 낫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인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손길로 병마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분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반면 회당장은 굳이 안식일에 치료를 해야 하냐며 분개합니다. 그는 안식일의 참의미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