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조짐이 보이긴 했다. 노무현-정몽준 두 후보의 대통령후보 단일화 토론이 3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하자 이회창 후보도 형평성 보장 차원에서 토론회를 방송해 줄 것을 각 방송사들에 요청했다. 방송사들은 난감해졌다.
단일화 토론회야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된 사안인데다, 합동 토론 형식으로 열렸기 때문에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한다는 차원에서나 흥행 면에서나 충분히 방송의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이슈도 없이 단지 '형평성 차원'에서 황금시간대를 할애해달라는 요청에 대해 방송사들은 곤혹스러워했다.
단일화 토론을 딱 1회만 허용한다고 명쾌한 유권 해석을 내렸던 선관위도 이번엔 방송사 맘대로 하라며 발을 뺐다. 토론회 하루 전인 25일까지도 방송사들은 토론회 방송여부를 결정하지 못하다가 당일인 26일에서야 한나라당이 요청한 대로 "사회 각 분야의 2,30대 남녀 100명이 질의응답하는 방식"의 토론회가 확정됐다.
명색은 '토론회'였지만, 차라리 '토크쇼'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긴장감이란 찾아보기 힘들었고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웃음이 넘쳐흘렀다. 자질이나 정책에 대한 진지한 토론보다는 "술마시고 필름이 끊겨본 적이 있느냐"는 등의 잡담과 "몸이 참 유연하시다"와 같은 덕담이 주를 이뤘다.
지난번 KBS토론에서 대답 잘못했다가 망신당했던 "주택문제"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이후보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택 230만호 건설 공약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패널로 참석한 청년들의 면면도 보기에 좀 민망했다. 심현섭씨를 비롯해 '개그콘서트' 출연진들이 다수 이회창 캠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역시 '개그콘서트' 멤버인 김대희, 김준호씨는 이날 토론회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 톡톡히 한몫을 했다.
"창 바꿔보니"라는 CM송 덕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가수 김건모씨도 오랜만에 TV에 출연해 특유의 입담을 과시했다.
2,30대에서 지지율이 오르지 않아 고민이 많은 이회창 후보로서는 '딱딱하다'는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젊은 층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청년들이 직접 참여하는 토론회'라기에 기존의 토론과는 다른 날카롭고 참신한 토론회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에겐 실망이 컸을 듯하다.
'형평성' 보장 차원에서 이루어진 토론이었지만 후보 단일화 토론회에 비해서 내용이나 형식 등 모든 면에서 형평을 맞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당연히 흥행도 부진했을 것으로 보인다. 갑자기 걱정되는 게, 이 후보 쪽에서 "시청률의 형평을 맞추기 위해 몇 번 더 오늘과 같은 토론회를 열어달라"고 우기면 어떡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