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1926∼1980)는 군인·정치가·행정 관료로 경상북도 선산 출신이다. 1943년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의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중등교원양성소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하였다. 김천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국군창설 때 조선 국방 경비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12월
제2기생으로 졸업한 뒤, 잠시 대구 대륜중학교 및 김천중학교의 교사 생활을 역임한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군요직을 거치면서 정치가와 행정관료의
길을 걸었다.
1954년 제5사단 제36연대장, 1957년 육군대학부총장, 1963년 제6사단장, 1966년 제6관구 사령관, 1968년
육군보안사령관, 1971년 제3군단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5월혁명 직후 군정하에서 호남비료 사장을 역임한 적이 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維新政友會 소속)이 되어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면서 의원직을 사퇴하고,
대통령 박정희를 측근에서 보좌하게 되었다.
그뒤 빈번한 소요 발생과 긴급조치령의 남발에 따른 정치세력간의 알력과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던 상황 속에서, 그는 주도 면밀한 정보수집과 사태 무마에서 맡은 바 소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79년
와이에이치무역 여공농성사건,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사건, 부산·마산 사태 등 계속된 정국 불안 사건을 해결하면서,
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대통령 박정희를 둘러싼 경호실장 차지철 등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1979년 직속부하인 박선호·박흥주 등과 사전모의하여 이른바 ‘10·26사태’인 대통령시해사건을 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에 대한 재판과정은 당시 여러가지 시시비비가 뒤따랐으나, 그는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0년
사형집행되었다. - 네이버의 인물정보에서 발췌 -
----------------------------------------------------------------------------------------------
"나의 죽음에 가족들은 축복하라" 10.26 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 1979년에 일어났다. 궁정동의 총소리는 당시 온 국민의 가슴을 출렁이게 했고, 10.26 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역사의 흐름이 엄청나게 바뀌게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1980년 5월
23일. 이미 사형이 확정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관련된 내용의 전갈이 서울 구치소로 떨어졌다.그리고 이튿날 새벽 4시 군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김재규는 수갑이 채워지고 포승으로 묶여진 상태로 서울 구치소 지하 독방으로 이감됐다. 그로부터 3시간 후인 아침 7시. 구치소 직원이
김재규를 데리고 나갔다. 이미 낌새를 알아차린 김재규는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았고 집행장에 들어서서는 그저 묵묵히 직원의 안내에 따를
뿐이었다.
드디어 집행관이 입을 열었다. "오늘 법무부장관의 사형집행 명령에
따라 그 형을 집행합니다" 그리고 집행관이 "유언이 있으시면 하십시요" 라고 말했으나 김씨는 "할 말이 없습니다" 라고만 대답했다.집행관은
또 다시 "스님을 모셨습니다.집례를 받으시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김재규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집행관은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직원이 재빨리 움직이며 김씨의 머리에다 하얀 용수를 씌웠다.김씨의 몸과 다리가 포승으로 묶여졌다. 계호 직원들은
그를 곧 사형 집행 장소로 옮겼다. 흰색 커튼이 내려진 곳이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가슴을 쏘았다'고 하던 김재규의 목에 마침내
굵은 밧줄이 걸렸다. 그리고는 이어 김씨가 앉은 마루판자가 꺼지면서 [쾅] 하는 소리가 집행장을 울렸다. 그는 그렇게 간
것이었다. 김재규는 사형장에서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는대 그것은 이미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사형당하기 하루 전인 5월 23일 군교도소에서 가족 11명과 만나 자신의 유언을 전한 터였다.
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죽거든 동정복에 중장 계급장을 붙여달라. 검은 양말에 검은 구두를 신겨 주고
오른손엔 상아 지휘봉을, 약력은 창호지에 적어 관속에 넣어 묻어달라. 우리 동지가 모두 일곱 사람이니 방향을 잘잡아 나를 중심으로 두 대령을
묻고 경비원을 좌우에 각 두명씩 묻어달라. 만약 내가 복권이 되면 '의사 김재규 장군지묘' 라고 묘비에 적어다오. 나는 아버님이 덕촌에 묻혀
지금까지 덕촌이란 호를 즐겨왔는대 이제부터는 덕산(德山)이라고 해다오.
나는 건강이 나빠 자연사를 하더라도 오래 살지는
못햇을 것이다.나는 아들이 없는 사람이니 민수(동생의 아들)를 내 양자로 삼아 제사를 지내게 해다오. 나는 내 스스로가 떳떳히 사형을
받고 가는 것을 원하는대 그 이유는 우선 사형이 집행되면 내 죽음이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모먼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
기분은 이러하니 내 죽음에 대해서 가족들은 축복을 해주어야지 울고 불고 해서는 안된다. 내용 출처 : 100인이 남기고 간 마지막 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