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마을의)당나무-마을 수호신
당나무의 나이를 마을 노인에게 물어보면 ‘우리야 모르지, 우리가 어릴 때도 이만큼 큰나무 였어’ 라기가 일수다. 당나무는 일반적으로 전설을 달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면 마을의 아득한 옛날 역사인지도 모른다.
나무를 숭상하는 수목신앙은 우주목 개념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의 토속신앙은 산악신앙 못지 않게 수풀 신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천경림 즉 오늘의 오능 숲이 무속 신앙의 중심지였다. 한밤 마을의 동구를 막고 있는 숲도 신성한 장소이다. 해와 달의 전설에서 보듯이 당나무는 땅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통로이다. 따라서 동네 앞에 있는 숲은 우리 문화에서 가장 원초적인 신앙의 대상물이다.
오래 전에 감포의 감은사를 찾아갔다. 절터의 구석에는 울긋불긋한 헌겊을 달고 있는 큰 나무가 있었다. 감은사는 신라시대에 얼마나 위엄있는 절이었는가. 왕의 명복을 빈 원찰이었는데 그 절은 허물어져서 사라져버리고 당나무가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민족의 얼이라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이어진다. 세도 당당하였던 불교는 빛을 잃고 사라지더라도 오늘까지도 천덕꾸러기의 대접을 받고 있는 무속신앙이 살아 있다. 한밤 마을도 부림 홍씨의 양반 마을이다. 아래 것들의 마을이 아니다. 유학을 닦는 선비의 마을인데도 토속의 기도처가 어디보다도 잘 보존되어 있다. 유학자들이 토속신앙을 음사라 하여 얼마나 학대하였는가를 생각하면 신기하기는 감은사의 당나무와 마찬가지이다.
마을 한 가운데 쯤에 대율사라는 절이 있다. 오래 된 절 같지는 않고 최근에야 절집의 간판을 단듯하다. 속인들이 사는 집 마냥 대문이 닫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부처님을 모신 전각도 용화전이라고 하였으니 미륵불을 모신다는 뜻이다.
고려 초 쯤에 조상한 입석불이다. 미륵불이라고 하였으나 도상에서는 어디를 보아도 미륵불이라고 부를 만한 건덕지가 없다. 나는 이 부처님은 절집에 계시는 부처님이라기 보다는 민중들이 신봉하는 그냥 미륵불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왜냐면 조선 후기에 미륵불은 단순히 토속신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부처를 민불이라고도 말한다. 운주사에서 보듯이 민불이라고 하면 제주도 돌 하르방도 닮았고, 장승의 모습이기도 하고, 부처님의 흉내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억불 정책으로 폐사가 된 절의 부처님이 땅 속에 묻혀 있다가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면 미륵불이라고 불렀다. 대중의 토속신이 되었다. 왜냐면 대중들 사이에 미륵불은 땅에서 솟아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밤 마을의 미륵불은 통일신라 불상이 퇴화기를 맞으면서 도상으로는 많이 흐트러진 모습이지만 부처가 틀림없다. 마을 사람들도 미륵불이라고 불렀다. 미륵불은 대중들이 접근하기가 가장 쉬운 부처이기 때문이리라. 이런 유형의 부처님은 굴불사의 마당에서도 만날 수 있다. 듣기도 거북한 암부처님이라고 한다지만 오히려 대중에게 더 친근한 이름인지도 모른다.
미륵부처님은 백성이 힘들 때마다 나타나서 그 아픔을 나누어 가진다. 미륵불을 숭상하던 시대의 백성들이야 농투성이들이다. 오늘날에도 시골 마을에서 미륵불이라고 부르는 부처님은 목이 잘린 부처님도 계시고, 반대로 몸통은 어디로 갔는지 머리만 남은 부처님도 계신다. 백성처럼 아픈 세월을 겪으신 부처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을 사람들이 찾아만 주면 마을로 뚜벅뚜벅 걸어와서 마을에 정좌하시는지 모르겠다. 한밤 마을 미륵님도 이렇게 마을로 내려오셔서 동민들과 함께 기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밤 마을의 고샅길은 꾸불꾸불하여 마치 용트림을 한 모습이다. 묵직한 돌로 쌓은 돌벽이 골목길을 성벽처럼 담을 이루면서 멀리멀리 이어진다. 일부러 마음먹고 쌓은 돌담이 아니다. 돌투성이인 땅을 밭으로 일구면서 주워도 주워도 끝이 없는 돌로서 만든 돌담이다. 돌을 파낸 자리에 흙을 부풀리어 밭을 만들었다. 이 돌담은 천년 너머 살아온 농민들이 피와 땀과 눈물이 섞여 있는 기념물이다.
골목길을 따라서 마을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면 튼 대청이 있는 누각이 나온다. 한밤 마을이 또 하나의 자랑으로 내세우는 것은 크다란 대청 마루가 있고 맞배 지붕을 한 바로 이 누각이다. 누각 앞은 널직한 빈터이다. 본래는 절터였으나 조선 초기에 누각으로 바꾸어 세운 후에 여러 번 중창을 하였다. 한때는 마을의 학동을 가르키는 서당이었다. 지금은 경로당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절에서 서당으로 그리고 경로당으로 유전의 세월을 겪은 것이 재미있다. 대청마루에 걸터 앉아서 마을 너머로 바라보고 있으니 팔공산에서 내려온 한 줄기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느라 시원하였다.
지난 번 민학회 답사 때는 마을의 풍물패가 한 마당 신나게 놀았다. 농사를 짓는 마을에서 풍물놀이란 유희적 성격이 강하지만 종교의례의 속성이 있다. 춤과 노래는 고대 의례에서는 필수 조건이다.
농경사회의 기본 단위는 마을이다. 마을이 공동체 신앙의 중심이고 주재자이다. 그러나 개인의 기복은 마을 공동체가 아닌 가정에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의 옛 가정에는 가신(家神) 즉 가정 지킴이가 있었다. 성주신을 위시하여 부엌신, 우물신 등 당양하게 있었다. 최근에는 가신 즉 가정 신의 명칭을 일제 때 만들었다 하여 ‘집안 지킴이’ ‘마을 지킴이’라는 말을 사용하자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전통적인 신앙 형태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정월 보름이면 마을의 풍물패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신명나게 한판 놀아준다. 우리집 마당에 풍물패가 신나게 괭과라를 두들기고, 마당 가운데에 펴둔 멍석 위에 쌀을 담은 함지박을 내오던 모습이 내 기억에 선명하다. 이런 놀이는 모두 고대사회의 의례에 뿌리를 두고 있다. 풍물놀이는 유희의 성격을 띠면서도 마을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마을에서 공동의 휴식 공간에서 벌이는 풍물놀이는 농사일과 그에 따른 제사의례적인 의미도 있다. 말하자면 개인의 안위와 마을의 안위를 비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다. 풍물놀이는 농경사회에서 노동의 공동체적 결집을 도모하는 축제적 성격을 지녔다.
풍물놀이는 산업사회가 이루어 놓은 도시에서도 그 기능을 잃지 않을 것이다. 팔공산 아래 마을인 한밤 마을(대율리)에서 우리의 마을 신앙을 알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