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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가 나의 왕을 세웠다 (시편2:1~12) 총신대학교 문현화
이 세상의 모든 왕들 이방나라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서로 상의 하고 악한 짓을 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미국 같은 나라들도 대통령을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세상이다. 마지막 때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래왔다. 마귀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 잘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속여서 저들이 거짓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같아서는 악인들을 멸망시키고 재앙을 쓰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법을 쓰신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인간들을 진멸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왕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런데 이 왕을 세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우리는 다는 모른다. 왕이라고 하는 자리는 부모도 형제도 모르는 자리이다. 다윗 왕의 뒤를 놓고 그의 아들들이 싸운다. 셋째로 등장한 인물이 아도니아인데 이 소식을 듣고 솔로몬을 왕으로 다윗은 세운다. 이 소식이 아도니아에게 전하자 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벌벌 떤다. 우리 일반 백성들은 누가 왕이 되는 큰 관심이 없지만 왕이 되려고 했던 아도니아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문제였다. 하나님께서 나의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고 할 때 일반백성에게는 무심한 일이지만 왕이 되려고 했던 사람은 다른 것이다.
나의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는 것이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왕을 그들 위에 세우셨는데 내 거룩한 산 시온데 세우셨다고 한다. 이 왕은 우리 육신의 눈에 보이는 왕이 아니 다른 것이다. 또 나의 왕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 무슨 왕이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고 한다. 예수님이 아들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사람들에게도 다 왕이 있다. 자녀들.. 왕같이 대접하고 왕같이 섬기면서 자녀들을 키운다. 이세상의 다른 집 자녀들보다 내 자녀가 훌륭하도록 키우는 것이 부모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나의 왕 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가? 이방은 누구인가? 성경은 역설적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 주고 판 사람은 같은 유대인 가롯 유다이다. 그러면 이 본문에서 말하는 세상의 군왕, 이방인은 누구인가? 내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실상은 이방인이다. 왕이신 예수님을 대적하여 죽은 사람들 유대인 즉 이방인인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찾았다.
예수님은 왕이신데 어떤 왕인가 신령한 왕이시다. 시온의 왕, 예루살렘과 비교가 된다. 시온에 세웠다 라는 것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의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왕이라는 것이다. 악인들의 왕이 아니라 당신의 성도들을 내 백성이라고 보살피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통치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심판하시는 왕이 아닌 구원하시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 희생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들에게는 자비의 주님이시지만 악인들에게는 심판자이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백성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떨며 두려워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며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한다. 떨며 두려워하며 섬긴다...??오늘날 신자들을 볼 때에 주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경외하는 마음이 부족하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심판에 대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오셔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많은 기적 중에 베드로에게 고기를 잡게 하시는 것도 있다.
이 이적 앞에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볼 때 두려운 마음이 생긴 것이다. 주님의 크신 모습을 보았고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두렵고 추한 자인지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때 그 분을 두려워 할 수 있다. 모세도 마찬가지이다. 기적은 보았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싶지 않다.
둘째 단계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 맞추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키스는 아무나하고 하면 안 된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아주 깊은 관계를 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주님 앞에 나가면 내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내 놓으라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에 옷을 안 입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부부사이는 내 마음속을 다 들여다보게 해도 부끄러운 것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허물이 보여도 서로 이해하고 덮어주는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입맞추라고 하는 의미는 말을 맞추라는 것이다. 죄 짓는 악인들도 서로 말을 맞춘다. 우리 성도들이 말을 맞춘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죄 지은 것이 일치, 목사가 설교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과 똑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전하려는 말씀과 내가 전하려는 것이 다르면 큰 일이 난다. 예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설교를 할 때가 많다.
시편 마지막절 말씀에서는 여호와께 피하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세상의 환난이 올 때 예수님께 피하는 자는 이 세상을 넉넉하게 이기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어려울 때 일수록 반석이 되시고 날개 그늘이 되어주시는 주님께 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신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함이라”
옛날에는 독생자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몰랐다. 구약에는 행위를 지키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성경전체의 요약이라도 한다. 하나님은 돈에는 비교할 수 없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빌라도는 물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리요.. 그것에 대한 각자의 대답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
우리는 독생자에 대한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나에게 독생자를 주신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독생자를 믿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에 엄청난 사랑을 주셨다. 무기기술이 발전해서 세계적인 수효가 대단하다. 앞으로는 삼성의 전자제품과, 스마트폰, 현대에서 나오는 자동차 미국을 맞먹는 기술이다.
요즘 북한 김정은이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했다. 아마 전쟁에서 막다른 골목에 있은 부틴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김정은은 식량을 제공해달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그렇다할지라도 하나님은 저들을 한꺼번에 가 같이 망하게 하실 것이다. 통일은 꼭 올 것이고 우리는 그곳에서 교회와 신학교들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의 재물들이 한국으로 모여들고 있다. 주님께서 이 작은 한국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물으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복음 3장16절과 짝을 이루는 말씀이 요한1서 3장 16절이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의 사랑이 내 마음에서 불타게 되면 우리는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이 어마어마한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3장 16~17절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 말씀 구절이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 내렸고, 예수님에게 하늘에서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물을 뿌리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림하심이 있는 세례가 있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 “너는 너를 기뻐한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마가복음 3장에는 14절부터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다. 그런데 3장 14절과 15절에 예수님을 세우신 목적을 세 가지로 표현한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시려고, 또 보내서 전도도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도 주시려고 부르셨다. 우리는 이 마씀을 자꾸 마음에 새겨야 한다. 첫째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려고 제자로 택하셨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임마누엘로 함께 하느냐이다. 어느 곳에 가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이것을 늘 체험하고 느끼며 이런 의식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 사랑의 감격이 충만해져야 한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다. “너희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오늘 날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성령이 없는 자들이 많다. 성령이 충만해야 내 몸이 성전인줄 깨닫는다.
딤후 장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창세기 3장15절에서는 타락의 원인이 된 하와에게 메시야를 약속하신다.
출애굽기 3장15절에서는 14절에서는 나는 곧 나다. 라고 하는데 15절에는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신다.
느낀점: 성경을 체계적으로 잘 배우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또한 어디에 어떤 말씀들이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도 가득했는데 3:15절이라는 통일된 장 절로 중요한 말씀들을 알아갈 수 있어서 감사한 시간이다. 또한 늘 그렇지만 목사님은 현재 미국에서 살고 계시는데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이 전달되어 눈물이 난다. 안그래도 요즘 “건국전쟁”이라는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다큐영화를 보고나서는 예전보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더욱 부어주셨는데, 목사님설교를 들을 때마다 나라를 향한 애국심이 더욱 깊이 심어진다.
가인과 아벨의 추수감사절 창세기4:1~8
성경의 제일먼저 추수감사절을 드린 사람들은 가인과 아벨이다. 그런데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 이에 가인은 아벨을 쳐 죽였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자신의 죄를 찾지 못하고 아벨를 죽인다. 과거 우리 조상들도 추수를 하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우리조상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조상들이 제사를 드렸다. 다 제사를 드렸지만 어떤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어떤 제사는 안 받으셨다.
마지막 때에 우울증으로 인한 고통이 심하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감사하는 생활을 우리 몸에 익히고 습관들여야 한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우리는 경고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이 나의 예배를 받아 주시면 너무 기쁜 일이지만, 안 받아주시면 그 것 만큼 속상한 일이 없다. 가인은 자신의 예배가 드려지지 않자, 하나님께는 어떻게 해보지 못하니 애꿎은 동생을 쳐 죽인다.
이 제사의 중요성을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태어난 아들들이 가인과 아벨이다. 즉 타락한 아담이 낳은 자손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열납 해 주시기를 원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시는지 요한복음 4장에서도 나타난다. 사마리아여인과 만나서 한 첫 대화가 예배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배는 귀중한 것이다. 우리가 예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한다.
가인가 아벨이 이 제사에서 둘로 갈라졌다는 것을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가인의 후손이 되지 말고 아벨의 후손이 되어야한다. 히브리서 11장 제일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가인과 아벨이다. 역시 제사의 문제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독자 아들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며, 레위지파를 택하셔서 그들을 장자지파의 복을 내려 주신다. 제사장 족속으로 삼으시고 이 제사를 귀중히 여기신다. 우리백성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여러 모양으로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제사가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첫째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고.. 고전14장의 영으로 예배는 방언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영이라는 단어보다 성령으로 예배해야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성령과 그리스도가 없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으신다. 모리아산에 이삭과 아브라함이 올라간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번제를 드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불도 있고 나무도 있는데 라고 한다. 여기서 불은 성령의 불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는 반드시 불이 있어야 한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 성령의 불로 임하시고 우리를 태우시옵소서라는 것을 우리를 열납 하신 다는 것이다.
둘째는 제물이다. 옛날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예배를 들렸다. 짐승의 피를 손에 발라서 단 뿔에 바르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열납하셨다. 우리는 피가 있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 히브리서에는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가 어떻게 달랐는가 할 때 아벨은 가인보다 더 믿음의 제사를 드렸다고 설명한다. 제사에는 믿음이 꼭 있어야 한다. 감리교에서는 사도신경을 쓰지 않고 교리적선언문을 한다. 불, 제물, 믿음 이것은 제사에서 중요한 것이다. 아벨의 제사는 죄를 회개하는 제사가 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드렸다. 피가 생명이기 때문에 피를 드린다는 것은 진정한 회개를 드린다는 것이다. 물론 아벨은 가인보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다. 가인에게 선을 행하지 않은 것, 죄를 다스리지 못한 것을 책망하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부족함을 깨닫고 나아가야 한다. 둘째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 자기를 바치는 헌신하는 제사였다.
아벨은 죽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입장에서 받을 때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순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아벨이 죽은 후 셋을 주셔서 의로운 대를 이어가게 하신다. 가인은 진정 자기의 잘못을 되기 위함이 없었다. 그가 진실한 회개가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잘 살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 성령의 불이 있어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
신령한 사람
고전 1:11~3:3
본문말씀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신령한 사람13절에 보니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않고, 육에 속한사람 이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육신에 속한 사람도 있다. 신령한 자는 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다. 내 영의 인도함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사람을 신령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이스라엘역사에는 거짓선지자들이 많이 있었다.(자기 또는 마귀의 영에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육에 속한 사람(교회에 나오지만 영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를 받아야 새사람이다. 교회에 다녀도 성령을 받아 새사람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들의 퍼센트가 많지 않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거듭났지만 육신의 일에 매여 사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는 자연인이였지만 교회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된다. 구약성경에서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이였다. 세상 사람들은 조롱하였지만 흔들리지 아니하고 방주를 만들고 구원을 받게 된다. 그를 비웃던 사람들은 다 죽게 된다.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이였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목표하고 지향하는 것은 신령한 사람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묵상해야 한다. 이 신령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2:11절 사람의 일은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알지 못한다. 또한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이 가르쳐준 말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마지막 때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즘은 세대주의 성령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 성령의 역사이다.
예수님시대에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쫒아낸다고 말하자 성령을 거스르는 것은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는 자들의 가르침에 속지 말아야 한다. 칠년대환난설에도 속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가르침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마귀의 가르침도 많다.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분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조심한다고 해서 속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깨어서 하나님 말씀 위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영 분별의 은사가 있는데 이런 은사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 모세는 반석을 명하지 않고 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자격을 박탈당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교만하지 않도록 어려움을 주시지만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신령한 사람이 되기를 만들지 못하는 마귀의 역사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선은 육신의 소욕이다. 사람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가면 멸망한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가시 같은 육신의 소욕들은 성령의 일들을 가로막는다. 둘째로 아주 강력하게 권고하는 것은 율법조문이다.
우리는 영으로 기도 할 줄 아는 사람, 마음으로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하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불과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고 하신다. 또한 마귀의 거짓말이다. 얼핏 보면 하나님의 말씀 같지만 실상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선한목자라고 표현하시는데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아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관계를 잘 유지하려고 하면 주님과 친밀해야 한다. 주님과 자주 만나는 관계를 유지해야 심판 날 내가 너를 도저히 모른다고 하시지 않을 것이다.
거듭남,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삶, 내가 온전히 죽어져야 하는 삶,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는 기적을 많이 행하셨다. 구약의 모세의 출애굽도 마찬가지며, 마라의 쓴 물, 등 수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이 유대의 백성들은 기적 차원에서만 보았다. 예수님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신다. 표적에서 끝나지 않고 싸인을 본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표적으로 끝났지만 제자들은 그렇지 않다.
느낀점: 오늘 설교를 통해서 많은 부분들을 깨닫고 은혜를 받았다. 또한 설교를 통해서 주님께서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심을 느낀다. 오늘 금요예배 드리고 오면서 주님 앞에서 조금 부끄럽게 느낄만한 입술의 작은 실수들이 있었다. 주님 앞에서 항상 다스림 받기를 원하던 부분 이였지만 막상 어떤 기회들이 되면 잘 지켜내지 못하는 부분들이다. 그 원인들을 깨닫게 되었는데 성령으로 거듭났지만 그런 죄를 지을 때는 신령한 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일을 거스르는 육신을 따라 행하기 때문임을 말씀을 통해 깊이 깨닫는다. 수시로 성령 안에서 행하는지 나를 살피며 깨어 있을 때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수 있음을 깊이 새기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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