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마음만 바빠지는 가운데 조동리유적에 불상사가 생기게 되었다. 유물이 분포되어 있는 이 지역의 밭은 수해로 훼손되어서 ‘수해복구’라는 절차가 뒤따르게 되었고 여기에 도의 문화재위원과 담당직원이 유적에 있는 흙을 중장비로 메우라는 지시를 내려 그대로 덮어 버렸던 것이다.
아니 이럴수가. 비 때문에 문화층이 파괴되고 훼손된 유적을 다시 도로 엎어버렸으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분노가 치밀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파괴된 유적은 그런 필자를 비웃으며 쳐다보고 있는 듯 하였다.
결국 더 많은 유물들이 지표상으로 올라온 것을 보고 유적 훼손의 심각성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어 중원군으로 찾아갔다. 당시의 공보실장은 지역문화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분이었지만 필자의 이야기에 그렇게 많이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고 다시 그 분이 부군수가 되었을 때도 필자의 주장에는 어려움만을 표현하였다. 이어서 군수실까지 방문하여 이야기를 하였지만 역시 같은 대답이어서 결국 그러한 상태로 몇 년을 지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쟁기로 밭을 뒤엎고 농작물을 가꾸는 바람에 유적 훼손이 날로 더해가게 되었고, 이어지는 경작 행위로 원 지층에 있던 유물들이 지표로 나오게 되면 다시 그 유물을 채집하는 과정을 반복하여 충북대 박물관팀은 이 유적을 50여 차례 답사한 것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는 사이에 충북대학교 선사문화연구소가 개최한 ‘선사시대의 중원문화’(1993년 10월) 심포지움에 이철재공보실장이 충북대학교 인문대학내에 참석하여 그날의 발표를 자세히 듣고 난 뒤 조동리에 관한 내용을 서로 토의한 바 있었다.
이후 충주시와 중원군이 합쳐지면서 이철재실장은 충주시 문화관광과장으로 부임하였고 조동리유적의 중요성을 남다르게 주목하고 있던 그는 행자부에서 발주되는 제방(조동제)의 건설에 앞서서 선사유적의 시굴 필요성을 강조하여 조사비를 마련하여, 이 사실을 우리 박물관에 연락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 박물관팀은 유적의 중요성을 주장한지 5년 반 만에 발굴에 착수하게 되었으니 이 때가 바로 96년 3월 23일이다. 이철재과장의 철저한 공무원 정신은 지금도 우리 시대의 지표인 것으로 생각하여 이 사실을 밝혀 두고자 한다.
당시 발굴 조사는 충주시 이시종시장(현 국회의원)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큰 관심을 받았고 상당히 좋은 조건에서 진행될 수 있었다.
더욱이 동량면 전승원면장(현 충주시 문화관광국장)은 매일 발굴팀을 방문하여 격려하여 주었고 본인 스스로가 많은 지표유물을 채집하여 우리 조사단에게 주고는 하였다. 또한 조사단원들이 피곤한 빛을 보이면 2층 면장실에서 찬 음료수를 대접하는 배려까지도 하였고 여러 가지 충주시와의 관계 조정에 애써 주어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마을의 이만영이장은 마을회관을 빌려 쓰도록 하는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으며 마을의 여러 주민들이 우리 발굴에 깊은 관심을 갖고 격려를 해주었던 것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은혜로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이렇게 하여 78일간의 1차 조사를 하면서 우리는 1호 집터를 비롯한 6개의 집터와 17개의 불땐자리, 11기의 움(저장할 목적으로 땅을 판 구덩이)을 발굴하는 큰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유적이 발견된 후 5년여 동안 농경기로 인한 작물심기와 수확, 그리고 포크레인에 의해 유적이 상당 부분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의 완전한 상태로 1호 집터를 찾는데 성공하였다.
수 년 동안의 농사행위로 1호 집터는 움벽이 거의 없어진 부분도 있었지만 밭 경계에 세워진 철책 덕분에 유적의 한 움벽부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움을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큰 행운이었다.
여기에서는 놀라운 만한 많은 토기들이 출토되었으며 그 당시에 식생활로 쓰인 많은 곡물들도 함께 검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3호 집터는 움벽이 완전히 없어진 채로 집 바닥만 남고 나란한 가래자국이 집터의 중앙으로 간 채 남아 있어서 얼마나 유적이 훼손되었는가를 절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적의 1차 조사는 중앙지에서도 보도되는 큰 성과를 올렸다. / 충북대학교 박물관장ㆍ 한국선사문화 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