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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지도(暗射地圖)
서 기 원
형남(亨男)이 작년 여름에 제대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던 차에 우연히 만난 옛 전우가 상덕(相德)이었다. 그들은 같은 중대에서 일 년 남짓 함께 지냈었다. 중대장은 해방 직후 군대에 들어가서 육 년 만에 대위가 된 사내로, 중대원들에게 훈시할 적마다,
“본관의 사병시대에는 침구를 정돈함에, 공장에서 갓 나온 벽돌을 포개어 놓듯 했는데, 귀관들은 도시 정신상태가 돼먹지 않았다.”
고 기합을 넣다가, 으레
“그럼으로 해서 귀관들은 인격을 도치(도야)해야 된다.”
고 다지곤 하였다. 못살던 자가 돈푼깨나 생기면 가난뱅이 업신여기기가 도리어 심하다더니, 그 사내는 사병들에게 노예가 되기를 강요했다.
그 아래서 미술대학생인 김형남 하사와 법대생 박상덕 하사는 서로 유일의 친구가 되었다. 총알이 스스로 피해간다는 중대장이 전사하고, 그들이 속한 소대도 거의 전멸하다시피 되어, 말더듬이 어느 이등중사가 대장 대리 근무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격전도 용케 견디어냈었다. 그래 상덕은 형남이 제대하기 반년 앞서 군복을 벗었다. 상덕은 형남에게 장차 사회에 나와 잠자리가 변변치 않으면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주소에다 열댓 칸짜리 한식 기와집의 구조마저 그려 가며,
“네가 오면 요 방을 주지.”
하곤, 대문간과 맞붙은 뜰아랫방을 빨간 오일 연필로 꼭꼭 찔렀던 것이다.
“고오마운 말씀이지. 원랜 그 사나이 첩의 집이거든, 원 집은 폭격에 폭삭 녹아버렸지, 모조리 전멸야. 웬일인지 그 집 명의가 그 사나이 이름으로 있다가, 그 첩두 역시 돌아가셨더라 그 말씀이야. 기맥힌 유산이지.”
상덕은 부친을 언제나 ‘그 사나이’라고 불렀다. 그가 웃지도 않고 그렇게 말할 때엔 형남은 가슴속이 흐뭇해지며 쾌적한 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 부자 사이의 따스한 체온을 느꼈고, 이를테면 애정의 역설적인 해학(諧謔)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는 그런 상덕이 좋았다.
그러자 형남도 군복을 벗고, 제대병에게 지급하는 곤색 광목지의 작업복에 같은 감의 작업모를 눌러쓴 채, 트럭으로 청량리를 거쳐 동대문에서 내려서 딱딱한 포장도로 위에 발을 디딘 순간, 꿈에서 상기 덜 깬 기분이라고 할까, 어쩐지 삼 년간의 군대생활이 실제 그가 체험한 것이 아닌 듯, 어릴 때 어머니 무릎에서 듣던 옛얘기처럼 까마득해지는 것이었다. 동대문 안으로 뻗은 번화한 거리가 몹시 생소하게 보였다. 먼저 그는 영등포에 있다는 숙모를 찾았으나 그의 수첩에 적힌 주소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학교 시절에 가까이 지냈던 친구의 얼굴들이 더러 눈앞에 아물거렸지만 주소도 분명치 않으려니와 그런 꼬락서니로 빌어먹으러 왔네, 할 용기가 있을 리 없음은 자신이 너무도 잘 아는 일이었다. 물론 상덕의 말을 잊지는 않았다. 서울의 지리는 잊어버려도 그걸 까먹었을 리 없다. 내심으론, 이렇게 미친 개처럼 헤매다가 마침내 뒹굴어 들어갈 곳이 바로 상덕이네거니 작정해둔 채, 그건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될 수 있는 데까지 무슨 다른 도리를 강구해보자는 심산이었다. 이것이 수첩 을 소매치기당할까 두려워하면서도 곧 찾아가지 않은 연유이다. 그러다가 길가에서 만난 것이다. 그러니 우연히 부딪친 것은 틀림이 없다. 그들은 손을 잡기 전에 껴안고 반겼다.
“야! 인마, 막바루 찾아올 것이지, 그래 뭘 하느라구 이 모양야! 당장 오라, 네 꼴을 보니 다 알겠다.”
상덕은 두 손으로 형남의 목을 졸라맸다. 형남은 웃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상덕의 집은 상상보다 넓었다. 아름드리 기둥이나 굵은 서까래, 그리고 푸르죽죽하게 칠이 벗어지긴 했지만 두툼한 현판이라든지 일견 규모 있게 꾸민 집으로 보였다. 상덕의 설명에 혹 부족이 있었다면 포탄에 지붕이 뚫어진 채로 있는 머릿방*과 문간에 관한 얘기가 없었다는 것쯤일까. 그뿐이 아니었다. 상덕이 여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그네를 ‘최형(崔兄)’ 하고 불렀다. 윤주(潤珠)라는 이름이라 하였다. 지난겨울 어느 일요일 상덕이 극장에 갔었다 한다. 극장 앞에 보스턴백*을 든 여인이 물끄러미 간판을 쳐다보고 있는데, 큰 키는 못되나 가는 몸집에 다색 코트가 썩 어울리더라는 것이다.
“영화 구경 같이합시다.”
했다. 그러니까 다소 우울하게 보이던 그네 얼굴이 활짝 피며,
“네!”
하고 국민학교 아동식의 대답을 했다. 스물한둘로 헤아려지며 녹록지 않은 집안을 생각히는* 옷차림 이어서 놓치기가 무척 아까운 터에,
“우리 집에 놀러 갑시다.”
하니까, 그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대꾸가 없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왜 그런지 그런 말이 나옵니다.”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살러 가는 것이라면…….”
하고 그네는 낯을 붉혔다. 여간한 일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도 않는 상덕도 그때만큼은 숨이 칵 막히더라는 것이다. 그네는 집을 쫓겨났었다. 부산 동무네로 갈 요량으로 정거장을 향하던 길이었는데, 새로 개봉한 프랑스 영화가 보고 싶어서 한참 수중의 돈과 의논하던 참이었다 한다. 실은 친구 집에도 가기 싫다고 한다.
“……나도 친척이라곤 아무도 없고, 이 집 하나가 재산이지요. 게다 직업이래야 언제 떨려날지 모르는 따위고, 수입은 쥐꼬리만한데 생각은 말꼬리만하구, 이런 생활이래도 견딜 수 있으시면 같이 삽시다.”
이렇게 된 일이라 하였다. 그네가 집에서 내쫓긴 까닭은 우정 묻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연애사건으로 짐작이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
“애매한 놈팡이와 몇 달 살다가 채인 거겠지, 다 그런 여자 아냐?”
하고 다소 자조적 인 웃음을 덧붙이는 것 이었다.
형남은 윤주를 멸시할 수가 없었다. 그 같은 야합을 가장 비웃는 그였으나, 그네가 그런 푼수의 여자라곤 당최 곧이들리지가 않았다. 그건 윤주의 첫 인상이 좋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앳된 얼굴인데, 말을 붙이면 번번이 긴 속눈썹을 가지런히 세우고는 말끔히 쳐다보는 밝고 구김살 없는 시선 속에서 도리어 그 자신이 추악하게 느껴지곤 하였다. 호감이 갔지만 어디까지나 한계가 뚜렷한 것이었지, 상덕의 아내로 예우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기야 뭣보다도 그 자신의 일이 다급했다. 일심중학관(一心中學館)을 일주에 사흘 출강하는 상덕의 수입으론 지탱해나갈 도리가 없었다. 형남도 제 밥값은 해야겠는데 미술대학 중퇴의 학력으론 마땅한 일자리가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두 달을 두고 온 장안을 속속들이 뒤진 끝에 어느 극장의 광고판을 그리게 된 것은 실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극장 앞에 매어다는 넓은 간판화가 아니라, 번화한 네거리에서 가끔 보게 되는 소규모의 그림이긴 했지만, 그걸 한 달에 네 가지 장면으로 여덟 장, 단가 오천 환에 계약이 성립되었다. 대청마루가 아틀리에가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두어 평 넓이의 캔버스가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있다. 지평선까지 푸른 목장을 배경으로 미국의 카우보이와 블론드의 서부 처녀가 키스하는 장면, 그림 밑에는 베니어판의 팔레트가 너덧 장, 그 위 함부로 뒹굴고 있는 굵직한 브러시, 각색 페인트가 뒤범벅으로 녹아 마릇바닥에까지 흐르기가 일쑤다. 형남은 카우보이의 어깨에 매달린 처녀의 손가락이 신통치 않다고 느껴진다. 가는 붓을 골라 기름에 녹인다. 머릿속엔, 간판화란 첫째 선정적이어야 한다고 강의하는 극장 지배인의 두꺼운 아랫입술…… 윤주는 화로에 숯을 피우고, 숯내가 심하면 분합문을 여닫으며 공기를 조절해주는 것이었다. 상덕은 출근하지 않는 날엔, 거의 정오가 돼서야 일어나서 아침 겸 점심으로 끼니를 때우고는 기원(棋院)으로 바둑을 두러 나가는 것이 일과였다. 종일 집 안에 박혀 있는 형남은 자연 윤주와 접촉할 시간이 길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지없이 기꺼운 일이 되거나 아니면 마음에 어떤 무거운 부담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원체 숫기가 나쁜 그의 성질이 쉽사리 농을 지껄일 줄도 모를뿐더러, 윤주는 그의 손 닿을 곳에 있는 여인이 아니라고 다짐하고도 있었다. 애초에 그네를 아주머니! 하고 불렀더니, 그네는 하하하! 하고 사내애처럼 웃었고, 상덕은
“인마! 아주머니가 어딨어? 우린 그런 새가 아니니까, 미스 최로 불러!”
했다.
“아주머닌 어감이 나빠요.”
하며 윤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하는 상덕의 말에서 짐짓 오해를 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 뒤로 형남은 될수록 그네의 인칭을 부르지 않으려 했고, 또한 얼마간 그러노라니 그네와 의 얘기 때엔 아예 인칭을 빼버려도 넉넉히 통할 수 있게끔 교묘한 화술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어느덧 그들의 생활비의 대부분이 형남에게서 마련되어감은 어찌 할 수 없었지만, 형남은 형남대로 오랜 부채를 갚아나가는 듯한 가뜬한 기분에 신명이 날망정, 바둑에만 소일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상덕의 무관심을 나무라는 마음은 전혀 없었고, 또 상덕은 원래 괄괄한 호기와 오활한* 탓도 있으려니와, 친구 덕을 좀 보기로서니 뭐 그리 구애될 거리가 되느냐는 태도로 형남을 대하는 것이라든지, 윤주 또한 그네의 영역을 잘 지켜서, 가령 형남에게 속이 들여다뵐 호의를 베푸는 따위의 눈치가 없었다. 형남에겐 그런 게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그는 그들에게 공치사하려는 것 같은 태도를 보여서는 안된다고, 차라리 지나칠 만큼 델리킷한 마음씨를 잊지 않으려 했다.
공교롭게도 상덕이 실직하게 되었다. 일심중학관이 인가 취소로 폐쇄되었던 것이다. 시간당 삼백 환의 품팔이 노동자로서 그것도 언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직장이긴 했지만, 막상 그것마저 놓치고 보니까, 상덕에겐 꽤 큰 타격 이었던 모양으로
“훈장질 절대루 안한다!”
하고 여느 때의 그답지 않게 내뱉었던 것이다. 마침 새학기에 접어들어 다른 학교의 빈자리를 구하기에도 시기가 늦었지맏 상덕은 취직 운동을랑 아예 염도 안 내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서로가 오해를 사기 쉬운 계기라 할 것이었다.
“그래! 좀 쉬고 동정을 봐가며 얘기하자. 그러는 동안 일이란 제 발로 걸어오는 거야.”'
형남은 정녕 상덕을 위하는 마음에서 위로의 말을 되풀이해주었다. 상덕은 바둑이 일의 전부가 되었다. 해도 무슨 계통 있는 공부라도 시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포석개설(布石槪說)』이란 책을 사다가 며칠 뒤적거리는 척 하더니 이내 다락에 처넣어버렸다. 그날도 저녁 때가 돼서야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진짜나 바아지는 아바지로오구우나.”
걸핏 우정 꾸며댄 목소리로 알 수 있는, 가늘고 야한 목청으로 거지타령을 뽑으며 대문 안에 들어섰다. 형남은 군에 있을 때 상덕이 술이 취하면 곧잘 교향곡이나 협주곡의 테마 같은 선율을 목이 메어져라고 외치던 일이 상기되었다.
“최형! 세숫물 좀 주이소애!·…‥아 고게 흑을 쥐라 카고 또 두 점 붙이라 안하는기요. 요겟 하고 뎀비었지만 아뿔싸! 사연패라.”
경상도 사투리를 흉내내며
“이 좀 보라아애 !”
하곤 손바닥을 펴서 윤주와 형남에게 번갈아 보이는 것이었다. 흑을 잡고 여러 판을 두고 나면 돌의 질이 나빠서 손이 시커멓게 더럽혀진다는 것이었다. 딴은 손이 깨끗한 채로 돌아와본 일이 드물다. 그의 변명으론 제 급수보다 한 급 높인 데다가 한두 급 상수하고만 대전하기 때문에 지게 마련이라 하며, 또 그래야만 바둑이 는다는 것이었으나…… 그날 상덕은 몹시 술이 취했다.
“제기랄! 그 사나이 덕분에 비바람은 겨우 면하였지만…… 이따위 구멍이 빵빵 뚫어진 걸 얻다가 쓰냐 말이야. 팔아버리구 며칠 동안 실컷 때려먹음 어때? 인마! 내 생각이 어때?”
그는 안방에 벌렁 나자빠져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군대에서 흔히 겪던 상덕의 주정인지라 형남은 상대를 안할 작정으로 그저 히죽히죽 웃고만 있었다. 한데 왜 그런지 상덕의 혀 꼬부라진 주정 속에 어떤 저의가 숨어 있는 것같이만 느껴지며 은근히 불쾌해지는 것이었다.
“아서라, 아서! 미스 최가 자꾸 웃는다.”
하며 윤주에게 흘낏 웃음어린 곁눈질을 주고는
“어때요? 전에도 이렇게 야단이던가요?”
하고, 심술궂은 어린애를 달래듯 얼버무리려 했다. 윤주는 애써 눈으로 웃어 뵈려는 것이나, 입술은 여전히 야무지게 다문 채 잠시 상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네의 뾰족한 아래턱을 감싸고 도는 싸늘한 기운은 분명 상덕에의 모멸이었다. 그것이 형남에게 막연한 기대 같은 것과 기쁨을 주는 것이었다. 기쁨, 사뭇 뒤숭숭한 기쁨, 누가 알면 난처할 듯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순간적인 마취에 지나지 않았고, 상덕이
“인마! 넌 대체 낭비한단 말이야! 엊저녁에도 묘한 곳에 갔었지? 싸구려 쇠주나 몇 잔 들이켠 연후에 말이야. 그러다간 몸도 버리지만 사십만 환을 벌어봐라. 소용이 없다, 없어!”
했을 때엔 형남도 여느 때의 장단을 맞추어 우정 양미간을 좁히며
“야! 내 돈 벌면 나간다. 십만 환만 모아봐라. 당장 나가서 판잣집이라두 세운다.”
했다.
“나가려면 나가! 당장 나가라! 너 없음 굶어 비틀어질 줄 아니? 엉? 판잣집 아니라 대궐이래두 썩 나가! 허허허허!”
상덕은 눈을 약간 부라리며 목소리만 듣기에는 여간 성난 것이 아닌, 그러나 말끝을 채 맺기 전에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형남도 따라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나니 속이 시원히 트였다. 결국은 스스로를 뉘우치는 것 이며 티끌만큼이라도 상덕을 오해할 뻔한 자기를 부꾸러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돈 기만 환 벌어댄다고, 상덕을 주체스럽게 여기려는 치사한 심사가 된다면 말이 아니라고 고소(苦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 이었다. 윤주가 심리적으로 상덕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다고 의식되는 것인데, 그네가 살금살금 뒷걸음질로 형남 자기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인 것이다. 그러고는 이즈음에 와서
“미스 최!”
하고 제법 혀에 익은 말로 그네를 부르는 자신이 새삼 쑥스러워지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윤주를 부르려다 언뜻 말문이 막혀버리고 마는 일이 간혹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전처럼 그네를 미스 최로 부르기가 거북해서가 아닌 것이었다. 아침나절에 양칫물이나 세숫물을 받으러 부엌 안을 들여다볼 때의 일인데, 흉하지 않을 정도로, 하니 어찌 보면 성적인 자극을 주는 엷은 핏줄이 윤기가 지르르 흐르는 그네의 눈망울에 엉클어져 선 것을 보게 되자, 간밤에 상덕의 품에 안겼을 그네를 미리에 아니 그릴 수가 없는 것이며, 그 순간엔 윤주의 이
름이 나오다가도 막히는 것이었다.
형남이 다시 사창굴에 드나들게 된 일을 윤주의 눈망울이 그랬다고 그네에게 뒤집어씌우기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기도 하다. 군대에서도 한 달에 한차례쯤 휴가를 얻으면, 전선에서 백여 리 후방인 도읍지로 상덕과 함께 ‘배설’하러 달리던 그였기에 새삼 마음에 걸리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윤주 때문에 욕정이. 도발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상덕은 사창굴에 가지 않는다.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상덕이 부러웠다. 상덕의 말 그대로 값싼 소주 몇 잔에 소용(小勇)을 얻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창녀를 물색하고 나서, 지극히 기계적인 동작을 끝마치고, 비위가 느글느글한 자기혐오를 자꾸만 되씹으며 집으로 돌아오고 하는, 틀에 짜인 일련의 절차에 싫증이 날 대로 난 것이었다. 그런 밤이면 자학의 충동을 어쩔 수 없어 안절부절못하다가, 마침내는 선반 위에 꽂힌 원색판 화집을 꺼내어 뒤지는 것이었다. 브라끄나 루오를 보는 것이 못 견딜 괴로움이었다. 보기 싫어하는 두 눈 앞에 떨리는 손이 용서없이 현란한 원색 화면을 펴놓는 것이었다. 미술대학에 다닐 때의 야망과 제작의 의욕과 스스로가 도취되던 휘황한 이미지는 죄다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이젠 귓전을 스치는 박격포탄 소리와 전우의 단장(斷腸)의 비명, 그리고 여인의 나체와 욕지기 나는 간판화의 원색…… 모두가 뒤섞여 머릿속을 맴돌며 어지럽게 하는 것일까. 클레의 화집을 폈다. 「태양과 달」, 태양의 걷히어가는 붉은 꼬리를 달의 희고 가냘픈 손목이 꼭 붙들고 있었다. 아니, 태양이 제 몸은 가라앉으면서도 손바닥을 모아 달을 고이 떠받치고 있는 듯도 하다.
“자니?”
굵은 사내 목소리였다. 형남은 소스라쳐 화집을 덮어 방구석에 밀어놓았다. 방문이 열리고 상덕의 네모진 얼굴이 방 안의 전둥등에 반사했다. 부신 눈을 껌벅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의 딱 벌어진 어깨 너머로 그믐달이 파랗게 투명 한 유리수조 안의 물고기가 되어 헤엄치고 있었다. 상덕은 화집에 짧은 눈총을 주고,
“……너 그럴 것 없다. 그러지 말구 최형과 자란 말이야! 일주일에 한 번만 더두 말구 그러란 말야! 그쯤이 그중 건강에 좋지, 나야 이젠 싫증이 났지만 너와 보조를 안 맞출 수도 없으니 난· 토요일로 정하지, 너 일요일로 정하려무나…… 그런 데 마구 다니다간 큰 변난다.”
했다. 이를테면 윤주 공유설이다. 형남은 당황했다.
“너, 너, 그게 무슨 소리냐?”
“인마! 춘천서 교대루 놀던 일을 잊었니? 놀랠 일이 어디 있어.”
“그런 여자와 미스 최가 같단 말이냐?:’'.
형남은 공연히 목이 메었다.
“다를 게 머 있어! 생각해봐. 최형이 내 뭐란 말이야, 내가 뭐 그 애 하구 평생 살겠다든가? 난 너를 기껏 생각해서 하는 제안이다.”
하긴 상덕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풀이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치에 닿는 소리는 못된다는 얼굴로,
“그렇지만 미스 최가 들어줄 리가 있니?”
했다.
‘그게 될 말이냐?’ 하려던 것이 그처럼 비루한 질문이 되었다.
“그런 여잔데 별수 있니? 건 네가 너무 순진해서 걔를 비싸게 보는 거야…… 글쎄 내 말대루 해봐! 지금 네 요구를 거절할 까닭이 없다. 여자란 사는 본능밖엔 없는 거다.”
상덕은 추근추근 설득하는 것이었다. 상덕의 말마따나 윤주를 비싸게 보려는 자신이 의젓잖은 감상에 젖은 놈이라고도 함직했다. 상덕에게 가부를 대답하기도 전에 갑자기 눈앞에 클로즈업되는 그네의 얼굴이 숨가쁘게 함은 웬일인가 그네는 과연 나를 받아들일 것인가? 단연 거부하리라. 분에 못 이겨 내 뺨이라도 갈길 것이다. 그럼 그 순간! 내 가슴이 후련해질 것이다. 상덕의 꼴 좀 보라. 내게 침이 마르도록 권하던 상덕의 울상을 보라…… 어쩌면 나를 반길지도 모르지, 나를 싫어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망상에 지쳐버린 그의 머리는 불이 안 들이는 아궁이처럼 짙고 독한 연기가 자욱이 끼었다. 대신 육신엔 어느 일정한 대상에 향하는 것이 아닌 막연한 욕망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돌아온 일요일 밤이었다. 상덕이 농락할 대로 다 한 여인이라 생각하면 아니꼽기도 했으나, 그건 이른바 타산이었지 윤주에의 아니꼬운 느낌은 아닌 것이었다. 자정이 넘도록 상덕은 오지 않았다. 근래 흔히 기원에서 밤을 새우기에 그러려니 하는 것이나 형남에겐 예의 배려로만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는 실상 안방에 가기로 결심 한 것은 아니었다. 결심 할 필요도 없이 드디어는 그네에게 가고야 견딜 자신을 기왕에 잘 알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는 안방 문을 살며시 열었다. 어둠 속에서 윤주의 숨소리가 흡사 오랫동안 한방에서 지내온 여인
의 내음새를 뿜으며 그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전등을 켰다. 그네의 얼굴은 잠깐 어렴풋한 웃음을 짓더니 눈시울을 열었다. 호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뻣뻣이 서 있는 형남의 충혈된 눈에 부딪치자,
“옥! 나가세요!”
하고 온몸을 뒤흔들며 말했다.
“나가라면 강제로 나오겠죠? 안돼요 안돼! 당신이 폭력으로 나설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난 잘 알아요.”
윤주의 낯에 핏기가 가셨다. 형남은 싸늘해지는 제 체온을 알았다.
“미스 최! 난 미스 최가 그리 말할 줄 알고 있었어!”
그는 잔등에 오한을 느꼈다. 기뻤다. 그건 아찔한 도취 같은 것이었다.
‘난 최가 좋아!’ 이렇게 목청 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럼 왜?”
윤주가 물었다.
“……”
“하여튼 난 그이에게(상덕에게) 말하겠어요. 이젠 당신과 그이 우정을 난 믿지 못하겠어요. 나중엔 어찌되든 난 그이한테 고백할 권리가 있어요…… 돌아가세요!”
그네는 늙고 쉰 목소리를 질렀다. 그는 시선을 윤주에게 매어둔 채 뒤로 물러섰다. 전등을 끄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상덕에게 이겼다!”
이렇게 자꾸만 중얼거리면서 뜰아랫방으로 물러가는 것이었다. 윤주가 귀여워졌다. 윤주의 존재가 더욱 움직일 수 없는 어떤 질량감으로 가슴 한복판에 자리잡게 된 것이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튿날 상덕이, 대체 일이 그 후 어찌 됐느냐는 기색을 통째 드러내 뵈며 바삐 돌아왔다. 윤주는 대뜸 상덕을 안방으로 청하였다. 간밤의 사건을 고해바칠 것이 빤하다. 한데
“형남아! 이리 좀 와!”
하고 상덕의 우악스런 목소리가 울려왔다. 형남이 안방에 들어가니 뜻밖에 그를 맞이하는 윤주의 눈초리엔 애원의 빛이 서렸다. 상덕은 거친 숨결로
“……그러니 맘대루 해! 형남은 나나 똑같단 말이야. 형남이를 모욕했다면 그건 바로 날 그렇게 한 거야. 최형이 그걸 충분히 이해한다면 그따위 케케묵은 관념으루 집안을 칼칼찮게 만들 게 뭐냐 말이야! 엉?”
상덕은 고개를 숙이고 표정을 숨기려는 윤주에게 퍼붓고 있었다. 부릅뜬 그의 눈은 잔인한 기쁨에 타오르고 있었다.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면서도 벌름벌름하는 코끝이, 그네가 형남을 물리치고 그에게 곧 호소한 사실에의 만족과 어떤 우월감을 감추지는 못하였다.
‘상덕아! 너 미리 이렇게 될 줄 알고 그랬구나!’
그러나 이 말을 한번 토해놓는 날엔 모든 일이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치워라! 내 잘못이었다.”
형남은 간신히 말했다. 상덕의 그 허심한 웃음과 험상궂은 말솜씨로 위장된 마음엔 누구보다도 소심하며 항시 자질구레한 근심이 눌어붙어 있는 것이리라, 이렇게 생각하며, 어쩐지 상덕이 가엾어지는 것이었다. 윤주는 종시 입을 다물었다. 상덕에게서, 그네가 만일 명남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할 의사라면 이 집을 나가라는 협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상덕아! 제발 치워라. 미스 최에게 그렇게 할 성질이 아냐. 아무 일두 없었던 것으로 씻어버려! 그저 내 실수지…….”
형남은 아마도 윤주가 상덕에게 정이 떨어졌을 것이라 미루어졌다. 그 자신과 윤주가 함께 샹덕과 맞서고 있으며, 서로가 공동의 피해자로 생각되는 것이었다. 그 뒤, 형남은 윤주의 변화를 참을성 많은 사냥꾼처럼 끈기있게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전 그대로의 윤주였다. 어쩌면 상덕한테서 받은 굴욕과 그네가 형남에게 준 그것과를 서로 상쇄해서 감정의 밸런스를 얻은 것인지도 몰랐다. 이왕 집을 나서지 못할 바에야 꺼림칙한 낯을 보이는 게 오히려 자신의 상처를 긁는 일이라는 생각이리라. 형남은 그런 윤주가 측은하며 더욱 끌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 여자나 쉽사리 흉내낼 수 있는 재주가 아닌 것이었다. 빈틈없는 계산이라 하기보다는 천성이 영리한 탓인 것이었다.
상덕은 게으름이 한층 더해진 성싶다. 햇살이 대청마루 구석에까지 퍼지고, 그리다 만 캔버스에 미칠 즈음에야 거무스레하게 부은 얼굴로, 엉클어진 머리를 득득 굵으며 건넌방에서 나오는 것이다. 윤주는 구멍 탄 위에 올려둔 세숫대야에 찬물을 타서 마루에 놓아준다. 그네의 써비스는 하루이틀 된 일이 아니었기 수상할 것도 없었지만, 형남은 그날따라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그네의 뒤걷이가 당연하다는 양, 한층 요란스럽게 부르르! 소리를 내어 마구 물방울을 사방에 튀겨가며, 여드름자국 투성이의 뒷목을 손등으로 비벼대는 꼴이 사뭇
비위에 거슬렸다. 최형은 내 ,물건이란 말이야, 이제 똑똑히 알았지? 하며 고소롬하게 웃는 것만 같은 것이다. 그는 상덕이 사내답지 않게 치사하다고 느껴지는 것이었다. 일주일이면 으레 한두 차례 용돈을 달라고
“인마! 이백 환 채워서 천 환 내!”
하고 형남의 호주머니를 뒤지던 일은 영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바둑을 두러 나가는 데도 담배 한 갑만 집어넣고는 성큼 나서는데,
“그쯤 다니니까 입장료구 뭐구 공짜거든. 따지구 보면 니 거기 쏟아놓은 돈만두 집 한 채 족히 되겠다.”
목청을 돋우는 것이었으나 형남에겐 서투른 허세로만 보이는 것이었다. 이때껏 몰랐던 상덕에의 쓰디쓴 혐오와 한편 안쓰러운 동정이 한데 섞갈린 뭉클한 심정인 것이었다. 그달 급료를 받자, 형남은 만 환 뭉치 하나만을 그림의 재료값으로 남기고 나머지를 통틀어 한 달의 경비라 하여 상덕 앞에 내놓았다. 그건 그 안에서 상덕의 용돈도 적당히 마련해보라는 의도가 품어져 있었다.
“날 주면 어떡해?”
상덕은 돈뭉치를 마땅치 않게 노려보는 것이었다. 이때껏 쌀이 떨어졌다, 나무가 모자란다, 하고 윤주가 그시그시 상덕에게 알리면 그는 어쩔 수 없이 형남에게 전하곤 하는데, 형남은 마침 수중에 돈이 있으니 제가 낸다는 양으로 해서 상덕에게 주었던 것이다.
“최형 한테 주면 되잖아!”
“상덕아! 갑자기 왜 그러니? 무슨 오해라도 있는 것 같구나.”
“오해? 오해가 어딨어? 생각해봐, 네가 번 돈이 빤한데 구태여 내 손을 거칠 게 없잖아? 도리어 이상하지 않냐 말이야.” ¨
“지금까지 그럼 네가 받은 일은 뭐야?”
“인마! 내 언제 최형을 내 와이프로 여겼더냐? 그랬음 내가 너한테 그랬겠냐 말이야. 거야 지금까지 습성으로 그리 됐지만 이젠 뭘 그리 복잡하게 할 까닭이 없지 않니?”
상덕의 이 말에 형남은 울화가 치밀었다. 항변의 말이 마구 쏟아져 나올 것 같았으나 막상 무슨 대꾸가 그중 적합한지 망설여지며 필경은
“……그래? 그럼 좋다!”
하고 잘라버렸다. 상덕이 밉기도 했지만 그보다 오히려 까닭 모를 슬픔이 몰려드는 것이었다. 문득 대체 뭣이 아쉬워서 밤이면 허리가 뻐근하도록 간판장이 노동을 견디어가며 상덕과 윤주를 부양하는가, 아니 그것은 고사하고 지난 일을 생각해서 달갑게 치른다 하자, 하나 이처럼 착잡한 갈등에 언제나 구질하게 살아야 할 의무란 도시 없지 않으냐고 생각되는 것이다. 윤주에의 애정이 자기를 얽매어두고 있는가? 그는 해답을 바랄 수 없는 반문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는 상덕이 말한 대로 돈뭉치를 윤주 앞에 내놓았다.
“이걸루 이달은 어떻게 꾸려봐요…… 그리고 상덕의 용돈도 이 안에서 뽑아봐요.”
하고 그네의 동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네는 시무룩해서 돈을 싼 헌 신문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삼면 기사인 듯 자극적인 표제가 보였다.
“상덕에게 주려고 했는데, 마침 생각난 김에 이렇게 하니 달리 마음을 쓰진 말구…….”
그는 실상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꼭 마음에 없는 소리를 너저분하게 지껄이는 그런 꺼림칙한 느낌인 것이다.
“……공연한 자선이 아니었다는 걸, 그리구 지금도 아니라는 걸 내게 똑똑히 알으켜주시는 거죠?”
그네는 또박또박 떼어가며 말했다.
“미스 최! 그런 당치도 않은!”
“그만두세요. 이 돈이 말하자면 날 사겠다는 표시죠? 적어도 이 돈의 삼분지 일의 금액으로, 아니에요?”
그네는 비로소 눈을 치뜨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왔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업신여기면 못써! 미스 최, 나를 오해하고 또 자신을 욕되게 하구.”
“당신에겐 부당하게 비싼 흥정 인지도 모르고 어쩜, 너무 싼지도 모르죠. (그때 미스 최! 하고 형남이 질렀으나)…… 난 지금의 나를 나 이상으로 착각하진 않아요…… 당신의 흥정에 응하겠어요. 돈은 내가 받아두지요. 나로서는 비싸고 싸고 따질 여유가 있나요? 건 당신이 잘 아시겠지만……”
그네는 입술을 비틀며 억지웃음을 짜냈다.
“최! 난 최를 사랑하고 있다!”
“……”
“벌써부터 말하려 했다!”
“아무도 날 사랑하진 않았어요. 그리구 지금도.”
“난 나는!”
“그만둬요, 사랑은 영화 속에나 있는 거예요. 상덕씨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오해했던 내 꼴을 보셨겠죠?”
“최같이 젊은 여자가 왜 늙은이 소릴 해!”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구요? 호호호! 그런다는 데야 낸들 어떻게 못하지요. 하여튼 난 당신의 요구를 받을 테니까요.”
“최는 그럼 상덕을 아직도 사랑하는가?”
“흐…… 질투는 마시기를…… 난 두 분 다 사…… 랑……하……지……않죠!”
발작을 일으키듯 웃었다. 형남의 얼굴이 검붉어졌다.
“으음! 그…… 래.”
짤막한 신음소리만 토했다. 애정의 폭발적인 고백을 무참히 짓밟고 무안해하기는커녕 그를 비웃는 그네에게 치솟는 분노를 겨우 참아냈다. 마구 대들어 그네의 머리채를 틀어잡고 갈기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흥! 그래? 흥정이 다 됐다구? 좋아! 이젠 아주 간단하게 됐군. 현금 거래란 말이지? 그럼 나두 주판을 잘 놔야겠는걸.”
그는 인중머리를 꿈틀거리며 표독스럽게 빈정대는 것이었다.
형남은 상덕의 외박을 기다렸다. 아니, 빈틈없이 겨누며 노리고 있었다. 윤주에의 욕망이라기보다, 그네를 짓밟지 않고서는 자기가 사내자식이랄 수 없이 지지리도 못난 놈이 된다는, 말하자면 열등의식에의 그악스런 반발이라고 할까, 무슨 일이 있든지 해치워야 된다. 그럴 수밖엔 없는 아슬아슬한 절정에 놓여 있는 듯한 강박의식에 억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 마음 한구석엔 현금의 흥정에 응하겠다던 그네의 말을 그냥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그러니까 윤주의 심리를 캐고 든다면 그때까지 상덕에게 다소라도 애정을 느끼고 있던 그네가 이번엔 상덕에게 앙갚음으로 해서 형남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두 사내에게, 더구나 친구끼리인 두 사내에게 그네는 몸을 맡김으로써 상덕에게 소위 애정의 복수를, 형남에겐 돈에의 보복을 일거양득으로 일삼을 수 있는 것이라면, 미묘한 삼파전에서 본전마저 떼이고 나가자빠지게 될 사람은 바로 형남이 자신임을 쉽사리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사적인 태도라는 미명 아래 아예 윤주에의 무관심으로 끝내 견디어볼까? 예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윤주의 얇고 긴 입술이 떠오르며 그 입에서 어쩜 내 몸이 너무 비싼지도 모르죠! 하는 독기를 뿜는 듯한 말이 귀를 쑤시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새 또 다시 아슬아슬한 절정에 놓인 자신을 의식하며, 윤주를 정복함이 마치 절박한 의무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자신에 가장 충실한 행동일 수 있다고 수긍케 되는 것이다. 하나 형남은 내심 쓰디쓰게 웃었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온갖 그럴싸한 천착이, 또한 요리조리 재주를 부리며 뚫어진 구멍을 꿰매어가는 바느질의 논리가, ‘윤주와 자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욕심에다 대면 얼마나 공허하고 무력한 것인가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자신에게 웃는 것이었다. 기회는 뜻밖에 일찍 돌아왔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의 창녀로 다루어주자던 결심은 윤주의 몸을 껴안자,
“난 최를 돈으로 사는 게 아냐!”
“난 최가 좋다!”
이렇게 중얼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네는 물이 흠뻑 밴 육중한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네가 생리적인 흥분에 허덕일 것을 집요하게 바랐다. 그러나 그는 인형에의 자독* 행위와 다름없는 꺼림칙한 뒷맛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모욕이었다. 아무런 갚을 길이 없는 모욕이었다.
며칠 후, 상기 싸늘한 냉기가 목덜미를 감도는 이른 봄의 오후였다. 상덕은 기원에 가고 없었다. 형남은 제 방에서 영화의 프로를 읽다가 시장기를 느꼈다. 안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윤주를 깨울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이제껏 그렇게까지 시켜본 일이 없었기, 한동안 머믓거렸다. 두드려 깨워서 부려먹어라! 네겐 그 권리가 있지 않느냐! 하고 마음속에서 고개를 세우는 ‘소악마(小惡魔)’를 타이르고 있었다. 툇마루에 나와 기지개를 켜보았다. 남향인 안방 영창엔 밝은 햇빛이 보송보송 핀 햇솜처럼 보드랍게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그날 밤의 윤주의 지체(肢體)를 그렸다. 어쩐지 그네의 시큼한 체취마저 풍겨오는 듯하였다. 자줏빛 바탕에 노란 국화가 피어 있는 이불은 그네의 젖가슴을 겨우 가리고나 있을는지? 그의 공상은 그네의 몸을 구석구석 더듬기 시작했다. 이윽고 가운뎃발가락이 그중 긴 그네의 발에서 맹랑한 애무가 멈추자, 채 얼굴도 버젓이 못 들던 예의 ‘소악마’가 턱을 불쑥 내밀며 쾌활하게 웃어대는 것이다. 그는 사뭇 득세한 듯한 취기로부터'
“내 최를 어려워할 게 뭐냐 말이다. 밥상을 차리게 해야지.”
시장기에 따르는 가벼운 조바심과 함께 뇌어지는 것이었다.
“여봐! 미스 최! 점심 차려요.”
그는 안방 문을 요란하게 열었다: 애들이 만세라도 부르는 모양으로 머리 위에 양팔을 뻗치고 검은 겨드랑이를 내놓고 있던 윤주는 왜 그러느냐고 눈으론 물으면서 입 언저리엔 냉소를 담는 것이었다.
“대담하신데요. 웬일이세요? 미스터 김 답잖은 명령인데요.”
형남은 그네에게 패해서는 아니될 시간임 을 깨달았다.
“여지껏 내가 최한테 명령조로 나오지 못한 건, 행동의 타성이란 거야. 오늘부터 난 좀더 떳떳하고 어엿해야겠어!”
그는 배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러나 그네는 손바닥을 모아 뒷머리를 떠받치고 픽 웃었다.
“떳떳하게요? 내 몸이 당신 맘대루 된다구 해서, 낡아빠진 자기 아내를 다루듯 하시는 건 어리석은 일예요. 왜 이쯤 못 나와요, 내 돈에 의지하는 여자니까 의당 맘대루 시켜먹겠다구. 그게 차라리 솔직하잖아요?”
형남은 윤주의 태도에서 흡사 어떤 의젓한 긍지나 당당한 자세에서 간혹 받을 수 있는 그런 벅찬 감동에 휩쓸려드는 것이었다. 그네의 귓바퀴에 보야니 돋은 솜털이 그로 하여금 그네를 정녕 미워할 수없게 하는 것일까…… 형남은,
“아니 머 내가 최를 아내로 아는 줄 알어? 아내라면 낡았건 말았건 정이야 있겠지만, 난 그런 게 아냐, 오해하면 난처한데. 최 말대루 난 돈으로 샀기 때문에 점심쯤 시키는 거야.”
하고 손으로 턱 아래를 문질렀다.
“……그래요? 그럼 됐군요, 일 이 제대로 됐군요.”
윤주는 말을 끊었다가,
“허지만 나 보기엔 그런 거 같지 않거든요. 그 한계를 분명히 해주세요. 거야 난 여자니까 집안 살림을 맡는 것은 하는 수 없지만 너무 그렇게 위압적으로 나오시진 마세요. 내가 먹는 대가로는 밤의 몇 시간이면 충분할 텐데요. 그래두 싼가요?”
하고 빤히 쳐다보았다. 형남은 대꾸를 못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비·. 그걸 감추려고 애쓸수록 자꾸만 이지러져가는 자기의 표정이 보이며 윤주 앞에 배겨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윤주가 상덕에게, 형남이 안방에 침입했노라 얘기하진 않았었다. 대신 형남이 자신이 말했다.
“머? 그래, 그거 잘됐군! 그럼 그래야지, 사내대장부가!”
상덕은 형남이 기대했던 바와 같은 불쾌한 얼굴은 도무지 아니었다. 도리어 진심으로 일의 성공을 기뻐하는 눈치인 것이었다. 그때 윤주가 고해바친 자리에서 그네를 나무라면서도 딴판 숨길 수 없던 잔인한 만족감에 이글거리던 얼굴이 꼭 형남의 착각으로 의심되리만큼 활달한 태도인 것이었다. 뿐더러 그것이 그 자리만의 연극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상덕은 그 후로 눈에 선하도록 원래의 괄괄한 호기를 거침없이 뿌리는 것이며, 너와 나는 한 여자를 의좋게 나누고 있는 말할 수 없이 다정한 친구지 뭐냐는 듯 만사에 도도해진 것이었다. 형남의 머리는 혼란하였다. 도시 어찌되어가는 판국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거야 따지고 보면 그에겐 아무 소득이 없는 생활임에 틀림은 없었다. 그런데도 거기서 벗어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영 지쳐버린 소달구지처럼 덜그럭덜그럭 굴러가는 것은, 그저 윤주에 대한 미련이나 애착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가슴팍을 파헤쳐보면 물론 윤주에의 애착도 없지 않지만 또한 항시 혐오감을 갖게 하는 상덕에게서도 섣불리 도려내버릴 수 없는 어떤 집착을 느끼는 것은 웬일인가. 한마디로 그 기괴한 살림의 얄궂은 매력에 끌려
가는 것이라 할까. ‘음산한 흡족’이란 말이 있을 수 있다면 바로 그 같은 상태로 그날그날을 보내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런 음산한 흡족이란 형남의 심정은, 윤주가 갈수록 말이 적어지며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메마른 표정에 짐짓 무엇엔가에 항상 원한을, 품은 듯한 서슬이 번득이게 된 것으로 해서 형남이 그네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또 그에 못지않게 징그러운 쾌감이 서로 얽힌 착잡한 심정 바로 그것에 다름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윤주의 변화는 무엇인가. 상덕의 다변(多辯)과 윤주의 과묵이 서로 반비례하는 관계에 있다면, 마땅히 질투와 분개를 나타내야 했을 상덕에게 노여워하는 것일까. 형남은 부인했다. 부인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윤주가 아직도 상덕을 사랑하고 있다는 반증을 시인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안되는 것이다. 그건 싫었다. 그럼 그네는 ˙바야흐로 스스로에 절망을 느끼는 것일까. 입으로는 가장 냉철한 에고이스트이며 감상이란 어느 구석에서도 찾을 수 없는 현실주의자인 체하지만 실상은 그네도 별수없이 평범한 하나의 젊은 여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형남은 윤주에게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문득 윤주를 우선 이 사람답지 않은 생활에서 벗어나게 할 것을 생각하였다. 차근차근하게 그 방도를 궁리하기 전에 왜 이제껏 그런 아이디어를 얻지 못했는가고, 무척 즐거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뉘우치는 것이었다. 그네에게 직장을 얻어주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형남의 뇌리엔 이 집이 아닌 어디 조그마한 셋방에서 그와 윤주가 밥상을 끼고 웃어대는 광경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결국 소원은 그것인 것이다. 그런 꿈의 실현이 전혀 가망이 없는 일임을 깨닫자, 역시 지금의 이 상태 그대로 지탱해갈 다른 아무런 도리가 없음을 체념하는 것이었다. 지난해도 그랬지만 올해도 봄은 짧았다. 어느새 서울은 여름에 접어들어 거리엔 가시각색의 파라솔이 빌딩 그늘 밑에 날로 늘어갔다. 산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에 토실토실하게 살찐 버섯들이 한창일 것이다. 하루는 윤주가 사내들의 밤의 예방을 삼가달라고 했다.
“그렇게 꼬박꼬박 어김없는 순서로 저를 찾아주시는 일이, 말하자면 내 밥줄이 아직두 끊어지지 않았다는 증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꾀병은 아니거든요.”
윤주는 좀 겸연쩍어하는 사내들을 번갈아 보고는
“호……”
나직이 웃었다. 형남은 그네의 임신을 생각했다. 전에도 그네가 멘스일 때는 미리 알리곤 했기에 별일이 아니었지만 왜 그런지 이번에 꼭 임신 때문일 거라고 믿어지는 것이다. 애를 뱄느냐는 상덕의 물음에
“아뇨, 그럼 어쩌죠.”
“참, 그걸 전혀 예비 안했었군그래! 아우! (형남에게) 도리없는 일 아닌가. 만일 임신했다면 도리 없지 않은가.”
상덕은 그래도 아무 대답이 없는 형남을 한참 바라보다가,
“……자, 그럼 우리 지금부터 박씨…… 아차, 실수군, 좌우간에 모모씨의 가족회의를 열겠소이다. 불초 소관이 사회를 맡겠습니다. 에! (이때 형남이, 관뒷! 했지만) 안건은 가독상속권(家督相續權)을 가지구, 그러니까 앞으로 최형께서 만일 소아(小兒)를 낳게 되면 그 애를 상속인으로 할 거야 분명한 일인데……”
상덕은 몸을 옴츠리고 신파조로 말했다. 형남은,
“농이 아냐! 너도 계획이 있겠지, 새삼 무슨 수작이야!”
낙태를 생각하며 말했다. 그러나 상덕은,
“지금 상속인은 필요없다는 제안이 나왔습니다.”
턱을 앞세우며 목을 길게 뽑았다. 윤주가 벌떡 일어섰다. 상덕을 노려보는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자, 돌아서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 어! 최형이 우네, 최형이 다 우네!”
상덕은 그래도 빈정대는 말투를 고치지 않았다. 그때처럼 형남은 상덕에게 참을 수 없는 노여움을 가진 일이 없다.
“미스 최! 울지 마, 애 배기 전에 나가란 말이야, 이 집에서 나가란 말이야, 어디로라도 가야 돼, 왜 못해? 예보담 못할 곳이 어딨어? 차라리 종삼으로 가는 게 낫지그래, 애 배기 전에 가란 말야, 미련이 있는가? 무슨 미련이야, 미련이 뭣이 있단 말이야, 었긴 뭣이 있어!”
그는 상덕의 존재를 잊고 그네에게 발끈 성을 냈다.
“알았어요, 알았어! 당신이 안 그래도 알았어! 그런 충고는 안 받아요!”
윤주의 울음은 서러워해서나 분에 못 이겨 터뜨린 것이 아니었다. 설사 그랬다 해도 우는 동안에, 가슴속이 흰히 트이는 성싶은, 뭣인지 자신에 게 타이르는 듯한 그런 울음으로 느껴졌다.
“알았지? 알았지?”
형남의 목소리는 분명 윤주의 이마에 부딪혔다간 그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며, 또한 자신을 채찍질하는 예리한 파열음으로 착각되는 것이었다. 윤주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저녁을 지으려는 모양이었다.
형남과 상덕은 서로 서먹서먹한 기분에 담배만 연방 피우고 있었다. 안방에서 마루로 자리를 옮겼다. 벽의 캔버스엔 쌍권총을 든 털보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부엌에서 저녁을 차리던 윤주가 마당에 튀어나오더니,
“그게 정 말예요. 이 안에 애기가 들었어요.”
했다.
“허어!”
사내들은 일제히 들뜬 소리를 질렀다.
“그래…… 뭣이 어디 들었다구? 어디 어디!”
한데 상덕은 그네의 아랫배 근처를 겨누어, 권투하는 시늉으로 마구 헛주먹질을 하는 것이다.
“꼭 당신의 애인 것 같군요!”
윤주는 하늘을 보며 비꼬아 말했다. 주먹질을 멈추고 그네를 치켜본 상덕의 얼굴엔 어리석은 듯한 눈웃음이 상기 가시지 않았는데, 이어 그네가,
“당신의 애처럼 귀여워진 거예요?”
했을 땐, 그의 얼굴이 진흙빛으로 달라지며 두 볼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내 애가 아니라군 어떻게 아는 거야! 웅?”
“당신의 애두 누구의 애도 아니에요!”
“그럼?”
“내 거죠!”
“바보 같은 소리 작작 해! 애비가 누구냐 그 말야.”
“……길가에서 많이 보시죠. 내외 사이에 요만한 애가 대롱대롱 매달려 가는 광경을 보셨죠? 남자 둘이 애의 손목을 하나씩 붙잡으면 난 어딜 잡으란 말예요, 다리를 떠메코 가나요?”
“내가 애도 못 날 놈인 줄 알아!”
“누가 그렇대요, 참!” :
“그럼! 무슨 소리야?”
“모르시겠어요?”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형남은,
“소용없는 말다툼이 이제 와서 무슨 도움이 돼! 해결이나 서둘러야지.”
했다.
“낳게 해!”
단호하게 상덕이 말했다.
“낳다니?”
“누굴 닮었는가 두구 보잔 말야!”
하는 상덕의 말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윤주가 나섰다.
“낳아라 낳지 말라가 다 뭐예요. 내 맘대로야, 왜 참견인지 모르겠네!”
“어림없지, 최형 맘대루 하는 건 낳는 것뿐이지.”
“무슨 뜻이죠? 공갈인가요?”
윤주는 불그레한 잇몸까지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상덕아! 최의 일도 생각해야지, 애를 낳아서 어쩌자는 거야?”
형남은 그네를 곁눈으로 보며 말했다. 그네는,
“……아아주! 애를 뗄 돈은 내게 있다는 얼굴이군요. 호……”
하며 허리를 앞으로 꺾고 웃었다.
“그럼 대체 어떡허겠다는 거야?”
형남은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낳죠!”
그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미쳤군!”
형남이 중얼댔다. 별안간 상덕이 주먹을 불끈 틀어쥐더니 무릎을 탁 내리치며,
“나를 꼭 닮았을 거야, 어허! 허……”
미친 듯이 웃어대는 것이었다.
“모두가 미쳤군!”
형남이 다시 입술을 놀렸다.
마당을 가로막는 앞집의 기와지붕이 저녁놀의 역광을 받아 번질번질한 남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난 나가야겠어요. 애는 아직 꿈틀거리진 않아요. 허지만 뭣이 꽉 차 있는 것 같아요. 그것까지도 당신네 장난감으로 맡겨둘 순 도저히 없어요. 상덕씨! 뭐 그렇게 좋아하실 건 없는데요. 당신의 원대로 하겠다는 건 아니거든요. 당신에겐 아무 권리도 없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윤주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낱말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떼어놓는 그런 말이었다. 아비가 뉜지 알지도 못하고, 아니 알려 하지도 않고 나간단 말인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하고 형남은 그네를 힐난하고 싶은 충동이 북받쳐올랐으나,
“내 것이란 생각뿐이에요. 거야 틀림없이 두 분 중에 한 분이 애 아버지겠죠. 허지만 그건 두 분이 다 애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확실한 건 내 거란 것뿐이거든요. 당신들엔 아무 권리가 없어요.”
하는 윤주의 어감 속에는 상식이나 혼리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무서운 집념이 도사려앉은 것을 느끼며 힘없이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최형! 그럼 시방 당장 나갈 수 있다, 그 말이지?”
상덕이 허리춤에 손을 넣고 앞가슴을 펐다.
“그러잖아도 나가요!”
“미스 최! 잘 생각해봐! 무턱대고 덤비지 말구.”
형남은 이젠 웬일인지 눈앞에 벌어지는 사태에 흐믓한 충족감을 스스로 즐기며 말했다. 그네는 온갖 일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워진다! 밤이 다 됐다!”
상덕이 그네의 뒷모습에 덮어씌우듯 소리쳤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그런 윤주의 침묵은 형남으로 하여금, 미구에 그네와 헤어질 애처로움을 도리어 사무치게 하였다. 형남은 그때까지도 끝내 저버릴 수 없었던 한 오라기의 낙관이, 설마 그렇게까지 나설 수야 없겠지 하는 자위가 이젠 산산이 부서져버리는 것을 깨달았다. 윤주는 바보다. 천치다. 애를 밴 채 어딜 나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애를 낳고 싶단 말이냐? 그럼 낳으라지, 이 집에서 낳으라지, 내가 아비노릇 하지, 난 그렇게 할 수가 있다. 윤주가 낳는 애의 아비 노릇을 하지, 아니 어쩜 정말 내 앤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상덕보다도 윤주를 사랑하고 있는 그만큼 내 에일 수가 있을지도 모르지. 정말 내 앤지도 모르지…… 마룻바닥에 한 손을 짚은 채 형남은 고개를 푹 숙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대청 천장엔 전등이 켜졌다. 윤주가 흰 블라우스에 곤색 플레어*를 입고 안방에서 나왔다. 손에는 예의 보스턴백을 들고 있었다.
“저녁이나 차려드리고 작별하려고 했지만 무정도 해라…… 호호호 당장 나가라는 걸 할 수 없죠, 뭐.”
윤주는 우정 노여움을 탄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구두끈을 매고 난 그네는 앙코르에 답례하는 발레리나의 시늉으로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며 머리를 꾸벅 하더니 돌아서버리는 것이었다.
“애비 없는 앨 어쩔라구 그러지?”
상덕이 이지러진 얼굴로 말했다.
“죽이든 살리든 내 맘대로 하니까요!”
두어 발짝 거닐다가 돌아서며 윤주는 쏘아붙였다.
“미스 최! 이봐.”
형남이 다급히 말문을 열려는데,
“그만두세요. 애 아버지가 분명 했던들 난 하자는 대로 했을지 몰라요…… 모르시겠어요? 두 분 다 아버진 아니에요. 아시겠어요…… 굿바이! 신사 여러분들이여!”
그러고는 덥석덥석 사내걸음으로 걷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거기까지의 동작이 너무도 멋들어진 호흡이어서 중간에 형남이 가로지를 여유를 주지 않았다. ‘굿바이! 신사 여러분들이여!’ 하는 그네의 쾌활한 익살에서 형남은 뜨거운 울음 같은 것이 목청에 치솟았다. 삐이걱! 대문을 여닫는 소리가 났다.
“제기랄! 잘됐다! 잘됐어!”
이렇게 내뱉는 상덕의 말이 형남에겐 무슨 짐승의 울음소리로 들렸다.
“미스 최! 최! 미스 최!”
형남은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맨발로 뛰어내리자 그대로 대문간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었다.
『현대문학』 23호(1956. 11); 『암사지도』 (민음사 1996)
서 기 원
서기원(徐基源)은 193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상대를 중퇴했다. 1956년부터 기자 생활을 시작해 『서울신문』 사장, 한국방송공사(KBS) 사장 등을 지냈다. 1956년 『현대문학』 에 단편 「안락사론」과 「암사지도」가 발표되어 등단했다. 대표작 「암사지도」는 6·25전쟁 후 지식인 청년들이 겪은 회의와 절망을 그린 작품이다. 초기에는 주로 전쟁 체험을 다투다가 차츰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정치권력을 풍자하는 역사소설을 썼다. 대표작으로 「이 성숙한 밤의 포옹」 『마록열전』 『혁명』 『징비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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