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향로가 발견된 것은 1993년의 일이다. 부여 능산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모두 도굴 당한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있어 국가에서 사적13호로 지정하고 잘 정비해 보존해왔다.
그런데 날로 관람객이 증가하자 부여군에서는 주차장을 확장하여 관람객의 편의를 제공하고자 했다. 주차장을 이 고분군과 부여나성 사이 계곡부에 있는 계단식 논을 닦아 조성하기로 하고 작업에 앞서 매장 문화재 조사를 하게 되었다.
부지는 계단식 논인 만큼 항상 물을 머금고 있어 질척거렸다. 그래서 이런 위치에 유구나 유물이 남아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겨울추위와 싸우면서 발굴구덩이에 흘러 드는 물을 임시방편으로 마련한 고랑을 통해 빼내면서 작업하던 중 1993년 12월 12일 오후 4시30분 질퍽거리는 땅 속에서 드디어 향로의 뚜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것이 향로라는 사실은 모르고 빨리 작업을 마쳐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조사원이 달려들어 8시30분경에 유물을 완전히 들어내는데 성공했다.
10여일 간의 처리 끝에 1,300여 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향로가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들 그 자태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12월 22일 부여박물관에서 공식적으로 언론에 공개했다.
그런데 그 때 명칭은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였다. 그러자 '백제금동용봉수미산향로'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 등 백가쟁명이 벌어졌다. 결국 1996년 5월30일 문화재위원회는 국보 제287호로 지정하면서 명칭을 '백제금동대향로'로 결정했다.
아무런 조사 없이 중장비가 동원돼 주차장이 조성됐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 백제의 국보를 잃었을 것이다.
- 한국일보 기사 인용
동아시아 최고의 걸작, 백제향로 - 김영조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에서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발굴되었습니다. 이 향로는 봉황, 뚜껑, 몸체, 용좌 4단계로 구분됩니다. 몸체 뚜껑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5명의 연주자가 있고, 그 아래에 74 개의 산봉우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보입니다.
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사자, 원숭이, 코끼리, 멧돼지, 개, 뱀을 물고 있는 거북이 등 65마리의 각종 동물상, 폭포, 불타는 모양의 무늬 등 백여개의 화려한 무늬도 있습니다. 뚜껑 장식에는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편 채 날며, 받침대는 용이 승천하는 형상으로 몸통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향을 피우면 12개의 구멍들을 통해 향이 피어오르는데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예술입니다. 1300년 전 몸체와 봉황의 속을 공간으로 비워낸 밀납법과 아말감 도금법을 이용하여 찬란한 외관을 보여준 금도금술은 현대의 기술로도 재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했다는 평입니다.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 근처에 위치한 절터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바닥 진흙 속에서 거의 녹도 슬지 않은 원형 그대로 발견되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 학계를 흥분시켰습니다.그리고 국보 제287호로 1996년 5월30일에 지정되었습니다.소재지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향로의 몸통을 연꽃모양으로 구성한 형태는 중국의 남북조 시대인 400년 경부터 등장하고 있으나 이 향로같이 고도로 고안된 연화화생의 표현이나 봉래산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인물, 동물 등의 묘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따라서 이 향로는 중국향로의 형식을 따랐으나 조형성이나 회화적인 구도는 중국을 뛰어넘는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발휘한 대표적인 백제 미술품입니다.
이 사진은 기념품인데도 가격이 상당합니다. 모형의 크기는 실제 크기와 달리 아담합니다.
인터넷에서 구입가능한 정식 크기의 모조품은 250만원 정도
뚜껑을 들어 향을 피우고 덮어 두면.. 12개의 구멍을 통해 연기가 나오는데.. 마치 깊은 산 속의 구름 같은 느낌..
1300여년을 땅 속에서 기다린 아름다움.. 일제강점기때 발견 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