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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1-10)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언제나 여러분의 마음과 삶 속에,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이 자리잡고 있기를 축복합니다.
시편 91:1-7절 말씀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우리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곁에 항상 머물러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늘 아래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요새요,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멀리하거나, 떠나는 일이 없이, 항상 주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이 바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27:8절을 보면, 다윗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나는 주님의 얼굴을 찾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열심을 다하여, 주님의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은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가서 2:10-13절 말씀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우리는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일어나서, 주님과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벌떡 일어나, 주님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아가서 2:16절을 보면,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속해 있습니까?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를 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속하였고, 우리는 주님에게 속하여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를 향한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5: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으셨습니다.
무덤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무덤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사망의 권세,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무덤에서 나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라고 물으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마르다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라고 고백했지만, 실상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3년 동안,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도, 한편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의심 많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라고 말씀하셨을 때, 직접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19)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오래 다니면서도,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을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33년을 사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래도 믿을 수 있겠는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 분이 어떻게 다시 살았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매 주일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살라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외치는 설교자들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그 모든 사람들의 믿음이 다 헛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믿었던 것일까요?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신실하게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은 없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하셨고, 그 말씀대로 올바르게 사셨고, 사랑을 베푸셨고, 그런 모습이 좋아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지, 부활을 믿어서 따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 못한 사람들이 지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고난 후에도, 그러한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고전 15:14-15)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사람들이 초대 교회에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새로운 정부에서 일할 사람들이 지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말들이 많습니다. “공정을 강조했는데,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의구심을 품게 되는 장관 후보자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들 중에,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들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일까요? “아, 저 사람 괜찮다, 저 사람이라면 당연히 장관해야지”
그렇만한 사람이 도무지 없는 것일까요? 오래된 친구이기에, 알면서도 지명했을까요? 아니면,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할지라도, 정말 몰랐기 때문에, 지명했을까요?
이래 저래, 올바르게 산 사람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 로마에서 파견나온 빌라도 총독이나, 뇌물을 주고 왕 자리를 차지한 헤롯왕에게 바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을지라도,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요, 신앙적인 지주 역할을 했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율법학자,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 있었기에, 그들을 믿어 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로마에 붙어, 빌라도 총독에게, 헤롯왕에게 아첨과 뇌물을 바쳐 가며,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좋은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착하게 살아라. 선하게 살아라,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살아라. 서로 용서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좋은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사셨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예수의 말대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겼고,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후에, 제자들을 통하여, 생전에 예수님이 하셨던 좋은 말씀을 들으려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나와 좋은 말씀 듣고, 기분이 좋아져서, 집에 돌아가면 그만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어. 그러나 나는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 않아. 나에게는 부활이 중요하지 않아.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어. 예수님의 말씀이 좋아서, 교회 다니고, 믿음 생활하는 것이야.”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예수님의 말씀과 삶은 믿고 따를 수 있을 것 같아서, 교회에 나온다고 하는 사람들이 초대 교회에도 있었고, 지금도 교회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 땅에 사셨던 살아계신 예수님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원래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때리고, 감옥에 가두는 일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가던 길에,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강한 빛이 비취어, 말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그때,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바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본 적이 없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핍박했던 사울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더 나아가, 예수님을 전하는 제자가 되어, 박해 받고, 핍박을 받는 바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을 믿기에,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4-5절 말씀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포도나무와 가지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입니다. 붙어 있습니다. 떨어지면 안됩니다. 가지가 아주 튼실하게 생겼을지라도,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붙어 있어야,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떨어지면 안됩니다.
며칠 전, 붙혀야 할 것이 있어서, 강력접착제를 샀습니다. 떨어진 부분에 접착제를 바르고, 떨어진 것을 몸통에 붙였습니다. 딱 붙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 붙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떨어지면 안됩니다. 다시 떨어지면, 쓸모없다고 생각하여, 버리게 됩니다.
9-10절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6절을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을 것이다”(출 20: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미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가서 7:10절을 보면,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하시기에,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시려고 다시 사셨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고 하여,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탕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탕자의 마지막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에게 돌아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탕자라고 부르기보다는 돌아온 탕자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둘째 아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에게서 마음을 접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 따뜻하게 아들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을 다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집을 나가 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그가 잘한 일은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은 벧엘로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야곱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창 3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있어야 할 곳은 벧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도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살 길이 열립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습니다.
주님이 주신 새생명을 누리며,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