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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야고보서 2:1-9 제목 :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니
<야고보서 2:1-9>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한두차례 언급한 기억이 있습니다만 이런 우스개 얘기를 몇번 들어보셨을 겁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목회자를 잘 섬기던 성도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배가 고파서 천국에 있는 어느 중국집에 들어갔는데 카운터에 서리집사가 앉아있고, 안수집사와 권사는 홀에서 서빙을 하고, 장로는 뜨거운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요리를 하더랍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목사가 보이지 않는 거죠. 그래서 불만에 찬 목소리로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 목사는 세상에서도 손가락 하나 까닭하지 않더니 천국에 와서도 아무 일도 안하는데 이거 목사만 너무 차별대우 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을까요? ‘얘야. 목사는 지금 자전거 타고 짜장면 배달 나갔단다.’ 지금은 제가 혼자 고상한 척하면서 설교하고 있지만 천국에서는 자전거 타고 부지런히 여러분들에게 짜장면 배달해 드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요.
내가 좋지 않은 차별대우 당한다면 기분이 나쁘고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아무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게 될까요? 권력과 힘 있는 자와 약하고 힘없는 자를 대하는 게 이론적으로는 동등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동등해지기는 어렵습니다. 부자를 대할 때와 가난한 자를 대할 때, 육체적으로 매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대할 때, 북미나 유럽 선진국 사람들을 대할 때와 동남아나 아프리카의 빈민들을 대할 때의 태도가 똑같아지기는 쉽지 않지요. 어찌보면 사람을 차별적으로 대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추석명절이 시작되었는데 가족들끼리 모이면 어쩔 수 없이 서로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현실이 되기도 하지요. 올 추석에는 이로 인해 상처받거나 분노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얘는 잘하는데 너는 왜 못하니?’ 이런 식으로 서로를 비교하면서 차별하는 행태는 정말 조심하셔야 하는 거죠.
그런데 이런 비교와 그로 인한 차별대우의 현실은 오늘날 뿐만 아니라 이미 야고보서 당시의 초대교회 안에서도 있었습니다. 특히 초대교회 당시 같은 고대 시대에는 사회적으로도 신분 차별이 뚜렷했지요. 귀족과 평민과 천민의 구별은 엄격했고, 높은 신분에서 낮은 신분으로 전락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낮은 신분에서 높은 신분으로 상승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라 해도 그 안에서 각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재산에 따라 서로 차별하는 일들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당시 교회에서 있었던 예를 들고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절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절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이런 차별은 야고보서에서 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인 고린도전서에서도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9절에 보면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절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한 교회 안에서 같이 식사하는데도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뚜렷할만큼 차별적이었다는 거죠.
성공했고 그래서 풍요로워지고 높은 사회적인 위치에 오르는 게 죄는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만 문제는 이렇게 풍요롭고 성공했고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얻었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수준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스스로 높이거나, 나를 기준 삼아서 내 수준 밑에 있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거나 하찮은 존재로 여긴다면 그것은 죄가 되는 거죠. 본문 8절과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차별없이 사랑하면 잘하는 것이지만, 9절에서처럼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씀하지요.
야고보서에서나 고린도전서에서나 부자와 가난한 자를 대조하면서 거기에서 발생하는 차별대우를 말하고 있는데, 세상이 생각하는 부자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부자는 어떻게 다를까요? 본문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 속에서 한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먼저 5절에서는 가난한 자에 대해 말하지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반면 부자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6절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절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셨다고 5절에서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부자는 일단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그래서 그 앞에 아부하고 머리 조아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많은 부자들은 6절에서처럼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힘없는 자들을 억압하며 법정에 끌고 간다고 하지요. 지금 이 시대의 법정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떠도는데 먼 고대 시대의 법정이 과연 얼마나 정의롭고 공평했을까요? 귀족이나 부자들에게 늘 유리했던 겁니다. 결국 겉으로는 법의 정의로운 심판을 받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재물의 힘으로 약한 자들을 억압했던 거죠.
게다가 7절에서는 약한 자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했다고 말합니다. 6절에서는 업신여기는 정도였는데 7절에서는 한술 더 떠서 그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한다고 말하지요. 한마디로 부자들에게는 사랑과 나눔과 따뜻한 마음과 배려와 섬김의 아름다움보다는 자기의 풍요와 힘을 과시하는 교만과 오만함, 힘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자기들 뜻대로 살아가려고 남을 조종하거나 억압하는 못된 버릇, 내가 잘났기 때문에 좀 못난 사람들을 쉽게 비방하고 조롱하고 멸시하는 태도들을 많이 보여왔음을 지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이 세상 모든 부자들을 다 나쁘게 본다고 오해해서는 안되는 거죠. 본문의 저자인 야고보 당시의 부자들 중에 이렇게 교만하고 되먹지 못한 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야고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부자라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게 아니라 그 풍요와 부유함 때문에 교만해지고 더 자기중심적이 되어가는 죄악과 못된 태도를 지적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풍요로운 사람들 중에도 겸손히 감사하면서 선하고 아름다운 섬김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이 있고, 가난한 자들 중에서도 가난하기 때문에 더 물질에 집착하면서 물질을 위한 것이라면 온갖 비열하고 더러운 방법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도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먼저 본문이 제시하는 전제조건은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사람으로 살려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려는 그리스도인들 아닙니까?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대하실 때에 차별적으로 대하지 않으셨지요. 어느 기준을 두시고 그 기준에 맞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셨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합당한 자격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아무 차별도 두지 않으셨고, 오로지 사랑과 은혜라는 관점에서만 우리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같이 한없이 부족하고 자격 없는 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거죠. 그러니 예수님의 이런 차별없는 은총과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육신적인 조건 몇가지로 사람을 판단하면서 차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1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처음부터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성경에서는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 몇 차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이런 안목도 배워야 하는 거죠. 사람의 외모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중심, 성품, 인격, 믿음, 그리고 모두가 동등하게 지니고 있는 인권을 정확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보려 해야 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가난하든 부요하든 중요한 것은 1절 말씀에서처럼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올바르게 가지는 겁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면 내가 남보다 많이 가진 재물과 권세와 지식과 능력이 주님 앞에서는 별개 아님을 깨닫게 되고, 내가 가난하고 초라하고 연약하고 부족하다 해도 주님 앞에서는 그런 부족함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우리의 삶은 부유하게 되거나 가난하게 되는 것에 인생의 승패가 있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진실하고 정직하고 굳건한가에 달려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