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뽀로에서 점심을
살아가면서 가끔 그리움처럼 찾아드는 장소가 있다. 구미로 출장 간다는 남편 말에 갑자기 삿뽀로가 생각났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주 갔던 그리움의 섬으로 떠 있는 곳이다. 코로나 이후로 남편은 집에만 있는 나를 위해서 출장 갈 때면 항상 데리고 간다. 일을 보는 동안 혼자 산책하거나 주변을 돌아보며 시간을 보낸다. 나만의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두 시간 정도 나에게 주어지는 소중한 시간이기에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나선다.
삿뽀로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남편이 일을 보는 동안에 근처 강가를 걸었다. 이른 아침이건만 햇볕이 따가웠다. 나무 그늘로 이어지는 강가를 걸으니 바람이 시원했다. 한 시간 정도 강변을 걸으며 우리 동네랑 별반 차이가 없는 친구들이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금계국이며 개망초 이름을 알 수 없는 친구들도 더러 만나서 인사를 했다. 낯선 여자의 인사에도 반갑게 웃어주니 내 마음도 활짝 열린다. 경산에서 왔다고 인사도 나누고 오늘 점심은 삿뽀로에서 먹기로 했다고 자랑도 했다.
강변 한쪽에 고즈넉하게 앉아있는 정자가 자리를 마련하고 초대한다. 먼지가 살짝 덮여있지만 휴지로 닦아내고 두 다리 쭉 펴고 편하게 앉았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사람들이 드물게 오갔다. 엄마의 무릎처럼 편안했다. 강이 보이고 풀이 내 허리만큼 자라서 건너편에서는 제초기 소리가 요란하다. 풀이 베일 때 나는 풀냄새가 좋을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풀들이 쓰러지면서 내는 신음 같아서 가슴이 쩌릿쩌릿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향기가 진한 풀냄새를 맡는다 생각하며 그냥 흘려보내기로 했다.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언어의 온도>라는 여행길에서 읽으면 좋은 책이다. 출발 전에 책장에서 고르고 골라 간택된 여인이다. 한참을 책에 빠져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 물을 마시면서 한 시간 넘게 책과 사랑에 빠져서 신선놀음했다. 이보다 더 한 행복이 어디 있으랴.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두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가져온 책 한 권 다 읽고 한 시간 정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삿뽀로로 떠나볼까요?’한다.
예약하려고 전화했더니 미용실 안내가 나온다. 다시 전화해서 물으니 2년 전에 삿뽀로가 없어졌다고 했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맛집을 검색해서 알아보자고 했지만 이미 마음이 떠나서 요지부동이었다. 다른 식당을 추천해도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니 남편도 난감한 표정이었다. 식사 시간이 지난 때라 아침을 안 먹는 남편은 시장할 것이다. ‘안 되면 되게 해라’ 대구에도 삿뽀로가 있다고 했더니 예약하라고 한다. 점심시간이 지난 때라 어떨지 몰라서 걱정했는데 예약이 되었다. 구미에서 대구까지 아니 삿뽀로까지 비행기를 타고 우리는 날아갔다. 삿뽀로에 도착하니 찌그러졌던 마음이 활짝 펴졌다. 남편도 다행이라고 즐거워해 주었다. 모처럼 남편이랑 삿뽀로에서 근사하게 데이트했다.
그동안 코로나로 외식을 전혀 안 한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이벤트가 되었다. 지인들이 식사하자고 해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최근에 친구랑 처음으로 식사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같다. 오늘은 든든한 지원군이 곁에서 손을 꼭 잡고 있어 주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너무 행복하다고 노래를 부르니 많이 먹으라고 생선회를 한 점 먹여준다. 오늘 삿뽀로에서 근사한 점심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