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주 조리 파주삼릉(坡州三陵)을 찾아서 ①
-진종(眞宗)과 효순왕후(孝純王后)의 영릉(永陵)-
지난 3월 17일에 있었던 정월 성지순례의 마지막 행선지는 파주삼릉(坡州三陵)이었습니 다. 3시경 광탄의 용암사를 물러나온 우리는 78번 도로에서 98번과의 교차점에서 98번 도로로 바꾸어 타고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번지에 소재한 파주삼릉에 도착했습니다. 용암사에서 파주삼릉까지는 승용차로 약 20분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파주삼릉에 도착하니 우선 낯익은 석비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선 기념비'입니다.
삼릉 관람요금은 만 19세~ 64세 개인은 1,000원이고 10명 이상 단체는 800원입니다. 매표시간과 관람시간은 계절마다 다소 차이가 있으나 매표시간은 9시부터입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입니다.
조선왕릉 세계유산
『조선왕릉(공릉, 순릉, 영릉)은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 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울어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 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등재일 : 2009년 6월 30일』
조선왕릉 전체는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사적 제205호 파주삼릉 종합안내도
파주삼릉(坡州三陵)에 대하여
파주삼릉은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의 세 능을 말는데, 공순영 삼릉이라고도 합니다.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번지에 소재합니다.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 에 등재 되어 있습니다. 사적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공릉(恭陵)은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의 원비(元妃)인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1461) 한씨 (韓氏)의 능이고, 순릉(順陵)은 조선 제9대 성종(成宗)의 원비(元妃)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776) 한씨(韓氏)의 능이며, 영릉(永陵)은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맏아들인 진종 (眞宗 1719~1728)과 효순왕후(孝純王后 1715~1751)의 쌍릉입니다.
파주삼릉 역사문화관
역사적인 파주삼릉에 대하여 참배하고자 미소님께서 단체입장표를 끊어 들어가 직접 발걸 음을 하니 기분이 무척 고무되었습니다. 왕릉진입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문화해설사 한 분 이 다가오셔서 해설해 드려도 괜찮겠냐고 하셔서 우리는 이를 반갑게 환영하였습니다. 파주삼릉에 오기 전 미리 소상히 파악을 하고 온 터이지만 이곳에서 전문적인 해설사의 왕 릉 해설을 들으면 더욱 생생하게 왕릉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으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 닐 수 없었습니다.
삼릉(三陵)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삼릉으로 가는 길에 만난 재실
파주삼릉에 대한 브리핑입니다.
해설을 들으며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재실(齋室)에 대한 설명
재실은 공순영 삼릉의 제향(祭享)을 준비하고 능참봉(陵參奉)이 기거하는 곳이랍니다.
진지한 설명과 귀기울여 듣는 법우님들
문화유산 해설사 선생님의 성함을 메모해 두었는데 수첩이 달아나는 바람에 기억을 못하 겠네요.
재실을 지납니다.
여기는 공순영 삼릉의 갈림길 우리는 영릉쪽으로
시대 순서상으로는 공릉, 순릉, 영릉이 맞을 것 같은데 능 안내상으로는 영릉, 순릉, 공릉 이 순서인 모양입니다.
멀리 영릉의 모습이 보입니다.
영릉에 도착했습니다. 정자가 뒤로 쌍릉이 보입니다.
영릉(永陵)은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맏아들인 진종(眞宗 1719~1728)과 효순왕후 (孝純王后 1715~1751)의 쌍릉입니다. 진종은 7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지만 10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복동생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진종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가 즉위한 후에 추존되었으며, 효순왕후는 37세까지 홀로 살다 생을 마쳤습니다.
해설사의 말씀이 능침공간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능침공간의 보호를 위하여 당국 에서 일체 불허하고 있다고 합니다. 작년 정릉참배와 같이 안내자의 인솔을 받으면 될 줄 알았는데 해설사와 동반해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시 간을 정해서 안내원의 인솔로 관람할 수 있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능침공간을 못가게 되 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속된 말로 앙꼬 없는 찐빵과 같았습니다.
홍살문인 정문(旌門) 앞에서
홍살문(紅箭門)
능에 가기에 앞서 정문(旌門)이 보이는데 이는 영혼이 출입하는 문으로 이를 홍살문(紅箭 門) 혹은 홍문(紅門), 또는 신문(神門)이라 합니다.
홍살문 옆의 배위(拜位)
제향을 드리러 들어가기 전 여기서 능을 절하는 곳입니다.
여기가 참도(參道)입니다.
정문(旌門)에서 정자각(丁字閣)으로 직선으로 참도(參道)가 나 있습니다. 참도(參道)에는 신도(神道)와 어도(御道)가 있습니다. 좌측은 조금 높게 길을 내어 신도(神道)라 하여 혼령 이 다니는 길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은 신도보다 낮게 조성하여 어도(御道)라 합니다. 이 길은 왕(王)이나 제과(祭官)들이 다니는 길입니다. 그런데 영릉의 참도에는 신도(神道)와 어도(御道)의 구분이 없습니다. 아마 이는 복원을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누가 법도 를 무시한 채 조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시 조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교육상 문제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문화해설사님께 잘못된 것이 아니냐 하니 그렇다고 하시네요.
정자각(丁字閣)
정자각(丁字閣)이란 왕과 왕비의 신좌(神座)를 모시고 각종 제사를 지내는 정자(丁字) 형태 의 건물입니다.
신계(神階)와 어계(御階)
왼쪽은 혼령이 오르내리는 계단이라 하여 신계(神階)라 하고, 오른쪽은 왕과 제관이 오르 내리는 계단으로 어계(御階)라 합니다. 이 어계는 동계(東階)라고도 합니다.
어계(御階)의 모습
왕과 제관이 오르내리는 계단으로 어계(御階)라 하는데 동계(東階)라고도 합니다. 반대편 에도 이같은 계단이 있는데 이를 서계(西階)라 합니다. 서계(西階)는 축관(祝官)이 축문(祝 文)을 소전대(燒錢臺)에서 태우기 위해 오르내리는 계단인데 여기에는 소전대는 없습니다.
제상(祭床)
제상(祭床) 앞에는 축문을 올려 놓는 축상(祝床)과 향로를 올려 놓는 향상(香床)이 있고, 왼쪽에는 제향시 태울 축문을 올려 놓는 망료상(望燎床)이 있고, 오른쪽에는 제향(祭享) 때, 술을 담는 그릇인 준뢰(樽罍)를 올려놓는 상인 준상(尊床)이 있고, 그 앞엔 제관이 손을 씻을 물을 올려 놓는 관세상(盥洗床)이 있습니다.
제향진설도를 보는 모습입니다.
제수진설도(祭需陳設圖) 영릉(永陵)제향일 : 매년 9월 19일
세자묘 비각(碑閣) -세자신분의 비각-
영릉에는 비각이 두 채이고 비는 세 개입니다. 한 비각은 '세자묘 비각'이고 또 하나는 '추존왕과 추존황제'에 따른 비각입니다. 그래서 '세자묘 비각'에 한 개, '추존왕과 추존 황제 비각'에 추존 왕비(王碑)와 추존 황제비(皇帝碑)'가 각각 모셔져 있습니다.
주인공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는 7세에 태자가 되었고, 10세에 돌아가셨기에 세자신분의 묘(墓)를 썼던 것입니다. 정조 때 진종(鎭宗)으로 추존되고 묘(墓)가 영릉(永陵) 으로 격상됩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지만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로 올 랐기에 효장세자는 정조의 양부(養父)가 됩니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큰아버지이자 양부 인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였고, 훗날 대한제국 시대에 진종은 다시 황제로 추 존되었기에 하나는 왕비(王碑)이고, 하나는 황제비(皇帝碑)가 각기 모셔져 있는 것입니다. 같이 부좌(祔左)된 효순왕후(孝純王后)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국(朝鮮國) 효장세자묘(孝章世子墓) 효순현빈부좌(孝純賢嬪祔左)
전면에는 이와 같고 후면은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효장세자묘(孝章世子墓) 효순현빈부좌(孝純賢嬪祔左) 비문(碑文)
영릉(永陵)의 비각(碑閣) -추존왕과 추존황제의 비각-
추존왕 진종(眞宗. 1719년 ~ 1728년)과 효순황후(孝純皇后)에 대하여 간략히 정리해 봅니 다.
진종은 숙종 45년인 1719년 2월 15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있는 창의궁(彰義宮)에서 영 조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행(糸幸)이며 자는 성경(聖敬)이며, 어머니는 정빈 (靖嬪) 이씨입니다. 영조가 1724년 즉위하자, 그 해 11월 3일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 가, 그 이듬해 3월 20일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영조 4년인 1728년 11월 16 일 창경궁(昌慶宮) 진수당(進修堂)에서 승하했습니다. 영조는 그 해 12월 2일 효장(孝章) 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그후 융희 2년(1908년) 음 7월 3일에는 황제로 추존, 진종황 제가 되었습니다.
효장세자가 요절한 뒤 영조는 40세가 넘어 둘째 아들을 얻자 아들이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세자(思悼世子)입니다. 그러나 영조는 영조 38 년 1762년, 사도세자를 폐세자시키고, 그의 맏아들인 왕세손을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정조(正祖)입니다. 정조 즉위년인 1776년, 왕 위에 오른 정조는 선왕인 영조의 유지를 따라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고, 능호 를 영릉(永陵)이라 했습니다.
효순황후(孝純皇后)는 풍양 조씨(豊壤趙氏)인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딸로 숙종 41년 1715년에 출생하였고, 영조 3년 1727년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효장세자(孝章世子)와 가 례를 올리고 영조 11년 1735년 현빈(賢嬪)에 봉해졌으나 영조 27년 1751년 소생 없이 창 덕궁 건극당(建極堂)에서 춘추 37세로 승하했습니다. 이듬해인 영조 28년 1752년 1월 22 일 효장세자묘 왼쪽에 안장하였습니다. 정조의 즉위 후 효순왕후(孝純王后)로 추존되었으 며, 역시 융희 2년에 황후(皇后)로 추존되었습니다.
조선국(朝鮮國) 진종대왕영릉(眞宗大王永陵) 효순왕후부좌(孝純王后祔左)
전면에는 이와 같고 후면은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종대왕영릉(眞宗大王永陵) 효순왕후부좌(孝純王后祔左) 비문(碑文)
대한(大韓) 진종소황제영릉(眞宗昭皇帝永陵) 효순소황후부좌(孝純昭皇后祔左)
전면에는 이와 같고 후면은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종소황제영릉(眞宗昭皇帝永陵) 효순소황후부좌(孝純昭皇后祔左) 비문(碑文)
영릉에는 비각은 있으나 수복방(守僕房)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복방(守僕房)은 능을 관 리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건물로, 능을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는 관노(官奴)나 하급관리들 이 거쳐하는 곳인데 아마 능 진입공간에 있는 그 재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능침공간엔 갈 수 없다고 하여 능에는 올라가지 못했지만 사진이라도 가져다 올려 보려 했 으나 변변한 사진 하나 없고 그나마 모두 사진을 못 퍼가게 막아 놓아 올릴 수 없음이 아 쉽습니다.
진종(眞宗)은 세자의 신분으로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가 훗날 진종으로 추존되었기 때문 에, 능 또한 세자묘의 예를 따라 조영되었다가 훗날 왕릉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봉분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생략되었고, 봉분 주위에는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문인석(文 人石)이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인석은 조선 전기의 능인 공릉에 비해 다소 마르 고 작은 편입니다. 관모를 쓰고 양손으로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 한 편입니다. 관복의 소매는 길게 늘어져 있고, 팔꿈치 부근에는 세 줄의 주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문인석과 함께 중계(中階)에 배치된 석마(石馬) 역시 조선 전기와는 다른 형태 로 겸손하게 머리를 구부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전기의 석마는 둔중한 모습이지만 영 릉의 석마는 전기의 것에 비해서는 살이 약간 빠지고 날렵한 모습입니다. 하계는 생략되 었으며 무인석은 없습니다.
능침공간에 직접 올라갈 수 없기에 아쉽고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순릉(順陵)으로 향했습니 다. 순릉에 대해서는 2부에서 소개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
|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수원살면서 융,건릉만 가보았던터라 왕릉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감사합니다._()_
융ㆍ건릉은 근처도 안 가봤는데요... 왕릉을 가면 역사가 거기에 있습니다. 왕릉을 다 둘러보고 싶은데 능침공간을 _()_
못 가게 하니...
융릉,건릉은 화성 용주사 인접지역에 있어서 자주갔었답니다.
그쪽도 언제한번 순례해보심이 어떨런지요._()_
예,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용주사를 몇 년 전에 갔었는데 또 가도 무방하지요. 용주사와 융건릉 연계해서 다녀오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_()_
왕릉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게 많은 것 같습니다. 해설사님이 수고해 주셨네요. ^-^
정수님 덕분에 파주릉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릉에 대하여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도 묘미가 있습니다. 단체로 갔을 때는 안내자의 안내를 맞아 관람했으면 하는 _()_
기회가 되면 장릉도 가고 싶은데요.
마음입니다.
왕릉에 가까이 친견하지 못하여 아쉬웠습니다. _()_
가장 핵심을 빠뜨리니 대단히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역사를 조금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_()_
좋은사진과 설명 잘보고 갑니다^^감사드리구요^^
홍인도님, 반갑습니다. 잘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다음은 순릉입니다. _()_
상세한 설명을 담은 영릉(永陵) 사진글 잘 봤습니다. _()_
이번 파주릉의 주인공 들은 모두 단명하여 비운의 주인공들입니다. 비록 단명했지만 좋은 명당 길지에 _()_
자리하여 명복을 누리리라 생각됩니다.
잘 보았습니다. 사진으로 다시보니 더 흥미롭고 좋습니다. 법사님 감사합니다._()_
해설사의 설명과 현장, 그리고 사진과 설명을 보시니 영릉에 대해서 애틋하게 다가오지않습니까 _()_
파주릉에 대한 개요와 영릉에 대한 설명, 영릉의 주인공에 대한 설명 잘 읽었습니다. 너무나 애석하네요. _()_
그리고 해설사님과 동반한 왕릉탐방 좋으셨을 듯하네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능침공간에 올라가지 못하셨다니
아쉬웠겠습니다. 만약 올라가셨다면 더 상세한 사진도 올려 주셨을 텐데요. 잘 보았습니다.
예, 해설사님의 해설과 제가 알아낸 정보가 어울려 좋은 왕릉순례를 했습니다. 다만 능침공간의 석물을 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이후 왕릉의 보호에 만전을 기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_()_
서울 근교에는 가 볼만한 곳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_()_
많지요. 많은데도 불구하고 안 가본 데가 너무 많습니다. 차근차근 가봐야지요. 파주 일원에 문화재가 무수히 많더군요. 사찰 인근에 있는 문화재는 더불어 찾아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_()_
해설을 겸한 왕릉순례는 처음 이었습니다 애들 어렸을때 서오릉만 가본듯~여유롭고 좋았습니다 _()_
여여님,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왕릉순례해 볼까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