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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하늘금을 이루는 산들이 보인다.
이 산들은 칠장산(492m·경기도 안성)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금북정맥으로 서운산(547m)을 지나온 성거산(聖居山·579.1m)과 태조봉(太祖峰·421.5m)이다.
태조봉에서 계속 남진하는 금북정맥은 취암산을 지나 백월산(560m)으로 흘러 가지만 남동쪽으로 가지를 쳐서 흑성산(黑城山·519.5m) 능선을 분가시킨다.
이게 바로 오늘 우리가 답사하는 코스.
먼저 맞는 태조봉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왕자산의 주산이자 천안의 진산(鎭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서 왕자산은 성거산 태조봉 흑성산 취암산을 합한 산줄기들이 왕(王) 자와 같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태조봉 이름도 930년 고려 태조 왕건이 이 산에 올라 산세가 오룡쟁주지세(五龍爭珠地勢)임을 간파, 천안도독부를 설치하고 후삼국통일의 전진기지로
삼은 데서 생겨난 이름이고...
성거산에서 태조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경계로 서쪽 방면으로 대찰 각원사(覺願寺)와 성불사(成佛寺)가 있고, 군사훈련장과 창고가 있었다는
유량동(留糧洞), 동쪽에는 왕이 머물렀다는 유왕(留王)골 등이 있다.
이외에도 태조가 말을 매었다는 마점산(馬點山)과 마점사지(馬點寺址), 왕건이 주둔할 때 지휘소였다는 장대산(將臺山)과 왕자산토성지(王字山土城址) 등
관련된 옛 지명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흑성산은 독립기념관을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명당임을 알 수 있으며,풍수지리에서 화기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 손꼽혀온 산이다.
본래 이름은 검은성(儉銀城)인데 일제감점기 때 ‘검다’는 뜻을 그대로 옮겨 ‘흑성산’으로 바꾼 것이다.
흑성산 정상에 자리잡은 KBS흑성산중계소는 현무암으로 쌓은 검은 성곽 외벽이 특징이다.
지금은 개방되었고, 성 안에는 흑성 대문과 망을 보던 망루를 재현한 공심돈과 노대가 있다.
천안제1경인 천안삼거리는 지명이 말해 주듯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접근이 된다.
영남과 호남 수도권 교통로가 만나는 교통요충지에다 서울에서 전철이 수시로 운행되어 태조봉 일원 산들을 당일산행코스로 다녀갈 수도 있다.
B팀은 각원사에서 독립기념관으로 이동하면서 천안삼거리 공원을 들리기도 하였다.
날머리의 독립기념관은 제1~제7전시관까지 9만여 점의 유물을 전시 보존하고 있으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기 위해 세운 겨레의 전당이다.
독립기념관이 개최하는 새해 해맞이 행사는 수많은 태극기의 행렬로 장관을 이룬다. <입장료는 무료.>
산행궤적
우리 버스가 각원사 주차장까지 올라왔으니 산행거리가 많이 단축된 셈이고,산행시간 역시 독립기념관 관람시간까지 포함됐으므로 그보다 짧은 셈이다.
고도표
개념도
우리 버스는 각원사 태조산루(太祖山樓) 앞에까지 올라왔다.
각원사는 개산조(開山祖) 경해법인(鏡海法印) 조실(祖室)스님의 원력으로 1975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A팀은 각원사 탐방 후 산길로 들어서고,B팀은 30분 간 머물다 차량에 탑승하여 천안삼거리공원 경유 독립기념관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태조산루 계단을 올라서려다 건물 용마루 끄트머리의 생김새가 특이하여...
당겨잡아 봤더니 생소한 모습이다.
태조산루 안으로 들어와서보니 아까 그 용마루에서 본 형체가 진열돼 있다.
치미(鴟尾)란다. 경주 황룡사에 있는 것을 본떠 청동으로 재현하였단다. * 솔개 치(鴟)
치미란 대체로 용마루에 얹을 수 있도록 밑부분에 반원형의 홈이 패어 있고, 옆면에는 몸통과 깃부분을 구분하는 굵은 융기선이 있는데 그 바깥쪽에는
날짐승의 깃털이 층단을 이룬 형태를 띠고 있다.<백과사전>
성종각(聖鐘閣)용마루에도 치미가 있다.
우측으로 자리한 관음전(觀音殿)은 정면 9칸의 대궐같은 건물이고...
정면으로 보이는 대웅보전은 정면 7칸의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엔 역시 치미가 있다.
당겨본 대웅보전의 치미
대웅보전 편액 낙관엔 병자상월(丙子霜月)이 적혀 있다.
상월(霜月)이란 서리(霜)와 달(月)로 서리 내린 밤의 찬 달을 의미하는 동짓달을 말하는 듯.
<전남 순천 출신의 자가 혼미(混迷)이고 호가 상월(霜月)이며 성이 손씨(孫氏)(1687~1767)인 조선 후기의 승려를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종해원(鐘海院) 전각도 9칸.
편액
관음전 편액
칠성각(七星閣)도 규모가 커서 칠성전(殿)이 되었고...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온 겨레의 염원을 담아 조성하였다는 동양최대의 아미타여래 청동좌불이다.
부처님 진신사리와 팔만대장경을 복장한 이 좌불상은 앉은 높이가 15m, 귀1.75m, 손톱길이 30cm이며 무게는 60t에 달한다. .
산길은 청동좌불 뒤로 열려있다.
청동좌불 옆엔 설법전(說法殿)이 있고,낙관의 경해법인(鏡海法印)은 각원사 개산조(開山祖) 조실(祖室)스님.
이제 산길로 접어든다. 조금 오르면 만나는 Y로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비스듬히 오르면...
군데군데 돌탑들이 쌓여져 있고...
5층석탑이나...
불상도 보인다.
뒤돌아 본 모습.
이젠 마애석불이 새겨져 있는 암벽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세 마애석불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새긴 지도 오래되지 않아 보였고 조각기법 또한 세련되어 보이지 않았다.
능선인 금북정맥에 올라서면 등로는 둘레길 수준의 아주 순탄한 길. (뒷쪽 방향은 성거산 방향.)
1시간에 4km를 넘게 걸을 정도로 빠른 걸음을 걸어...
체육공원을 지나고...
'제2솔바람길' 안내판
체육공원의 이정표
또 이정표
녹색 휀스의 열린 문을 들어서서...
휀스를 좌측 겨드랑이에 끼고 조금만 오르면...
2층 전망대가 있는...
태조산에 오른다.
고려태조왕건과 관련된 지명으로 금북정맥의 한 봉우리이다. 다섯 용이 여의주를 놓고 싸우는 형세라니...
2층팔각정자가 있는 조망좋은 태조산 정상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양지에서 식당을 차렸다.
태조산에서 보는 천안시가지 모습을 아래 사진과 비교해 보지만...
선명하지 못해 확인이 잘 되지 않는다.
천안10경 중에 오늘 드날머리에서 만난 각원사(6경)와 독립기념관(2경) 외에도 B팀들이 들린 천안삼거리가 1경이다.
휀스 안쪽에는 교보생명 개인사유지인 모양.
휀스를 따라 걷다가...
휀스 밖으로 빠져 나가자...
다시 우측으로 조망이 트이더니...
좌측 송림 사이로 시설물이 우뚝한 흑석산이 보인다.
이제 금복정맥을 이탈하여...
좌측 흑석산 이정표를 따라...
2차선 아스팔트도로에 내려선다.
아스팔트도로를 무단 횡단하여 곧장 산길로 올라서면서...
우측 고개마루를 올려다 보면 좌우 절개지에 휀스가 쳐져 있는 게 보인다. 도로에 내려올 때 곧장 내려오면 절개지 휀스에 막힌다는 이야기.
따라서 중간에 시그널이 많이 달린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야 된다는 말씀.
2차선 도로 지점이 해발 약250m로 떨어졌으니 제법 된비알을 치고 올라야 되겠지.
불과 30여분 만에 중계소가 있는 곳에 오른다.
정상부위는 아주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 산성이 있을 최적의 장소로 보인다.
대전 MBC 흑성산 중계소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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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부대 잠긴 문 옆으로...
아주 커다랗고 반듯한 헬기장. 흑성산성으로 가는 길은 맞은 편 철문 우측 휀스를 따라 이어진다.
헬기장은 조망이 트이는 곳.
지나온 능선 끄트머리에 시설물을 이고 있는 봉우리는 성거산인 듯.
잠긴 철문 우측 휀스를 따라...
돌아 가면...
활공장을 만나고...
활공장 시원한 조망에서 금북정맥은 계속 이어지고,솟은 봉우리는 취암산(319.9m)인 듯(?)
활공장 안내판
흑성문이 보이는 이 지점엔 비석과 산불초소와 삐딱한 흑성산 정상석과 또 우측으로 성곽 외곽으로 내려설 수 있는 스텐계단이 있다.
삐딱한 정상석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 뒤 좌측으로 우리가 진행할 성 외곽으로 내려서는 계단의 스텐봉이 보인다.
'고려상원수시충절공김사혁전적비(高麗上元師諡忠節公金斯革戰蹟碑)'
고려때 거란군의 침공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몽진을 가는 등 혼란한 시기에 홀연히 일어나 적을 섬멸시킨 김사혁의 전적비다.
김사혁(1320년~1382년)은 고려 충숙왕 7년에 태어나 우왕 8년에 64세로 향리 정침에서 졸했다.
묘소는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 기와골 계좌에 표석과 상석이 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신도비가 훼손돼 1979년에 2월에 다시 세웠다.
강릉김씨 천안종친회에서 공적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선조의 애국충절 정신 함양에 힘썼다.
흑성산 전망데크에서 바라본 주위 산군들
흑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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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성산(黑城山)은 높이 약 504m로 천안 시가지 동쪽에 위치한, 차령산맥 줄기의 구릉성 산이다.
산 아래 남화리에 독립 기념관이 있으며,이 산을 중심으로 김시민, 이동령, 이범석, 유관순, 조병옥 등 많은 구국 열사가 배출되었다.
'대동여지도'에 취암산과 세성산 사이에 흑성산이 표시되었고,'조선 지형도'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태조봉, 남쪽으로는 백운산과 취암산, 서쪽은 아홉 싸리 고개, 유량리 고개, 장고개 등이 있다.
흑성산은 우리말의 ‘검은 성’을 한자화한 것이지만 단순히 흑색을 의미하지 않는다.
‘검’은 높다, 크다, 거룩하다, 신성하다 등의 뜻을 함축한 옛말로서 단군왕검의 ‘검’, 임금의 ‘금’과 통하는 말이다.
따라서 흑성산은 뜻 그대로 ‘검은 산’이 아니라 큰 산, 신령한 산, 거룩한 산 등의 뜻을 지닌 이름이다. <자료요약>
노대(弩臺)
노대의 목적은 성밖의 사정을 성안의 군사에게 알리는 것인데 수원 서장대(西將臺)의 서북측에 동향(東向)으로 자리잡은 서노대를 본 따 축조한 것으로
누각이 없이 쇠뇌(노포 弩砲)를 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계단 위로 KBS중계소와 좌측으로 공심돈.
공심돈(空心墩)은 적의 동정을 살피는 일종의 망루이다.
수비와 공격을 겸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검정벽돌을 사용하여 방형으로 축조하고 네 방향으로 구멍을 내어 각종 무기로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수원성곽의 돈대(墩臺)를 모방하여 1987년에 축조하였다고...
안내판
KBS흑성산 중계소에서 내려오는 등네미님.
성곽 가장자리에 다가가자 성벽 담장의 윗 부분의 돌들이 눈에 설다.
이 지점 우측...
스텐계단으로 내려서서...
성벽을 왼쪽 어깨에 짊어지고...
검은 성곽을 따라 가야한다.
성벽을 벗어나자 다시 활공장이 나타나면서 조망이 트이는데...
희뿌연 가운데 독립기념관의 모습이다.
살짝 당겨보니 맞배지붕의 거대한 독립기념관 본관 건물과 그 주위를 둘러싼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다.
곧 독립기념관 방향 갈림길(주유소길 5지점)을 만나면...
독립기념관 방향 이정표는 날개가 떨어져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제 역활을 다하고 있다.
지그재그 급하강을 지나면 솔숲길을 만나고...
도로변에 내려선다.
도로에서 올려다 본 모습과 'B코스 흑성산 가는 길 1500m' 안내판
추모의 자리 방향으로 틀면...
난해한 모습의 조각품들이 깊고 큰 의미를 전달하러 애쓴다.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아우성 같기도 하고,강압에 항거하는 울부짖음 같기도 하다.
추모의 자리
내려서면서 잘 정돈된 조각 공원으로 들었다.
보라! 나라 잃은 사람은 자유가 없음을!
임시정부 선전부 비서로 활동하며 광복운동을 펼친 해암 안병무 선생(1912~1986) 어록비
-압록강 행진곡-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우리는 한국 광복군 악마의 원수 쳐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진주 우리나라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고향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밟힌 꽃포기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
독립기념관 본관 건물의 뒷태
좌에서부터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의사(1908∼1932)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훙커우공원의거 '를 일으켜 상해파견군 사령관을
포함한 5명을 살상하였다.
이후 일본제국주의에 침략당한 중국의 장제스(蔣介石)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할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하다니,
윤봉길 길이 빛나리'라 칭송하며,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선언을 한다.
의사는 그 해 12월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안중근(安重根) 의사(1879~1910)는 교육가이자 의병장으로서 자는 응칠(應七),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총을 잘 쏘았다.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 "국가의 안위를 마음으로 애쓰고 속을 태움"
20대에 학교를 세워 학생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다가 1907년 한일신협약에 체결된 후 간도로 가 의병을 결집 일본군대와 싸웠다.
1909년 비밀결사를 조직해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해 죽였다.
재판에서는 자신을 한국의 군인 신분이고 국제의 평화를 위한 행동이었음을 당당하게 밝혔다. 사형을 언도받고 1910년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1889~1930)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1905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담해 군사 책임을 맡고,
정의단을 군정부(軍政府)로 개편한 다음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청산리(靑山里)에서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는 일본군과 만나 전투가 시작되었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 휘하 부대가 서로 합동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3,000여명을 살상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특히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군은 백운평,천수평,어랑촌전투 등에서 전승을 거두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930년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앞에서 공산주의자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3의사 안내판을 돌아 전시관으로 들어 갔다.
-광야를 달리는 독립군-
광야를 헤치며 달리는 사나이
오늘은 북간도 내일은 몽고땅
흐르고 또 흘러 부평초 같은 몸
고향을 더난지 그 몇해이런가
석양하늘 등에 지고 달려가는 독립군아
남아 일생 가는 길은 미련이 없어라.
<1920년 무렵 불리던 노래>
전시되어 있는 붙잡힌 의병장들의 사진.
한인들을 학살한 일본군들이 의기양양 기념사진을 찍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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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수(梟首)된 의병장들의 모습.
이렇게 목을 매달아 잔인하게 우리 민족들을 살상하였으니... (사진 밑에 '기미년 3월 1일 만세사건'이라 적혀있다.)
총살당하는 우리 민족들.
-독립군가-
----전 략------
너 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나 죽으면 독립군의 혼령이 되니
동지야 너와 나의 소원 아니냐
빛낼 이 너와 나로다
나가 hey 나가 hey 싸우러 나가
나가 hey 나가 hey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압록강과 두만강을 뛰어 건너라
악 독한 원수무리 쓸어몰아라
잃었던 조국 강산 회복하는 날
만세를 불러 보세
-----후 략-----
본관 정문으로 들어서서 전시실을 찾아 보았지만 본관에는 전시실이 없다.
광장으로 내려서서...
태극기 터널을 통과하며 눈에 익은 임신한 위안부 사진을 담았다.이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 한 곳이 찡한데, 옆에 총을 든 놈은 히죽히죽 웃고 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재현한 것이다.
강화도에 있는 고인돌을 본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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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은 '겨레의 집'이다. 본관건물 너머로 흑성산이 보인다.
'겨레의 집'은 86년 완공이 되어 개관을 10여일 앞둔 시점에 화재로 불에 타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한국적 전통 양식에 기반하여 만든 겨레의 집 지붕은 독립기념관에서 상징적인 역할을 하지만 해방 이후 최악의 건축물 15선에도 이름을 올릴만큼
평가가 갈리는 건축물이다.
독립기념관은 무료입장이며,매주 월요일 휴관한다고 한다.
독립기념관의 상징인 '겨레의 탑'뒤로 흑성산이 보인다.
겨레의 탑은 길이가 51m가 되는 쌍탑이다.
대지를 박차고 막 날아오르려는 새의 모양이기도 하고, 기도를 위해 모은 손의 모습을 하기도 한 이 탑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영원히 뻗어나가는
우리 민족의 기상과 독립, 나아가 통일로의 염원까지 담고 있다.
꽃샘추위로 바람도 센 편이였지만 예상한 시간보다 일정이 당겨졌다.
일행들이 모두 하산하였지만 우리 막내가 보이지 않아 전화를 하였더니 전시관에 있다고 한다.
우리 막내는 최근에 영화 '귀향'을 본 후 위안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 아버지를 따라나섰는데,다 보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으니...
이럴줄 알았으면 흑성산을 오르지 말고 독립기념관을 찬찬히 훑어 보라고 할 걸 그랬다.
안중근의 어머니인 조마리아는 12월 중국 뤼순에서 유죄판결을 받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응칠아(안중근 의사의 어릴 때 이름)!
네가 이번에 한 일은 우리 동포 모두의 분노를 세계만방에 보여준 것이다.
이 분노의 불길을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억울하더라도 상고를 하지말고 우리 민족의 대의를 위해 거룩한 죽음을 택해야 될 줄로 안다.
옳은 일을 한 사람이 그른 일을 한 사람들에게 재판을 다시 해 달라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의 영웅으로 대접을 받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너를 일본놈들이 살려 줄 리가 있겠느냐.
혹시 자식으로서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이 불효라고 생각해서 상고하겠다면 그건 결코 효도가 아니다.
기왕에 큰 뜻을 품고 죽으려면 구차히 상고를 하여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남기지 않기 바란다."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