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15. 열한번째주 . 설교문
묵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장님입니다.
신앙고백
찬송 23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기도 하경숙 권사,조용림 권사,염성섭 장로,이원준 장로,
성경말씀 로마서 4:13~25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
찬송 463 험한 시험 물속에서
광고 코로나 19 예방을 위해 마스크 착용 , 서울 교회 설립을 위해 기도
찬송 464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축도 아프니까 그만 하세요 . 주님도 아프고 , 나도 아프잖아요 .
코로나19가 전 세계적 대 유행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WHO에서 팬데믹 선언을 했습니다.
이로인하여 가장 큰 불똥이 일본에 튀었습니다.
7월, 올림픽 개최가 매우 어려워지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경제적 손실이 몇백, 몇천조가 될 것입니다.
일본뿐이겠습니까?
코로나19가 유럽도 매우 심각한 지경입니다.
코로나19에 대하여
강 건너 불구경만 했던 미국도 비상사태 선포를 했습니다.
그런데 선진국 국민은 좀 나으려나 했습니다.
그러나 마스크 사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인가 봅니다.
나만 살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아침 5시에 알람이 울리면 샤워하고 출근합니다.
꼭두새벽에 요양원에 도착하면 벌써 우리 어르신들이 휠체어에 앉아서
아침 식사를 기다립니다.
그러면 저는 침상에 누워 사시는 우리 전예순 권사님
아침 식사 돕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목사인 제가 한 수저 더 드시게 하려고 얼마나 재롱을 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겨우겨우 식사를 마치면 양치질을 돕습니다.
우리 전예순 권사님 턱밑에 바가지를 바치면
퀙퀙 가래를 벹어 내며 양치질을 합니다.
그리고 따듯한 차를 대접합니다.
그리고 우리 소현순 집사님 죽을 떠 드리고
그리고 박옥례 권사님 밥을 떠 드립니다.
그리고 약을 챙겨 드리고.
아침 식사를 다 드신 식판을 나르고 식탁을 행주로 닦습니다.
매일 아침에 이렇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엊그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모든 일을 거들고
제 책상에 앉아 쉬고 있는데
우리 백 권사님께서 꼬부랑꼬부랑 다가오시는 겁니다.
목사님, 어젯밤에 잠 한숨 못 잤습니다.
꿈에 전예순 권사가 죽었는데
조용림 권사가 전예순 권사님을 붙들고 얼마나 울던지
그러다 조용림 권사님까지 아파서 따라 죽겠습니다.
그러니 전예순 권사를 아무도 모르게 이불에 싸서 집으로 보내라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 에피소드episode.
우리네 인생이 이렇게 쓸쓸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렇듯 나라가 어려워지고, 기업이 어려워지고, 교회가 어려워지고
한 가정이 어려워지게 되면
그 나라 국민성, 그리고 그 가정, 그 사람의 인간성이 드러납니다.
성숙한 국민은
성숙한 성도는
나보다 남을 더 배려하게 됩니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사는 것입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보면 나부터 피하려다
모두를 죽게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세월호 침몰 당시 이준석 선장이 어린 학생들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팬티 바람으로 탈출하는 모습은 꼴불견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준석 선장은 감옥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 선장의 딸은 자살을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월호 이준석 선장은 살아있어도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나만 살려다 모두를 죽게 만들고
이제 나만 살아있어도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인생인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절,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6절,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절,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절,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절,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절,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절,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절,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독일의 칸트는 매일 정확한 시간에 공원을 산책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칸트가 산책하는 시간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약속, 언약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미 약속한 것은 갚지 않은 부채입니다.
그래서 성경이란 말도 영어로는
Old Testament 구약
New Testament 신약입니다.
성경은 곧 언약,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약속을 했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6절입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7)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 후사를 낳으리라.(창17:16,19)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자손을 주리라.(창13:16)
이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입니다.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에게서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후사를 주겠다는 것이고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가 되었는데
그리고 아내 사라의 나이가 몇 살입니까?
그래서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도 웃었습니다.
목사인 저 역시도
믿어도 될까요~ 당신의 약속을~
흘러가는 구름은 아니겠지요~
이랬을 겁니다.
창세기 17장 1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
창세기 18장 12절입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이걸 두고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합니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은 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소한 에피소드episode였습니다.
목사님에게도 이런 사소한 에피소드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께도 에피소드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사소한 에피소드만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허허 웃습니다.
그런데 성숙한 성도님들이
아브라함의 에피소드를 가지고 문제 삼겠습니까?
성숙한 국민은
성숙한 성도는
에피소드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줄 압니다.
17절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9절입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아내 사라의 자궁은 이미 죽은 무덤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잉태할 수 없었음을 성숙했던 아브라함이 이미 알고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믿는 자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성도님들은 영웅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니
얼마나 신실한 성도입니까?
그래서 꿈은 이루어집니다.
우리들의 꿈은 믿을 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믿으면 반드시 축복을 받습니다.
목사인 제가 증인입니다.
목사인 저도 믿음으로 이렇게 큰 성전을 이루었습니다.
제가 노숙자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할 때에
이웃 목사들까지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공했습니다.
25절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 박희순 집사님께서 관조라는 새를 가져오셨습니다.
아주 예쁜 새입니다.
그런데 밤이건 낮이건 울어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권사님들이 잠을 잘 수가 없으니
어두운 화장실로 쫓겨 난 것입니다.
그래서 보기가 싫어서 우리집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작은 새장 안에서 갇히어 사는 새가 안쓰러웠습니다.
그래서 새장을 열어 두었습니다.
하루를 나오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겁니다.
다음날 창밖으로 훨훨 날아가 버렸습니다.
제도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죄에 눌려 살지 말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