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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황금마삭
1392년 조선이 개국한다.
새 왕조는 4대 세종에 이르러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역사의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1453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1455년 세조(世祖)로 즉위한다.
이에 반발한 사육신들의 단종(端宗) 복위 운동과,
세조의 처절한 응징이 있었다.
1457년 단종의 죽음.
조선 최대 피바람이었다.
이 정치적 피바람의 한가운데 수양대군 세조가 선택했던 한 인물.
신숙주(申淑舟, 1417~1475)가 있었다.
<한국사 전>
오늘은 조선 500년 역사에 큰 논란을 일으켰던 보한재(保閑齋) 신숙주를 만나본다.
사육신이었던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같은 인물들은,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반발해 죽임을 당하는 데 반해서,
신숙주라는 인물은
세조에게 협력을 하게 된다.
때문에 신숙주는 훗날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한편 신숙주는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세운
천재 관료였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세종부터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모시고,
<세조실록>, <예종실록>, <동국통감>, <해동제국기>,
<국조오례의>, <동국정운>, <병장록> 등 같은 많은 저술에 참여했고,
한글 반포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더 큰 논란이 되어온 것이다.
과연 신숙주는 노회한 정치권력가에다 변절자인가?
아니면 실용주의 노선을 천재 관료인가?
2. 수양대군, 명관(明官)을 알아본 최고의 선택!~
- 외교 전문가, 신숙주!
"수양대군이 권람에게
중국에 보낼 정관이 될 만 한 자를 물었더니
신숙주를 추천하였다."
- <연려실기술> 연려실기술 동각잡기 中
비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를 선택한 신숙주.
그를 둘러싼 숱한 논란과 평가의 실체들을 살펴보자.
1456년. 세조 2년 2월 21일.
조선 조정에는 경사가 있었다.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명나라 황제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은 것이다.
"전하. 신 사은사 신숙주 진심으로 경하드리옵니다."
"드디어 명나라 황제도 과인과 이 나라 조선을 인정했소."
"경하드리옵니다. 이 나라 조선과 만백성의 흥복이옵니다."
"참으로 큰일을 하셨소.
지난날 그대와 내가 만리 먼길을 갔었고,
또 함께 맹세한 일이 있었거늘,
이제 능히 대사를 성취하였으니 이 기쁨을 어찌 다 헤아리겠소."
"이 모든 것이 전하의 용기와 결단으로 말미암은 것이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여봐라. 주안상을 드리거라. 내 오늘 대소신료들과 마음껏 즐기리라."
세조 수양대군과 병조판서 신숙주.
이들이 함께 맹세한 일은 무엇이며,
또 함께 성취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의 본격적인 만남은
세조가 왕이 되기 4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452년 수양대군(首陽大君) 저택(단종 즉위년 8월 10일).
"이보게 신수찬.
어허 이런 우연한 일이 있나!
어찌 지나가면서 내 집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냥 가는가!"
"대군 황송하옵니다!
하오나 어찌 대군의 사가에 함부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옛 친구의 집인데 어떠하겠나. 자 들어가세!"
평범해보이는 이 만남을 어떻게 봐야 할까!
당시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이라고 해서
하급관리가 상급관리의 집을 방문하지 못하고,
왕실의 인사들이 함부로 대신들을 만날 수 없는 법이 있었다.
그렇다면 수양대군이 우연을 가장하여 신숙주를 집안으로 불러들인 건 아닐까?
어쩧든 분경금지법의 상황 아래서
이들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신숙주는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의 자리에 있었다.
"하하하. 내 오래전부터 신수찬과 더불어 이런 자리를 하고 싶었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마는 주변의 시선도 있고 해서."
"하하하. 친구끼린데 어떠한가!
헌데 지금의 조정은 어떠한가!
나이 어린 임금에,
김종서, 황보인 등 나이 많은 신하들이 설쳐대는 조정말일세! "
"대군..."
"장부가 벼슬길에 나섰으면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장부가 편안히 아녀자의 품에서 죽는다면 어찌 살아도 살았다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나와 함께 중국으로 가겠는가?"
"중국이라 하셨습니까?..."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중국행을 자원했다.
사실 이는 왕실 종친이 할 일이 아니어서
주위에서 반대했으나
수양대군의 완고한 주장과 변명에 결국 허락된다.
이때 신숙주도 함께 가자고 한 것이다.
수양대군이 굳이 중국행을 고집한 것은
명 조정에 그의 입지를 미리 굳히려는 정치적 의도 아니었을까!...
1452년 10월.
신숙주는 비서관이 되어
수양대군의 명나라 사행(使行)에 동행한다.
사은사(謝恩使)란
새 왕이 등극했을 때
명나라 황제의 공인을 받기 위해 가는 사신이었다.
이들이 중국에 함께 머문 기간은 약 5개월.
훗날 세조는 이때부터 신숙주와 뜻이 통했고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정신과 뜻과 기운이 같이 하여 믿으니.."
- 세조실록, 세조4년 1458년 6월 29일.
3. 신숙주! 최고 권력을 향한 최선의 선택은?~
No.3 수양대군!
사은사에서 돌아온 수양대군은
얼마후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계유정난(1453년 단종1년 10월 10일).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조극관 등 원로대신을 제거하고,
그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계유정난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유정난이 정당한 것이었다라고 한다면
그 연장선상에 있는 세조의 왕위 찬탈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할 수 있고,
거꾸로 세조의 왕위 찬탈이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라고 한다면
계유정난도 일어나서는 안되는, 말하자면 친위쿠데타 같은 것이죠."
-남지대 교수(서원대 역사교육과)
신숙주는 계유정난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신숙주는
승정원 우부승지(右部承旨) 겸 지병조사(知兵曺事)를 맡고 있었다.
지위는 높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신숙주는 승정원의 우부승지가 되어있었죠.
승지 가운데서는 좀 아랫쪽의 서열입니다만은,
겸하여 지병조사로 병조 관련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수양대군의 눈과 귀가 되어가지고,
궁궐의 호위 군사들을 중간에서 지휘 감독하는 그런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역할은 세조에게 있어서나 신숙주에게 있어서나 매우 중요했습니다."
- 오종록 교수(성신여대 사학과)
계유정난 이후 세조는
어린 조카 단종으로부터 강제로 왕위를 넘겨받는다.
세조 즉위 1455년 8월 13일 (세조1년).
드디어 수양대군이 세조가 된 것이다.
세조는 신숙주를 일등 공신에 봉한다.
그리고 다른 공신들과 더불어
그를 동료라 칭하며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한다.
"계양군 이증, 양천 위 윤사로, 신숙주, 권람, 한명회, 등이
서로 보좌하여 나에게 흉당의 제거를 권고하고..."
그러나 세조로서는 넘어야 할 높은 산이 있었다.
그것은 명나라의 인정이었다.
이때 신숙주가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서
명나라 황제의 인정, 즉 고명을 받아온 것이다.
신숙주, 명나라로 사행, 1455년 세조1년 10월.
"세조 같은 경우는
지금 단종이 살아있는 가운데서 양위를 받았기 때문에
명에서 이를 문제삼으면 설명하거나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신숙주가 사은사로 가서 잘 설명을 해서 무리없이 인정을 잘 받아온거죠.
고명을 받아온 것은
계유정난을 비롯해 양위 전체를 정당화하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조가 쿠테타를 일으킨 전체 과정을
중국의 왕으로부터 인정받아서
국제적인 정당성을 인정받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남지대 교수(서원대 역사교육과)
계유정난 이전부터 뜻을 같이 했던 신숙주와 세조.
세조가 말한 함께 맹세한 것은 그의 즉위였고,
여기에 신숙주가 큰 기여를 했던 것이다.
세조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신숙주.
그런데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폄하되어있다.
4. 신숙주와 성삼문, 갈림길에 서다!...
"세종(世宗)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신숙주는 큰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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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을 보면
단종 복위 운동을 하던 사육신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데
바로 그날 신숙주가 집으로 돌아오니
이런 일이 벌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아니 대감 이게 어찌된 일이오?
어찌하여 당신이 살아온단 말이오?
지난날 성승지(성삼문)와 대감이 얼마나 친하게 지내셨소?
어찌하여 당신이 살아온단 말이오.
부끄럽고 부끄럽소.
당신이 살아온 것이 나는 나는 부끄럽소."
이 이야기는 사육신이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서
남편 신숙주가 살아서 돌아오자
그 부인이 남편의 변절을 부끄러워했다는 대목이다.
특히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에는
유씨 부인이 목을 매서 죽었다고 씌여 있다.
하지만 실록에 의하면
유씨부인은 사육신 사건이 발생하기
6개월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대제학 신숙주의 처 윤씨 부인의 병이 위독..
갑자기 부음을 듣고.." - 세조2년 1456년 1월 23일(음)
즉 이 모든 내용은
후대에 과장되거나 윤색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렇듯 신숙주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인 이유를 알아보자.
신숙주와 관련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사육신과 관련 대표적인 인물 매죽헌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이다.
매죽헌사우(梅竹軒社宇) 문절사(文節祠) - 충남 연기군 금남면
성삼문은 신숙주보다 한 살 적었으나
둘은 친구였다.
성삼문은 1447년 삼십세 때 문과 중시에 장원을 하였고
신숙주와 더불어 집현전 학사로 활동을 하였다.
세종때는
신숙주와 더불어
중국의 음운학자 황찬을 찾는 등
한글 반포에도 큰 공을 세웠다.
정계 진출 초기부터 이들은 학문적 동지였던 것이다.
계유정난 당시
신숙주는 2등 공신,
성삼문은 3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신숙주와 성삼문이 완전히 갈라서는 사건이 발생했다.
숙부 수양대군의 위세를 견디지 못한
단종이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기게 된 것이다.
세조 1년. 1455년 윤 6월 11일.
야사에 따르면
성삼문(동부승지)은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전하. 이제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넘기면
어떻게 문종 아바마마와 세종할바마마를 뵙겠습니까. 아니되옵니다 전하."
"전하. 이 부덕한 숙부, 어찌 대통을 물려받을 수 있겠나이까."
그날 수양대군은 몇 차례에 걸쳐 양위를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은 알지 못하므로...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에게 넘겨주려고 한다..."
그러나 단종은 자신이 어려 정사를 잘 모른다며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겼다.
성삼문은 한동안 옥새를 꼭 잡고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 (<연려실기술>, 단종고사본말 육신의 상왕 복위 모의)
옥새를 전한 성삼문이 통곡을 하자
수양대군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고 기록은 전한다.
신숙주 - "이보게 금보, 그렇게도 내 진심을 모르겠나."
성삼문 - "진심이라고?
세종대왕과 문종대왕의 간절한 당부를 버리고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기는 것이
자네의 진심이란 말인가?"
신숙주 - "대의를 쫓아야 하네."
성삼문 - "대의라구?
대의는 단종 임금을 잘 보필하는 것일세.
실리를 쫓아 일신의 안일을 꾀하는 게 대의는 아니란 말일세."
신숙주 - "진정한 대의란 이 나라 조선을 든든한 반석위에 올려놓는 것일세.
해서 강한 군주가 필요한게야.
어리고 문약한 왕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겠나.
이 나라 조선과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 그것이 대의며,
세종대왕과 문종대왕이 진심으로 바라던 바일세. "
성삼문 -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선왕들을 들먹이는가!
가게나! 이제 자네와 나의 길은 달라!"
신숙주 - "경거망동하지 마시게.
무엇이 이 나라 종묘사직을 위하는 길인지 깊이 성찰하시게."
성삼문 - "그래서? 나더러 자네처럼 그 더러운 변절의 길을 걸으라는 겐가?"
신숙주 - "변절, 변절하지 말게!
나 역시 깊이 고민한 선택일세! 알 것는가!"
이처럼 수양대군의 등극에 입장 차이를 보이던 두 사람.
그러다가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단종 복위 모의'였다(1456년, 세조 2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유성원, 유응부 등이
상왕 단종의 복위를 꾀한 것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수양대군의 즉위는
명분도 원칙도 없는 정변이었다.
따라서 세조를 폐하고
단종을 복위하는 것은 정통성의 회복이었다.
"계유정난까지만 해도 왕은 여전히 단종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다른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단종을 내리고
세조가 왕위로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는
정통에서도 어긋나고 명분이 아니라는 것이죠.
명분이 없는 일이 발생했음으로
명분을 다시 세우는 걸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현실 정치에서 그들이 드러냈던 것이
바로 단종 복위 운동입니다."
- 김경수 교수(청원대 교양학부, 한국사)
이들의 계획은 세조 암살이었다.
1456년 세조 2년 6월 1일.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세조를 호위하기로 한 성승(성삼문 아버지)과 유응부가
세조를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차질을 빗는다.
한명회의 제의를 받아들인 병조판서 신숙주가
세조에게 호위무사인 운검을 세우지 말자고 한 것이다.
세조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세조 암살 계획이 좌절되자
성삼문 등은 거사를 뒤로 미뤘다.
1456년 6월 2일.
밀고자가 생겼다.
함께 계획에 동참했던 김질과 그의 사위 정창손이
성삼문의 계획을 세조에게 고해 바친다.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가담자와 연류자는 모두 체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세조의 응징은 가혹했다.
성삼문 등 주모자는 능지처참형에 처해졌고
연류자 70여 명이 처형당했다.
가담자와 연류자의 부녀자들은
세조의 공신들이 사노비로 나누어가졌다.
그들의 재산도 모두 몰수당해 역시 나누어졌다.
성삼문의 아내와 딸을 비롯한
160명의 부녀자들은 모두 세조의 공신들에게 분배되었다.
신숙주는 이때 세 명의 부녀자들을 사노비로 받았다.
세조 2년 병자 (1456년) 9월 7일 갑술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자를 대신들에게 나누어주게 하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 딸 효옥, 이승로의 누이 자근아지는 운성 부원군 박종우에게 주고..."
"최면의 누이 선비, 조완규의 아내 소사, 딸 요문은 병조판서 신숙주에게 주고..."
"역모를 꾀하면 삼족이 멸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당사자와 핵심 직계가 처벌을 받는데,
단종 복위 가담자들은
본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성인들은 다 죽이고,
심지어 부인들과 살아남은 딸들까지
공신들이 다 나누어갖는데,
이것은 사적인 복수라 말할 수 있죠."
- 이덕일 박사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1457년 세조 3년 6월.
이듬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1457년 세조 3년 9월 10일.
이 사건 이후 신숙주(의정부 좌찬성)는 더 강경한 주장을 한다.
"금성대군 이유가 노산군을 내세워 반역을 도모하려 했으니
이유는 물론 노산군도 편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 전하.
따지고 보면 노산군이 반역을 주도한 것입니다.
편히 살게 할 수 없사옵니다. 전하."
"그 일은 나중에 다시 의논할 것이오."
"이와 같은 일은 다시 의논할 일이 못되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이런 주장은 나중에 신숙주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신숙주는
단종의 아버지 문종과
할아버지 세종이 아끼던 신하였다.
"세종께서 일찌기 말씀하시길
신숙주는 큰 일을 맡길 만한 인물이라"
- 문종 1년, 1451년 8월 5일(음)
그런 그가 문종의 아들 단종을 죽이자고 한 것이다.
후대에 이르러 신숙주에 대한 폄하가 나타난다.
바로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관련된 야사의 기록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가자,
평민으로 강등된 송씨는 날마다 단종을 기다렸다.
야사에는
신숙주가 송씨를 공신 노비로 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송씨가 관비가 되니
숙주가 공신비로 삼아 자기가 받으려 했다"
- <월정만필(月汀漫筆)>
심지어 신숙주가 송씨를 노비로 삼아
"신숙주가 공신으로서
노산군(魯山君)의 왕비 송씨를 노비로 받아 여종 삼았다."
- <파수편>
그러나 실제 송씨는 양인으로 살면서
82세까지 장수했다.
신숙주에 대한 이러한 폄하는
세조에 의해 선택되고
그에 협력한 탓이었다.
5. "신숙주는 나의 위징이니라"
세조는 정통성 없는 쿠데타 계유정난을 일으켜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버린다.
왜 그는 이 같은 정변을 감행했던 것일까?
당시 조선 조정의 세력 분포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들여다보자.
계유정난 직전 가장 정통성 있는 세력은
당연히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대신들이 쥐고 있는 단종(端宗)의 왕권이었다.
그리고 수양대군의 동생이었던 안평대군(安平大君),
그는 많은 문인 친구들이 있었고
정가의 평판도 좋았고
왕권에 협조적이었다.
반면에 수양대군 같은 경우는
한명회, 권람 같은
당시에는 영향력이 미미했던 인사들과 가까웠다.
이렇게 볼때 수양대군은
당시 넘버 쓰리였던 셈이다.
이때 넘버 쓰리 수양대군의 선택은 명확해진다.
현실을 수긍하고 넘버 쓰리로 사느냐,
아니면 정변을 통한 집권이냐.
과감하게 그는 후자를 선택하게 되고,
그때 그의 곁에는 신숙주가 있었던 것이다.
구봉영당(九峰影堂, 충북 청원군 가덕면)
신숙주 영정(보물 제613호)
신숙주(1417~1475)는 세종 21년, 1439년
스물 세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훈민정음 반포때는 자료 수집에 참여하고
성삼문과 함께 명나라 학자 황찬을 여러번 찾아가
음운 지식을 가져오는 등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집현전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 시기 수양대군 역시 세종의 명에 따라
집현전에 참여, 젊은 지식인 신숙주와 교류했다.
젊은 관료 신숙주(춘추관 기주관, 春秋館 記注官)의
정치적 성향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세종실록 편찬 도중
좌의정 김종서와 의견 충돌을 보인 것이다.
"대감. 이미 세종대왕의 손때가 묻은 오례를
세종실록에 싣지 않겠다는 것은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신하가 어찌 이렇게 임금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대감께서는 그러고도 세종대왕의 신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뭣이"
"대감께서는 벼슬을 앞세워 옳은 주장을 묵살하려 합니까?"
"오례는 세종실록에 싣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 1452년 단종 즉위년 9월 13일. <단종실록>
단종 당시 원로대신으로
권력의 중심이던 김종서에 맞서
정면으로 반박하는 신숙주.
신숙주의 이런 일면은
김종서 등 원로대신들과 대립하던
수양대군의 노선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었다.
수양대군 입장에서
신숙주는 포섭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신숙주에 대한 수양대군의 관심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단종 즉위년 1452년 10월 5일.
수양대군 - "건저공은 외척으로 승지가 되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
신숙주 - "그 사람됨을 보면 크게 착하거나 악한 것이 없는데
다만 침착하고 신중하지 못한 자이니
그 연고를 다 말하지 말고 넌즈시 빗대어 말하여 스스로 알게 함이 좋을 듯 합니다."
수양대군은 신숙주에게 인사에 대한 조언까지 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숙주는 수양대군을 어떻게 봤을까?
그가 남긴 시문집 <보한재집(保閑齋集)>을 보면
그 역시 수양대군을 신뢰하고
인간적인 호의를 가진 것으로 되어있다.
신숙주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의기투합했고
수양대군으로부터
'나라의 선비로 대접받았다'고 말한다.
"나라의 선비로 예우를 받았네." - <광릉만사(光陵輓詞)>
급기야 세조는 신숙주는 자신에게 있어
중국 당나라 태종의 명재상 위징과 같은 인물이라고 공언한다.
세조실록 세조 3년 1457년 3월 15일
"'지장(智將)'이니 신숙주는 나의 '위징(魏徵)'이니라."
"위징이 당나라 초기에 다른 왕자를 모시다가
당 태종이 임금이 될 때 태종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당 태종이 조금만 잘못된 길로 가서
국민민복에 위배되는 일을 할 듯 싶으면
목숨을 걸고 앞장 서서 막아서
당 태종을 바른 길로 인도했던 명재상이 위징입니다.
- 신용호 교수(공주대 한문교육과)
탁월한 관료로서
김종서 등과는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졌던 신숙주.
수양대군 세조는 이런 신숙주를 선택했다.
그리고 중국의 명재상 위징에 비유될만큼
자신에게 비중있는 인물로 살았던 것이다.
6. 천재 관료 신숙주!~
"집현전에서 근무하게 되어 숙직할 때에
평소에 보지 못했던 책을 가져다가 남김없이 모두 열람하였다.
어떤 때에는 동료 대신 숙직을 청하여 밤새도록 잠자지 않았다.
- <연려실기술> 필원잡기 中
신숙주는 조선 전기, 문물제도 완성의 총지휘자였다.
한글편찬을 비롯하여 운문, 서예에서 해박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경국대전>, <동국통감> 등의 법전과 역사서 편찬을 주도하였고, 세조실록, 예조실록의 찬수까지 도맡아 했다.
말년에는 벼슬에서 간절히 물러나고 싶어 했지만 나라의 임금이 놓아주지 않아 죽을 때까지 벼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신숙주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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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패기 넘치는 천재 관료 신숙주.
그 신숙주를 선택했던
세조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리고 그 신숙주도
결국 세조를 선택하게 된다.
이 선택때문에 신숙주는
훗날 역사적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게 되는데,
과연 처세에 능한 변절자였는가?
아니면 나라의 기틀을 새로 짜기 위해 고뇌했던 천재 관료였던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치 않아 보인다.
우린 여기서 신숙주의 인간적인 면모를 좀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먼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숙주의 관료로서 진면목이다.
종묘(宗廟, 세계문화유산, 사적 제125호)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잘 봉안하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정전.
이곳에는 모두 49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종묘 정전에 제4실.
세조와 정희왕후의 신주가 있다.
정전 맞은편에 있는 공신당.
정전에 모셔진 왕들의 공신들로 배향되는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공신당에는 모두 83분의 공신들이 모셔져 있다.
황희 정승, 율곡 이이 등 기라성 같은 조선 인물들의 위패,
그들과 나란히 신숙주의 위패가 있다.
그는 이곳에 조선 9대 성종대왕의 공신으로 배향되어 있다.
'문충공 신숙주 위패 - 조선 9대 왕 성종의 영의정으로 묘정배향'
처음 집현전에 학사가 되었을 때
신숙주는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어 기뻐했다고 한다.
집현전에서 밤늦게 책을 읽다가 잠든 신숙주에게
세종이 어의를 내렸다.
이처럼 신숙주는 학문에 몰두하는 관료였다.
"세종이...곧 어의(御衣)를 내려서 권장하였다." - <필원잡기(筆苑雜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곳 전시실에는 조선 초기 그려진 지도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신숙주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날 수 있었다.
신숙주가 그린 <해동제국총도>와,
그 지도가 담긴 1472년(성종 2년)에 그가 편찬한
일본에 관한 저서 <해국제국기(海東諸國記)>.
"신숙주는
'일본에 대해 정확히 알려면
일본에 대한 정확한 지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신으로 일하는 틈틈이 일본 정보를 입수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 본국과 함께 부속 도서를 포함한
매우 정확한 지도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 신병주 박사(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신숙주의 일본 지도는 당시로선 매우 정확하고 세밀하다.
외교관 신숙주의 치밀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해동제국기>속의 '일본본국지도'
그보다 약간 앞선 1402년 <혼일강리역대지도>.
일본은 지금의 오키나와 정도로 그려져 있다.
신숙주는 군사 분야에 있어서도 특출한 인물이었다.
1460년, 8000명의 조선군사가 두만강을 건너 여진 정벌에 나선다.
여진족을 괴멸시키며 승승장구하던 어느날, 적이 불시에 조선군 진영을 기습한다.
당시 조선군의 군장이었던 신숙주.
한밤중에 벌어진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는 가만히 누워서 시를 읊는데... |
<야전부시도(野戰賦詩圖)> - 신숙주가 여진족을 정벌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1460년 세조 6년때
함길, 강원 양도 도체찰사 신숙주의 조선군이
여진족을 정벌하는 장면을 그린 <야전부시도>.
전투가 한참일 때 지휘관은 독특한 자세로 누워있다.
여진 정벌에 나선 도체찰사, 즉 신숙주다.
밤중에 여진족의 기습 공격이 있었다.
그러나 총사령관 신숙주의 반응은 의외였다.
"오랑캐 땅에 서리 치니 변방이 차가운데
기마병이 백리에 뻗쳐있구나
밤 싸움은 쉬지 않고 동이 이미 트려하는데
누워서 보니 북두성이 비끼네."
적의 야습에도 태연하게 시를 읊은 신숙주.
그의 이 대담함에 조선군의 사기는 높아졌고
여진족은 야습을 포기하고 퇴강했다.
"조선으로 보면 거의 마지막 단계로
독자적으로 여진에 대해 군사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이 신숙주가 총괄 지휘해서
함경도 북부 지역의 여진족을 공략했던 이 전투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뒤로는
조선이 두만강 너머에 있는 여진족 세력에
실질적인 영향력이 꽤 약화되는 그런 변화가 오게 되는데,
이 일종의 분수령적인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조선의 군사적 위엄을 과시했던 그런 인물이 신숙주라 할 수 있습니다."
- 오종록 교수(성신여대 사학과)
군사 전략가 신숙주의 면모는 저술에까지 이어진다.
신숙주는 세조가 하사한 군사 서적에
주석을 단 <병장설(兵將說)>을 간행했다.
이외에도 국가의 의례 절차를 담은
<오례의(五禮儀)> 등 수많은 책을 편찬했다.
1462년 세조 8년 간행 <병장설> - 조선 시대 군사 교훈집
1474년 <오례의> - 조선 시대 오례의 예법과 절차에 관하여 기록한 책.
그의 저술들은 조선의 문화 부흥을 이끌었다.
그는 특히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에도 책임을 맡았다.
이처럼 신숙주는 여러 면에서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던 전문관료였던 것이다.
"세조에서 성종때까지 걸친 시기,
조선 전기 문물 편찬이 완성되는 그 시기에,
<경국대전>과 같은 법전이라든가,
<동국통감>과 같은 역사서를 주도하는 인물이 신숙주라는 것이죠.
조선 전기 문물 제도의 총완성의 지휘자라고 할만큼
뛰어난 학자관료의 면모가 보입니다."
- 신병주 박사(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후 신숙주는 그가 지지했던 세조의 손자,
성종을 왕위에 앉히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세종에서 문종, 단종, 세조를 거쳐 예종, 성종까지
여섯명의 왕의 보필하며 정치를 관할한 신숙주.
그는 두 번의 영의정을 지냈으며
공신에 네 번이나 책봉되었다.
1453년 37세 단종 1년 계유정난으로 정난(靖難)공신 2등공신.
1455년 39세 세조 1년 세조 즉위로 좌익(佐翼)공신 1등공신.
1458년 42세 세조 4년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책봉
1460년 44세 세조 6년 함길. 강원 양도 도체찰사로 여진족 소탕.
1462년 46세 세조 8년 영의정
1468년 52세 예종 원년 원상(院相), 남이 변란 평정의 공으로 익대(翊戴) 공신 1등공신.
성종 즉위 공로로 좌리(佐理)공신 1등공신.
그리고 마침내 성종의 공신으로 종묘에 배향되었던 것이다.
창백한 지식인이 아니라 실천력을 겸비한 전문 관료.
조선 초기 숱한 업적을 이룬 신숙주.
그런데 이런 인물을 민중들은 왜 싫어했을까?
비록 세조를 도왔고
그로인해 세조의 공신이 되었지만,
신숙주는 한명회나 권람 등 다른 공신들에 비해
훨씬 청렴하고 탁월한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도 그에 대한 업적 대신 폄하된 평가만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신숙주가 부정적인 인물로 각인되는 계기가 있었다.
바로 성삼문 등 '사육신의 옥사'였다.
<연려실기술> 단종기사본말 1456년 세조 2년 6월.
세조 - "지금이라도 과인에게 협조하면 살려주겠노라."
성삼문 - "하하하하하하!~이보시오 나리! 그 무슨 망발이시오이까! 과인이라니!~"
세조 - "뭐? 뭣이라?~"
성삼문 - "아무리 임금 옷을 입고, 임금 자리에 앉았다고 하나 당신은 수양대군 일 뿐이오.
아시겠소이까 나으리!~"
세조 - "네 이노옴!~그래도 너는 내가 주는 녹봉을 꼬박꼬박 받지 않았느냐!~"
성삼문 - "나리가 준 녹봉은 한 톨도 먹지 않고 내 집 창고에 쌓아놓았소이다. 가져가시오."
세조- "니가 정녕 죽기로 하였구나."
........
성삼문 - "네 이놈 숙주야!~너는 어찌 거기에 서 있느냐!~"
세조 - "병조판서(신숙주)는 뒤로 물러나 계시오."
야사에 의하면
성삼문이 신숙주를 나무라자 부끄러워하며 뒤로 물러났다고 한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이때 세조는 성삼문의 충절을 높이 샀다고 한다.
성삼문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온몸이 찢겨지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러나 후일 사육신으로 불리며 충절의 대명사가 되었다.
<숙종실록> 숙종 6년. 1680년 12월 22일.
"세조께서...성삼문 등은 금세의 난신(亂臣)이나 후세의 충신(忠臣)이다."
신숙주는 세조에게 협력하며 관료로서 많은 업적을 이룬다.
이처럼 당대에 신숙주와 성삼문의 길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단종과 사육신의 복권이 추진되었다.
숙종 24년 이들에 대한 복권이 완료된다.
단종 복위 운동 이후 240여 년만이었다.
* 단종 복위 운동 참가자 복권 과정.
세조 2년(1456) 단종 복위 운동 발생
성종 6년 (1468) 남효온, 육신전 편찬
효종 9년(1658) 육신전유고 간행
숙종 7년(1681) 노산군, 노산대군 칭호 격상
숙종 17년(1691) 성삼문 등 육신의 복작
숙종 24년(1698) 노산대군, 단종으로 복위
조선 중기 이후
성삼문 등 사육신에 대한 완전한 복권은
신숙주에 대한 평가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16세기로 넘어가면서 사림파의 등장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성삼문의 절의, 의리, 절개 그런 것을 강조하다보니,
집학전 학자중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신숙주가 깍아내려진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 김경수 교수
조선 후기에는 임금도
신숙주에 대해 폄하된 평가를 내린다.
조선 제 24대 임금 현종은
신숙주가 사육신이 되지 못한 것을 지적하면서
성삼문 등 사육신을 칭송한다.
"신숙주는 어찌하여 사육신이 한 일을 하지 않았는가?
..........장하다 사육신의 절개여."
- <현종실록, 현종 11년(1845) 11월 9일
"이 나물을 만두 속으로 넣을 적에 짓이겨 넣는 고로
신숙주를 이 나물 찧듯 하자고 하여
'숙주나물' 이 라 하였다" |
신숙주에 대한 민중의 폄하도 시작된다.
바로 숙주 나물이라는 유머의 등장이다.
"숙주 나물은 신숙주가....미움을 받아...지어진 것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2년
녹두 나물의 변질을 미워하여
민간에서 '신숙주 나물'이라 불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음식 관련 문헌 <만기요람(萬機要覽), 1808 편찬>에는
녹두 나물이 '녹두장음(菉豆長音)' '장음녹두(長音菉豆)'라고만 표기되어있다.
"숙주 나물은 '녹두장음' 혹은 '장음녹두'로 표시"
"녹두 나물 혹은 숙주 나물,
이렇게 순수하게 한국어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을
문서상으로는 볼 수가 없구요.
1930년대 소설속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으로 봤을 때
녹두 나물 혹은 숙주 나물이란 말이 그 전부터 충분히 사용되었을 수 있지만은,
기록상으로는 1930년대에 나오는 것으로 봤을 때
정확히 시기를 논할 수는 없죠."
- 김승일 교수(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조선 후기 지식인에 의한 신숙주의 폄하도 나타난다.
조선 후기 문인 이건창은 '고령탄(고령탄, 1886년)이라는 시에서
신숙주가 만년에 인생에 대해 반성을 한 것처럼 적고 있다.
"인생이 여기서 그치는구나
참으로 어려운 길을 왔도다.
이처럼 신숙주에 대한 세간의 폄하는 끈질겼다.
"계유정난과,
그 다음에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그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그 소용돌이가 역사속에 없었다고 한다면
보다 많은 업적을 남기고 순탄한 관료 생활을 했을 가능성과 역량이 있는 분인데,
이런 소용돌이에 뛰어들어서,
역사에서 잘못된 편을 들어서,
그분이 만들었던 많은 업적들까지도 후대에 폄하되게 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 이덕일 박사
각자의 선택에 따라 각기 다른 길을 걸었던 신숙주와 성삼문.
성삼문은 '충문(忠文)'
신숙주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삼문은 '충'이 앞서고
신숙주는 '문'이 앞선다는 역사의 평인 것이다.
자신이 꿈꾸는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정통성 없는 수양대군 세조를 선택했던 신숙주.
신숙주는 이 판단 하나로 역사적으로 대중적으로 '변절자'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신숙주는 정치 권력가의 모습도 보이지만
실천하는 전문 관료의 면모도 보인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일방적인 평가에서 벗어나서 신숙주의 능력을 재평가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여기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 있다.
만약 우리 앞에 역사적 선택의 길이 놓여진다면,
우린 신숙주의 길을 갈 것인가?.....
성삼문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 한국사 전을 보고
(늘 평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