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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활짝 갠 아침에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의 기운을 받으니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바람이 가을을 안겨주니 나는 생기가 돋아난다. 기분(氣分), 기운(氣運), 생기(生氣) 모두가 기(氣)를 포함하고 있다.
새로운 강사 선생이 왔다. 노인복지관 수업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기를 줄 수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교수님이 자기 대신 보낸 무용학과 출신 대학원생이다. 무용학과 출신에게 건강 플러스라는 건강 증진 프로그램을 수강한다는 것이 자못 못마땅하지만, 그래도 그 교수님이 보낸 강사라 기대가 반이고 또 우려도 반이다.
생글생글 웃으며 시작한 첫 수업,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된다. 지금까지 배웠던 것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노인을 위한 무용을 가르칠 모양이다. 양팔을 벌리고 나비야 노래를 부르면서 나비가 날 듯이 양팔이 올라갈 때는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내려올 때는 손끝은 하늘을 향하며 나긋하게 내린다. 발도 무릎을 높이 올려 날아오를 듯한 걸음으로 사뿐히 걷는다.
초등학교 일학년,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선생님을 따라 유희(遊戲)를 하던 유년의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초등학교 일학년은 유희를 배우는지 모르지만 아마 지금은 유치원에서는 더욱 진화된 유희를 배우고 있는 것 같다.
손녀 원지의 유치원생이었던 때가 생각났다. 제 어미가 직장 일로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내가 유치원에서 원지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럴 때면 원지는 그날 유치원에서 배웠던 발레를 나에게 가르치겠다고 곧잘 나섰다. 엄하게 호령하며 “다리를 이렇게 찢으세요. 더 벌려요! 그것도 못 해요!”라며 나의 어깨를 온 힘을 다해 눌렀다. 아프다고 하면 엄살을 부린다고 호되게 꾸중했다. 내가 손녀를 본 것이 아니라 손녀가 할아버지를 본 것으로 생각하여 “할아버지 보기”라는 제목의 수필을 썼던 적이 있었다. 손녀 보기든, 할아버지 보기든 조손 간에 서로 기를 주고받은 것이었다.
그랬던 원지는 지금 중학교 이학년이다. 커가면서 TV에 나오는 아이돌의 춤을 곧잘 따라 추며 음악만 나오면 장소에 상관없이 몸을 흔들었다. 그런 원지가 커서 어떤 아가씨가 되고, 어떤 숙녀가 될지 늘 궁금했다. 혹시, 나중에 대학을 무용학과에 가겠다고 부모의 속을 썩이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그러고 보니 그 강사 선생은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얼굴이고, 몸짓이며 미소까지 낯설지가 않다. 잘 생각해보니 내가 늘 상상하던 손녀 원지의 미래 모습이다.
생기발랄하게 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수업을 수강하고부터 손녀 원지가 무용학과를 가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회와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을 고쳤다.
손녀의 미래 모습을 본다는 생각에 수업은 마냥 즐겁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다. 대부분 수강생이 그 시간만 되면 싱글벙글한다. 수강생이 늘어만 가는 것을 보면 모두 그녀를 좋아하고, 생기발랄한 기운을 받는 것을 즐기고 있다.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을 소환시켜 주는 것에 더하여 그녀에게서만이 풍기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보태어진 것이다. 무엇인지 막연하지만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그녀와 그녀의 춤에서 받았고 그로 인하여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그것은 분명히 그녀에게 기를 받는 것이다.
기는 활동하는 힘, 뻗어 나가는 기운, 숨 쉴 때 나오는 기운, 막연한 전체적인 느낌, 분위기, 동양 철학에서는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이 되는 기운, 즉 원기(元氣), 이기(理氣)라고 사전에 정의되어있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을 통하여 좋은 감정을 받게 되는 것을 기(氣)를 받는다고 한다. 반대로 상대방을 통하여 나쁜 감정을 받게 되는 경우는 기를 뺏긴다고 말한다.
손녀도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전달해주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