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C. B 세블스키가 저녁을 먹고 혼자 놀고 있었을 때 거실에서 TV를 보던 아버지가 그를 다급히 불렀다. “뉴스에 〈스타워즈〉를 만든 사람이 나왔어!” 여섯 살 때 〈스타워즈〉를 처음 본 이후로 거기에 빠져 살았던 세블스키는 그때도 손에 〈스타워즈〉 피규어를 들고 놀고 있었다. 그가 거실로 뛰쳐나갔을 때 TV에선 조지 루카스(〈스타워즈〉의 감독이자 제작자)의 인터뷰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스타워즈를 만든 사람이 있었어? 이 엄청난 환상 세계 뒤에는 현실의 사람이 있었다는 거야?’
TV를 본 뒤 그는 방에 가서 자신이 모아온 코믹스(미국 만화책)를 펼쳐봤다.
지금까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곳에 아티스트와 작가, 편집자 등의 이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세블스키는 그때 ‘내 꿈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10대가 된 뒤, 여느 사내아이들이 자동차와, 파티, 여자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때도 그는 코믹스와 망가(일본 만화), 스타워즈 등을 끼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 그는 현실 속에서 꿈을 꾸며 살고 있다.
세블스키는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영화를 좋아하며 유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이 꿈의 직장으로 꼽는 마블엔터테인먼트의 수석 부사장이다. 1939년 만화책 출판사로 출발한 마블엔터테인먼트는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등 수퍼 히어로를 비롯해 5000여 개의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다. 그가 맡은 일은 ‘크리에이터와 콘텐츠 개발부문 총괄’이다. 디즈니는 마블 엔터테인먼트와 〈스타워즈〉를 제작하는 루카스 필름을 다 인수했다. 마블이 최근 내놓은 영화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한국에서 1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돌파했다. 그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장 좋아한 것 세 가지가 마블 코믹스, 디즈니, 그리고 스타워즈다. 어린 시절 사진 속에선 언제나 디즈니 캐릭터가 그려진 옷을 입었고, 방에는 스타워즈 피규어와 포스터가, 그리고 학교 사물함에는 마블 코믹스가 있었다. 이 세 가지가 한군데 있는 곳에서 일하는 것은 내게 꿈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지난 5월 19, 29일 열린 제6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 참석차 한국에 온 그에게 꿈을 어떻게 이뤘는지 들어봤다.
실패 경험이 성공의 자산이 되다
세블스키는 뉴욕시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코네티컷의 교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웨덴 출신인 어머니 덕분에 어렸을 때 방학 때마다 유럽에 자주 갔다는 것 말고는 평범한 유년을 보냈다. 세블스키는 “그때 경험 덕분에 스웨덴어・ 프랑스어・스페인어를 할 줄 알게 됐고,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여행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게 됐다”고 했다. 전기공인 할아버지가 운영한 ‘세블스키 일렉트릭스’란 전파상을 아버지가 이어받아서 하고 있었고, 세블스키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 그가 가업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만화와 관련된 일을 절실하게 하고 싶었지만, 나에겐 정해진 직업이 있는 것만 같아서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이미 아버지를 따라 트럭을 몰면서 일을 배웠다. 전선을 어떻게 바꾸고 배열하는지를 익혔고 자격증을 땄다. 그는 그 시기를 “꿈과 현실의 교차로”라고 표현했다.
“꿈을 거의 포기했을 무렵, 아버지가 저한테 말씀하셨어요. ‘넌 나처럼 살지 않아도 된다. 나는 아침에 눈뜨면 일하고 피곤한 채로 밤에 잠이 든다. 물론 나는 내 가족과 아내를 사랑하고, 이 삶이 싫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시켰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거든. 네가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나를 미워하는 게 싫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대학에 가고 싶으면 가라. 설령 그게 실패해도 돌아와서 할 일이 있다는 걸 명심하고.’ 아버지도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하는 게 싫었나 봐요.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가업은 저의 안전망이 된 거죠. 다행히 그 안전망을 쓸 일이 없었네요.”
세블스키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대학에서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전공했다. 코믹스와 함께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봤던 게 바로 ‘망가’였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에는 망가가 번역되지 않았다. 세블스키는 마을 일본인 수퍼마켓에서 망가를 사봤고, 대사를 알아보기 위해 일본어를 조금씩 배웠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를 전공으로 삼았고, 망가를 졸업논문 주제로 삼았다. 대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갔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을 인연으로 그는 졸업 후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에서 영어교사를 하는 것이 가장 빨리 비자를 얻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는 교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퇴근 후에는 망가 연구에 나섰다. 그는 “처음에는 집에서 망가를 읽다가 지역 도서관에 갔고, 그다음에는 지역 망가 동호회에 들었다가, 나중에는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망가 박람회까지 찾아다녔다”고 했다.
“망가 출판사에서 일하기 위해서 출판사 사장, 아티스트, 편집자들을 만나고 다녔어요. 아직 인터넷이 성행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에 타자기로 친 편지를 우편으로 그들에게 보냈죠. 실제로 만나러 다니기도 했고요. 업계에서 저는 망가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미친 외국인으로 소문이 났어요. 결국 일본에서는 원하던 일을 하지 못했어요. 당시만 해도 일본 망가 업계는 외국인에게 매우 배타적이었거든요.”
미국으로 돌아온 뒤 그는 일본 망가를 미국으로 수입해 번역하고 판매하는 일까지 맡았다. 그는 마블코믹스나 DC코믹스처럼 미국에서 잘나가는 코믹스 작가들이 망가의 표지를 그리도록 했다. 미국의 코믹스 독자들이 망가에 관심을 갖게 하려는 전략이었다. 90년대 후반 〈포켓몬〉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면서 망가가 미국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01년, 마블은 그동안 코믹스와 망가 업계를 오간 세블스키에게 컨설팅을 부탁했고, 2002년부터 그는 마블의 정직원이 됐다.
한국에서 고영훈 작가 발굴
만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세블스키는 자신이 “아티스트가 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주말이나 방과 후에 가는 아트스쿨에서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겐 어떤 고양이 그림이 좋은 것인지 보는 눈썰미는 있었지만 그 고양이를 그려낼 손재주는 없었다. 그래서 작가나 제작자, 편집자가 되고 싶었다. 밴드에도 리드 싱어와 베이시스트, 드러머 등이 각각 역할을 맡고, 그 뒤에 제작자, 작곡가, 음향 기술자 등이 있다. 그 뒤에 있는 일이 바로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에게 맡겨진 첫 번째 일이 바로 편집자. 하지만 1년 만에 그 일을 그만두게 됐다.
“저는 작품의 질을 중요시했고, 마감이란 개념을 싫어했어요. 작가들을 독촉해서 원고를 받아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질 못했죠. 제가 담당한 작가가 마감을 못 했다고 하면 계속 1주일씩 마감을 미뤄줬어요. 만화들은 다 늦게 나왔지만 전 기뻤죠. 아티스트들이 작품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줬으니까요. 전 나쁜 편집자였지만, 모두 날 좋아했어요. 그래서 회사에서는 저에게 모든 마블 아티스트들을 관리하고 새로운 아티스트들을 고용하는 일을 함께 맡겼어요.”
세블스키는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까지 맡으면서 세계를 돌아다닌다. 지난해부터 한국의 한 포털사이트에선 마블의 캐릭터가 한국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웹툰 《일렉트릭 레인》이 인기를 끌고 있다. 세블스키가 발굴한 한국의 고영훈 작가가 그린 것이다.
세블스키는 “일본에서의 실패 경험이 커리어에 엄청 큰 도움이 됐다. 나는 후회하지 않지만, 대신 기억을 잘하는 사람이다. 당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 기억이 내가 훗날 하는 일에서 실수하는 것을 막아줬다”고 했다.
“사람의 겉모습과 출신과 상관없이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누군가 저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자 하거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임합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최소한 그들이 피칭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줘요. 누가 알겠어요? 제가 미래의 피카소를 발견할 수도 있잖아요.”
세블스키는 “오타쿠란 말을 한국에서도 많이 쓰나? 혹시 나쁘게 쓰이는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꼭 나쁜 뜻으로만 쓰이진 않는다”고 대답하자, 그는 “나는 오타쿠가 맞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내 꿈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아, 이왕이면 나를 쿨(cool)한 오타쿠라고 해달라”고 했다.
“저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조언했던 아버지는 결국 그 조언을 스스로에게도 적용하셨어요. 막내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전기공을 그만두고, 선생님이 되셨어요. 원래는 가르치는 일이 제일 하고 싶었대요. 그러니까 무엇을 해도 너무 늦은 때라는 것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