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심이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 / 송담 큰스님
송담스님 달마도
문헌에 오른 천칠백 공안 외에도 수없이 많은 공안이 있어서
눈 밝은 대종사는 자유자재로 법(法)을 갖다가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말로써 설할 수 없는 최고에 법을 자유자재로 쓰시고,
또 그 법으로써 학자든 도를 배우려는 수행자들을 눈을 뜨게 하고
경책을 하고 또 점검(點檢)을 해서 그렇게 교화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안은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그 공안의 원리를 분명하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지식이 높고
경전을, 팔만대장경을 종횡으로 읽고 외우고
해설을 한다 하더라도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공안의 도리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연구한 모든 이론을 동원을 해 가지고
이 공안을 분별을 하고, 천착을 하고, 분석을 한다 하더라도
이 공안의 참뜻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질 수록에 참 진리로 부터서는 멀어가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별심을 사용하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용한 데에서 공부를 익히는 것은
시끄러운 속에서 요중선(鬧中禪)을 하기 위해서 익히는 공부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괜찮습니다.
만날 조용한 데서만 해야만 공부가 잘된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공부에 소극적인 방법을 취하는 사람이라,
이 공부가 매카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시끄럽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하는 것인데,
밤낮 조용한 데서만 익혀야만 공부가 좀 된 것 같고
그래야만 공부가 잘된다고 생각하면은
그 사람은 정말 생사를 당적할 만한 그러한 힘 있는 공부에
힘을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반야 (般若)는 지혜인데
지혜롭게 마음을 쓰면 그러한 묘한 작용이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력이라 하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우리의 생각 조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180도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밖에서 찾지 말고 내 마음에서 찾으라.
천당과 지옥도 시간과 공간을 멀리 잡고
딴 데에서 딴 시간에 찾지를 말고,
당장 '한 생각' 일어나는 그곳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여실히 느끼게 됩니다.
화두 한 번 들 때 지옥이 금방 천당이 되고.
공부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퍼뜩 한 생각 돌리면, '이뭣고?' 하고 돌리면 그 자리가 선방입니다.
출처 : 염화실
첫댓글
요중선(鬧中禪)
요중선( 시끄러울 뇨鬧 /가운데 중中/ 참선 선禪)
시끄러운 가운데 하는 참선.
저잣거리나 상갓집에서도 하는 禪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