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실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승정원일기는 글자 수가 2억 4천여 만 자나 되는 세계 최대의 역사기록물이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을 거치면서 일부가 소실돼 인조 대부터 순종 대까지 288년의 기록만 남아있을 뿐인데도 세계 최대의 단일 왕조 역사서로 꼽히는 조선왕조실록보다 4배나 많은 분량이다. 1999년에 국보 303호로 지정이 됐고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세계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1994년부터 번역이 시작됐다. 현재까지 번역된 것은 전체 1800여권 중 280여권이다. 지금까지의 속도로 보면 승정원일기가 완역되는 데는 앞으로도 100여년이 소요된다. 그러나 2007년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고전번역원이 출범하면서 번역 속도가 점차 빨라져 그 시간이 30년 정도로 단축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루에 한 줄 해석 못할 때도 많아 승정원일기를 번역하는 곳은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2팀이다. 이 팀에서도 7명만이 승정원일기를 담당하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원래 알아보기 힘든 초서체로 작성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를 해서체로 바꿔놓았는데 번역 2팀은 이 탈초본을 가지고 한글로 번역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이 팀의 연구원들은 하루 원고지 14매 분량을 번역해야 한다. 막힘없이 술술 번역되는 날이 있는가하는 반면, 한 줄을 해석하기 위해 며칠이 소요되기도 한다. 박재영 연구원은 “내용이 순차적으로 정리돼있는 역사서가 아니고 몇 십 년 전, 몇 백 년 전 얘기가 드문드문 튀어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한 줄을 해석하기 위해 몇 년 치 기록을 훑어봐야하는 일도 있다” 고 말했다.
대부분의 업무시간을 책상위에서 보내는 연구원들에게는 직업병이 있다. 만성적인 허리 통증과 시력저하가 바로 그 것. 소진희 선임연구원은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책과 모니터를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번역을 하며 책 내용에 빠져들다 보면 고통도 쉽게 잊혀진다고 연구원들은 말한다.
‘권위적인 왕’ 아닌 ‘인간적인 왕’ 흥미로워 승정원일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흥미로운 내용들을 가득 담고 있다. 하승현 연구원은 “승정원일기는 왕이 본 것, 말한 것, 들은 것, 느낀 것 등 모든 면을 적고 있고 소재에 있어서도 제한이 없어 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고 말했다. 하루는 영조가 문안인사를 온 신하에게 “요 몇 일 하루에 변을 5~6번 보는데 뒤 끝이 시원치가 않다”고 호소한다. 신하가 영조에게 설사를 하는지 묻자 영조는 “설사라도 했으면 시원하련만...”하고 한탄을 한다. 한 인간으로서 당시 영조의 건강과 심리 상태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대를 이어 번역해야...” 농담은 하지만... 번역 2팀에서 승정원일기를 번역하는 연구원들의 평균 연령은 40대 중반이다. 완역되는 시점이 30년 후 라고 봤을 때 승정원일기는 이미 이들의 손을 떠난 상태. 번역 2팀 이정원 팀장은 “농담삼아 ‘대를 이어 번역하자’ 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면서도 “세계기록유산을 번역한다는 자부심이 매우 크기 때문에 한 줄이라도 더 번역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