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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히브리서 제 9 강 ‘커넥터(connector)’
히브리서 8장 1-13절
1-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3-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4-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5-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6-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7-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9-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10-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12-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1-The point of what we are saying is this: We do have such a high priest, who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the Majesty in heaven,
2-and who serves in the sanctuary, the true tabernacle set up by the Lord, not by man.
3-Every high priest is appointed to offer both gifts and sacrifices, and so it was necessary for this one also to have something to offer.
4-If he were on earth, he would not be a priest, for there are already men who offer the gifts prescribed by the law.
5-They serve at a sanctuary that is a copy and shadow of what is in heaven. This is why Moses was warned when he was about to build the tabernacle: "See to it that you make everything according to the pattern shown you on the mountain."
6-But the ministry Jesus has received is as superior to theirs as the covenant of which he is mediator is superior to the old one, and it is founded on better promises.
7-For if there had been nothing wrong with that first covenant, no place would have been sought for another.
8-But God found fault with the people and said: "The time is coming, declares the Lord, when I will make a new covenant with the house of Israel and with the house of Judah.
9-It will not be like the covenant I made with their forefathers when I took them by the hand to lead them out of Egypt, because they did not remain faithful to my covenant, and I turned away from them, declares the Lord.
10-This is the covenant I will make with the house of Israel after that time, declares the Lord. I will put my laws in their minds and write them on their hearts.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people.
11-No longer will a man teach his neighbor, or a man his brother, saying, 'Know the Lord,' because they will all know me, from the least of them to the greatest.
12-For I will forgive their wickedness and will remember their sins no more."
13-By calling this covenant "new," he has made the first one obsolete; and what is obsolete and aging will soon disappear.
Point: 예수님은 우리를 참 생명으로 연결(connect)해 주십니다.
Introduction: ‘I love me’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그런 뜻입니다. 이 말은 ‘자기 것만 챙기는 이기심’의 의미보다는, ‘높은 자존감,’ 즉,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자애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기심하면 네거티브의 의미가 있지만, 자애심은 긍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아가 건강하지 못하면, 자기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면, 자기 파괴적인 상황으로 가기 쉽습니다. 자아가 건강해야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이래야 삶이 복된 것이 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형상으로써 자신을 보면,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고, 때로는 파괴적 방향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 이것은 믿음의 영역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하나님 말씀에 뿌리내리지 않으면 자기를 미워합니다. 자기를 함부로 대합니다. 자학합니다. 죄가 우리 안에서 날뛰는 역사하는거지요. 하나님을 통해 나를 보지 못하니까, 죄에 끌려다니는 자신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이것은 굉장히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자신을 진
정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남도 소중히 여깁니다. 나를 하나님의 복된 형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남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자,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중보자’되시는 예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봅니다. 커넥터(connector)로서의 예수님이지요. 예수는 파괴의 현장과 생명의 현장을 연결시킵니다. 미움의 현장을 사랑의 현장과 연결시킵니다. 죄의 현장을 은혜의 현장과 연결시킵니다. 그래서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바뀌어 자기를 사랑됩니다. 자기를 파괴하던 사람이 생명을 창조해 나갑니다. 죄로 형상을 빚어가는 사람이, 은혜로, 믿음으로 자신을 만들어 갑니다. 그 사명이 바로 예수의 사명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Point 1: 커넥터(connector)
자, 본문 1-2절을 보세요.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요점’을 강조합니다. 자신이 말하는 내용의 요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Point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제사장,' 특별히 '하늘의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늘 대제사장의 존재가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는 것의 요점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인생에 대한 simple한 요약을 합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창조된 형상이고, 하나님의 복된 세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열이 생겼습니다. 이탈이 생기고 도피가 생기고, 어색함이 생겼습니다. 죄의 영역이 생겨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영역과 땅의 영역이 나누어져 버렸습니다. 사람이 은혜의 영역, 축복의 영역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낙원을 잃어버렸습니다. ‘실낙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하늘의 보좌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있고 파괴하고 또 죄를 즐기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인생에게 성소를 주시고, 장막을 주시고, 또한 아들을 대제사장이 되게 하십니다. 2절 후반부를 보세요.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여기에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보입니다.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장소가 있습니다. 사람의 죄가 해결되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 2절에 보면, ‘성소’가 나오고, 성막이 나옵니다. ‘참 성막’이 나옵니다. Sanctuary, true tabernacle! 이곳에서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고, 인간의 죄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구약 열왕기상에 보면, 솔로몬의 왕 즉위 상황이 나옵니다. 다윗 말기입니다. 다윗이 쇠약하여 그의 왕권도 굉장히 약화된 모습으로 나옵니다. 여기에 아도니야라는 아들이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다윗왕의 재가나 선언 없이, 자기를 왕으로 공포합니다. 여기에 제사장 아비아달과 요압장군이 가세하여 아도니야의 왕옹립을 주도합니다. 이때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가 다윗을 찾아갑니다. 왜 솔로몬을 왕으로 삼기로 약속해놓고, 아도니야의 행동을 가만두느냐고 따집니다.
이 일을 계기로 급반전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솔로몬이 즉위하는 시기가 빨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다윗은 솔로몬을 앞에 두고 유언을 합니다. 통치원리 몇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권력안정화의 방법도 충고해 줍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마무리하고 열조로 돌아갑니다. 열왕기상 초반부의 내용입니다.
이제 솔로몬의 시대입니다. 솔로몬은 대단한 지혜의 사람이고, 매우 신중한 성격입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뛰어난 정치적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입니다. 반란세력 아도니야의 무리들을 권력으로 싸그리 숙청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둡니다. 시간을 기다립니다. 이런 가운데 아도니야가 어이없는 일을 벌입니다. 국모 밧세바를 찾아가 다윗 말년에 다윗을 시종 들던 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삼고 싶다고 간청을 합니다. 그가 절세미인이었다고 성경은 소개하는데, 이 아도니야가 아비삭의 외모에 반한 모양입니다. 정욕이 그의 눈을 가린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실수입니다. 그 여인은 엄연히 아버지 다윗의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을 탐한다는 것은 선대왕 다윗을 욕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 명분을 솔로몬이 놓치질 않습니다. ‘내가 이 일을 바로 잡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의 벌을 내려도 마땅할 것이다.’ 이러면서 솔로몬의 액션이 시작됩니다.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아비아달 제사장 가문은 제사장직분을 박탈해 버립니다. 요압을 처단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요압이 이 소식을 듣고 성막으로 도망갑니다. 그리곤 제단의 뿔을 붙잡고 버팁니다. 살려달라고, 죽더라도 여기서 죽겠다고 버팁니다. 그래서 결국 그 자리에서 죽어 묻히게 됩니다.
여기 나오는 성막 법궤의 뿔은 굉장한 상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중요한 부분이 여기에 나옵니다. 여기 보면 이 뿔을 붙잡으면, 어떠한 죄도 일단 그 죗값이 보류가 됩니다. 문제 해결의 시간이 생기는 것입니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이것이 이스라엘 신앙의 베이식입니다. 사람의 문제가 어떠하든지 일단 성전으로 가져오면, 해결의 실마리가 생깁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베이직입니다. 이게 기본입니다. 내가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성막으로, 성전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가져오면, 살 길이 생깁니다. 이게 하나님 백성이 가지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이 뭘 얘기합니까? 2절을 보세요. 성소와 장막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장막은 우리가 세운 것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Set up by the Lord, not by man!
보세요.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성전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경우를 만나든지 예배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이 주님께서 세우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주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거기가 주님의 나를 향한 역사를 기대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그 성소로, 그 성전으로, 그 예배의 장소로 믿음갑니다. 그곳에서 보좌 우편에 계신 분을 우리는 믿음으로 만납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성소, 이 장막, 이 예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 예배의 시간에 성도들은 하늘의 대제사장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약 진리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왜 만나야 합니까? 만나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크고 중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대제사장을 만나야 해결되는, 인생의 중차대한 문제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본문은 먼저 '대제사장' 얘기를 합니다. 땅에는, 이스라엘에는, '대제사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은 3-4절에 나오는대로, '예물과 제사 드림'이고,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것'이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사명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문제는 뭔가?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그것을 보여주고, 지금의 인생
들이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이 문제를 드러내시고, 또 지금 인생들을 통해 그것을 드러내십니다. 인생의 문제는 그 처음에서 마지막까지 죄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죄인이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사람은 그 안에서부터 죄가 있고, 이 죄는 그 사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또 그 주위에서 또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인생들 사이에서 그 문제들이 증폭되고 폭발합니다. 인생을 피폐화시키고 주저앉히고, 초토화시키는 것입니다.
죄가 사람의 밖에만 있으면,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정의라는 칼을 빼들고 심판하고 단죄하고 정죄하면, 끝이 납니다. 나서서 정의를 외치고 실현하면 됩니다. 내 문제가 아니라 남의 문제이기에, 공정의 잣대를 들이대고 재단하면 됩니다. 그러면 문제는 풀리고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이게 내 문제일 때는, 문제가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나에게 ‘정의’를 들이대고, ‘공정’을 들이댈 때는,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요즘 많이 듣는 ‘공정, 공정사회’라는 구호도 밖으로 외칠때는 그럴 듯 해 보입니다. 그러나 내부기관을 향해 외칠 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정권이 외치는데 정권 안에서 불공정이 나타날 때, 문제가 커집니다. ‘자기도 못하면서! 자기도 불공정하면서!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지 주제나 파악하지!’ 이러면 심각해집니다.
우리가 요즘 정의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 데, 그 배경 가운데 하나가 하바드대 교수인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책입니다. 이 책이 초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사실 이 책은 소화하기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무슨 파퓰러한 에세이가 아닙니다. 정치철학 논문 수준의 내용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오고, 칸트가 나오고, 존 롤스가 나오는 굉장한 수준의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초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것을 보면, 그만큼 사람들이 '정의'에 관심이 많은 모양입니다.
이 사람의 주장은 물론 좀 발전은 있지만, 그의 스승인 존 롤스가 지은 '정의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존 롤스의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평등적 자유주의'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마땅한 대가를 얻어야 하고, 그 대가를 누려야 합니다. 이게 자유주의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이 자유주의적인 세상에서 ‘정의, 공정’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자기 능력과 노력에 따라 마땅한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에도 어떤 환경이나 조건 때문에, 능력과 노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대가, 삶의 열매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이 있지요. 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또 독거노인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소년.소녀 가장이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으로 소외된 위치에서는 자기 최선의 능력과 노력을 발휘해도, 받는 혜택이 대단히 미약할 수 있습니다. 존 롤스를 이것을 ‘최소 수혜자’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사는 자유주의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이런 최소 수혜자들에 대해 ‘공정한 기회를 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경쟁에서 보조적이며, 보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요즘 듣는 ‘공정사회’니, 보편적 복지니, 선별적.선택적 복지니, 평생 맞춤형 복지니 하는 말들이 다 이 범주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선, 이런 식으로 ‘정의’를 실현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정의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죄가 남의 죄이고, 문제가 남의 문제면, 정의는 쉽습니다. 판단하면 됩니다. 정죄하면 됩니다. 단정적으로 ‘저 나쁜 놈’ 이러면 됩니다. 그러나 죄가 나의 죄이고, 문제가 내 문제면, ‘정의’라는 말은 대단히 심각한 말이 됩니다.
요한복음 8장으로 가 보세요. 길가에 끌려나온 한 여인을 만납니다. 한쪽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한쪽에는 정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 모인 많은 사람들에겐 죄가 바깥에 있습니다. 남에게 있습니다. 이 간음한 여인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이다. 돌로 쳐라'는 선언이 나오면 바로 정의의 심판을 내릴 참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한 마디에 사람들이 뒷 걸음 칩니다. 어른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사라져 버립니다. 그 말씀의 순간에 모두가 자기 안의 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순간, 자기 속의 죄성이 꿈틀하는 것을 느꼈고, 자기도 역시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자기들도 역시, 문제적 이스라엘, 문제적 인생이라는 사실에 직면한 것입니다.
죄는 사람 안에 있고, 또 사방에 있습니다. 그래서 죄가 인생의 가장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내 안에서 문제가 생겨나고, 사방에서 문제가 생겨나고, 이것이 서로 부딪치며 생채기내고, 부수고, 폭발합니다. 이래서 성경은 시작부터 죄를 말하고, 마지막까지 죄를 얘기합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으로 와야 했고, 마침내 세상 끝에서 죽었습니다. 그 아들이 죽어야만 출구가 보이고, 그 아들이 나무에 달려야만 실마리가 보이는 것이, 죄라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인생 한 가운데 너무 깊이 뿌리 박혀있고, 사방에서 너무도 광포하게 활개 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죄가 인생의 가장 치명적이고,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다 축복을 좋아합니다. 저도 엄청 좋아합니다. 그래서 셋째 아이 태명을 ‘축복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루에 수도 없이 많이 ‘축복, 축복’합니다. 온 가족이 다! 하나님 백성은 당연히 '축복'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알기 때문입니다. 족장시대로부터 수없이 오고 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소망한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넘쳐흐르는 하나님의 축복을 좋아합니다. 축복의 자리를 차버리고, 저주의 자리로 가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축복의 자리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특징입니다.
이 '축복'은 본문 히브리서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축복을 항상 죄와 병행해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죄의 반대를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축복'의 반대말이 죄라는 거지요. 죄를 이긴 축복, 죄가 없는 축복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품은 축복은, 시한폭탄이 든 선물상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죄와 축복을 양쪽에 놓고, 그 사이에 피와 용서를 놓습니다. 죄, 피, 용서, 그리고 축복! 이 도식이 히브리서의 중요한 기둥입니다. 축복이 어떻게 오나? 죄를 해결하는데서 옵니다. 죄는 어떻게 해결됩니까?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피가 있어야 합니다.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대가를 치룸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면 누군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피를 흘려야 합니다. 이 피흘림이 있고서야,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용서의 바탕 위에 축복이 쏟아집니다. 죄가 해결되는 곳에 축복이 임합니다. 이것이 구약 이스라엘을 관통하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또한 히브리서의 주제 메시지가 됩니다.
그래서 죄가 사라지고 축복이 들어오는 이 중요한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피와 용서입니다. 피를 통해 용서함을 받는 것, 이것이 있어야 죄인이 축복의 사람됩니다. 피흘림을 통해 죄를 용서받는 것이, 축복으로의 지름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입니다. 인생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고자 합니다. 위로부터의 신령한 축복을 물붓듯 붓기를 원하십니다. 그 축복을 인생이 온전히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신령한 축복부터 현세의 축복까지 모든 축복을, 인생들이 풍성히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불순종이 이 축복을 막았습니다. 내 생각대로 가는 것이 내게 유익하다는 인생의 생각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가로 막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인생을 축복하시고자 합니다. 당신과 교통하며 동산을 거닐던 그 인생과 다시 교제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소를 주시고, 장막을 주십니다. 또 예배의 시간을 주시고, 장소를 주십니다. 죄인이 죄를 해결하고, 축복의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피흘림의 제사를 받으시고 용서를 베푸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면 죄가 뭡니까? 죄는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이 죄입니다. 또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러면 우리 마음에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생각도 못하나, 생각의 자유도 없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 의사와 의지를 주지 않으셨나,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마저 가로막는 폭군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의미 있는 주장이요, 반박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생각을 할 능력을 주셨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할 것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존재입니다. 만약에 우리 생각과 하나님 생각, 말씀이 일치하고 같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걸 어떻게 보면, 상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각이 일치하니,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고 축복이 됩니다. common sense, 이것을 ‘상식적이다’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어긋나는 경우지요. 때로는 둘이 정반대의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은 여기에, 하나님 생각은 저기에,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내게 유익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내게 축복으로 보입니다. 이 길로 가야, 이 생각대로 빨리 밀어붙여야, 남보다 먼저 큰 복덩어리를 차지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도장을 빨리 콱 받아야 하는데, 확실히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마음 편히 서둘러 가야 하는데, 하나님이 말씀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십니다. 바로 이런 때에 뭐가 내게 참 축복인가, 이것이 굉장히 크리티칼합니다.
창세기 초반을 보세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창세기 2장에 생명나무 얘기가 나오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얘기도 나옵니다. 우리는 이 나무가 정확히 무슨 나무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 나무와 그 실과를 무슨 불로초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이 나무는 그냥 다른 과실나무처럼, 과일이 달리는 보통 나무로 보는 게 더 낫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나무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 나무에 하나님의 언약을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임을 알려 주시려 했습니다. 그게 생명나무의 존재이유입니다.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생각 따라, 하나님 말씀따라 사는 것이, 내게 유익이고 축복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또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 눈에 좋아 보이고 내 생각에 유익이고 축복으로 보여도,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하고, 먹지 말라고 하고, 노라고 하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 내게 참 유익이고, 내게 참 축복임을 믿는 것, 그래서 그대로 사는 것, 이게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가 죄입니다. 그게 죄의 기원이 되고, 죄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이런 믿음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축복인가,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내게 축복인가, 바로 여기에 죄가 있고, 자유가 있고, 믿음이 있고, 또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의 의미입니다.
자, 그러면 이런 죄많은 인생의 현장에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이 내려옵니까? 내 생각대로 가고, 내 생각대로 사는, 그 죄가 인생에게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생명과의 절연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사망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이런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그 사망의 현장에 생명이 오려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생명의 피가 와야 합니다. 대신 죽는 죽음이 와야 합니다. 내가 살려면 다른 누군가의 생명이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가 옵니다. 피와 용서가 있어야, 죄인에게 생명이 옵니다. 피흘림의 용서가 있어야, 죄의 현장이 축복의 현장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본문은 계속 제사장 얘기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제사장 얘기를 합니다. 성소에서, 참 장막에서 생명의 피를 뿌리는 대제사장 얘기를 합니다. 피로 죄를 덮어 용서가 일어나게 하고, 축복을 가져오는 제사장 얘기를 합니다. 예물을 드리고, 또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대제사장 얘기를 계속 계속 합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얘기하는 제사장은 4절에 나오는대로 ‘율법에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이미 동물의 피를 흘려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장들은 있습니다. 많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제사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고, 제물의 피를 흘려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은 5절에 나오는 대로,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일 뿐입니다. A copy and shadow of what is in heaven! 이 피흘림과 용서는 시간의 제약이 있고, 공간의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점점 발전하고 발달하고 교묘해지고 치밀해져서, 시간을 넘어가고, 공간을 넘어가 버립니다. 다시 말해 제사장들의 피흘림의 제사로는 세상의 죄, 인생들의 죄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제사는 단지 모형이고, 암시일 뿐입니다. 사람은 더욱 더 자기 생각대로 나아가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나, 제사장들의 제사가 그 넘쳐나는 죄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얘기합니다. 1절에서 얘기하고, 다시 6절에서 반복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것도 땅에 있는 제사장이 아닌,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하늘의 대제사장이 필요합니다. 그 대제사장이 우리 편을 들어주어야 하고, 그 대제사장이 우리를 위해 제사를 드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근본 문제인 죄가 해결됩니다.
6절을 보세요.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더 아름다운 직분’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사명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그런데 여기 보면, ‘약속’이 나오고, 또 ‘언약’이 나옵니다.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 이 약속과 언약의 중보자가 있음을 얘기합니다. Promises, covenant! 이 두 단어는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보’라는 단어를 좀 더 이해하면, 약속과 언약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중보’는 ‘중개인’의 의미가 있습니다. 상거래용어지요. 상품이나 부동산을 거래할 때 양자를 이어주는 ‘중개인’이 ‘중보’입니다. 중개인은 양자를 이어주고, 수수료를 받습니다. 부동산 운영하는 공인중개사들이 이런 일을 하지요. 그런데 어떤 중개인은 한쪽의 전권을 위임받아, 상품이나 부동산을 자기 재량으로 사고 팔기도 합니다. 큰 신뢰를 받는 능력 있는 중개인입니다.
부동산을 좀 더 생각해 봅시다. 한 집의 가장이 집장만을 준비합니다. 그 가장은 가족들에게 곧 집이 생길 거라고 약속합니다. 그 집에서 이런 저런 유익을 누릴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학교가 가깝다. 각자 공부방도 갖는다. 주방은 최신식 설비다. 김치냉장고도 있을거다. 거실 쇼파는 쿠션최고를 들일거다. LED TV도 거실에 달거다.’ 이런 약속들을 합니다. 다들 기대에 차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빠의 ‘약속’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이제 가장이 한 부동산의 중개인이 소개한 아파트로 갑니다. 보니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계약금을 얼마 지불하고 계약을 맺습니다. 계약서에 도장 쾅 찍고, 찍고, 한 부씩 가집니다. 자 이러면 이제 아버지의 이 약속들은 언약이 됩니다. 이제 집에 들어가도 됩니다. 이사를 해도 됩니다. 이사하고서 잔금 치르면 정말 ‘우리집’이 됩니다. 그 집에서 뭘해도, 뭘 들여다 놔도, 어떻게 꾸며도, 간섭할 사람 없습니다. 그 가족의 집입니다. 이게 바로 ‘약속’이 이루어져 ‘언약’이 된 것입니다. 대가를 치룬 약속이 언약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본문에서 말하는 ‘중보’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중보자, 이 중개자는 주인에게 전권을 위임받습니다. ‘니가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다. 자네가 어떻게 이 부동산 권리를 처분하든, 나는 그대로 시행한다. 마음 가는대로 해라.’ 주인이 이럽니다. 이 중개인에게 이런 권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개인은 광고하고 다닙니다. ‘집이 필요한 사람 와라. 땅이 필요한 사람 와라. 집을 주겠다. 땅을 주겠다. 내 말을 믿어라. 믿고 내게 와서 선물을 받아가라.’ 이럽니다. 그리고 그 말을 믿고 온 사람은 집을 받고, 땅을 받습니다. 이 중개자, 이 중보자가 본문이 말하는 ‘중보’와 흡사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중보’라는 단어를 가지고 본문 전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본문에 나타나는 두 종류의 언약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언약의 두 가지 형태를 보여줍니다. 첫째 언약은 5절에서 ‘모형과 그림자’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이것은 모세가 만든 땅의 성막과 성소를 가리키지만, 크게 보면 모세가 받은 언약을 가리킵니다.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또 7절에서는 ‘첫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first covenant! 그런데 여기서 ‘첫 언약’을 ‘흠’이 있는 언약인 것처럼 얘기합니다. Something wrong! 이 말은 언약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영어로 하면 Not yet, on the way! 이지요. 미완성이다라는 말입니다. 앞으로 중요한 요소가 채워져야 온전한 언약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9절 이하에서는 이것을 ‘출애굽의 언약’이라고 부르고, 마지막으로 13절에서는 ‘새 언약’의 반대 개념으로, 낡아지고 쇠하여지는 ‘옛 언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들을 6절에서 간단하게 ‘더 좋은 약속’ better promises 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왜 ‘약속, 에팡켈리아’는 ‘언약, 디아데케’가 되지 못합니까? 왜 하나님께서 구약백성에게 언약으로 주신 이 약속들은 우리에게 참된 축복의 언약이 되지 못할까요? 왜 ‘첫 언약, 옛 언약, 낡아지고 쇠하여지는 약속들’로 불려 져야 할까요?
자, 다시 구약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구약 신앙의 대표는 땅에 있는 성막입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성막이 그 대표입니다. 이 성막에서 아론의 자손들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합니다. 이들이 구약의 중개인, 중보자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죄인입니다. 죄가 많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 죄를 깊이 압니다. 그래서 죄를 더 깊이 경험하고 자각하고 그 본성을 더 절절히 알게 됩니다. 죄로 인한 충격이 더 크고, 죄의식, 죄책감도 더 심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죄를 깨닫고선, 죄에 마땅한 짐승을 끌고 성막, 성전으로 옵니다. 이 제물로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장들이 제물을 잡아 그 피를 뿌립니다. 대제사장은 그 피를 지성소에 뿌립니다. 지성소에 뿌리면 그 피가 하늘의 지성소에 상달됩니다. 물론 상달되지 못하고 대제사장이 죽을 때도 있지요. 상달되면 하늘의 제사장이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죄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면 용서를 베푸십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은혜를 하늘의 제사장은 땅의 제사장에게 내려줍니다. 이제 땅의 제사장이 이 용서와 축복을 받아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합니다. 축복의 은혜를 선포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신앙 요약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자란 것이 뭡니까? 여기서 부족한 것이 뭡니까? 왜 이 언약이 ‘첫 언약’이 되어야 합니까? 왜 이 언약이 ‘옛 언약’이고, ‘좋은 약속들’에 머물러야 합니까? 낡아지고 쇠하여지는 것으로 불려 집니까?
자, 보세요. 문제는 사람의 죄입니다. 사람의 죄는 피흘림이 있어야 해결이 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어야 죄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매 죄마다 사람이 죽을 순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일회적이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죄를 해결합니까? 대신 뭔가가 죽어야 합니다. 대신 제물이 죽어야 합니다. 죽어서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 제물의 피흘림의 자리에 사람의 죄가 같이 죽어야 합니다. ‘저 제물처럼 저의 죄도 죽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제물의 피흘림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바로 이 자리에 용서가 있습니다. 이 회개의 자리에 그 피흘림을 보시고 용서를 주십니다. ‘자기 생각대로’가 죽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의 성질과 범위입니다. 이 죄는 사람 그 밑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라, 성막의 제사, 제물의 피흘림만으로는 해결이 되질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막의 제사, 그 피흘림의 제사를 넘어서 죄의 역사들이 일어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보세요. 성막에서 제물의 피를 흘러 제사를 드림으로 그 죄를 막습니다. 그 죄를 드러냅니다. 그 죄를 피흘린 제물과 함께 죽입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현장의 사람들 가운데서, 그 마음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죄가 끓어 올라 인간의 현장을 덮치는 것입니다. 용서의 현장을 또 다른 죄의 파도가 덮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여전히 분노하고, 욕심내고, 한계를 넘어가고, 내 생각을 주장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이런 죄의 넘쳐나는 성격과 범위를, 구약 제사가 감당하지 못합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한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자기 죄를 깨닫고 시인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 마땅한 율법이 요구하는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로 갑니다. 제사장은 제물을 잡아 피를 흘립니다. 그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순간에도, 바로 그 현장에서, 사람 가운데 욕심이 불쑥 올라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탐심이 불쑥 생겨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핑핑 돌아 그 순간에도 자기 유익의 길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을 넘어선 정욕을 꿈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용서의 자리에서 나의 자존심을 건드린 원수를 넘치게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게 인생이 가진 죄의 성격이요 범위입니다. 죄가 넘쳐납니다. 제사의 시간과 장소를 넘어 넘쳐 올라옵니다. 이래서 인생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성막의 제사만으로는 넘치는 인생의 죄를 해결할 수 없음을, 구약의 언약들은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9절에 나오는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족장들을 부르시고, 요셉을 통해 애굽에서 일가를 이루고,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모세를 통해 출애굽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으로 광야의 긴 세월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입히시고 먹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마침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이 있고, 약속의 땅이 있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질 않았’습니다. They did not remain faithful to the covenant! 그들의 죄를 향한 갈망은 율법의 테두리를 넘어서 버렸습니다. 그들의 탐심은 가나안의 경계를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들의 죄의 깊이와 넓이는 제물의 제사의 효용을 훌쩍 뛰어 넘었습니다. 그래서 13절의 표현대로 모세에게 주신 언약을 ‘낡아지고 쇠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obsolete and aging!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제사를 모형이라 부릅니다. 그림자라고 부릅니다. 패턴, 본이라고 부릅니다. ‘첫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옛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낡아지고 쇠하는 것이라 부릅니다. 부족한 것이 있어서 뭔가로 채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상태가 바로 6절, ‘좋은 약속’ better promises 의 의미가 됩니다.
그러면 이 ‘첫 언약’을 하나님은 왜 주신 겁니까? 그냥 낡아지고 쇠하여서 사라져 버릴 것을 왜 주셨을까요? 이렇게 쇠하여 사라질 것을 하나님은 약속이라고, 언약이라고 주신 것입니까?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 다윗을 거쳐 오고 오는 구약 백성들에게 ‘첫 언약’은 과연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 따라 믿음으로 살아야,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나옴을 언약의 백성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향땅을 버리고, 아비 친척과 결별하며 말씀따라, 미지의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그 말씀에 붙들려 애굽과 대적하며 광야의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그 말씀따라 생명의 위협을 받아가며 말씀 안에서 생명을 찾았습니다. 이 ‘첫 언약’은 하나님 말씀이 생명이요, 구원임을 하나님 백성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둘째로 ‘첫 언약’은 우리에게 죄의 깊음, 그 광포하고 질긴 성격을 인생에게 보여줍니다. 이런 첫 언약의 성격과 한계를 가장 깊이 경험하고, 그래서 새 언약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 성경의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로마에 보낸 서신에서 이 첫 언약과 새 언약, 그리고 인생과의 관계를 가장 적절하게, 가장 깊이 설명합니다.
로마서 7장 후반부를 보세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럽니다. 율법을 가지고도,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도, 성막이 있고, 성소가 있고, 제물의 피흘림의 제사가 있어도, 바로 그 시간, 그 공간에서도 죄를 품고, 죄를 꿈꾸고, 죄를 키워나가는 이스라엘을 정확히 본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자신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셨나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율법의 기능을 다시금 알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알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보세요. 율법은 죄의 정체가 뭔지를 사람이 알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적나라한 모습을 그 밑에서부터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 율법의 역할이라는 말입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죄를 그 뿌리부터 보여줍니다. 죄의 근본적 모습, 사람이 어떻게 깊이 죄인인가를 그 밑둥 저 밑에서부터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뭡니까?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래서 시작부터 끝까지 죄인이라 불리게 되는 사람의 죄의 모습을 정밀하게 보게 합니다. 세세하게 보게 합니다. 낱낱이 보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첫 언약, 옛 언약, 약속들’의 기능이자, 역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 언약’은 뭡니까? 8절에 나오는대로 주께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맺으시는 ‘새 언약’은 뭡니까? New covenant!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 8절에서부터 12절까지 길게 예레미야 31장을 인용합니다. 31-34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The time is coming! 예레미야 선지자가 즐겨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의 주된 메시지가 뭡니까? 유다의 멸망,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바벨론의 강철군대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고 몽땅 포로로 끌고간다는 메시지입니다. ‘망하니까 정신차리고 그냥 끌려가라,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 아주 반민족적인 메시지입니다. ‘결사항전, 죽을 똥 살똥으로 마지막까지 레지스탕스처럼 저항하라, 죽을 때 죽더라도 민족을 위해 끝까지 싸워라’ 이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보고, ‘저 놈 뭐야, 미친갱이 아냐, 빨리 항복하라니. 그게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완전 똘아이네!’ 그래서 예레미야는 민족주의자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습니다. 온갖 비난과 저주와 욕을 먹습니다.
그러던 예레미야가 어느 날 ‘그 날’을 외칩니다.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The time is coming! ‘이 모든 불행을 이기고도 남을 놀랍고 큰 축복의 날이 온다.’ 이렇게 예레미야가 ‘그 날’을 전합니다. 둘째 언약이 이루어지는 날, 새 언약이 성취되는 날이 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좋은 언약이 이루어짐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좋은 새 언약’이 뭡니까? 본문 10-12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예레미야서 31장 33-34절 내용입니다. 이 내용이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깊이 새겨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다 하나님을 더욱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이 마음 깊이 새겨지고,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고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언약의 역사, 새 언약의 역사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말씀이 우리 마음 판에 깊이 새겨집니까? 성령의 역할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새겨주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풍성히 부어져서 말씀을 박아 주셔야 합니다. 성령의 불로 새겨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성전의 역사의 핵심이고, 교회 핵심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심중 깊이 새겨져 살아 역사하는 것, 이것이 성전의 비밀이요, 교회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축복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말씀이 죄인에게 들립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성령이 죄의 현장, 그 한가운데서 역사합니까? 피 때문입니다. 더 이상 동물의 피가 아닌, 중보자의 피 때문입니다. 커넥터 대제사장 예수의 피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피가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합니다. 예수의 그 피가 하나님의 성령을 움직여 우리 심중 깊이에서 역사하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 마음 판에 깊이 깊이 새기게 합니다. 이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참다운 성전의 역사, 교회의 역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성전 위에, 이 교회 위에 용서를 내려 주십니다. 긍휼을 주십니다. 은혜를 주십니다. 풍성한 회복을 주십니다. 예수의 피를 붙잡은 이 성전 위에, 중보자의 피를 붙든 이 교회 위에, 하나님의 축복을 가득히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12절,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자, 이제 이 네 가지를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죄, 피, 용서, 축복! 자, 어떻게 용서가 이루어지고, 축복이 내려옵니까? 피로 죄를 해결할 때입니다. 피가 죄를 대신할 때입니다. 피가 죄를 덮을 때입니다. 중보자의 피, 중재자의 피, 커넥터의 피가 죄를 해결할 때, 참다운 용서가 옵니다. 그 용서의 자리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죄가 있습니다. 세상에 죄가 있고, 많아서 차고 넘칩니다. 내 안에 죄가 있고, 이것도 많아서 차고 넘칩니다. 또 생기고 자꾸 생겨납니다. 내 안의 죄는 뿌리를 알 수 없이 깊고, 그 근원에서 시시때때로 솟아납니다. 세상의 죄는 '어째서 저럴까'하는 마음이 수없이 들도록, 점점 치밀해지고, 교활해지고, 악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고, 또 세상은 죄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많은 죄를 예수의 피가 해결합니까? 이 넘쳐나는 엄청난 죄를, 대제사장, 중보자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어떻게 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세상과 우리 안의 그 엄청난 죄악을, 예수 혼자 다 감당하고 해결하고 깨끗하게 씻을 수 있습니까? 세상의 그 많은 기관들과 공권력들, 법정들이 해결하고 또 해결해도 더욱 더 기승부리고 흉폭해지는 죄악들을, 어떻게 예수 홀로 없앨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의문입니다. 불신의 근거가 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믿기 힘들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죄는 자기가 해결해야지, 왜 남이 해결을 해.' 그러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성인, 위대한 인물, 거기까지는 좋아. 그런데 어떻게 한 인간이 세상의 그 모든 죄악, 과거, 현재, 미래의 죄들을 해결해. 너무 웃기는 상상력 아냐?' 이렇게 비웃기도 합니다. 나름 일리도 있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주장이 우습게 들리기도 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피가 세상의 모든 죄를 해결합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 한 사람 대제사장 예수가 세상보다, 세상의 오고 오는 그 모든 사람을 다 합친 것보다, 아니 온 우주보다 더 크다고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의 피는, 그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세상 그 어떤 죄도 다 덮는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오고 오는 모든 죄를 다 가져와도, 모두 다 씻어버린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마저도 다 감당하고 처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누구든 그 피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용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 믿음 위에 한없는 축복이 쏟아진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대제사장 예수의 피공로요, 십자가 보혈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체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오고 오는 모든 죄, 우리의 모든 죄, 그 죄가 만들어내는 모든 찌꺼기들, 부작용들, 죄책감들, 그 모든 죄의 모양들은, 대제사장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법적으로 종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팩트입니다. 최종적인 법적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피를 보고, '모든 죄는 다 끝났다. 다 해결되었다.' 법적으로 선언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법의 실효를 선언하셨습니다.
물론 죄의 후유증들이 있지요. 많습니다.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이미 벌어진 죄는 자기 자신에게 심각한 상처를 남깁니다. 가족들에게도 깊은 생채기를 냅니다. 이웃에게도, 공동체 가운데도 큰 상처와 부작용, 폐해들을 남깁니다. 사회적 파장까지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의 피를 믿는 사람은, 그 피의 능력을 믿고, 그 피로 용서를 받음을 믿는 사람은, 자기의 죄에 대해 정직하게 쏘리합니다. 잘못을 한 것이니까요. 죄의 주체가 자기이니까요.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가 있으면, 피하지 않습니다. 달게 받습니다. 책임을 집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죄가 남긴 흔적과 자국들을 처리합니다. 회개합니다. 사과합니다. 무릎 꿇고 사죄합니다. 배상합니다. 법적인 징벌을 달게 받습니다. 예수의 피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이것을 정직하게 감당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십자가 용서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죄의 후유증에 대해 피합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고 회피합니다. 구실을 만들어 냅니다. 핑계를 댑니다. 남 탓합니다. 폭탄돌리기합니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내가 일을 벌였지만, 내가 망해선 안된다고 생각하니까요. 다 책임지면 손해가 막심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별거 아닌 것 가지고 내 인생 망칠 순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주님의 용서를 믿는 사람은 죄의 여파를 피하지 않습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정직하게 책임을 집니다. 왜입니까? 죄는 이미 과거이거든요. 분명 내가 잘못을 했습니다. 이미 벌어졌습니다. 큰 어리석음입니다. 미련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입니다. 그 죄는 주님의 피로 분명 용서함을 받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피흘려 이루신 용서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피를 붙들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무슨 죄든 다 용서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과거가 내 현재를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갉아먹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오늘을 또 믿음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과거를 주님께 던져버리고, 미래를 주님 손에 맡기고, 오늘을 믿음으로 우리는 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회개하고, 죄의 상황에 정직합니다. 죄의 근본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심을 믿으니까, 죄의 부작용들, 부산물들에 대해 정직하게 책임집니다. 그래야 과거가 현재를 부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제사장의 피능력, 그 용서를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 사람을 하나님은 회복으로, 축복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Conclsuio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말에 '질끈'이란 말이 있습니다. '눈을 질끈 감다.' 이렇게 많이 사용하지요. 제 딸들이 어릴 때, 출근하는 저에게 '아빠 출근하신다. 윙크해드려.' 이러면 윙크를 찡긋 해야하는데, 두 눈을 다 '질끈 감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이 ‘질끈’이란 단어가 참 복된 말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정신이 담겨져 있는 걸 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생의 모든 죄악에 눈을 부릅떠 보십시오. 남아날 인생이 누구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자녀들의 모든 것에 대해, 잘못들에 대해, 실수에 대해, 죄들에 대해, 눈을 부릅떠 보십시오. 온전한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도 압니다. 부모의 죄를.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후배들이 선배들에 대해, 다음세대가 기성세대에게, 모든 사사건건 다 눈을 부릅떠 보십시오. 온전한 가족, 온전한 공동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분노와 증오, 한, 복수심, 이런 게 더 쌓여만 갈 것입니다. 정의와 공정을 무너뜨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밝혀야지요. 살펴야지요. 세워야지요. 그러나 어느 시기엔 질끈 감는 것, 넘어가 주는 것, 슬쩍 덮어주는 것, 이게 있어야 정의도 오래가고, 공정도 오래간다는 것입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삽니다. 이 질끈의 용서가 있어야 마침내 죄가 해결되고, 회복도 빠릅니다.
복음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눈을 질끈 감아주시는 것입니다. 아들의 피, 예수의 십자가를 보시고, 그게 무슨 죄이든, 어떤 뒤틀린 모양이든, 이미 넘어가기로 마음먹으신 것입니다. Passover! 질끈 감아주시고자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 피를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오는 이들은, 무슨 죄인이든 눈을 질끈 감으시고 나와 꽉 안아주십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이 새 언약을 믿고 있습니까? ‘낡아지고 쇠하여져 없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가 세상에 직접 와서, 몸소 피흘려 이룬 이 좋은 언약을 믿습니까? 이 중보자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의 죄가 어떠하든,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추한 모양이든, 이 중재자의 피, 이 대제사장 예수의 보혈을 믿고 나아가면, 용서 받고 축복의 길로 가게 됨을 믿습니까? 모두가 그런 믿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Prayer: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더 좋은 언약으로 축복해 주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아들을 중보자로 주시고, 그 중보의 피로 온전한 언약을 이루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우리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 중보자를 붙듬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죄가 어떠하든지, 세상의 죄가 어떠하든지, 그 피를 붙들고 나아갑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용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과거를 맡깁니다. 미래를 의탁합니다. 오늘을 믿음의 축복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