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달관의 <진랍풍토기>
앙코르와트 유적을 보기 전에 꼭 읽고 가야 할 소중한 문헌이다. 마치 우리나라 혜초스님이 인도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을 남겨놓아 세계사적 의미가 있듯이 이 자료도 그에 맞먹는 소중한 자료이다. 나는 김용옥의 ‘앙코르와트․월남가다’라는 책과 서규석이 쓴 논문 ‘신화가 만든 문명 앙코르와트’를 접하고 원나라 때 진랍(크메르)에 사신으로 왔던 주달관의 진랍풍토기 내용을 요약해 정리해 보았다.
주달관은 1296년 2월 명주(현 절강성 영파시)를 떠나 2월 20일 온주(현 절강성 온주시)의 항구에서 출범하여 3월 15일에는 베트남 중부 참파에 이르렀다. 계절풍 역풍을 피해 가을 7월에 캄보디아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1297년 6월 배를 돌려 8월 20일에는 명주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니까 주달관은 앙코르 지역에서 대략 만 1년을 머문 셈이다.
앙코르 문명은 통일신라중기부터(802년에 해인사 창건) 조선초기 세종조에까지 이르는 장수 왕조로서 그 전성기는 우리나라 고려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중국 왕조로 보아도 당, 송, 원, 명에 걸치고 있다. 참고로 크메르 역사를 소개하면 부남시대는
AD 1세기부터 AD 550년 경이고 전라시대는 AD 550년부터 802년 까지 이다. 앙코르시대는 AD 802년부터 1432년 까지이다.
서문
진랍은 점랍이라고도 하는 데, 이 나라는 스스로 감패지로 부른다. 티벳의 불교경전인 서번 경에는 이 나라의 이름이 감포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중국식 표기인 감패지와 비교해 볼 때 근사한 음역이라고 생각된다.
온주에서 배를 띄워 나침반이 가리키는 남남서방향으로 진행하여 복건성과 광동성, 해남도의 여러 항구를 거쳐 칠주양을 통과하고 교지양을 경유하니 점성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점성에서는 순풍을 만나서 보름 만에 진포에 도달하였다. 진포에서 또 다시 서남쪽으로 항해하여 곤륜양을 지나 메콩 하류의 항구에 들어섰다. 항구는 십수 개에 이르지만 네 번째 항구에 우리 일행이 들어섰으며 그 이외에는 모래가 많이 쌓여서 커다란 배가 드나들 수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높게 자란 사탕수수, 고무나무, 황색 모래밭 하얀 갈대 숲이 펼쳐 있어 주변의 정경을 파악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선두가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항구에서 서북쪽으로 나가서 호수의 물결이 흐르는 방향으로 배를 저어 보름을 가면 포구인 사남이 나타난다. 이곳이 크메르왕국이 다스리는 군이다.
또 사남에서 작은 배로 갈아타고 물결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10여일 노를 저어 가면 ‘도중에 불(佛)이라 불리는 마을을 통과하게 되며, 거기서 다시 담양을 건너가면 간방이라는 곳에 도달한다. 여기서부터 도성은 5십리 거리에 있다.
<제번지>에는 이 땅의 넓이가 7천리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국가는 북으로 보름을 걸어가면 점성에 닿고 서남으로 보름을 걸어가면 섬라에 이르며 남으로 10일을 걸어가면 광동성에 이른다. 또 동쪽으로는 바다와 맞닿아 있다.
이 국가는 예부터 중국과 왕래해 왔다. 원나라는 하늘의 명을 받아 사방에 있는 여러 국가를 멸망시켰다. 이들을 점령한 다음에 점성에는 사도원수가 파견되어 행정기관을 설치했고, 크메르에는 한 사람의 호부만호나 금천패호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이들 장수들이 부임 도중에 잡혀서 그 후로 소식이 단절되었다.
이에 따라서 원나라 1295년 6월 성종이 사신을 파견하여 이들을 외교적으로 굴복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는 나를 사절단에 수행케 하였다. 1926년 명주을 떠나 2월 20일 온주항을 출발하여 3월 15일에 버트남 중부에 도달했다. 도중에 역풍을 만나는 불행을 겪은 끝에 가을이 시작되는 7월에 캄부자에 들어서서 (원나라에)복종하도록 했다.
1297년 6월에 배를 되돌려서 8월 12일 사명에 정박하였다. 이 국가의 풍토와 국사에 대해서는 짧은 기간 동안 체류하였기 때문에 비록 상세히 기술할 수는 없지만 주요 특징을 개괄적으로 정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성곽도시
주성 (앙코르톰을 말한다)은 주위가 2십리나 된다. 성에는 다섯 개의 문이 있고 성문은 각각 이중으로 되어 있다. 또 동쪽에는 두 개의 문을 열어놓고 그 외에 측면으로 하나의 문이 더 있다. 성곽 바깥 측에는 커다란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 양쪽에는 27개씩 모두 54개의 석상이 석장군 모습을 하고 있다. 다섯 개의 성문은 모두 비슷하며, 다리 난간은 일어나 앉아 있는 형태의 뱀 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아홉 개(실제로는 일곱 개다)의 머리를 갖고 있다.
54개의 석장군은 손에 뱀을 잡고 있으며, 마치 뱀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는 자세로 서 있다. 성의 출입문 위에는 돌로 만든 커다란 사면 불상이 다섯 기나 조각되어 있고, 불상은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있으며 중앙에 위치한 불상은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문 양쪽에는 돌을 깎아서 만든 코끼리 상(성문 안팎으로 조각된 코끼리상은 좌우 양측에 세 개씩 모두 12개다)이 있다.
성벽은 돌을 차곡차곡 겹쳐서 쌓아올려 세웠으며 그 높이는 2장에 이른다. 돌은 잡초가 자라날 틈이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쌓아져 있으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마련된 시설은 없다. 성벽 위에는 여기저기에 야자나무의 일종인 광낭목이 심어져 있다. 성에는 사람이 기거하지 않는 빈방이 경쟁하듯이 나란히 들어 서 있다. 성벽의 내측은 망루가 설치되어 있고, 그 두게는 10여장(약 33m)나 된다. 망루 위에는 커다란 문이 있으며 저녁에 닫았다가 아침에 연다. 또 성문을 감시하는 파수꾼이 있으며 개들은 성문 출입을 할 수 없다. 성벽은 정확하게 만들어져 있고 사방의 모서리에 각각의 석탑 1좌씩 위치해 있다. 발가락을 자른 죄수들은 성문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앙코르 도성의 중앙에는 금탑 1좌(바이욘 사원을 말한다)가 있으며, 그 주위에 석탑 20여좌, 돌로 만든 방(이중화랑을 말한다)이 백여 실이나 된다. 동측에는 금교 1개소가 있으며, 금사자 두 마리가 다리 좌우에 서있고, 금불상 8체가 돌로 만든 방 아래에 위치해 있다.
금탑에서 북쪽으로 1리를 가면 동으로 만든 탑(바푸온 사원을 말한다)이 있다. 금탑과 비교될 정도의 높이에서 이 곳을 바라보면 울창한 숲으로 둘러쌓여 있다, 그 밑에는 돌로 만든 방이 수십 개나 된다.
또 이곳에서 북쪽으로 1리를 가면 거기가 왕국의 중심지인 왕궁이다. 왕궁의 정전에도 별도의 금탑 1좌가 있다. 해상무역상인들이 왕래하면서 이들 사이에는 ‘부귀한 진랍’이라고 칭해지는 것도 이와 같은 금탑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곳에서부터 남문 밖으로 반리를 가면 석탑이 있는 산이 나온다. 노반이 하룻밤에 쌓았다는 ‘노반의 묘’가 남문밖 1리에 위치해 있는데, 돌로 만든 방들이 수백 개에 이르며 주위는 약 10리나 된다.
동쪽의 연못은 도성 동쪽 10리에 있고, 주위는 백리나 되며, 연못 가운데에 석탑, 석실이 있다. 석탑 가운데에는 와불상 1채가 있고, 와불 상의 배꼽에서 항상 물이 흘러나온다.
북쪽의 연못은 성 북쪽 5리에 있다. 연못 가운데 금탑 1좌(닉팬사원)가 있고, 돌로 만든 석실이 수십 개나 되며(입 가운데로 물을 뿜어대는) 금사자, 금불상, 청동상, 청동우, 청동마상이 있다.
주거 생활
왕궁, 관사, 지방행정기관과 귀족들의 건물은 동쪽을 향해 짓는 관습이 있다. 왕궁과 코끼리 테라스는 금탑(바이욘사원), 금교의 북쪽에 있어 북문과 가깝고 주위는 5,6리나 된다. 그 꼭대기의 기와는 흙을 구워서 만든 연와가 사용되었고 황색을 띄고 있다.
거대한 들보와 기둥에는 부처를 조각해 놓았다. 지붕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길게 늘어선 회랑은 2층이며 높이는 불분명하나 적어도 건축상 일정한 규칙아래 만들어졌다.
국왕이 정사를 돌보는 곳에는 금으로 장식된 창문이 있고, 격자창 좌우에 거울이 달린 4각기둥이 서 있다. 거울은 약 40~50개 면을 이루고 있으며 그 아래가 코끼리 테라스다. 궁전에는 침실이 많다고 들었으나 볼 수는 없다. 그 궁전의 금탑(피메아나카스)에는 국왕이 밤만 되면 탑 아래에 드러눕는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여 왔다.
‘탑 가운데는 머리가 아홉 달린 뱀의 정령이 있는데, 이 정렬이 왕국 토지의 주인이다. 이 정령은 여인의 모습으로 변하여 매일 밤 나타난다. 국왕은 여기서 먼저 그녀와 동침하는데 그 시간에는 국왕의 부인이라 하더라도 결코 들어올 수 없다. 약 네 시간이 지나면 국왕은 이 탑에서 나와서 다시 처첩과 함께 잠을 잔다.
정령이 밤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 때는 국왕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국왕이 하룻밤이라도 답에 가지 않으면 그 때마다 반드시 재앙이 내렸다.
한편, 왕 다음으로 왕족과 대신들이 기거하는 가옥은 일반인의 집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우 넓다. 주위의 건물은 풀로 엮어서 지붕을 만들었지만 조묘와 왕이 기거하는 표어전의 두 처소는 기와를 사용하여 건축된 것이다. 각각의 등급에 따라서 지붕과 방의 크기가 결정된다. 그 아래 서민들의 집은 풀로 엮은 지붕이며 지붕은 기와를 쓰지 못했다. 지붕의 크기가 부귀의 정도를 가늠해 주는 것이다. 다만 정부의 관리들이 사무를 보는 건물도 그 등급에 따라서 결정되는 전례가 서 있다.
의상
국왕을 제외한 남녀 모두 상투를 틀고 웃옷은 벗은 채 살을 드러내 놓고 다닌다. 단지 면포로 허리주위만을 가리고 다닐 뿐 외출할 때에는 커다란 천을 허리에 얹는다. 천은 서열에 따라서 사용할 수 있는 사이즈가 매겨져 있다. 국왕이 허리에 매는 천은 금 3,4냥 정도이며 아주 이름답고 화려하다. 이 나라에서는 스스로 천을 짜기도 하고 시암국과 점성국으로부터 수입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남 인도에서 수입 된 천이 상품으로 인정받는다. 남인도 천은 정교한데다 아름답다.
오직 국왕만이 순화포를 입을 수 있으며, 머리에 금관을 쓰거나 금강역사가 달린 금관을 쓴다. 간혹 쓰지 않을 때도 있으며 향기나는 꽃을 실로 엮은 것이나 쟈스민 향류를 머리카락 사이에 바르고 정수리에 세 근이나 되는 진주를 얹고 다녔다.
손목과 발목, 손가락에는 금반지, 팔찌를 하고 그 위에 보석인 묘안석을 박아 장식했다. 그 아래는 맨발로 다녔으나 발톱과 손톱에는 홍색염료인 홍약으로 붉게 염색하였다. 국왕이 외출할 때는 금으로 만든 칼을 손에 들고 다녔다.
한편, 서민 가운데 부녀자들은 손과 발을 염색하였으나 남자들은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대신과 왕족들은 사라사천을 두르고 다녔으며 관리들은 양쪽에 천을 둘렀다.
서민들 가운데는 부인들이 천을 둘렀다. 연지의 중국인들도 천을 둘렀으나 이들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은 중국인들이 이 곳의 규칙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암정팔살’(‘알지 못하다’-‘현지어를 모르는 자’)로 칭했다.
관속들
중국과 마찬가지로 이 나라에서도 승상, 장군, 사천(천문, 지리를 관장하는 기관)등의 관료제도가 시행되고 있으며 그 밑에는 각 관리에 예속된 속관들이 있다. 다만, 그 명칭이 중국과 다를 뿐이다. 일반적으로 관리는 왕족 가운데서 선발된다. 관료로 선발되지 못하면 자신의 자녀들을 왕궁으로 보내 왕의 첩이 되게 한다.
관리들이 외출할 때에는 각각의 직급별로 규정된 의식절차를 따라야만 한다. 고위관료는 금으로 장식된 양산과 손잡이가 4개나 되는 가마를 타고 다닌다. 두 개의 손잡이를 사용하는 관리는 그 다음 서열이며, 하나의 손잡이를 사용하는 자는 그 다음 서열이다. 금이 장식되지 않은 양산을 사용하는 자는 그 다음 서열이다. 또 은으로 만든 양산과 손잡이를 사용하는 자도 있다.
금으로 장식된 가마를 사용하는 관료는 파정 또는 암정이라 하고, 은으로 만든 가마를 사용하는 관리는 시랄적이라 불렀다.
양산은 중국의 붉은 천을 사용해 만들었으며 그 테두리는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늘어진 천이 장식되어 있다. 비가 많이 올 때는 양산의 테두리를 말아 올려 짧게 한다.
세 가지 종교
유학자는 반힐로 부르고, 승려는 저고, 도학자는 팔사유라 한다. 반힐은 누가 시조인지를 알지 못하며 학교나 강습하는 곳도 없고 읽는 경전이 어떤 것인지도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인과 같은 옷을 입고 있으며 머리 위에 하얀 실을 꽂고 있어서 그것으로 유학자임을 식별할 수 있다.
반힐은 궁정에 들어와서 고위직에 오를 수는 있으나 머리에 꽂은 실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승려인 저고는 머리를 깎고 누런 옷을 입는데 오른 쪽 어깨는 드러내고 다닌다. 하반신은 누런 천을 묶어서 몸을 가리고 맨발로 다닌다.
사원은 연와를 사용하여 지었다. 사원 가운데는 하나의 불상이 있는데, 부처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패뢰라 한다. 이 불상은 점토로 만들어졌으며 적, 청색의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그 이와에 다른 불상은 없다.
탑 가운데 있는 불상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동으로 만들어졌다. 종, 북, 받침대, 채(심벌즈와 비슷하며 양손으로 부딪쳐서 소리를 내는 불교 악기)가 있고, 큰 구리 대야, 보물 넣는 함등도 있다.
승려는 매일 한 끼만 먹는데 어육을 먹으며 술은 입에 대지 않는다. 부처에 공양하는 음식도 어육만 사용하고 시주를 받지만 사원 한가운데 공양하는 장소는 설치되어 있지 않다.
독경하는 곳에 있는 경전은 그 크기가 매우 크다. 경전은 일종의 야자나무인 패다라 잎을 사용하여 만든 것이며, 그것을 아주 질서정연하게 정리하고 그 위에 검은 글씨를 쓴다. 필묵을 사용하지는 않으나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나뭇잎에 글을 쓰는 지는 알 수 없다.
승려 가운데서도 금을 입힌 가마, 일산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 승려는 국왕과 정치의 대사를 상담한다. 그러나 여승은 없다. 팔사유는 보통 사람과 같은 옷을 입었으며 머리 위에 하나의 홍포나 백포를 두르고 있다. 그것은 몽골 여성의 고고 모양과 같이 그 높이는 약간 낮다. 또 도교 사원은 있으나 불교 사원에 비해서는 조금 협소하다. 물론 도교라는 것이 불교와 같이 성행한 것은 아니다.
제사를 지내는 장소에 특별한 상이 있는 것도 아니며 단지 하나의 괴석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종교재단인 사직단에 있는 석주오 그 모양이 비슷하다. 또 종교를 누가 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자 도사가 있고, 사원은 기와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팔사유는 남이 만든 음식을 먹지 않고 또 먹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지 않으며, 술도 먹지 않는다. 이들은 경전을 읽기는커녕, 그 선행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를 제공했는지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일반인 가운데 어려서 입학한 자는 승려로 교육을 받은 다음 성장하면 환속한다. 그러나 자세한 것은 조사할 수 없었다.
주민
크메르인들은 야만스런 습속을 갖고 있다. 얼굴과 자태는 아주 추하게 생겼고, 피부색은 검게 그을려 있다. 특히 해안가나 벽촌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마을에 거주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왕궁에서 생활하는 궁인과 관리의 부인은 피부색이 하얗고 백옥과 같은 피부색을 가진 자도 있다.
아마 햇빛을 받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 같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천으로 허리를 감싸는 이외에 남녀의 구별은 없으며 젖가슴을 노출시키고 머리에는 상토를 틀고 맨발로 다녔다. 국왕의 왕비도 마찬가지였다.
국왕은 다섯 명의 비를 두고 있다. 정실에 한 명, 왕궁의 동서남북 끝에 있는 방에 네 명의 부인이 기거한다. 그리고 그 밑에 첩과 궁녀들이 3천명에서 5천명이 있고, 이들은 여러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들었다.
이들은 왕궁의 성문 밖으로 결코 외출하지 않는다. 내가 궁정에 들어가 국왕을 뵐 때마다 국왕은 왕비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고 왕궁의 접견실에서 금으로 만든 창문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궁녀들은 서열에 따라서 창문 아래 베란다 양측에 늘어서 있으며 우리 일행이 잘 볼 수 있도록 장소를 바꾸고 또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어여쁜 딸이 있는 집에서는 자식을 왕궁으로 들어 보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하급신분이 딸들은 궁정에서 심부름을 하는 여자들인데, 이들은 진가란이라 한다. 이들은 그 수가 약 2천명이나 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결혼하여 남편이 있는 몸이고 왕궁이 아닌 민가에 거주한다.
단지 앞이마의 머리카락을 삭발하여 중국북인(몽고, 요, 여진족이 기거했던 화북지역 주민을 지칭한다)이 물 흘러가는 도랑을 파 놓은 것과 같은 모습이며, 여기에 주홍색깔을 상투가 있는 곳까지 칠했다.
이것으로 진가란의 특징을 구분한다. 단지 이 여인들만이 궁정에 출입할 수 있으며 그 밑의 사람들은 궁정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왕궁의 앞뒷길을 줄을 지어서 이동한다.
일반적으로 부녀자들은 머리에 매듭을 매고 머리핀이나 빗과 같은 머리장식물은 전혀 하지 않는다. 다만 금반지와 금팔찌를 하였는데 이런 치장은 진가란과 궁녀 모두 마찬가지였다.
남녀는 신체에 향약을 바르고 다녔다. 이것은 단향, 사향, 등 향수의 일종이다.
집에는 부처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도처에는 동성연애자가 많아 매일 십수 인이 모여 있고, 시장 한 가운데 걸어 다니며 중국인의 환심을 사려들거나 특히 부유한 사람들을 유혹하는데 이것은 좋지 못한 관습이다.
임산부
여성은 출산 후에 곧바로 쌀밥을 데운 후 여기에 소금을 넣은 다음 그늘진 곳에 하룻밤을 두었다가 꺼내 먹는다. 이 식이요법을 통해서 산욕을 치료하고 자궁수축에 의해서 젊어지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얘기는 내가 처음 들어서 그런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곧이어 민박한 집에서는 여자가 갓 태어난 애를 돌보고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부인들은 출산한 다음 날 어린애들을 옷으로 싼 다음 집에서 나와 호수에 몸을 씻는 것을 알았는데 이것은 아주 이상한 행동이다. 또 사람들을 만나 보면 여인들은 음란한 얘기를 많이 주고 받는다. 출산 후 하루가 지나면 벌써 남편과 함께 잠자리에 든다.
만약 남편이이를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여자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다. 또 남편이 이따금 부역에 나가거나 수일동안 돌아오지 않은 경우에는 여인이 이를 참고 지내지만, 열흘이 넘도록 출장을 가게되면 그 부인은 반드시 “나는 정령이 아니다. 왜 나는 독신인가‘라는 말을 되뇌이고는 한다. 음탕한 마음도 깊어만 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조를 지키는 여인도 있다고 들었다.
부녀자는 늙기 쉽다. 판단하건대 결혼과 출산, 교육이 이미 어려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2,30대 여인은 중국의 4,50대처럼 늙어 보인다.
소녀
여자 아이를 출산하면 그 부모는 반드시 장래의 행복을 기원하며 ‘너는 큰 부자가 되어 장차 천, 백의 남자에게 시집가라’고 말한다. 부잣집의 여자는 일곱 살부터 아홉 살, 가난한 집의 여자는 열한 살이 되면 반드시 승려와 도사에게 생명을 맡기고 처녀성을 없애는 절차를 밟는데 이를 진담이라 한다.
즉 관리가 매년 중국의 4월(크메르에서는 정월에 해당한다)중 하루를 선택하여 날짜를 잡는데 이를 ‘진담일’이라 하며, 국가는 다음과 같은 포고령을 발표한다.
‘여자를 기르며 진담에 해당하는 집이 있으면, 반드시 관리에게 보고하라.’
그런 다음 관리는 진담에 해당되는 집에 양초 하나를 지급한다. 관리가 제공한 양초에는 글이 새겨져 있다. 진담일 저녁이 되면 촛불을 켤 것을 약속하고 글씨가 새겨진 곳까지 촛불이 타들어 가면 그 때가 진담 시각이다.
진담일에 앞서 1개월, 보름 또는 10일 전에 부모가 반드시 한 사람의 승려나 도사를 선택한다. 이 절차는 어느 곳에 있는 불고, 도교사원에 의하여 단골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평판이 있는 승려들은 관직에 있는 집이나 부잣집으로부터 진담을 위한 예약이 되어 있으나 가난한 집은 승려를 선택할 형편이 못된다.
관리나 부잣집은 진담에 대한 사례비로 술, 쌀, 포, 야자, 은으로 만든 그릇 등을 보내는데, 그 무게가 1백담(1담은 100근)ㅇ나 되면 그 가치를 중국 돈으로 환산하면 은 2~3백 냥에 해당한다. 적은 자는 3~40담 혹은 1~20담 정도로 집안 형편에 따라서 다르다. 가난한 집은 여아가 열 한두 살이 지나도 진담을 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선물을 준비할 형편이 안 되기 때문이다. 부잣집은 또 돈을 베풀어 가난한 집 여자의 진담을 해주는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판단하건대 1년 가운데 한사람의 승려가 한 여자를 담당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또 다른 여자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진담이 이루어지는 날 밤에 그 집은 음식을 장만하고 북을 크게 만들어서 설치하며 친척과 이웃집 사람들을 불러 모아 대접한다.
문밖에는 하나의 선반을 세우고 흙으로 빚은 인형, 준비한 선물을 그 위에 올려놓는다. 그 수가 10여 개 또는 3~4개나 되는데 가난한 집에서는 아예 만들지도 못한다. 인형은 옛 고사를 따서 만든 것이며 7일이 지나면 철거한다.
해질 무렵이면 양산을 들고 북을 치면서 사원에서 승려를 맞이하여 집으로 모셔온다. 갖가지 모양을 수놓은 견직물로 두 개의 천막에 묶은 다음, 한 쪽 천막에는 여자 아이를 앉히고 다른 쪽 천막에는 승려를 앉게 한다. 이때 승려가 여자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 수 없다.
떠들썩한 음악이 사방에 울려 퍼지고 진담을 위해서 통행금지도 해제된다. 시간이 지나면 승려는 여자와 함께 침실로 들어가 자신의 손으로 여자의 처녀성을 제거한 다음 그것을 술에 넣는다고 들었다.
어떤 집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부모, 친척, 주위 사람들의 얼굴에 묻히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는 입으로 맛을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승려가 여자와 성교를 한다고 말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다만 중국인은 이러한 의식을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동틀 무렵이면 다시 양산을 들고 북을 치며 승려를 환송한다. 그 후에는 당연히 사례비로 옷감을 승려에게 주어 여자 아이의 몸을 돌보아준 것에 보답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자 아이는 일생동안 승려의 소유가 되어 다른 곳에 출가할 수 없게 된다.
내가 본 것은 대덕정유년(1297년 4월 6일)밤이었다. 이 행사에 앞서 부모는 반드시 여자 아이와 함께 침실로 동행하였으나 그 후에는 침실에서 나와서 자리를 비켜 주었는데 이절차를 구속하거나 감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결혼을 하게 되면 처가에 옷을 보내는 ‘납폐의 의례’를 해야하고 간소하게 일을 처리한다. 이미 여자를 범한 다음에 자신의 아내로 삼는 자도 많지만 그 풍습을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또 괴이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진담이 거행되는 밤에는 이 행사를 치르는 가구가 거리마다 10여호에 이르고 성안에는 승려와 도사를 맞이하려는 자가 도로에 널려 있으며 북소리가 도성 전체에 울려 퍼진다.
노비
밀림에 사는 야인들을 붙잡아서 시장에서 사고파는데, 이들은 노비가 되어 일반인의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하게 된다. 많게는 100여명, 적게는 10~20명의 노비를 거느린 자도 있다. 그러나 가난한 집은 노비를 두지 않는다. 사실 야인들은 산 속에서 생활하는 한 종족이다.
이들은 당이라 불린다.
도성 안에 있으면서도 이들은 주인집을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집에 출입하지 못한다. 도성 안에서 사람들이 논쟁하다가도 상태방을 ‘당’이라 부르면 그 사람은 모욕감으로 한이 골수에 미칠 정도로 분노한다. 젊고 건강한 노비는 옷감 백포를 주고, 노쇠한 노비는 3,40포를 주면 살 수 있다. 노비들은 고상 가옥의 아래에 드러눕거나 앉는 것이 허용된다. 또 일을 하는 경우에는 고상가옥에 올라가는 것이 허용되지만 이 경우에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한 채 머리를 땅에 대고 인사해야 한다.
노비들은 주인을 파타, 여주인을 미라 부른다. 또 잘못을 저질러 채찍을 맞을 때는 ‘당’이라고 소리치며 결코 움직여서는 안된다. 노비 자식들은 그들끼리 부부가 되며 주인은 결코 이들과 결혼 하는 법이 없다.
중국인이 야만인들이 사는 곳에 가서 오랫동안 거주하거나 노비와 결혼하면 주인이 이를 알게 되는 날부터 그 중국인과 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다. 중국인이 야만인과 결혼하는 이로 있다. 노비가 외부인과 잠을 자서 자식을 낳는 일도 있지만 그렇다고 주인이 이를 힐책하지는 않는다.
짐작하자면 노비 신분이 자신과 같지 않기 때문에 관여할 필요도 없지만 노비가 자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장래의 노비로 사고자 하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노비 가운데에서도 얼굴에 청색으로 문신을 새겨 넣거나 머리 위에 철로 만든 형틀인 가쇄를 채워서 노비의 자유를 속박시킨다. 또 팔에다 가쇄를 채우는 경우도 있다.
언어
이 국가의 언어는 다른 나라의 언어와는 달리 자신들이 만든 것이다. 음성이 비슷한 말도 있으나 참국, 시암국 사람들과 통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을 매라고 하고 2를 별이라 하며, 3을 비, 4를 반, 5를 패람, 10을 답이라 한다.
아버지를 ‘파타’라 하고 아버지의 형제에 대해서도 동일한 호칭을 사용한다. 어머니는 ‘미’라 하며 고모와 이모의 여동생, 제수, 며느리, 주변의 나이든 여자들까지 모두 ‘미’라 호칭한다.
형은 ‘방’이라 하고, 여동생도 ‘방’이라 한다. 동생은 보온 어머니 형제는 글뢰, 고모부. 이모부, 매부는 패뢰라 한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뒤에 오는 글자가 이 곳에서는 앞에 오는 경우가 많다. 가령 ‘장씨의 셋째 동생’이 크메르어로는 ‘셋째 동생 장씨’라 하며, 이씨의 넷째 아들의 어미니 형제를 ‘어머니 형제의 넷째 이씨 아들’ 이라 한다.
또 중국을 비세, 관리를 파정이라 하며, 뛰어난 인재를 반힐이라 한다. 여기서 중국의 관리를 ‘비세파정’이라 하지 않고, ‘파정비세’라 부른다. 중국의 뛰어난 인재는 ‘비세반힐’이 아닌, ‘반힐비세’로 부르고 있다. 이 같은 사례를 간략히 적어 보았다.
지방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형식이 있으며, 수재는 수재가 사용하는 언어가 있고, 승려와 도사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따로 있다. 도성의 시가지와 촌락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각각 다르지만 중국과 같은 말도 있다.
야만인
야만인은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캄보디아인 사이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들 즉 도성 내에서 물건을 파는 노비들이며, 또 하나는 교화되지 않아 말이 통하지 않는 야만인들이다. 이들은 기거하는 집이 없고 가족들을 데리고 떠돌아다니며 산기슭을 배회하며 머리에 하나의 질그릇으로 된 주발을 얹고 다닌다.
짐승을 보면 나무로 만든 화살과 투창을 던지며 이를 잡으면 돌로 다듬고 불에 구워서 함께 먹은 다음 사라진다. 품성은 매우 난폭하고 서로 죽이기도 한다. 이들이 만든 치료제는 독성이 매우 강하다. 이들은 가까운 곳에 콩과 목화를 재배하고 천을 짜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자도 있다. 이들이 짠 천은 거칠고 두꺼우며 천에 수놓은 꽃 모양도 아주 독특하다.
문자
일반적으로 문자오 관청의 문서는 사슴가죽과 같은 물건이 이용된다. 즉 이들 재료를 검게 염색하고 사용할 용도에 알맞은 넓이와 크기로 절단하고, 일종의 하얀 흙 즉 중국에서 쓰는 것과 유사한 백색토에 물을 붓고 저은 다음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묻혀서 기록한다. 이 백생토 가루를 사라 한다.
이런 방법으로 문서를 기록하면 영구적으로 탈색되지 않는다. 백색토를 사용하여 기록이 끝나면 ‘사’를 사람의 귀 위에 꽂아서 보관한다. 또 필정에 따라서 어느 사람이 쓴 것인지를 구분하기도 한다. 물기가 있는 것으로 검은 피지를 닦아내면 곧바로 글씨가 지워진다.
문자의 모양은 대략 위그르 문자와 유사하다. 또한 모든 무자는 뒤에서부터 앞으로 써 가는 형태였지만, 위에서 아리로 쓰지는 않는다. 나는 이것을 야선해아로부터 들었으며 이 문자의 발음은 몽고어의 발음과 대단히 유사하며 다만 같지 않은 것도 두 세 개 문자 정도였다. 또 관리의 서명은 없으며 사람들의 청원서를 대필하는 경우도 없다.
달력과 계절
캄보디아의 정월은 중국을 기준으로 10월이다. 정월은 가득이라 한다. 왕궁 앞에는 나뭇단을 묶어서 커다란 연단을 세워서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연단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둥근 형태의 등롱, 꽃가지 등을 달아 놓았다.
즉 왕궁 맞은편에서 2~3만장 거리나 떨어진 곳에서 나무를 연결하여 연단을 높게 만들고 여기에 나무 장대를 세워 놓는다. 장대의 높이는 20여장(약65m)에 달한다.
밤마다 3~4대 또는 5~6대의 장대에 꽃 모양의 화약, 폭죽을 올려서 장식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여러 고을의 지방관서가 부담하여 마련한 것이다. 이윽고 밤이 되면 국왕이 초대되어 참관을 하며 꽃으로 장식된 화약과 폭죽을 점화시킨다. 꽃 모양의 불꽃은 100리 밖에서도 볼 수 있다. 폭죽은 소리가 커서 대포소리와 같고 그 폭음이 도성전체를 진동시킨다.
관리와 국왕의 친척들은 사람들과 함께 커다란 촛불, 야자나무를 나누어 부담하는데 그 비용이 꽤 비싸다. 국왕은 또한 외국사절을 이 축제에 초대하여 참관하게 한다. 이와 같은 행사는 보름이 넘게 계속 된다.
일 개월마다 반드시 하나의 행사가 열린다. 예를 들어 4월에는 포공, 9월에는 왕성의 군중집회를 열어 왕궁 앞에서 검열을 실시한다. 5월에는 영불수을 개최하여 국가 안에 있는 모든 불상을 모으고 물을 떠오게 한 다음 국왕과 함께 몸을 씻고 깨끗이 했다. 7월에는 벼이삭을 태우는 행사가 있다.
이 때가 되면 햅쌀을 수확할 정도로 벼가 여물어 간다. 남문 밖에서는 새로운 쌀을 가져다 놓고 이것을 불에 태운 다음 부처에게 공양하였다. 부녀자들은 마차와 코끼리에 올라타서 이 행사를 보려는 자가 부지기수였지만 국왕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8월은 애람이라 한다. 애람에는 춤추고 배우의 연주음악을 점검한다.
왕궁에서는 매일 춤을 추며 그 이외에는 돼지싸움, 코끼리 싸움을 벌였다. 국왕은 또 외국사절을 이곳에 초청한다. 이와 같은 행사가 10일간이나 계속된다. 이 나라에는 천문에 능통한 자가 있으며 해와 달의 일식, 월식도 추산한다. 다만 달력의 크고 작은 역법이 중국과 같지 않을 뿐이다.
하루를 네 경으로 나누고, 일주일은 7일로 하고 중국과 같이 각 요일의 길흉을 나타내는데 개, 패, 건, 제와 같은 것을 사용했다.
캄보디아인은 성(姓)이 없다. 또 생일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태아난 날에 따라서 이름을 붙이는 자가 많았다. 2일에 태어난 자는 최길, 3일에 태어난 자는 보통, 4일에 태어난 자는 최흉이며, 어느 날에는 동쪽으로 가고 어느 날에는 서쪽으로 가라는 날이 있다. 부녀자들은 이것을 반드시 지킨다. 12자 또한 중국과 같다. 단지 부르는 명칭만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말은 복새, 닭은 만으로, 돼지는 직로, 소는 개로 불린다.
재판
일반인의 소송사건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국왕 앞에서 다루어진다. 볼기를 치는 태형과 장형은 들어보지 못했으면 단지 벌금형만 있다고 들었다.
사람의 도리로서 범할 수 없는 대역죄를 지은 경우에도 교수형과 참수형은 없으며, 단지 성문밖에 땅을 파고 죄인을 구덩이에 넣은 다음 돌을 쌓아 올리는 벌을 주었다. 그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는 벌이며, 코를 제거하는 벌도 있다. 그러나 간음과 도박에 대한 죄는 없다. 만약 부인의 간음을 남편이 인지한 경우에는 간음한 남자를 가두고 두 개의 나무사이에 끼우고 조여서 그 고통을 참지 못해 사실을 시인하면 구속에서 풀려나는 대가로 여자의 남편에게 자신의 재산을 주어야 한다. 간혹 잘생긴 얼굴을 이용하여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다.
문 밖에 죽은 자가 있으면 줄을 이용하여 시체를 끌어다가 성밖의 황무지에 버린다. 따라서 죽은 자에 대한 상세한 조사와 죽은 원인등은 파악하지 않는다. 인가에 혹시 도둑이 들어와 이를 붙잡아 감금하거나 고문해도 된다.
신문 또한 아주 재미있는 절차로 이루어진다. 물건을 잃어버려 어떤 사람이 훔쳐간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어도 그 사람이 자백하지 않는 경우에는 냄비에 기름을 붓고 끓인 다음에 혐의가 있는 사람의 손을 냄비에 넣게 한다. 그렇게 해서 물건을 훔쳤으면 손이 기름에 데어서 살갗이 벗겨지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상처도 없다. 이것은 캄보디아인이 갖고 있는 독특한 방법이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 소송이 일어났을 때 사리의 옳고 그름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에는 사건 당사자들이 왕궁 맞은편에 있는 12개의 석탑에 친족을 거느리고 앉아 상대편에 대고 훈계하기 시작한다.
보통 하루, 이틀씩 어느 때는 사나흘 씩 앉아 있기도 하는데 잘못한 측은 물증을 확보하기 이하여 석탑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간다. 그러나 사실 잘못을 저지른 상대는 몸에 부스럼이 생기고 기침을 하여 열이 아기 때문에 그 곳에 앉아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이 없는 쪽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잘잘못을 구분하는데 이것을 ‘신의 재판’ 이라 한다. 말하자면 토지신의 신비적인 능력으로 서로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다.
나병
이 나라는 일반적으로 병이 많고 많은 사람들이 물 속으로 뛰어들어 목욕을 하며 빈번하게 머리를 감는다. 이것이 자연적으로 병을 옮기게 된다. 나병을 앓는 자도 많고 수많은 환자가 도로 곳곳에서 누워 있다. 이들은 누운 채로 음식을 먹지만 감염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신들의 땅, 풍토에서 질병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또 이전의 국왕도 나병을 앓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 병을 크게 혐오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여러 번 호색행각을 한 뒤에 물 속에 들어가 닦았기 때문에 나병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람들은 성행위가 막 끝나면 물로 뛰어들어 몸을 씻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캄보디아에서는 설사를 하게 되면 십중팔구는 사망에 이른다. 또 약을 시장에서 구입하는 사람도 있지만 중국의 약과는 다르면 그것이 어떤 약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일종의 무당 같은 무리가 사람들에게 주술을 행하고 있는데, 실소를 금치 못한다.
사망
사람이 죽으면 둥그런 대나무나 돗자리에 시체를 넣고 천으로 감싼다. 죽은 사람을 떠나 보낼 때는 그 사람 앞에 만장을 세우고 북을 친다. 또 두 개의 쟁반에 쌀가루를 넣고 돌아가면서 도로에 뿌린다. 이어서 시체를 가지고 사람이 살지 않는 성밖의 시골에 도달한 후에 땅에 내려놓고 매와 까마귀, 개와 동물이 먹기를 기다린다. 날짐승들이 먹어치우면 사자의 부모에 복이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먹지 않거나 먹다가 중단하면 부모는 오히려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화장을 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은 주로 화교들이다.
부모가 사망해도 특별히 상복을 만들어 입지는 않는다. 남자는 모두 머리를 삭발하고 여자들은 소위 춤추는 무희처럼 동전 크기만큼 앞머리를 자르고 그것으로 효행을 다한다. 국왕이 죽으면 탑이 있는 곳에 매장하지만 육체를 화장한 후 그 재를 모시는지는 알 수 없다.
경작
일반적으로 1년에 3회 또는 4회 수확을 한다. 캄보디아의 연간 기후는 중국의 5,6월 기후와 같고, 서리와 눈은 내리지 않는다. 이 지역은 1년의 절반은 비가 내리고 절반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 4월부터 9월까지는 매일 그것도 오후가 되면 반드시 내린다. 담수양(톤레샵호수)의 수위는 높이가 7~8장(약 23~26m)이며, 커다란 나무 모두가 물 속에 잠기며 나뭇가지 끝이 수면 위에 보일 정도가 된다. 이 때가 되면 호수 위에 사는 수상족들은 언덕 위로 집을 옮긴다.
10월부터 3월까지는 비가 오지 않으며 호수는 작은 배가 겨우 자니갈 정도로 수심이 낮아진다. 수위가 깊은 곳이라도 3~5척(약 1~1.6m)에 지나지 않아 수상족들은 언덕위에서 다시 호수 주변으로 이동한다.
농부들은 어느 시기에 벼가 여물어가고 호수의 수면이 어디까지 덮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몰되지 않는 지역에 벼를 파종한다. 경작에 소를 이용하지 않는다. 쟁기, 낫 가래와 같은 농기구는 중국과 상호 유사한 원리로 만들어졌으나 그 모양은 전적으로 다르다. 또한 파종하지 않았는데 자연적으로 성장하는 벼가 있다. 수면이 1장이면 벼도 그 높이에 알맞게 자란다. 생각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특수한 벼다(이 벼는 ‘떠 있는 벼’로서 일종의 수경재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밭을 경작하고 야채를 재배하는데 인분은 사용하지 않는다. 불결한 것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중국인이 캄보디아를 여행할 때는 자신들이 인분을 사용하여 재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인들이 자신들을 멸시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두서너 집이 공동으로 땅을 파서 하나의 굴을 만든 다음 이 곳을 풀이나 나뭇잎으로 덮어서 화장실로 활용한다. 이 곳에 오물을 넣어 꽉 차게 되면 또 다른 굴을 판다. 모든 사람들이 변소에서 볼일을 끝내면 반드시 연못에 들어가 씻는다. 씻을 때는 왼손을 사용하며 오른손은 식사를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중국인이 화장실에서 휴지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웃음을 참지 못한다.
또한 심한 경우에는 그 중국인이 공공의 장소에 다니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일부 부녀자들은 선채로 소변을 보는 이도 있다. 이것은 아주 조소적이다.
무역
캄보디아에서의 무역과 거래는 여성의 몫이다. 이 같은 이유로 중국인이 캄보디아에 도착하면 반드시 한 여인을 처로 맞이하는데 그것은 무역과 거래에서 커다란 자산인 여인들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시장은 매일 오전 여섯 시에 시작되고 정오가 되면 폐장한다. 점포는 없으며 상인들이 노상에서 물건을 사고파는데, 각기 정해진 장소가 있다. 캄보디아세서도 관아에서 장소를 빌려주고 세를 받는다고 들었다.
소규모 거래일 때는 미곡과 중궁의 물품을 이용하고, 그 다음으로 규모가 클 때는 포를 사용하며 커다란 매매가 있을 때에는 금과 은을 사용한다.
이전에는 캄보디아인이 가장 순박하여 중국인을 보면 외경스런 마음을 가지고 이들을 ‘부처’로 칭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올렸다. 그러나 중국인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자도 있다. 이 곳에서 활동하는 화교의 수가 많아진 이유도 있다.
지방행정구역
이 나라는 ‘90개 이상’의 지방으로 구획되어 있다. 진포, 사남, 파간, 막량, 팔설, 포매, 치곤, 목진파, 뢰감생, 팔사리, 등이 행정구역이다. 기타 지역 이름에 관해서는 기억할 수 없다. 모든 지방은 관아를 두고 목책으로 성벽을 쌓았다.
촌락
모든 촌 마다 사원을 가지고 있으며 탑이 건립된 경우도 있다. 인구의 수가 아무리 적어도 지방을 통제하는 관리가 있고 그 이름을 매절이라 한다. 대로변에는 휴식장소가 있다. 일종의 숙박역으로 그 명칭은 삼목이라 한다. 최근에는 시암국과 전쟁을 겪고 난 후라서 넓은 마을이 항무지로 버려져 있는 실정이다.
목욕하기
이 땅에서는 뜨거운 태양과 높은 온도 때문에 고통스럽다. 매일 수차례씩 목욕을 하지 않으면 하루를 지내기조차 어렵다. 밤이 되어서도 한두 차례 목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전에는 욕실, 대야, 물통 등이 있었다. 그러나 목욕을 하기 위해 집집마다 하나의 연못을 갖고 있거나 두, 세 가구별로 하나의 공동연못을 갖고 있다.
현지인들은 남녀 구분 없이 벌거벗은 상태로 연못에 들어간다. 또 부모나 연장자가 연못에 있을 때는 자녀와 연소자가 들어가 목욕하지 않는다. 반대로 연소자나 아이들이 연못에 있으면 연장자들이 차례를 기다린다. 연못에 동년배들이 들어가면 이런 예의는 무시된다. 다만 여성들은 왼 손으로 자신의 음부를 가리고 물에 들어간다. 도성내의 여성들은 3,4일 혹은 5,6일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성문밖 강가에 와서 목욕을 한다.
강가에 도착하면 입었던 옷을 벗고 물 속에 들어간다. 강가에는 목욕을 하는 또 다른 여성들이 수천을 헤아린다. 이 가운데는 고위관리의 부인들도 있는데 이를 보려고 몰려든 주변의 구경꾼들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몸이 노출되어도 개의치 않는다.
성밖의 커다란 호수(시엠렙 강)에는 이런 일이 하루 종일 일어난다. 중국인들은 쉬는 날에 이러한 목욕장면을 구경하러 가는 것을 즐긴다. 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물 속에서 미리 기다리는 자도 있다. 수온은 난로와 같이 뜨겁지만 밤이 되면 다시 차가워지고 해가 뜨면 수온이 다시 상승한다.
국왕의 외출
이전 국왕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서 집을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예기치 않은 변일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운 국왕은 죽은 왕인 자야바르만 8세의 맏사위로서 병권을 담당하는 직위에 있었다. 국왕은 장인인 자야바르만8세가 죽자 선왕의 딸이면서 자신의 아내가 된 부인으로부터 왕권을 상징하는 금으로 된 보검을 훔쳐 받았다. 이 때문에 선왕의 아들이 왕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한 때, 선왕의 아들이 복위를 시도 했으나 국왕이 이를 간파하고 체포하여 발가락을 절단한 다음 어두운 지하실에 감금시켰다.
새로운 국왕은 입에 성스러운 쇠붙이를 집어넣고 다녔는데, 이것은 어떤 칼이나 창으로 찔려도 상처가 나지 않는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국왕은 이것을 지니고 항상 외출했다. 내가 캄보디아에 1년여를 체류하는 동안 국왕의 외출모습을 본 것은 불과 4,5회에 불과했다.
국왕이 외출할 때는 군사가 전방을 지키고 있고, 깃발을 들며 음악을 연주하는 병사가 뒤따른다. 또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 꽃장식을 한 삼백 내지 오백 명의 궁녀들이 촛불을 들고 열을 지어 맞이 한다. 환한 대낮에도 켜놓고 있다.
한편으로 별도의 궁녀들이 있는데 궁정에 있는 금은 도기와 아주 특별하게 고안된 장식물을 붙이고 왕을 뒤따른다. 또한 손에 표창과 방패를 든 또 다른 궁녀들이 궁중의 여군으로서 하나의 대오를 이루고 뒤따른다.
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장식한 궁중의 마차, 사슴 한 필이 이끄는 마차, 소가 끄는 마차가 뒤따르는데 모두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신하와 왕족들은 코끼리를 타고 앞서 나가고 있으며 멀리서 주홍색이 양산도 보이지만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 다음에는 왕비와 후궁이 뒤따르는데 가마나 마차 또는 말이나 코끼리를 타며 금으로 장식한 양산이 백여 개가 넘는다.
마지막으로 국왕이 코끼리 위에 선 모습으로 행차하는데 국왕은 금으로 만든 성검을 손에 쥐고 있다. 또한 사방에 코끼리 부대가 밀집 호위를 하고 있으며, 군마가 뒤따르며 보호하고 있다.
국왕과 마주치는 자들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야한다. 이를 일컬어 삼파라 한다. 이러한 복종의 예를 갖추지 않는 사람들은 정사를 다스리는 관리에 의해 구금되며 행동이 약간만 의심스러워도 석방하지 않는다.
국왕은 매일 두 차례 걸쳐 집무실에서 정무를 돌보지만 집무실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신하와 서민들이 국왕을 오는 것을 희망한다면 지상에 나란히 앉아서 국왕이 행차하기를 기다린다.
잠시 동안 궁정에서는 은은한 음악이 흐르고 궁정의 바깥쪽에서부터 조개껍질을 부는 신호가 울리면 국왕을 영접하는 시간이다. 국왕의 행차는 한 대의 금수레를 이용하여 행선지가 먼 곳이라고 들었다. 잠시 동안 두 명의 궁녀가 여리고 아리따운 손으로 발을 걷어 올리면 국왕은 손에 검을 잡고 은으로 만든 창 한가운데 서 있다. 신하들과 서민들은 모두 합장하며 머리를 땅에 대고 고동소리가 끝나면 일제히 머리를 치켜세운다.
이어서 국왕이 좌석에 앉는다. 국왕이 앉는 좌석은 한 장의 사자 가죽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라고 한다.
집무가 끝나고 왕이 궁으로 되돌아 갈 때면 두 명의 궁녀가 ‘발’을 내리고 모든 사람이 기립한다. 이 모든 일을 통해 판단하자면 감패지(캄보디아)인과 같이 비록 야만스런 국가라 하더라도 군주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