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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12:35~37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서기관들의 위선, 가난한 과부의 헌신 12:38~44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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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은 다윗이 ‘주’라고 칭한 그리스도가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높은 자리를 원하며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외식하는 서기관들은 중한 판결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한편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은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으니 누구보다 많이 헌금했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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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12:35~37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지 않으면 성경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필사하거나 가르치는 학자들임에도 성경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을 압제에서 해방시킬 정치적 인물로만 이해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메시아를 ‘내 주’라고 고백했으며, 하나님이 원수를 굴복시키실 때까지 메시아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찬양했습니다(시 110:1). 예수님은 다윗의 시편을 들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을 넘어 ‘하나님 아들’임을 일깨우십니다(37절).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롬 1:3) 죄 사함의 권세를 지니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다윗이 그의 자손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주’라고 호칭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호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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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들의 위선, 가난한 과부의 헌신 12:38~44
예수님은 위험 수위에 달한 서기관들의 위선을 경고하십니다. 서기관들은 종교 의식 때 착용하는 ‘긴 옷’을 입고 시장을 다니며 인사를 받는 것, 회당과 잔치의 상석에 앉아 위세 부리기를 즐겼습니다. 또한 남편이 남긴 상속금에 대한 법률 자문을 요청하는 과부들에게 비싼 수임료를 요구했으며, 오래 기도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경건을 과시했습니다(38~40절). 예수님은 자신의 지위를 악용하는 서기관들에게 엄중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반면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드리는 두 렙돈의 헌신에 주목하십니다(42~44절). 이는 생활비 전부로, 과부의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보여 줍니다. 가진 자들의 탐욕과 과부의 헌신이 대비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과 선한 삶에 주목하십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서기관들의 위선과 과부의 헌신을 대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위선과 진실한 헌신을 구별하시는 주님 앞에서 나는 어떠할까요?
한절묵상:마가복음 12장 43~44절
하나님은 그분 백성의 마음을 보십니다. '보다 많이'라는 말은 비교급 표현으로, 과부의 헌금이 모든 사람보다 더 많다는 뜻입니다. 과부의 헌금은 두 렙돈에 불과한 적은 금액입니다. 그러나 과부가 드린 생활비 전부는 그에게 생명과도 같은 큰돈입니다. 예수님은 액수가 아니라 그 의미를 보시기에 더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척도는 '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이 담긴 우리의 '중심 '입니다!
주님의 완전한 선물이 영원토록 우리 것이 된다는 것, 이것이 성도가 진정 소망해야 할 바다. - 찰스 스펄전
오늘의 기도
주님, 사람의 시선이나 평가에 갇혀 중심을 보시는 주님을 생각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제 마음과 걸음을 밝히 비추시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붙들고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게 하소서. 저를 위한 종교적 허영을 버리고, 주님을 향해 순전한 헌신을 드리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15 내 죄 속해 주신 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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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으니 그의 지위가 다윗보다 상위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또한 서기관들을 조심할 것을 당부하시며, 과부의 모범적인 헌금을 칭찬하시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높은 자리를 원하며 과부의 재산을 가로채는 서기관들을 향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다윗의 주, 그리스도에 대한 다윗의 고백, 서기관들의 외식, 가난한 과부의 헌금 등입니다.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 서기관들의 메시아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을 수정하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이 인용하신 것은 다윗의 시편 110:1절의 말씀입니다. 곧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에게 주님이 두 분입니다. 전자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 후자 주님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문제는 다윗이 후자 주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후자 주님은 자신의 자손으로 올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자신의 혈통으로 올 자손을 다윗이 주님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 당시 서기관들의 작태에 관한 주님의 비판입니다. ‘긴 옷’은 학자들이 입고 다니는 가운을 말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땅에 질질 끌리는 화려한 긴 술이 달려 있습니다. 그들은 이 옷을 입고 그렇게 뻐긴 것으로, 높아지기를 바라서 회당에서 인기 있었던 ‘모세의 자리’라는 자리와 만찬 석에서 주인의 바로 왼편 자리에 앉기를 선호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길게 기도하는데 이는 진실되게 기도할 내용이 많아서가 아니라 오직 경건하게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 가장 심각한 점으로, 과부와 같은 약자의 재산을 착취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을 봐주는 체 하면서 실은 자신들의 배를 채웠던 것입니다. 실제로 서기관들은 과부가 남편의 유산을 정리할 때 자신들에게 위임된 율법적인 해석과 판결을 통하여 은밀한 방법으로 유산의 일부를 착복합니다. 심지어 빚 때문에 고생하는 과부들의 집을 저당 잡아 재산을 가로챘다고도 합니다.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그들에게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입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범죄하면 더 중한 판결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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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 과부가 드린 헌금에 대한 주님의 판단입니다. 과부의 생활비 전부라고 했으니, 어쩌면 굶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계보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연 그 과부는 굶어 죽었을까요? 엘리야 시대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하필 이방 땅 가난한 사르밧 과부에게 보냅니다. 그녀는 마지막 음식을 엘리야에게 줍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 집에 밀가루와 기름을 끊임없이 공급하셨죠. 사르밧 과부를 그렇게 하늘에서 도와주신 것처럼 그 과부를 하늘에서 외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도 은밀히 복을 빌어 주었을 것입니다.
헌금은 마음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문제이지요. 이는 마음의 중심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것, 내 시간, 내 사람, 내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교회가 없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없어서 헌금을 못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의 과부가 헌금한 성전은 예루살렘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강도의 소굴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교회에 헌금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낸 돈 회수하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칭찬하십니다.
하나님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 돈의 용도를 개의치 않는 이유입니다. 헌금은 내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금지출은 사용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용의 정당여부를 그 사람과 계산할 것입니다. 바치는 사람은 바치는 사람의 몫만 하면 되지요. 장로피택에서 누락되었다고 그간 낸 헌금을 돌려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세상입니다. 계산하지 말고, 우리 것 주장하지 않고 주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를 드린 사람은 또 하나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전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기부도 아닙니다. 아직 자신의 돈일뿐입니다.
주님이 과부의 헌금을 기뻐한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다 줄 수 있습니다. 못줘서 못내 아쉽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헌금뿐만 아니라 시간, 건강, 더 나아가 우리 자신도 드릴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2:35~44 헌금의 액수가 아닌 태도를 보신다.
성전에서의 마지막 가르침이 있다.
그 동안 성전에서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책 잡기 위해서
자기들의 전공을 가지고 질문하고 도전했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그랬고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이 그랬고
사두개인들이 그랬고 서기관들이 그랬다.
모두가 더 떠나가자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질문을 하신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냐?(35)는 질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너무나 상식적인 질문을 하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질문이라 아무도 대답을 못했던 것 같다.
예수님이 상식과 다른 말씀을 가르쳐 주신다.
다윗이 시편110편에서 성령에 감동하여 말한 부분을 인용하여 말씀하시고(36)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는냐?(37)고 말씀해 주신다.
백성들이 즐겁게 들었다.(37) 할렐루야.
다윗은 적어도 대략 BC1,000년 경에 살았던
이스라엘의 목동이자 도망자이자 군인이자 시인이자 왕이였다.
그리스도는 지금 33살이니 AD33년에 살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은 상식이지만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는 것은 상식이 아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체성이시다.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말씀 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셨다.(요1:1)
그리스도는 맨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2)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으며
그 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요1:3) <현대인의 성경>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과 함께 거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하셨다.
나는 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아멘.
다윗 보다 먼저 계신 주님을 찬양한다.
두번째 서기관들을 삼가하라(39) 가르치시며 말씀하신다.
어떤 서기관들을 삼가하는가?
1. 긴 옷을 입고 다니는 자(38)
2. 시장에서 문안 받는 자(38)
3. 회당의 상좌에 앉는 자(39)
4.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자(39)
5.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40)
6.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40)
이런 자를 삼가하라 말씀하신다.
정리하면 어떤 사람을 삼가하라는 말씀인가?
명예욕, 탐욕, 위선, 불의, 교만, 거짓, 가식이 있는자를 삼가하라는 말씀이다.
진리보다 명예를 더 소중이 여기며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하며
알멩이보다 껍데기 포장지가 더 소중한 자를 경계하라 하시는 말씀이리라.
주님 내가 이런 서기관 같은 사람 되지 않게 하옵소서.
세번째 과부의 헌금에 대해서 가르치신다.
헌금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나 가르치시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르치신다.(43) 할렐루야.
이런 의미에서 헌금은 부담이 아니라 특권이로구나.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42)
나의 헌금을 보시는 주님
정직하게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정성을 담아 드리길 원합니다.
렙돈은 헬라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이고
고드란트는 로마의 가장 작은 화폐의 단위이다.
두 렙돈은 하루 품삯의 1/64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일당이 10만원이면 1,560원쯤 되는 돈이다.
나는 이 과부보다도 더 적게 헌금할 때가 있구나.!!! 주여.
예수님이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43)고 말씀해 주셨다.
왜냐하면 이 과부는 자기의 모든 소유 즉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44)
쉽지않는 결단이다.
액수를 보시지 않으시고 정성을 보시는 주님
일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원하시는 주님
주님 앞에 전부를 드리길 원합니다.
최선의 것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리길 원합니다.
과부의 마음으로 드리길 원합니다.
주님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성전 헌금함 앞에 앉으셔서 어떻게 헌금 하는지 다 보셨는데, 아주 민망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누가 교회 헌금함 앞에서 얼마나 헌금하는지 지켜 본다면 무례하다고 할 것이지만, 주님께서 지켜 보시는 것을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정말로 다 보고 계십니다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애3:60)
그리고 사람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액의 헌금을 한 부자들이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평가하겠지만, 예수님은 오직 두 렙돈 현 시세로 약 1,500원을 헌금한 한 가난한 과부가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금액을 기준으로 삼지만, 하나님은 비율을 기준으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막12:43~44)
악인들은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시10:11)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만 아니라 악인도 다 아시고, 의인의 행위만 아니라 악인의 행위도 다 보십니다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 하나 다 보시느니라"(욥11:11)
이렇게 주께서 다 보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다 보시는 주님이 우리의 억울함도 보시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인정하시고 원통함을 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애3:59)
우리의 고난도 다 보고 계십니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시31:7~8)
그러므로 주께 간구하기 원합니다
"주여 와서 보옵소서"(요11:34)
그리하면 영화로운 처소에서 다 보시고 은혜 베푸실 줄 믿습니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사63:15)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35-37절 ‘다윗의 주’이십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을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다윗의 주’이심을 증명하시기 위해 다윗의 기도(시 110:1)를 인용하십니다. ‘주께서 내 주께’라는 다윗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나의 주님(메시아)께’라는 말입니다. 그는 오실 메시아를 ‘나의 주님’이라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적 후손으로 오셨지만, 그보다 선재하신 분으로 다윗보다 크신 분입니다. 다윗의 위를 잇는 이스라엘의 왕일 뿐 아니라, 모든 왕의 왕이신 만군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편협하고 제한된 이해를 벗어버리지 못한 이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새롭고 낯선 예수님, 말씀을 발견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41-44절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과부의 두 렙돈을 인정하십니다. 헌금의 액수보다 그 진정성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부자의 헌금은 많은 소유 중에 극히 일부를 드린 것이지만, 과부의 두 렙돈은 그가 가진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과부의 두 렙돈은 많은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낫다는 교훈의 본보기입니다. 여전히 헌금과 구제는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주님과 말씀에 대한 헌신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주님은 나의 헌금과 물질 사용에 어떤 평가를 내리실 것 같습니까?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38-40절 신앙적인 외식을 경계해야 합니다. 최고의 율법학자로 존경받던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회원으로 많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런 위치에 있는 이들이 겸손하게 제 본분을 다하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중독되면 거만해지기 쉽고, 외식하기도 쉽습니다. 이렇듯 높아진 눈으로는 약자의 형편을 살필 수 없는 것이 필연적 귀결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돌보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도리어 그들의 율법해석은 가진 자를 옹호하고 자신이 지닌 지위를 통해 과부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약탈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역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으로서(마 13:52) 명예욕, 소유욕, 종교적 위선을 늘 조심해야 합니다. 늘 낮은 자리를 찾고, 겸손한 태도로 섬기고 있습니까?
기도
제 지식과 지위를 자랑하지 않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겸손히 섬기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정작으로 ‘인사받기’에 합당하고 ‘높은 자리와 잔치에서 윗자리’에 앉아야 하실 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에 과부들을 포함한 많은 연약한 자들이 종교지도자들이 부과하는 과도한 성전세와 헌금 강요를 받아야 했습니다.
여전히 성전은 건축되고 있었고 많은 재정이 요구되었으므로
부자들은 제사를 드리고 남긴 잔돈을 다양한 목적을 위한 헌금통에 자신 있게 나누어 내며
자신들을 과시할 수 있었지만
가난한 과부와 연약한 자들은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을 생계가 달려 있는 렙돈 동전 두 개까지 내어 놓아야 하는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마가가 이 과부의 모습을 메시아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 이어 기록한 것은 이 땅의 메시아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오셔서 모든 연약하고 아픈 이들을 가르치시고 고치시며 성전을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하시면서도 결국 핍박과 고통 가운데 그 육신과 생명의 피를 쏟아 구원을 이뤄야 하는 전부를 드리는 주님의 사명과 닮아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풍성히 주시고 아끼지 않으시는 그 은혜를 받은 믿음의 자녀로 세상 가운데 거룩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고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오늘 하루의 시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인정하는 삶❞
주님은 세상의 가치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기에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 하나님 나라 가치에 합당한 삶을 무엇입니까?
➲ 헛된 욕망들을 멀리하는 삶입니다(35~37절).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 질서를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35절)이라고 하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36절,새번역)고 하십니다. 세상의 가치 질서로 보면 분명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맞습니다.
그러나 ‘다윗 스스로가 그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37절,새번역).. 예수님은 다윗의 보좌와 다윗의 왕국을 훨씬 능가하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결국 서기관들이 꿈꾸는 나라를 비판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지 못하고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을 겨냥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들뿐만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은 다윗이 이루었던 그런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등을 두루 갖춘 그런 강대국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적인 복을 안겨다 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꿈꾸고 있었던 메시아의 모습을 예수님으로부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는 다윗이 이룬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나라입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잘 믿고 살아가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여전히 세상 나라에 그리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내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믿고 바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복의 개념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여기고 있다면 나의 믿음을 심각하게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타이틀만 가지고 있지 나의 내면에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고, 바라는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심지어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으로 교묘하게 포장하여 결국엔 나의 만족을 이루는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합당한 삶에는 멀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헛된 욕망들을 멀리하여 참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세상 기득권을 내려놓는 삶입니다(38~40절).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 질서를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 즉 율법학자(새번역)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면서 경건을 과시하며 일반인들과 구분하려 했습니다.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고,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이용해서 과부의 집을 삼키고 길게 기도함으로써 위선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 그들의 행위에 대해 예수님은 더 큰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높은 자리에 오른 자들이 자신의 힘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바라고, 더 많은 특권을 누리고 싶어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배만 채우는 일에 자신이 가진 특권을 남용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분노합니다. 세상의 가치 질서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바라고 꿈꾸는 하나님 나라는 이와는 정 반대입니다. 목사라고 하는 옷만 입고 있지, 그 옷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나의 위선적인 신앙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에 앉기를 즐겨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세상 기득권을 내려놓고 참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삶입니다(41~44절).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 질서를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헌금함에 부자들이 많은 액수의 돈을 넣은 것보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은 것이 훨씬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렙돈은 당시 화폐의 최소 단위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44절,새번역)털어 넣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 질서는 가진 게 많아야 인정을 받지만,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서는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 만 의지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최고로 높음을 받습니다. 나에게 많은 것이 있어서 남을 돕거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자족하는 마음으로 내가 써야 할 것을 떼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 때, 기꺼이 나의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진정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통해 참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이기적이고 편협한 삶의 틀을 버리고 겸손과 진정성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며, 헛된 욕망을 버리고 오직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막 12:35~44절)
오늘의 말씀요약
예수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했는데 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외식적이니 더 중한 판결을 받을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셨고,
가난한 중에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드린 과부가 가장 많이 헌금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다윗의 주(12:35~37)
예수님은 성전에서 또 다른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분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어째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미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함으로써(36절; 시 110:1 참조)
그분이 자기보다 높음을 인정했는데,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다윗보다 먼저 계셨습니다. 서기관들은 단순히 일차원적으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할 뿐, 그 다양한 측면과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예수님은 다윗보다 크신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이 주라 부른 메시아, 온 세상의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 적용 질문: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으며, 어떻게 높여 드리나요?
전부 드린 과부(12:38~44)
참경건은 없으면서 사람들 눈을 의식해 행동하고 남에게 높임받기를 즐기는 서기관들의 위선과
외식을 예수님이 폭로하십니다. 이는 섬기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빼앗으면서도 남들에게는 경건하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그들의 행태는
하나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증스러운 모습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지켜보시며 그를 칭찬하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양은 적어도 전부를 드린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풍족한 중에 많이 드린 부자의 헌금보다 더 가치가 큽니다.
하나님께는 헌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그 마음과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이 경고하신 서기관들의 나쁜 행태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내가 외식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무엇이며, 그것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제가 알고 있는 주님의 모습을 전부로 여기며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소서.
매 순간 새롭고 다채로우신 주님의 성품을 알아 가기 원합니다.
그럼으로 제게 있는 것을 기꺼이 자원해서 드리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하소서.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모든 것을 우리를 향해 허락하신
그 놀라운 은혜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귀한 은사와 성령의 능력으로
이웃을 더욱 사랑하고
오직 여호와의 기쁨을 위하여 걸어가는
복된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을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저 북녘땅의 백성들에게도 그 놀라운 빛과 사랑을 비춰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수많은 은혜로 이끌어 주신 그 뜻에 합당하게 쓰임 받는
축복의 통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