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복(李仁復)은 자(字)가 극례(克禮)이고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의 손자이다.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빼어났고 조금 커서는 행동거지가 노성(老成)한 사람과 같았다. 힘써 배워 글을 잘 짓자 이조년이 매번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우리 가문을 크게 할 자는 바로 너로구나!”라고 하였다.
충숙왕(忠肅王) 때 19세로 과거에 급제하여 복주사록(福州司錄)이 되었다가 춘추공봉(春秋供奉)에 뽑혀 임명되었고, 충혜왕(忠惠王)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임명되었다. 원(元)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대녕로금주판관(大寧路錦州判官)에 임명되었고 귀국해서는 기거주(起居注)로 옮겼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이인복이 제과에 합격하여 명망이 있었으므로 4번 옮겨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삼았다가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시키고 서연(書筵)에 나아가 강론하도록 하였다. 이인복의 용모가 엄정하였으며 말투가 간략하고 신중하였으므로 임금이 매번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공(李公)을 보면 나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든다.”라고 하였다. 여러 번 옮겨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고 원(元)에서는 정동행성도사(征東行省都事)에 임명하였다.
공민왕(恭愍王) 초에 조일신(趙日新)이 반란을 일으켜 전국을 호령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두려운 마음에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왕이 몰래 이인복을 불러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니 〈이인복이〉 대답하기를, “신하가 반란을 일으키면 응당 정해진 처벌이 있습니다. 하물며 지금 원[天朝]에서 당당히 법령을 밝히고 있는데 만약 주저한다면 신은 허물이 주상에게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조일신을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왕이 평소 이인복을 중히 여겼는데 이와 같이 대답하니 더욱 중히 여기게 되었으며, 마침내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政堂文學 兼監察大夫)에 임명하고 곧이어 성산군(星山君)에 책봉하였다. 원에서는 정동성원외랑(征東省員外郞)에 임명하였다. 원에서 기씨(奇氏)를 처형한 것과 변방을 침범한 죄를 용서한다는 조서를 보냈다.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려고 하는데, 왕은 이인복이 대의를 알고 절의를 지킨다고 하여 그를 〈사신으로〉 보냈다. 평장사(平章事) 이승경(李承慶)은 이인복의 숙부인데 왕에게 말하기를, “신은 이인복이 간사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라고 하자 〈이승경이〉 대답하기를, “이인복은 평생 배운 것이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학문인데[經濟之術], 어찌하여 왕에게 한 번도 진술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서좌복야 어사대부(尙書左僕射 御史大夫)로 옮기니 이색(李穡)에게 말하기를, “나는 재능이 없어서 헌대(憲臺)를 관장한 것이 2~3번인데도 일찍이 기강을 진작시키지 못하였소. 내 생각에 사소한 일은 주상께 번거롭게 아뢸 것이 못되고 큰일 역시 묘당(廟堂)에서 처리할 것이므로 중간에서 어지럽힐 수 없소.”라고 하였다.
〈이후〉 참지중서정사(叅知中書政事)로 전임되었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역임하였으며,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하여 단성좌리공신(端誠左理功臣) 칭호를 하사받았다. 왕이 이인복을 보내 원에 가서 복위를 사례하게 하였다. 당시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 보루테무르)가 군사를 이끌고 연경(燕京)으로 들어가 승상(丞相)을 내쫓고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인복이 들어가 알현하면서 말이 간략하고 용모가 엄중하니 패라첩목아가 여러 번 눈 여겨 보았다. 이인복이 물러나와 수행원들에게 말하기를, “가서 만나도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더니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인가 보다.”라고 하였다. 왕이 원에 아뢰어 〈이인복이〉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奉議大夫 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임명되었으나 신돈(辛旽)에게 거슬려 파직되었고,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으로 봉해졌다가 곧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왕이 크게 문수회(文殊會)를 열고 양부(兩府)를 거느리고 예불(禮佛)을 드리는데, 오직 이인복(李仁復)과 이색(李穡)은 절할 때마다 번번이 나가서 절을 하지 않았다. 〈공민왕〉 22년(1373)에 검교시중(檢校侍中)으로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경산(京山)에 있으니 왕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임박(林樸)을 보내어 조문하게 하였다. 이듬해 등에 종기가 나서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의관을 갖추어 북쪽을 향하여 이마를 조아리니 마치 임금에게 하직하는 것처럼 하였다. 임종 때 동생 이인임(李仁任)이 염불하기를 권하니 말하기를, “나는 평생 부처에게 아첨하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라고 하였다. 약을 올렸더니 또한 물리쳤다.
〈이인복이〉 이인임에게 말하기를, “재신(宰臣)이 죽으면 관아에서 장사를 치러주는 것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평소 터럭만큼도 보답하지 못하여 죽으면 부끄러움이 남게 되니 나를 위하여 〈관비를〉 사양해야 한다.”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몸에 조복(朝服)을 입히게 하고 죽으니 67세였다. 왕이 깊이 애도하여 소찬을 먹고 사자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예(禮)를 갖춰 장사를 치르게 하였으며,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이인복은 강직하여 절개가 있었고 남이 착하다는 말을 들으면 비록 작더라도 반드시 기뻐하였다. 한 가지 일이라도 마땅하지 잃으면 반드시 얼굴에 노기가 드러났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을 더듬거린다고 하자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성품이 성급하니 실언할까 두려워서 말을 참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장을 지으면 말이 엄중하고 뜻이 오묘하였으며, 붓을 잡아 글을 쓰면 매우 고심하였다. 사실을 서술하거나 사물을 읊을 때는 풍자하는 말이 많았다.
일찍이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과 『충렬왕실록(忠烈王實錄)』·『충선왕실록(忠宣王實錄)』·『충숙왕실록(忠肅王實錄)』의 3대 실록 및 『고금록(古今錄)』·『금경록(金鏡錄)』의 2록을 수찬하였다. 이인복이 몰래 아뢰기를, “신돈(辛旽)은 단정한 사람이 아니라서 다른 날에 반드시 변란이 있을 것이니 청하옵건대 그를 멀리하십시오.”라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신돈이 처형되자 왕이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였다. 이인복은 동생 이인임(李仁任)과 이인민(李仁敏)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말하기를, “나라와 집안을 패망시킬 자는 반드시 두 동생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과연 패망하였으며 그의 손자 이존성(李存性) 역시 연좌되었다. 신우(辛禑) 원년(1375)에 충정왕(忠定王)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아들은 이향(李向)과 이용(李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