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에서 실시한 일본군경의 교반적(攪拌的) 방법에 의한 새 전술은 1910년 11월 25일부터 12월 20일에 걸쳐 경상북도 북부의 일월산(日月山)을 중심으로 안동·예천·영춘·봉화 일대에서, 또 1911년 9월 하순부터11월 초순에 걸쳐서는 황해도에서 실시되었다.
이리하여 1910년 8월 22일의 국권강탈을 전후하여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은 거의 종말을 고하여, 산간 벽지에서의 분산적인 소조활동만이 지속되었다. 나라의 주권이 완전히 상실되고 국내에서의 무장투쟁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무장투쟁을 지속하기 위한 새로운 독창적인 방안이 제기되었다. 유생 의병장 유인석이 제기한 근거지 이론이 그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유인석 부대는 그 문인 이춘영·안승우에 의하여 경기도 지평에서 조직되었다. 그들이 원주·제천으로 부대를 옮긴 것은 유인석의 다음과 같은 근거지 사상에 따른 것이다.
우리 나라의 강한 포군(砲軍)은 모두 서북에 있고, 돈과 곡식과 인재는 모두 동남에 있으니, 원주(原州)와 제천(堤川) 사이에 근거를 두고 오른쪽으로 서북의 군사를 모집하고 왼쪽으로 동남의 인재를 모집하여 굳게 지켜 8도의 인심을 고동(鼓動)시킨 연후라야 일이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제천·단양·충주를 중심으로 한 ‘호령요액(湖嶺要扼)’의 전투에서 실패한 다음 그는 ‘돈과 곡식과 인재’가 있다는 동남을 버리고 만주 요동지방에 옮겨서 서토강용(西土强勇)’에 의거한 ‘복진지계(復振之計)’를 전개하게 된다. 유인석의 이러한 근거지 사상이 가장 분명히 체계화된 것이 지구전(持久戰)을 위한 ‘북계책(北計策)’〔要持久得根據地〕이라 하겠다.
그는 1907년 12월에 경기도 양주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창의 대진소를 두고 서울로 진격한다는 소식에 접했을 때 「여러 진에 주는 별지」〔與諸陣別紙〕를 발표하여 북계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서울로 진공한다는 계획은 통쾌한 일이기는 하나, 매우 위태롭다고 지적한 다음 “만전의 책(策)은 북계(北計)에 있는 것 같다”〔萬全之策, 似在北計〕고 지적하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지리적 조건, 사회적 조건, 국제적 조건의 세 가지가 고려되고 있다.
첫째로는, 지리적 조건이니 백두산을 중심으로 지구전(持久戰)을 위한 근거지를 창설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각컨대 백두산(白頭山)은 일국의 근저로서 부근의 제읍, 즉 무산(茂山), 삼수(三水), 갑산(甲山), 장진(長津), 자성(慈城)·후창(厚昌)·강계(江界) 등은 절험하여 요충지가 될만 하니 이를 근거지로 삼으면 가히 대사를 도모할 만하다.
둘째로, 사회적 조건이니 무장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군중적 기반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서북인은 강경(强勁)하고 포(砲)를 쏘는데도 능숙하며 북간도와 서간도에 이어져서 우리나라 사람이 매우 많다. 듣건대 이 지방에도 호응하려는 기세가 없지 않다하니 이것을 연결시키면 가히 병력을 모아 기를만하고 재곡(財穀)을 조달하기가 좋고 병기를 만들거나 살 수도 있다.
세째로는, 국제적 조건이니 이 지역은 또한 “청·러시아 양국과 연결하는 길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여러 고을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지구전을 전개한 다음 결정적인 순간이 닥쳐올 때에 온 나라가 일어서면 쉽게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근거지의 군중을 어떤 이념으로써 결속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북송(北宋)시대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발전시킨 ‘관일약(貫一約)’을 실시하여 유교적 소우주(小宇宙)를 만들고 이것을 전국에 확대시키는 것을 민족독립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교적 소우주를 위한 투쟁에 일반 군중이 신명을 걸고 싸울 수 있겠는가. 결국 유인석이 그린 근거지 창설에 대한 구상은 하나의 이념으로 마무리되고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계책’은 우리나라 민족운동사상 처음으로 제시된 창조적인 근거지 사상이며, 위정척사사상과는 다른 지도이념에 의하여 의병운동을 독립군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전략적 방향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1911년 4월에 신민회(新民會)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항하여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창설한 독립군운동의 근거지라 하겠다.
신민회는 물론 개화파의 사상적 계보에 속하는 비밀결사이다. 이 결사는 교육과 식산(殖產)에 의한 실력양성을 우선하고 결정적인 기회를 포착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계몽운동단체이다. 따라서 신민회는 지금까지 강력한 일본군경에 대하여 무력으로 저항하는 의병운동에 대해서는 오히려 실력양성을 저해하는 투쟁형태라고 하여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강탈을 전후하여 무장투쟁에 의한 국권회복 노선을 취하게 되었으며, 일제의 권력이 미치지 않은 서간도 지방에서 근거지 창설에 착수하였다. 즉 그들은 1911년 4월에 유하현 삼원보에서 노천대회(露天大會)를 열어서, 이상룡(李相龍)을 초대사장으로 하는 경학사(耕學社)를 창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로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였다. 경학사란 경(耕; 산업)과, 학(學; 교육)에 의하여 실력을 양성하고 그를 토대로 하여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경학사란 종래의 신민회의 투쟁노선을 새로운 환경에 알맞게 발전시킨 것이라 하겠다.
물론 서간도는 중국영토이다.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대전제로서 한국인 주민의 법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선결과제가 되었다. 따라서 경학사는 1913년부터 산업·교육·권리를 삼대강령으로 정립시켰다. 경학사는 그후에 부민단(扶民團)·한족회(韓族會)로 발전하면서, 3·1독립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인 1919년 11월에 임시정부의 산하단체로 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창설의 군중적 토대가 되었다. 또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사업도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로 부터 신흥학교(新興學校)·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면서 1920년대의 독립군운동을 위한 우수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이와 같이 한국이 일본에 강점되고 해가 가고 날이 갈수록 그 권력망이 방방곡곡에 조밀화되는 환경 속에서, 의병운동의 무장투쟁 형태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근거지 창설문제는 유인석의 그것이 실패된 반면에, 신민회에 의하여 해결되었다. 이것이 성공한 이유로는 근거지로 이주해 오는 군중들의 생활적 요구와 결부된 제반시책에 의하여 그들을 경학사 주위에 굳게 결속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유인석의 근거지 창설 이념은 그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근거지 군중의 생활적 요구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시책이 결여되고, 너무나 정신주의적인 데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결함은 위정척사사상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경향이라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신민회에 의한 근거지 창설이 성공한 배경은 개화사상이 지니고 있는 실학(實學)적 성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미 거론하였거니와 원래 한말의 의병운동은 위정척사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여 출발하였다. 일제의 침략정책이 노골화됨에 따라, 민족적 모순이 날카롭게되고 더욱 광범한 군중이 전국적인 규모에서 의병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의병장의 계층적 구성에서도 점차 평민의병장의 비중이 높아갔다. 의병운동의 이와 같은 내재적인 변화는 지도이념의 교체를 불가피하게 요구하게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하여 무장투쟁을 광범한 군중적 토대 위에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위정척사사상을 극복 지양하는 사상적 과제가 전면에 부각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독립군운동은 민족주의를 지도이념으로 하는 무장투쟁이다. 따라서 의병운동과 독립군운동간에는 투쟁형태에서의 계속성과 동시에 지도이념에서의 단절성이 있다. 역사적 사실은 우리나라 민족주의 형성이 개화사상을 기조로 하며 발전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본다. 3·1독립운동 직후 북간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단체로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가 있었다. 그 회장 구춘선(具春先)은 1920년의 독립군운동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고유문(告論文)을 발표하고 있다.
동포여, 독립을 원하고 또 자유를 원한다면 독립전쟁의 군인이 되라. 군인이 되면 속히 정부(임시정부)의 군적(軍籍)에 등록하라. 동포여, 우리 국토를 회복하고 우리 국권을 회복하려면, 독립전쟁의 군인이 되라. 대한의 국토는 대한인인 우리들의 피로써 회복해야 한다. 대한의 국권은 대한인인 우리들의 힘으로써 회복해야 한다. 동포여, 군인이 되려면 정부의 군인이 될 것이요, 죽어도 정의의 공화기치(共和旗幟) 아래서 죽어야 한다. 독립을 위해서는 너도 죽고 나도 죽어야 하지만, 죽더라도 가치있는 곳에서 죽고 성공하는 곳에서 죽어야 한다. 임시정부의 밖에 서 있는 저 복벽주의(復辟主義) 단체 등의 군인으로서 죽으면 하등의 가치가 없고 하등의 성공도 없다. 가치있고 성공적인 죽음을 위해서는 공화정부의 군적에 등록하고 공화정부의 군인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1920년에 북간도 지방의 무장단체에는 위정척사파의 ‘복벽주의 단체 등의 군인’과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공화정부의 군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종래부터의 의병운동의 잔존세력이 있는 반면에 공화주의의 기치를 세운 독립군이 병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고주의적인 위정척사사상이 새로운 시대의 무장투쟁의 지도이념으로서 지속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3·1운동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가 교리상으로는 서로 대립적이면서도 3교연합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종교단체의 지도층의 많은 인사들이 각기 그 교리에 우선하여 민족주의 이념하에서 공통된 사상적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림대표 곽종석(郭鍾錫)은 끝끝내 ‘3교연합’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유림대표 166명이 연서한 독립청원서를 독자적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고 있다. 즉 민족주의적 입장보다도 유교적 입장를 우선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국민주의·국가주의·민족주의로 다양하게 번역되나, 일반적으로 식민지·반(半)식민지 국가에서는 민족의 자결권을 회복하기 위한 반침략적인 민족주의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민족주의란 바로 국민국가(nation state)의 형성을 지향하는 사상조류이며, 그를 위한 무장력은 국민군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봉건적인 신분제도(우리나라에서의 문벌주의)와 지방 할거주의(우리나라에서의 地閥主義)가 극복 지양되어야 한다. 그런데 근대 한국의 사상사에서 문벌(門閥)과 지벌(地閥)의 극복을 중요한 정치적 슬로 우건으로 내건 정치세력은 개화파이며, ‘인내천(人乃天)’을 종지(宗旨)로 하는 동학사상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의병운동은 근대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피어린 투쟁이다. 또 그 운동을 선도한 사상도 유생층의 위정척사사상이다.
그러나 오랜 의병운동 과정에서는 의병장의 계층적 구성은 물론, 그 지도사상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병운동 그 자체는 위정척사사상의 잔재를 끝끝내 극복하지 못하였고, 국민군적 성격을 지니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바꾸어 말한다면 의병운동은 그 지도사상이 위정척사사상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점차 근대적인 민족주의에로 전환하는 과도기적인 무장투쟁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무장투쟁의 성공여부를 좌우하는 요인으로서는 무기의 성능 문제, 전투경험의 유무 문제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이상 더 중요한 문제는 무장투쟁의 성격상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각계각층 군중과의 연계를 좌우하는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의병운동은 신명을 건 애국투쟁이요 하물며 그 핵심세력이 평민층인데, 이러한 투쟁대열 속에 반상(班常)간의 서계적(序階的) 질서를 그대로 도입하여서는 의병부대의 내부적인 결속은 물론 각계각층 군중과의 연계를 강화하면서 그 투쟁대열을 확대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제국군의 해산과 대일항전
1) 한국군의 해산
(1) 1905년의 감축
근대 한국군은 1881년 별기군(別技軍)이라는 이름으로 발족되었으나, 이듬해 구한국군이 일으킨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말미암아 불과 1년만에 좌초되고 말았다. 이후 한국군은 1904년까지 20여년 동안 점멸하는 한말의 국운 속에 표류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1904년 2월 러시아와 개전한 일제(日帝)는 즉시 한국정부(韓國政府)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하고, 이어 동년 5월 ‘대한방략(對韓方略) 및 시설강령(施設綱領)’을 확정하여 한국군의 본격적인 약체화를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즉 ‘의정서’에 의거하여 한국내에 군사기지를 확보한 일제는 다시 ‘강령’에 따라 한국군대를 감축시키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동년 8월에 나온 ‘한국시정개혁안(韓國施政改革案)’이었다. 주한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하야시 곤스께)와 한국황제 사이에 합의된 이 개혁안에는 다음 두 가지 조항이 들어 있었다. 첫째, 한국의 군대는 축소하여 2만명의 병력을 1만명 내외로 감원한다. 둘째, 일한병기동맹(日韓兵器同盟)을 맺어 군기(軍器)를 정리한다. 이 합의사항에 따라 8월 23일 황제의 ‘군제개혁에 관한 조칙’이 발표되었다.
이 조칙에 따라 민영환(민泳煥)·권중현(權重顯)·이지용(李址鎔) 등 12인의 군제의정관(軍制議定官)이 아래와 같이 7개항의 개혁안을 만들어냈다.
1. 원수부(元師府)를 폐하고 참모부(參謀部)를 설치할 것.
2. 교육감부(敎育監府)를 설치하고 무관의 양성훈련을 관장할 것.
3. 시종무관직(侍從武官職)을 설치할 것.
4. 각 수비대(守備隊) 주차지(駐箚地)의 변경
5. 노병 및 20세 이하의 소년병을 해대(解隊)할 것.
6. 무관교육을 받지 않는 무관을 퇴직시키고 교육감부의 감독을 엄히할 것.
7. 군사국(軍事局)을 군부에 직할시켜서 군기의 정리와 통일을 도모할 것.
이 개혁안의 저의는, 첫째 원수부를 해체함으로써 황제의 군통수권을 약화시키고, 둘째 교육감부를 설치함으로써 친일장교를 양성하여 한국군의 지휘를 일본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것이었다.
이어 1904년 10월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하세가와 요세미찌)가 한국주재 일본군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동년 12월 26일 황제에게 「한국군제개정(韓國軍制改正)에 관한 의견」이라는 상주문을 올렸다. 그 골자는 현재의 한국군 병력 2만명을 1만명으로 반감하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한국정부의 재정적 부담이 과중하고, 다수의 약병(弱兵)보다 소수의 정병(精兵)이 더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전주(全州)·의주(義州)·금주(金州)·하주(河州)·개성(開城)·경주(慶州)·진남(鎭南) 등지의 지방 진위대는 해산되고 수원(水原)·청주(淸州)·대구(大邱)·광주(光州)·원주(原州)·해주(海州)·평양(平壤)·북청(北靑)의 8개 처에만 진위대를 두게 되었으며, 병력은 8천명 선으로 대폭 감축하고 말았다. 그러나 교활하게도 일제는 감원으로 인하여 실직된 한국군의 반발을 피하기 위하여, 1904년 12월부터 1905년 4월까지 5개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감축한다는 꾀를 부렸다.
이와같이 일제는 러일전쟁을 구실로 2개사단 병력의 일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다른 한편 한국군을 약체화시켜 종국적으로는 한국군을 해체하여 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할 음모를 꾸였던 것이다. 이같은 1905년의 원수부 해체와 한국군 감축이 2년 뒤인 1907년에 단행된 한국군 해산의 준비작업이었음은 물론이다.
(2) 1907년의 해산
ㄱ. 「비밀각서」 3항
한국군 해산은 마침내 1907년 7월 24일 밤에 강제로 체결된 소위 ‘정미 7조약’에 의해 강행되었다. 동 7조약에는 한국군 해산을 주요 골자로 한 ‘비밀각서’가 부수되어 있었으니, 그 제3항에 해산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1주일 뒤인 8월 1일 새벽 한국군은 1881년 이후 28년만에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비밀각서 제3항
1. 육군 1대대를 존치(存置)하여 황궁수위(皇宮守衛) 임무를 담당케 하고 기타를 해대(解隊)할 것.
2. 교육이 있는 사관(士官)은 한국군대에 유무(留務)할 필요가 있는 자를 제외하고, 기타는 일본군대로 부속케 하고 실지 연습케 할 것.
3. 일본서 한국 사관을 위하여 상당한 설비를 할 것.
또 부수각서 제3항에는 한국군 해산의 방법과 해산 병사의 구체적 처리방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 육군 1대대만 존치하여 황궁 수위에 임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해산할 것.
2. 군부(軍部)를 비롯한 육군에 관계 하는 관아(官衙)를 전폐(全廢)할 것.
3. 교육있는 사관은 한국군대에 머물 필요가 있는 자를 제외하고, 기타는 일본군대에 부속시켜 연습시킬 것.
4. 해대(解隊)한 하사졸(下士卒) 중 경찰관의 자격이 있는 자는 이를 경찰관으로 채용하고, 기타는 가급적 실업(實業)에 종사하도록 할 것.
실업에 종사시키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간도(間島)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사시킬 것.
② 둔전법(屯田法)에 따라 황무지 개간에 종사시킬 것.
이상과 같이 당초의 한국군 해산방법은, 첫째 장교를 제외한 모든 사병을 해산하고 이들을 간도로 보내거나 황무지 개간에 노역하게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장교라 할지라도 필요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군대에 이적시켜 훈련케 한다는 것이었다. 세째로는 황궁수비대로 필요한 소수의 병력을 그대로 남겨 두되, 나머지는 어떤 군사기관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체안은 8월 1일 새벽을 기하여 극비리에 진행된 한국군 해산에 저항하는 무장항거로 말미암아, 전혀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일본공사관기록』에 보면 한국군 해산의 이유를 “신뢰할 수 없는 군대”요 “군사지식이 없는 무능한 군대”이기 때문이라 말하고, 필경 고용병제도를 고쳐 징병제도를 실시하여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 우선 현재의 한국군을 완전히 해체하여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이유는 단순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에 있어서는 한국군을 원천적으로 말살하려는 음모가 이미 1904년부터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05년 4월에 단행된 원수부의 해체였다. 이때 한국군의 총사령부에 해당하는 원수부가 해체되고 실제병력 2만명이 8천명으로 반감되었음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원수부 해체와 한국군의 병력 감축을 제안한 자는 일본공사관부(日本公使館附) 무관 제등역삼랑(齊藤力三郎:사이또 리끼사부로)으로서 그가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1904년 6월 14일에 제출한 ‘한국에 있어서의 군사적 경영요령(軍事的經營要領)’에 따르면, 병제개혁(兵制改革)을 한다는 명분을 내걸어 현재의 한국군대 7개 연대(聯隊)를 대부분 해산하여, 궁중을 호위하고 황제를 안도시킴에 족한 근소한 병력을 비치하도록 함으로써, 한국이 완전히 우리 일본 무력을 신뢰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는 음모가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04년에 반감된 한국군이 1907년 해산 당일까지 존속되어 왔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해산 당시의 한국군 병력은 시위 2개연대 및 군부(軍部)·연성(硏成)·무관(武官)·유년학교(幼年學校) 등 약 5천명이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고, 지방에는 8개 진위대대 약 2천명이 있어 도합 7천명에 지나지 않았다. 1904년의 8천명이 자연감소로 7천명으로 줄어든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등박문(伊藤博文:이또오 히로부미)은 비밀각서 제3항에 의거하여 한국군 해산이 확정되기도 전에 이미 본국에다 주한일본군의 증파를 요청하여, 한국군의 예상되는 저항으로 야기될지도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즉 그가 본국정부에 타전한 전문에 보면
목하(目下) 경성(京城)에는 약 6천명의 한국병이 있어 언제 봉기할지 모를 일이니 그 무기를 빼앗을 필요가 있다. 이를 실행하는데 있어 소란이 일어날지 모르므로 다수 우세한 병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조속히 본국으로부터 출병(出兵)시킴이 긴요하다고 믿는다.
이때 주한 일본군은 모두 1개 사단병력으로서 그 주력을 평양과 함경도에 배치하여 국경수비에 충당하고 있었다. 앞서 고종의 강제양위 때에는 그 일부 병력을 서울로 이동시켜 사태에 대비하였으나, 한국군 해산에 즈음하여서는 더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이등박문은 증원부대의 파견을 본국에 요청했던 것이다. 이 요청에 따라 1개 혼성여단병력이 도착하고, 7월 31일에는 총기 6만정이 용산병참창(龍山兵站廠)에 도착하였다.
ㄴ. 해산조칙과 방법
바로 이 날이 한국군 해산 조칙이 작성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이 조칙은 극비리에 작성되었다. 고종은 이미 제위에서 물러났고 순종(純宗)이 자리를 물려 받고 있었으므로, 아무런 저항없이 이등이 제시한 문안대로 조칙은 선포되었다. 조칙은 한국군을 해산하여 “국비를 절약하고 이를 이용후생의 업에 이용한다”는 이유와 장차 징병제도를 실시하여 정예군을 만든다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고,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이 조칙은 해산 한국군 병사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후 전국으로 확대발전하는 의병항쟁에도 일본군을 투입할 수 있다는 법적근거로 이용되었다.
한편 일본군은 8월 1일 강행될 한국군 해산의 구체적 실행 방법을 작성하였다. 먼저 각 부대장을 소집하여 조칙을 낭독 전달하고 그들이 귀대할 때 일본군 약 2개 중대를 함께 파견하며, 귀대한 부대장은 병사들을 모아 해산조칙을 알리고 해산에 따른 일시 은급금(恩給金) 지급을 통보한다. 또 병참 탄약군복은 일체 환납한다는 것이었다.
군대해산의 방법
1. 군부대신은 헌병사령관, 여단장, 기(騎), 포(砲), 공병대장(工兵隊長)을 소집하야 조칙(詔勅)을 전하며, 또 해산순서(解散順序) 제2항 포고를 보여줄 것.
2. 앞 항의 제관(諸官)은 즉시 각기 그 부하에 대하여 대신이 전한 조칙 및 포고를 명시하여, 이때에 각 대장(隊長)과 동시에 일본병 약 2개 중대를 각 병영에 동행케 하고, 필요가 있으면 병력을 사용할 것.
비고:제1항의 보병대대장 중에는 지방대장(地方隊長)도 포함된다.
군대해산 순서
1. 군대해산 이유의 조칙을 발표할 것.
2. 조칙과 동시에 정부는 해산 후의 군인처분에 관한 .포고를 발표하되, 이 포고 중에는 다음 사항을 명시할 것.
① 시위보병 1대대를 둘 것.
② 시종무관 몇 명을 둘 것.
3. 무관학교(武官學校) 및 유년학교(幼年學校)를 둘 것.
4. 해산할 때에 장교 이하에게 일시 은급금을 급여하되, 그 금액은 장교는 대개 2개년 반에 상당한 금액, 하사 이하는 대개 1개년에 상당한 금액으로 한다. 단, 1개년 이상 병역에 복무한 자이다.
5. 장교 및 하사 중 군사학의 소양이 있으며 체격강건(體格强建)하고 장래유망(將來有望)한 자는 1, 2, 3호(전항)의 직원 혹은 일본군대에 부속케 할 것.단, 하사는 일본군대에 부(附)치 아니할 것.
6. 장교 및 하사 중 군사학 소양이 없는 자로 보통학식이 있으며 문관기능이 있는 자는 문관에 채용할 것.
7. 병기 탄약은 환납(還納)할 것.
일제는 이와 같은 모든 음모를 극비리에 진행하였지만 대부분의 한국군 병사들은 머지않아 한국군에 대한 어떤 조처가 있으리라고 짐작하여 왔다. 따라서 한국군 해산의 비밀은 공공연한 것이었고, 다만 그 날이 언제인가 하는 것만이 비밀이었던 것이다.
ㄷ. 서울 시위대(侍衛隊)의 해산
먼저 군대해산은 서울 시위대부터 실시하기로 계획되었고 8월 1일이 그 실시 날짜였다. 서울에는 시위(侍衛) 5개 대대와 기병대(騎兵隊)·포병대(砲兵隊)·교성대대(敎成大隊) 등이 있었는데, 8월 1일의 1차 해산대상으로 꼽았다.
이상과 같이 보병 2연대 2대대를 근위대로 개편하여 잔존시키는 이외에는 모두 8월 1일을 기해 해산하기로 하고, 군악대(軍樂隊) 등 일부부대만 추후 해산하기로 하였다.
〈표 1〉서울시위대의 해산(8월 1일)
부대명
정원
비고
장교
사병
시위여단사령부(參將)
3
6
근위대(近衛隊)로 개편
보병 제1연대 본부(副領)
3
3
제1대대(參領)
21
591
제2대대(〃)
21
591
제3대대(〃)
21
591
보병 제2연대 본부(副領)
3
6
제1대대(參領)
21
591
제2대대(〃)
21
591
제3대대(〃)
21
591
기병대(〃)
5
131
포병대(〃)
4
157
공병대(〃)
5
198
1907년 8월 1일 새벽 7시에 해산조칙이 발표되었다. 조칙은 시위 각 부대장을 장곡천(長谷川) 일본군 사령관의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에 집합시켜 군부대신 이병무로 하여금 조칙을 낭독하게 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장곡천은 “조용히 해산을 실행하라”는 요지의 훈시를 했다.
부대로 돌아온 각 부대장은 먼저 중대장을 불러 해산조칙을 전달하고 중대장은 극비리에 사병들의 총기를 반납시키고 오전 10시까지 그들을 현재의 을지로 5가에 있는 훈련원(訓練院)에 집합하도록 하였다. 해산식장이 마련된 훈련원에는 모전(牟田:무다) 일본 주차군 참모장, 군부 고문 야진(野津:노즈)을 비롯한 한국군 수뇌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해산군은 무장 해제된 채 거리를 행진 훈련원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는데, 종로와 덕수궁 대안문(大安門)에는 기관총을 설치한 일본군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훈련원에 제일 먼저 도착한 해산 한국군은 김기선(金基善)의 기병대인 시위 제1연대 제3대대였다. 이 대대는 황제 강제양위에 격분한 병사들이 일본경찰을 쏘아 죽인바 있는 이른바 ‘불온 한국군’이었다. 이어 마지막으로 경운궁 포덕문(慶雲宮布德門) 밖의 시위연대 제3대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훈련원에 도착한 3개 대대의 병사들은 모두 6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병사들이 이미 탈영하여 해산식장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산식은 오후 2시가 넘어서 시작되어 3시에 끝났다. 때마침 소나기가 쏟아져 병사들의 옷은 비에 흠뻑 젖어 보기에도 안타까웠다. 조칙 낭독이 끝나자 소위 은금(恩金)이라 하여 하사 80원, 병졸(1년 이상 복무자) 50원, 동(1년 미만 복무자) 25원이 각각 지급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 날의 해산식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최종경례(最終敬禮)
어제 아침 열시부터 각대 병정을 훈련원에 소집하고 해산식을 거행할 새 일병(日兵)이 사면환위(四面環圍)하여 철통같이 하고 한국위관(韓國尉官)을 곤재해심(困在垓心)하여 대대장이 효유(曉諭)한 후 장졸이 서로 작별 경례를 하게 하고 장교는 고사대명(姑舍待命)이고 하사는 80원씩의, 1년 이하자들은 25원씩 반사(頒賜)하였다.
또 이 신문은 이른바 은금이란 이름의 돈을 받아 쥔 한국군 병사들이 훈련원을 나오면서 울분을 참지 못해 지폐를 갈갈이 찢고 있었다는 사실과 받은 돈으로 사복을 사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들을 보도하고 있다.註 020020 위와 같음.닫기
ㄹ. 진위대(鎭衛隊)의 해산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를 해산한 일본군은 계속하여 지방 진위대의 해산에 착수하였다. 즉 8월 3일에 개성·청주 등, 4일에 대구, 5일에 안성, 6일에 공주·해주·평양, 7일 안주, 8일 수원, 9일 광주·의주, 10일 홍주·원주, 11일 강화·개경, 13일 강릉·진남, 14일 전주, 16일 안동, 17일 울산·강진, 19일 북한산·경주, 23일 강계, 24일 함흥, 9월 3일 북청의 차례로 약 1개월에 걸려 해산시켰다.
〈표 2〉 지방 진위대의 해산(8월 3일~9월 3일)
부대명
위치
정원
해산일자
장교
사병
진위 제1대대 참령(參領)
수원
4
113
8.3
분견대 정위(正尉)
개성
1
103
8.3
〃 참위(參尉)
안성
1
40
8.5
〃 부위(副尉)
강화
1
50
8.11
〃 하사(下士)
북한산
1
10
8.19
진위 제2대대 부령(副領)
청주
7
153
8.3
분견대 정위(正尉)
공주
1
101
8.6
〃 부위(副尉)
홍주
1
50
8.1
진위 제3대대 부령(副領)
대구
10
251
8.4
분견대 부위(副尉)
경주
1
29
8.19
〃 부위(副尉)
울산
1
21
8.17
〃 정위(正尉)
진남
1
101
8.13
〃 부위(副尉)
진주
1
29
9.2
〃 정위(正尉)
안동
1
101
8.16
〃 부위(副尉)
문경
1
50
8.11
진위 제4대대 참령(參領)
광주
4
105
8.9
분견대 부위(副尉)
강진
1
50
8.17
〃 정위(正尉)
전주
1
101
8.14
진위 제5대대 참령(參領)
원주
10
251
8.1
분견대 부위(副尉)
강릉
1
50
8.13
진위 제6대대 참령(參領)
해주
10
251
8.1
분견대 부위(副尉)
황주
1
50
8.14
진위 제7대대 참령(參領)
평양
5
105
8.6
분견대 부위(副尉)
안주
1
50
8.7
〃 정위(正尉)
강계
1
100
8.23
〃 부위(副尉)
의주
1
50
8.9
진위 제8대대 (신설중)
북청
―
―
9.3
분견대 ( 〃 )
함흥
―
―
8.24
지방 진위대 해산에도 일본군은 미리 한국군장교를 시켜 탄약과 총기를 압수한 다음 일본군을 파견하여 해산을 감독하고 병영을 접수하였다. 지방의 진위대 병사들도 서울시위대 병사들에 호응하여 무장해제와 해산에 반대하여 봉기하였다. 특히 원주지방 진위대와 강화도분견소 병사들은 전원이 무기를 들고 일본군의 접근을 불허하였다. 홍주분견소 병사들은 무기를 소지하고 집단적으로 병영을 이탈하였다.
1
907년 8월의 서울시위대와 지방 진위대의 해산으로 한국군은 사실상 해체되고 만 것이지만, 이때 장교만은 아직 해산하지 않았다. 한국군 장교는 사병해산에 적극 협력하도록 하고 그 대신 일제는 그들에게 상당한 후대를 언약하였다. 그러나 장교라 할지라도 특히 ‘교육이 있는 사관’으로 ‘한국군대에 유무(留務)할 필요가 있는 자’ (각서 제3항)가 아니면 면관(免官)되었다. 따라서 장교들은 일본군 견습생으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은금을 받고 나가거나 둘중의 하나를 택하여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교는 은금을 받고 나가기를 원했다.
이리하여 9월 3일 1,255명의 장교가 면관되었다. 나머지 장교들은 조칙의 ‘사관양성(士官養成)’ 운운의 표본으로 남았지만, 1909년 7월 30일의 ‘군부폐지칙령(軍部廢止勅令)’으로 한국의 무관학교는 폐교되고 무관양성마저 ‘일본에 위임’하고 말았다. 면관된 장교와 8월 27일에 해산된 헌병(257명)에 대해서는 헌병보조원간부(憲兵補助員幹部)로 특채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2) 한국군의 항전
(1) 시위대의 항쟁
일제의 기만적인 군대해산에 대항하여 한국군병사들은 감연히 일어나 항전하였다. 서울시위 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의 항전에 뒤이어 원주진위대와 강화분견대 병사들이 봉기하였다. 많은 서울시위대 병사들이 훈련장에 가기를 거부하며 탈영하였으며, 원주분견대 병사들은 무기를 든 채 탈영하였다.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병영사수를 외친 서울시위 1연대 1대대의 항거는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로 폭발하였다. 8월 1일 아침 박참령(參領)은 각 대대장의 소집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신병을 빙자하여 최고참 중대장 보병정위 김재흡(金在洽)을 보냈다. 장곡천(長谷川)의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에 다녀온 김재흡은 군대해산 조칙이 내렸다는 사실과 아침 9시반까지 전 사병을 무장해제하고 동대문의 훈련원으로 인솔, 해산식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대대장 박참령에게 복명하였다. 박참령은 곧 각 중대장을 집합시켜 명령을 하달하였다. 각 중대장은 중대 전사병의 총기를 무기고에 반납토록 하고 전원 대대 중정(中庭)에 집합시키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대대장실에 들어갔다. 대대의 무장해제를 감시하기 위하여 교원(敎原:오시하라) 대위가 기병 2명을 인솔하고 병영에 들어섰다.
무기를 반납한 사병들은 중대장 명령에 따라 대대 중정에 정렬하였다. 대대장실에 들어간 박승환은 한 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신의 단총으로 자결하였다. 유서내용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라는 것이었다. 대대장실에서 총성이 울리고 “대한제국만세”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병영은 긴장되었다. 순간 중정(中庭)의 병사들은 대열을 벗어나 무기고로 달려갔다. 문을 부수고 총기와 탄환을 되찾은 병사들은 교관 율원(栗原:구리하라)을 향하여 난사했다. 당황한 율원과 기병은 창문을 부수고 도주하였다. 성난 병사들은 대대장의 시신을 차에 싣고 슬그머니 뺑소니치려던 부위 안봉수(安鳳洙)에게도 총부리를 돌렸다. 쓰러진 안봉수는 가까스로 기어 민가에 몸을 숨겼다. 이때 시간은 아침 8시를 조금 지났을 때였다.
박승환 대대는 남대문과 서소문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고 이웃에 제2연대 제1대대가 있었다. 병영을 점령한 박승환 대대 병사 3명은 제1연대 제1대대로 달려 갔다. 2연대 1대대의 병사들도 무장을 해제당한 채 연병장에 정열하고 막 훈련원으로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박승환 대대에서 달려온 병사들은 문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은 왜 가만있나. 우리 대대장은 죽었다.”
이렇게 외친 병사는 공포를 쏘면서 같이 동조하라고 호소하였다. 연병장의 2연대 1대대 병사들도 함성을 지르며 무기고로 달려가 문을 부수고 무기를 들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일본군교관 지(池:이께) 대위는 재빨리 남문으로 도망쳤다. 사병들의 의거를 극력 만류하던 장교도 사병들의 총대에 맞아 쓰러지거나 재빨리 도주하였다. 이와 같이 1연대 1대대 사병들과 동조하여 일어선 2연대 1대대도 며칠전 대대장 보병참령 이기표(李基豹)를 잃은 부대였다. 이 참령은 7월 25일 사병 진무책(鎭撫策)을 논하는 대대장회의 석상에서, “불고사체(不顧事體)하고 언사승당(言辭乘當)에 거차해망(擧措駭妄)하다”는 이유로 면관되었던 것이다. 8월 1일 아침 대대장 서리 민중식(閔仲植)은 장곡천의 관저에 다녀온 후 지(池) 교관에게 해산식장으로 갈 사병들에게는 일체 군대해산에 관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훈련원으로만 간다고 속이겠으니 그리 알라고 말했다. 사병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총부리를 돌리자 민중식은 친절하게 지 교관을 남문으로 모셔 도주할 수 있게 하고 자신도 담을 넘어 민가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모든 장교가 그렇게 비겁했던 것은 아니다. 제2연대 제1대대 중대장 보병정위 오의선(吳儀善)도 박승환과 같이 ‘이인자처(以刃自處)’하여 순절하였으며, 견습육군보병참위 남상덕(南相悳)은 병사를 지휘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남상덕 참위는 이 교전에서 적군 중대장 미원(梶原:가지하라)을 사살하였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가장 용감했던 제2연대 제1대대의 전투 속에는 남상덕 참위의 ‘충의와 지략’이 숨어 있으며 병사들은 그에 감읍하여 마지 않았다.
이같이 의거를 일으킨 2개 대대 병사들은 즉시 일본군의 반격을 받았다. 병사들은 기관총의 엄호하에 반격해 들어오는 우세한 적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8시부터 동 10시 50분까지 약 세시간이나 병영을 사수하였다. 병영을 빼앗긴 후에도 일부 병사들은 계속 시가전을 벌여 끝까지 일본군에 항전하였으니, 이 날의 전투는 “적군도 높이 찬양하여 마지않은” 영웅적 항전이었고 “이후 적어도 며칠 동안은 일인들이 경의를 가지고 한국과 한국인에 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용감한 방어전”이었던 것이다.
2개 대대의 의거가 일어나자 먼저 남대문 안에 자리잡고 있던 일본군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 제9중대와 제10중대의 각1소대가 병영을 접수할 임무를 띠고 막 영문을 나서려던 차 총성을 들은 것이다. 두 부대는 각각 한 시위대대를 맡아 접근하였으나 맹사격을 받아 한 시간이 넘도록 저지당하였다. 도시 소대병력으로는 꼼짝할 수 없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3대대장 판부(坂部:사까베) 소좌는 9시 30분 제10중대 전원을 투입하고 사단장에게 병력증강을 요청하였다.
보고에 접한 사단장은 “병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달리 수단이 없음”을 깨닫고 고전하고 있는 3대대장 판부에게 귀관은 남대문 병영에 있는 3중대와 기관총 3문으로 남대문 위병 및 소의문(昭義門) 위병과 협력하여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동 제2연대 제2대대 반병(叛兵)을 급속히 진압하라. 공병장교 11명과 전기(傳騎) 둘을 증파한다. 고 명령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판부는 남대문 벽위에 기관총 2문을 걸고 치열한 엄호사격을 하게 하는 한편, 제9중대의 기관총 1문을 앞세우고 우선 시위대 2연대 제1대대의 뒷문을 향해 돌격작전을 감행하였다. 10시 40분까지 약40분간 되풀이하여 돌격해 보았으나 적지않은 부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일본군은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뒷문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길을 전진하여야 했고, 한국군병사들은 일본군이 후퇴하면 사격을 중지하고 전진하면 즉시 사격하였다.
판부대대의 고전 보고에 접한 사단장은 다시 장곡천 관저 앞에 있던 보병 1개 중대와 종로의 보병 1개중대(제7중대)를 증파하였다. 10시 40분 이들 증원부대가 도착하자 사까베는 그중 1개 중대를 고전하고 있는 제9중대에 붙여 시위 제2연대 제1대대에 대한 총공격을 명령하였다. 원병에 용기를 얻은 미원(梶原)은 용분(勇奮)하여 선두에 서서 병영에 돌입하고 부하는 매진 이에 따랐다. 그러나 이 미원의 ‘독전(毒戰)’은 분명 만용이었다. 뒷문을 부수고 영내에 돌입한 일본군은 사방의 병사(兵舍) 창구에서 쏘는 한국병사들의 집중공격을 받아 ‘가장 많은 부상자’를 내고 말았다. 러일전쟁 때 여순(旅順) 공격에 참전하여 러시아병 19명을 죽였다는 용명으로 ‘도깨비대장(鬼大將)’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미원(梶原)은 이 돌격에서 2명의 한국 장교를 베었다고 하지만, 영내에 돌입한 후 자기 부하를 ‘독안에 든 쥐’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뒤따라 영내로 들어왔다가 한국군 병사의 집중사격을 받은 공병소위 대전(大田:오오다)은 폭탄을 투입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쏟아지는 소나기로 점화할 수 없었고 피아(彼我)가 접근하여 그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겨우 일탄에 점화’한 그는 병영 안을 향해 폭탄을 투입하였다. 이때 9중대에 뒤따라 12중대가 영내로 들어서서 한국군 병사와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리하여 시위 2연대 1대대 병영은 10시 50분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은 남상덕 참위의 지휘 아래 미원(梶原) 이하 다수의 일본병을 사상하여 압도적으로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을 괴롭혔으나, 그들에게는 기관총이 없는 데다가 탄환마저 한정되어 있었다. 미원의 돌격을 허용한 것도 총기와 탄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몰려드는 일본군을 맞아 백병전까지 벌였다는 사실은 그들의 용감한 투쟁 정신을 말해주는 것이다.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병사들도 병영 정문을 향해 전진해오는 일본군 제51연대 제3대대 제10중대에게 맹사격을 가해 그 접근을 불허하였다. 여기에서도 일본군은 몇 차례나 좁은 골목길을 돌격해 들어가려고 시도하였으나, 더욱더 가열해지는 한국군의 사격에 조금도 전진하지 못하였다. 10시 50분 1개중대와 공병 1개분대의 증원군에 힘입은 일본군은 한국군이 시위 제2연대 제1대대의 병사들이 패했다는 소식에 동요한 틈을 이용하여 맹렬한 사격과 돌격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한국군은 오전 11시 40분까지 병영을 사수하였다.
병영을 빼앗겨 퇴각한 일부 한국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수가 태평동(太平洞)·정동(貞洞) 부근으로 피신하여 군복을 벗고 민가에 숨었으나, 일부 병사들은 서소문 밖으로 달려 나가 예수교회의 고지 부근에서 남대문 정거장(서울역)의 일본군 위병을 향해 사격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민가로 숨은 한국군 병사들에 대한 수색전을 벌였다. 이 수색전은 잔인하였다. 『대한매일신보』(1907년 9월 5일자)는 일본군의 이러한 잔인성을 ‘혈탐성(血貪性)’이라 극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본 기자의 목격과 무편(無偏)한 외인들의 관광한 실증을 거(據)하건대, 향자(向者) 한성(漢城)내 기우(起擾)에도 일인의 잔혹과 만행이 다유(多有)한지라. 무죄(無罪) 양민이 포환(砲丸)을 피(被)하였고 피촉지인(被捉之人)은 학대를 수(受)하였으며, 서소문내 영중에 있던 한병(韓兵)은 검단(劍端)에 20여 창(創)을 피(被)하였으니 병졸을 불능행동(不能行動)케 하기에는 2중 3창(三創)이 족의(足矣)어늘, 여피다수(如彼多數)에 지(至)리오……차일주목(且一注目)할 것은 해영(該營) 부근에서 피살된 병졸 중에는 1인도 무기를 가진 자 없었다고 하니 ……
그러나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다음과 같은 애틋한 광경이 묘사되고 있다.
바야흐로 싸울 때에 여학교 간호부 수명이 탄환이 쏟아지는 것을 무릅쓰고 인력거에 아병 부상자를 싣고 병원으로 보냈다. 미국인 의사 어비신(魚飛信) 목사, 조원시(趙元時) 등도 또한 아국병 부상자를 들고 제중원(濟衆院)에 들어가 힘써 치료해 주었다. 장안사람 김명철(金命哲) 등 3인은 돈을 거두어 전사한 장졸들의 장례를 치뤄주고 곡을 하며 애통해 하고 돌아갔다.
8월 1일의 시가전에서 일본군은 대위 미원(梶原), 특무조장 웅본(熊本:구마모도), 조장 평야(平野:히라노) 등 4명의 전사자와 소위 등강(藤江:후지에), 특무조장 등전(藤田:후지다) 등 2명의 전상자를 냈으며 한국군은 장교 13명과 준사관·하사·병 57명이 전사하고 100명이 전상하였다. 이 시가전으로 시내 상점은 모두 문을 닫았고 교통은 차단되었다. 경찰은 이튿날 아침 폐문한 상점을 강제로 개점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서울시위대 병사의 항전은 단 하루에 끝났으나 그것이 미친 영향은 심대하였다. 이 항전은 8월 3일부터 계속될 지방진위대 해산계획을 크게 그르쳤을 뿐 아니라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더우기 주목할 것은 시위대 항전의 주축인 사병들의 사회적 계층성분이다.
즉 서울 동부분견소가 조사한 관내 해산병사 104명의 취업상황을 보면 8월 16일 현재 미취업자는 불과 16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취업자였다. 취업자 88명 중 농업이 53명, 기타 35명이 야채판매·육상(肉商:8명)·신매업(薪賣業:4명)·화공(靴工:3명)·잡상(雜商:2명)·연초행상·승화공(繩靴工)·석공업(石工業:이상 각 2명)·면타업(綿打業:1명)이었다.
(2) 진위대의 항쟁
군대해산과 서울시위대 항전의 소식은 순식간에 지방진위대 병사들에게 전해졌다. 시위대 병사들에 대한 일병의 잔인무도한 살육행위는 진위대 병사들을 크게 격분시켰다. 제일 먼저 궐기한 진위대는 원주 진위대였다.
8월 2일 대대장 홍유형(洪裕馨)이 소집명령을 받고 상경한 후, 대대장 대리 김덕제(金德濟)와 특무장교 민긍호(閔肯鎬)는 비밀리에 봉기계획을 세웠다. 8월 5일 하오 원주진위대 병사들은 일제히 무기고를 장악하고 1,200여 정의 소총과 4만발의 탄환을 확보하였다. 부위 장세진(張世鎭)은 이때의 광경을 삼가 아뢰오면 지난달 8월 5일에 본인이 병영에 돌아오고 혹자는 밖에 있어 그 행색들이 수상하더니, 갑자기 함성이 크게 일어나 무장하려 일제히 튀어나와 무기고를 깨부수고 탄환을 나누어 갖고 사방에 난사하기에 본인이 백방으로 만류하였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는지라. 그 사유를 물어 보았더니 사졸이 말하기를, 서울시위대의 각 중대 사졸들이 서로 약속하였으니 당신네도 역시 화를 면치 못할 것인데 어찌 앉아서 죽으랴 하면서, 감히 장교를 죽이려 드는 형세인지라 병영을 나아가 집으로 돌아갔다……
라 하였다. 무기를 든 병사들은 원주 시민과 합세하여 우편 취급소·군아(郡衙)·경찰분서를 습격하고 원주시를 장악하였다. 원주 본대에서 봉기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여주(驪州) 분대 병사들도 이튿날 죽음을 같이 하겠다고 본대에 합세하였다.
원주에서도 장교들은 사병들을 배신하였다. 대대장 홍유형은 해산조칙을 듣고 귀대하다가 도중 지평(砥平)에서 의병들에게 붙잡혔다. 의병들은 홍유형에게 원주대대를 지휘하여 서울로 진격하자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홍유형은 비겁하게도 야음을 타서 도주하고 말았다. 이밖에도 동 대대 권태희(權泰熙)·김덕제(金悳齊) 정위 등 10명의 장교들은 비열한 행동을 취하면서 도주하였다.
원주성내를 완전 장악한 진위대 병사와 시민들은 이튿날 충주수비대장 이궁(二宮:이노미야) 소위가 지휘하는 일본군 20명의 공격을 받았으나 2시간의 교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그러나 적은 원주성 밖으로 피난했던 일인을 구출하여 갔다. 한편 급보에 접한 서울의 일본군 사령관은 이 날 보병 47연대 제3대대의 2개중대(기관총 4문, 공병 1소대)를 급파하였다. 지평을 거쳐 8월 10일에야 원주에 도착한 일본군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원주를 점령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원주진위대 병사들은 일본군의 원주성 공격을 사전에 탐지하고 원주성을 철수하는 한편, 2대로 나누어 민긍호를 충주·제천·죽산·여주 방면으로, 김덕제는 평창·강릉·양양 방면으로 진출하여 광범한 의병항쟁을 기도하였던 것이다.
원주진위대의 봉기에 이어 수원진위대 강화분견대 병사들이 일어났다. 8월 9일 그들은 지홍윤(池弘允)·유명규(劉明奎)·이동기(휘)(李東基, 輝) 등을 선두로 동 분견대 무기고를 습격하였다. 소대장 보병부위 민완식(閔完植)과 참위 민영락(閔永洛)은 무기고를 돌로 부수고 무기를 들고 나오는 병사들을 말리다가 ‘족척권타(足踢拳打)’ 당하였고 소대장은 도망하였다. 병사들은 무기를 시민에게 분급하고 동문 밖에서 군수이며 일진회 수령인 정경수(鄭景洙)를 처단하였다. 그들은 강화의 일본순사와 일인을 사살하고 강화성을 완전장악하였다.
급보에 접한 일본군사령관은 보병 1소대(기관총 2문)를 강화로 급파하였다. 8월 10일 강화분견대의 봉기병사 50명은 일본군의 공격을 예견하여 강화도 갑곶동(甲串洞)에 잠복하고 있었다. 수원진위대의 교관 소창(小倉:오꾸라) 대위를 앞세운 일본 소대가 그 곳에 상륙하자, 갑곶동 동쪽 성벽에 숨어있던 한국군은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이때 일본군 사상자는 하사 이하 전사 5명, 부상 5명이었다. 의외의 기습에 놀란 일본군 소대는 갑곶동 북쪽 고지로 올라 반격하였다. 강화분견대의 복병들은 성내로 후퇴하여 일본군의 야습에 대비하였다. 그들은 밤새 일본군과 사격전을 벌여 성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일본군은 기관총 2문으로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공격해 들어왔다. 이로 인하여 11일 아침 8시 성은 무너졌다.
성 안으로 들어선 일본군은 일경과 일진회를 동원하여 가택수색을 시작하였다. 11일 오후에 증원군 2개 중대(기관총 2문, 공병 1소대)가 도착하여 일본군의 수색전은 본격화되었다. 12일 대장 적사(赤司:아까즈) 소좌는 향중신사(鄕中紳士)를 모아놓고, 15일 정오까지 도망한 병사의 총기와 탄약을 모조리 거두어 오지 않으면 전 시가를 불태워 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리하여 하루 동안에 총 250정, 화승총 110정, 대포 50문, 구포(舊砲) 대소 240문을 비롯한 많은 무기와 탄약이 압수되었다.
강화분견대 병사와 무장 시민단의 6백여 명은 성을 탈출하여 통진(通津)·해주(海州) 등지의 의병투쟁을 강화하였지만 미처 탈출하지 못한 병사들은 계속 탈출을 시도하였다. 8월 15일 3명의 탈출병은 남문 초병을 기습하여 탈출을 시도하였는데, 이중 2명은 피살되었고 1명은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밖에도 홍주분견대는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집단탈영을 시도하였으며, 진주진위대도 봉기계획을 추진하였다. 봉기에 실패한 병사들도 각자 지방의병에 가담하여 의병항쟁의 주력을 이루었다.
3) 한국군 해산과 정미의병전쟁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일제는 ‘한국병합(韓國併合)’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하여 1905년 한국군을 먼저 감축하고 이어 1907년 해산에 착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연 2만명에 이르는 한국군장병이 자리를 잃고 그중 적지않은 병사들이 의병전쟁(義兵戰爭)에 참가하여 항일전열을 강화하였다. 원주진위대의 민긍호가 그 대표적 예라 할 것이다.
또 1908년 2월 2일 서울 진공작전(進攻作戰)을 계획, 13도 창의군(倡義軍) 1만명 가운데 3천명의 주력부대가 민긍호의 해산 한국군이었던 사실을 보더라도 한국군 해산으로 말미암아 정미의병(丁未義兵)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군 병사들은 첫째 신식소총을 소지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기능보유자였고, 둘째로 근대적인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아 전투능력·지휘능력이 일반 의병보다 월등히 우월하였다. 더우기 그들의 의병참가는 일반 의병의 사기를 올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리하여 정미의병전쟁으로 하여금 전국적인 항일 국민전쟁(抗日國民戰爭)으로 발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멕켄지가 목격한 바와 같이 일제의 조직적인 총기화약 단속으로 해산 한국군에게 탄약보급이 두절되었으며, 또 총기조차 노후화하는 결과를 빚어 장기전에 대비할만한 태세가 갖추어져 있지 못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해산 한국군의 의병참여도는 감쇄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해산 한국군은 직접 정미의병전쟁에 참여하였다는 사실 이외에도 1910년 이후의 독립군전쟁으로의 발전에 직접으로 기여한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