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가 터지고 전쟁이 치열해지자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이 우국충정에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 때 현광수 청년(우리 교회 안수집사)도 자원하여 나섰습니다.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8.15해방 후에 월남한 사람입니다.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교회를 간섭하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했습니다.
'아~ 이거 안되겠구나' 판단하고 '오직 신앙' 그 한 가지 때문에 월남했던 것입니다.
짧은 기간 군사훈련을 마쳤을 때
남침한 공산군은 이미 낙동강 지역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경상북도 안강지역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적군의 화력 앞에서도 생명을 내놓고 저항했습니다.
'죽기는 죽는다. 그 죽는 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필사의 각오였답니다.
가까이서 수류탄이 터졌습니다. 숲의 나무들이 꺾이고 아군 진지 여기 저기서 비명이 터졌습니다.
현광수도 몸을 움질일 수 없었습니다.
정신을 잃었다가 잠시 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공산군에게 붙들려있었습니다.
의료장비도 약품도 없는 그들 의무병은 며칠 후에야 이발사가 쓰는 면도칼로
발목을 수술하여 파편을 제거하고 곪은 엉덩이를 치료했습니다.
유엔군 참전으로 후퇴하게 된 그들에게 포로로 끌려 가다가 대열을 빠져나와 한 농가에 숨었습니다.
곧 진격하는 국군에 합류하여 북진했지만 1.4후퇴로 남하했습니다.
보급로가 끊겨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춥고 배고팠습니다.
죽은 적군의 군화나 운동화를 벗겨 신기도 했답니다.
아~ 그 시절....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때 전국순회복음전도집회를 다녔던 김활란(이화여전 재학)은
일제 당국이 기독교활동을 중단시키자 일엽편주 같은 이 민족의 고통을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캄캄한밤 사나운 바람불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배 한척이 떠나가니 아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
1952년. 부산에는 피란민이 몰렸습니다. 갈 곳 없고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석진영은 이 백성의 위기와 탄식과 부르짖음을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눈을들어 하늘보라 어지러운 세상중에 곡곳마다 상한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잃은 많은사람 길을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자여 어이할꼬
이렇게 지나간 이 민족의 슬픈 역사.
독립운동가로, 6.25참전 용사로 생명을 바친 많은 분들.
민주화와 경제개발을 위해 피땀 흘린 우리의 부모 형제들...
그래서 오늘이 있습니다.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찬송하게됩니다.
이스라엘은 어려웠을 때 은혜 베푸신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첫농사를 추수하여 하나님께 감사예물을 드리고 이웃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너희가 애굽에 종으로 있을 때 너희를 인도하신 여호와를 생각하라.' 하십니다.
우리도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면 오늘의 고난, 내가 겪는 어려움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양식으로 감사하고, 구원받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생명의 떡 되셨음을 감하해야합니다.
2008년 맥추절 점심식탁.
우리 부모님들이 잡수셨던 그 밀개떡을 나눠먹었습니다.
나이 60이 넘은 한나여전도회원들이 기억을 살려 그 맛있었던 밀개떡을 만드셨습니다.
서로가 겪었던 어려운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고보면 고생도 아름다운 추억이고,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같은 사실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으시지요.
그 때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또 하나의 징검다리를 놓아주실 것입니다. 내 몫의 십자가를 감당하게 하시고....
당신의 출애굽기, 당신의 인생추억을 되돌아 보십시오.
-광주동산교회 황영준 목사-
첫댓글 귀한 떡 잘 먹었습니다...맛이 담백했어요~
떡만드느라 애쓰신분들 감사합니다. 어릴적추억 생각하며 한입한입 음미했습니다.
귀한 떡이라 욕심 부려 아이들까지 모두 맛있게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