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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Nesṭōrīyōs Paṭrīyarkā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루브룩은 남쪽의 알타이 초원에 진을 치고 있는 몽케의 진영에 크리스마스 직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인 1254년 1월 4일 몽케 대칸을 면담할 수 있었다. 그는 대칸과 그 가족을 위해 자신이 하느님께 기도할 것이라며 체류를 간청하였다. 대칸은 그들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봄이 되어 하영지로 이동하는 대칸의 진영을 따라 루브룩은 카라코룸으로 갔는데 그곳에 있는 네스토리우스 교회에서 부활절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다.
당시 중앙아시아와 몽골 일대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상당히 전파되어 있었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431년 에페수스 공회의에서 카톨릭 다수파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된 파이다.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네스토리우스(386-450)는 소위 기독론 즉 예수에게 인성과 신성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매우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논쟁에서 다수파들과는 좀 다른 입장을 취했을 따름인데 당시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런 차이를 용납하지 못했다. 네스토리우스 주교는 오늘날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힘든 쓸데없는 논쟁의 피해자였던 셈인데 그는 로마 황제에 의해 이집트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사후 그의 교리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 페르시아로 피신하였는데 이들의 교회를 동방교회 혹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라고 부른다.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서도 박해를 받아 다시 중앙아시아로 피신하였는데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초원의 유목민들에게 전파되었다.
당나라 초기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중국에 전파되었다. 바로 네스토리우스 교회였다. 780년경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비석에 그 전파과정이 드러나 있다. 그에 의하면 정관 9년(635년) 아라본 사절단이 장안에 도착하였으며 3년 뒤에는 장안 시내에 대진사라는 교당을 지어 포교의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대진국은 로마를 가리키고 경교는 기독교를 가리킨다. 물론 실제로 아라본 사절단은 로마가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왔지만 말이다. 루브룩의 서술에 의하면 당시 중국에는 15개의 도시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있었고 장안에는 주교가 있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중앙아시아 뿐 아니라 위구르족이나 케레이트, 나이만, 웅구트족 등 동방의 끄트머리인 몽골 초원의 부족들 사이에서는 세력을 넓혀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세 십자군 전쟁기에 유럽인들에게 널리 퍼져있던 사제왕 요한의 전설도 이러한 네스토리우스교의 확산을 드러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학식 있는 카톨릭 수사 루브룩의 눈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은 엉터리 교인들로 비춰졌다. 시리아어로 된 기도서가 있었지만 사제들은 그것을 읽을 줄 몰랐고 찬송도 뜻도 모른 채 불렀다. 심지어는 서방교회에서는 큰 죄로 여긴 고리대를 행하고 술을 너무 좋아하여 술 취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은 사라센인들과 섞여 살아서 그런지 축제를 금요일에 행하였으며 금요일에는 서방교회와는 달리 육식을 하였다. 주교는 드물게 방문하였는데 그가 순방하면 교인들은 거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사제로 서품을 받게 만들어 사제가 아닌 남자신도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루브룩의 눈에 이상한 것은 그 외에도 많았다. 그들은 십자가상에 붙어 있는 예수의 상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구세주 예수가 무력한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꺼렸던 것이다. 네스토리우스파 사제들은 또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과는 달리 독신을 지키지 않고 결혼하였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대부분의 사내아이들이 사제로 서품 받았다면 사제가 독신생활을 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누라와 자식들을 거느린 사제들은 신앙의 성장보다는 재산의 증대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고 루브룩은 힐난하였다. 몽골 귀족들은 자제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네스토리우스 사제들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의 나쁜 행실과 탐욕스런 태도 때문에 귀족 자제들은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한다. 오히려 일반 몽골인들이나 불교승려들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은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로마교회가 모든 교회들의 우두머리 교회임을 인정하였으며 만약 길이 열리기만 한다면 로마교황이 보내는 총주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그들은 또 로마교회의 수사인 루브룩이 자신들 방식대로 올리는 부활절 성찬과 세례 의식을 가까이서 관찰하는 것도 허락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발을 씻어주던 기름과 예수가 최후의 만찬용 빵을 구을 때 사용하던 밀가루도 갖고 있다고 하였다. 부활절에 사용하는 빵을 이러한 기름과 밀가루를 이용하여 만드는데 줄어든 기름과 밀가루는 다시 채워 넣었던 것은 물론이다. 부활절 만찬에서는 사도들의 수를 따라 빵을 열두 조각으로 자른 후 각 조각을 다시 참석한 신도들에게 잘라서 나눠주었다. 신도들은 자신들이 받은 빵조각을 매우 경건한 태도로 들어서 이마에 문질렀다고 한다. 루브룩은 한 네스토리우스파 사제의 죽음을 직접 옆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네시토리우스파에는 죽음을 앞둔 병자에게 사제가 기름을 발라주는 종부성사와 교인들이 자신의 죄를 사제에게 고백하는 고해성사가 없었다.
몽골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는 그렇게 규모가 크다고는 할 수 없는 토성이 있었는데 루브룩의 말에 따르면 파리 근처의 생드니 마을보다 작았다고 한다. 성에는 사라센인들이 모여 사는 구역과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구역 그리고 궁정의 서기들을 위한 커다란 궁정이 있었다. 성안에서는 유럽에서 잡혀온 포로들과 외국에서 온 사절들을 볼 수 있었다. 또 불교사원이 12개, 회교 모스크가 둘, 기독교 교회당이 하나 있었는데 물론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였다.
이처럼 몽골 제국은 교회 외에는 다른 종교를 용인하지 않는 유럽과는 달리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도록 하였다. 여러 종교들에 대해 관대하고 공정한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몽골의 칸들이 종교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루브룩이 가져간 성서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표하였다. 대칸 앞에서 여러 종교의 대표자들이 모여서 신학논쟁을 하는 공식적인 종교토론회도 간혹 열렸는데 루브룩도 바로 그러한 토론회에 참가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사라센인들과 불교도들 그리고 기독교 세 파의 토론회였는데 루브룩은 불교도와의 토론을 맡았다. 불교대표는 세상의 창조문제나 아니면 사후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의 문제를 놓고 토론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루브룩은 만물의 근원이 하느님이므로 하느님에 대한 토론으로 시작하자고 역제안하였다. 신에 대한 이러한 토론에서 불교도들의 신관과 기독교의 신관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 불교도는 한 분의 전능한 신을 믿는 기독교와는 달리 한 최고신 밑에 여러 등급의 신들이 존재한다는 다신관을 피력하였다. 이슬람 교도들 즉 사라센인들도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관을 갖고 있어 논쟁에서 루브룩의 편을 들었다. 그리하여 몽케 대칸 임석하에 벌어진 이 종교토론회는 불교가 기독교와 이슬람 양쪽으로부터 공격당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토론회가 몽케 칸의 종교정책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아니다. 몽케 칸은 자신의 모친이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그 부인 가운데도 기독교인도 있어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다른 종교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손에 다섯 개의 손가락이 있듯이 천국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가 있는 것이다. 루브룩이 참가한 종교토론회는 마치 오늘날의 학술토론회와 비슷하게 행사가 끝나자 참석자들은 모두 어울려 엄청나게 많은 술을 마셨다고 한다.
몽케 칸은 루브룩과 함께 프랑스 왕에게 사절을 파견하기를 원했으나 루브룩은 이들이 유럽의 사정을 염탐할까봐 그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였다. 대신 칸이 루이 9세에게 보내는 서신을 휴대하였는데 그 서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짐이 당신에게 알리는 것은 영원한 신의 명령이다. 당신이 이를 듣고 믿는다면, 당신이 짐에게 복속할 의사가 있다면, 당신의 사신들을 짐에게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당신이 우리와 평화를 원하는가 아니면 전쟁을 원하는가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영원한 신의 힘에 기대어,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지는 곳까지 모든 세상은 기쁨과 평화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가 어떻게 할지 비로소 정해질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신의 명령을 듣고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그것을 준수하지 않거나 그것을 신뢰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래서 ‘우리의 나라는 멀고 우리의 산들은 강력하며 우리의 바다는 넓다’고 말하고 그런 것에 기대어 우리와 전쟁을 하려고 한다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려운 것은 쉽게 만들고 멀리 있는 것을 가깝게 만드시는 영원한 그분만이 아신다.”
협박이 섞인 복속의 권유였다. 루브룩은 이 서한을 갖고서 바투의 사라이, 카프카즈 산맥 밑의 관문인 철문(데르벤드),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를 차례로 거쳐 지중해 동안의 트리폴리로 귀환하였다. 당시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프랑스로 귀국한 이후였기 때문에 만날 수 없어 자신의 여행기를 보고서로 써서 칸의 서한과 함께 보냈다. 몽골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영웅적으로 마치기는 했지만 그가 애초에 의도했던 선교활동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루브룩이 몽골에서 세례를 준 사람은 도합 여섯 명이었다.
김호동 역주, 《몽골제국기행》 (까치, 2015)
김호동,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 (까치,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