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었던 겉옷을 두르고
요한복음 21:1-14 19, 320, 339, 316,
사람들은 입었던 겉옷을 벗고 바다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벗었던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7). 상식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씀 같지만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겉옷’이 무엇을 상징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겉옷’은 단순한 겉옷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를 상징하는 가운입니다. 목사에게도 목사를 상징하는 가운이 있습니다. 설교나 성찬예식을 할 때 가운을 입습니다. 임직식 때 주례목사가 가운을 입고 안수하고 직분자들을 세웁니다. 찬양대가 가운을 입고 찬양합니다. 직분자나 성도 모두에게도 주님께서 입혀주신 가운이 다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겉옷을 엘리사에게 주었습니다.(왕상19:19) 엘리사는 엘리야가 주는 겉옷으로 요단을 쳐서 요단이 갈라지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엘리야의 ‘겉옷’은 선지자를 상징하는 가운입니다.(왕하2:14)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준 것은 자신의 선지자 사명을 엘리사에게 넘겨 준 것을 의미 합니다.
베드로가 겉옷을 벗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맡겨주신 제자의 직분을 벗었다는 말입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나 옷 벗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표를 쓰고 직장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벗었던 겉옷을 두른 후에’(7)라는 말은 다시 제자가 되겠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유대의 왕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크냐고 하며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제자들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들을 닫고 숨었습니다.(20:19) 그런데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있는 방에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하시며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며 자신의 살아나심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때 도마가 없었기 때문에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는 방에 두 번째로 나타나셔서 도마의 손을 잡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시며 의심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 했습니다.(20:26,27)
그런데 예수님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게 되니까 제자들은 당장 먹고 사는 것을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노라’고 하며 함께 어부가 되어 그물을 내렸습니다.
‘겉옷을 벗고 있다가’란 말은 단순하게 겉옷을 벗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제자의 직분을 벗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겉옷을 벗으므로 제자들을 가르쳐서 지상 교회를 세우고 죄인들을 구워하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몽땅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던 그 모든 계획이 깡그리 채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신뢰하던 베드로가 앞장서서 겉옷을 벗었으니 다른 제자들까지도 제자의 겉옷을 벗고 내 동댕이치고 포기한 것입니다. 열 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는 이미 목메어 죽었고 일곱이 겉옷을 벗었으니 나머지 네 명도 어떻게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겉옷을 벗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지금까지 하신 모든 일들이 헛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지상에 계시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 가셔야 하기 때문에 매우 다급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겉옷을 벗고 어부가 되어서 그물을 내리는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14) 이제 우리는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세 번째로 나타나셔서 겉옷을 벗고 물고기 잡는 베드로를 비롯한 그들에게 다시 사명을 맡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초신자를 가르쳐 중직을 맡기는 것보다 중직자가 갑자기 겉옷을 벗고 교회를 떠났을 때 그를 다시 불러다가 중직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가르쳐 줍니다.
처음으로 시몬 베드로를 불러 제자로 삼으셨을 때의 말씀은 불과 몇 절 밖에 되지 않지만 제자의 직분을 포기하고 어부가 된 베드로를 다시 제자의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어떻게 하셨는가를 우리는 21장 전체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장자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18)을 보면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더 이상 염려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실 수가 있을 정도로 확실한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겉옷을 벗고 물고기 잡는 베드로를 어떻게 하셨는 가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날이 새어 갈 때에 바닷가에 서서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라고 물었고 그들은 “없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없나이다’라는 말한 것은 실패 했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한 ‘물고기’(3)와 예수님께서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하신 ‘고기’(5) 그리고 6,8,11절에는 ‘물고기’와, 9,10,13절에 ‘생선’이라는 단어를 볼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모두 동사로 fishing, 명사로 fish 라고 기록하고 ‘고기’(5)를 meat(육류고기)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로는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러 가자고 한 ‘물고기’(알레온)는 어부(직업)가 생업으로 잡는 물고기를 의미하고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내려 잡은 ‘물고기’(6,8,11)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구세주라는 말로 ‘익투스’라고 했습니다.
‘익투스’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받을 때 물고기 모양의 그림으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문양입니다. 자동차에 물고기 문양이나 스티커 같은 것을 붙인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운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9,13절에 ‘생선’(옵사리온)은 요리를 해서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생선을 의미하는 단어 입니다. 우리 성경에 이렇게 ‘물고기’, ‘고기’, ‘생선’으로 번역한 것을 보면 영어성경보다 원문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영어성경에 ‘물고기’와 달리 사람들이 즐겨먹는 육고기라는 의미로 ‘maet’로 번역을 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어부가 잡은 물고기를 팔아서 먹을 수 있는 육고기가 있느냐’는 의미로 ‘meat’로 번역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없나이다’라고 말하므로 해서 어부가 되어서 먹고 살려고 했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고 구원하는 일을 하도록 맡겨주신 제자의 직분을 마치 헌 신짝처럼 던져버리고 먹고 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불러주시고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맡겨 주신 직분을 버리면 세상의 그 어떤 일을 했을 때 실패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겉옷을 벗고 실패한 그들에게 찾아 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이 잡았습니다. 이때 잡은 ‘물고기’(6)을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헬라어로 익투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익투스’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은 물고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바닷가에 서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예수신줄을 알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4,5).
어떤 분은 이른 아침이라 짙은 안개 때문에 예수신줄을 알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안개 때문에 얼굴은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음성을 듣고서라도 쉽게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신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는 영안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똑 같은 사건이 3년 전에 있었습니다. 그 때도 밤이 새도록 수고해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세 ‘깊은 대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그물을 내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고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시며 제자로 삼아 주셨습니다.(눅5:8)
그러나 지금은 영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찾아오시고 말씀하신 예수님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은 그물을 내려 많은 ‘물고기’를 잡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한)가 주님이시다’라고 소리쳤고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신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신줄 알고 벗었던 겉옷을 두르고 바다에 뛰어내려 예수님에게로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잡은 물고기가 든 그물을 작은 배에 싣고 육지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숯불 위에 떡과 생선을 올려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9) 숯불 위에 올려놓은 ‘생선’(옵사리온)은 요리를 해서 먹을 수 있는 고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고 하셨습니다.(10) 그들이 잡은 것을 ‘물고기’(알레온)라고 하지 않고 ‘생선’(옵사리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고기’를 ‘생선’(옵사리온)이라는 말은 고 하신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겉옷(사명)을 벗고 어부가 되어 먹고 살기 위해서 잡은 물고기(알레온)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서 잡은 ‘물고기’(익투스)를 가져와서 숯불 위에 올려놓고 먹을 수 있는 ‘생선’(옵사리온)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고기’가 ‘생선’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직분을 버리고 먹고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실패를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넘치는 수입을 주시고, 그 수입이 곧 먹고 살 수 있는 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교회가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서 노력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물질적인 복을 주시고 그래서 먹고 사는 것까지도 어려움이 없도록 축복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숯불로 구워서 따끈 따끈하게 먹을 수 있는 행복을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가 너무 어려워서 택시 운전을 한다고 합니다. 사모님이 학교 교사인 목사님은 사모님이 받는 월급이 목사 사례보다 많으니까 목사가 전업이 아니고 부업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이 맡겨 주신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 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잡은 큰물고기가 백쉰세 마리 였습니다. ‘백쉰세 마리’ 153이라는 숫자가 재미있습니다. 모나미 볼펜에 15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실패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그물이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적적인 복을 받았다는 숫자를 의미하는 볼펜이라는 것 입니다.
생선 가게나 반찬 가게에 ‘153’이란 간판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예수 믿는 집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베풀지 않고 욕심만 부린다면 오히려 예수님에게 욕 돌릴 수도 있습니다.
성도는 교회가 맡겨 주신 직분을 귀중히 여기시고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직분을 버리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충성하면 복을 받습니다.
교회가 입혀 주신 겉옷을 벗으면 실패합니다. 벗었더라도 다시 입고 주님께서 맡겨 주신 직분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맡겨 주신 양을 먹입시다. 주의 백성들을 살피며 섬깁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넘치는 복을 받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