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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
알렉산드로스 동방 원정 경로.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를 출발해 페르시아 제국에 도달, 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를 끝낸 직후까지를 재구성한 것이다.
“나는 마케도니아에서 출발, 그리스를 정복했다. 트라키아와 일리리아를 꺾고, 트리발리아와 메디아를 차지하고, 헬레스폰트에서 홍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아시아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의 끝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이르렀다. 이제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리라.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리라. 나는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을 허문 사람이노라. 왕위에 오른 지 9년 만에, 나이 스물여덟에, 두 대륙의 주인이 되었노라.”
기원전 326년 겨울, 지금의 인도와 파키스탄의 접경 지점에서, 원주민의 완강한 저항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다 겨우 회복한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the Great, BC 356~323.6)에게 그의 충직한 부하들은 “제발 이젠 그만 야망을 접고 귀국하시라”며 간언했다. 그러나 아직도 상처가 다 낫지 않아 핼쑥한 모습이던 알렉산드로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내가 평생을 바쳐 추구한 과업을 여기서 멈추란 말인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실패자가 되지 않으리라. 세상이라는 극장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연기를 하리라.”
그의 말대로 그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그 누구도 꿈꾸지 못했던 정복왕의 위업을 이루었다. 그러나 왜 그는 멈출 줄을 몰랐던가. 두 대륙을 손에 넣고도 왜 ‘세상의 끝’으로 가기를 원했으며, 지치고 굶주린 그의 부하들이 귀환을 애걸할 때마다 왜 ‘나를 따르라’를 되풀이했던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알렉산드로스의 전쟁은 기원전 331년, 북부 이라크의 가우가멜라 인근의 전투에서 사실상 끝났다. 그러나 그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장정을 계속하여, 약 9년 동안 1만 5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더 나아갔다. 여기서는 알렉산드로스의 전쟁이라기보다, 그 멈출 줄을 몰랐던 장정에 대해 재조명하고자 한다.
장정에 참여했던 장본인인 크세노폰이 직접 기록을 남긴 “아나바시스(Anabasis)”와는 달리, 지금 남아 있는 알렉산드로스 장정의 기록은 수백 년이 지난 후에 로마 역사가들이 쓴 것들이 고작이다. 쿠르티우스(Crutius, BC 20?~AD 53?)의 [알렉산드로스 전기],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46?~120?)의 [영웅전], 아리아노스(Arrianos, 95?~175?)의 [알렉산드로스의 아나바시스(알렉산드로스의 출정기)]는 저마다 지금은 사라진 알렉산드로스 당시의 기록을 참고했다고 하지만, 세부적으로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가령 쿠르티우스가 중요하게 묘사한 사건이 아리아노스에게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거나, 플루타르코스가 서아시아에서 일어났다고 한 사건을 아리아노스는 몇 년 뒤의 인도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식이다. 이들의 글쓰기 스타일도 제각각이어서, 쿠르티우스는 마치 오늘날의 황색 언론인처럼 자극적인 내용을 원색적으로 펼쳐보이는 데 집중했다. 반면 플루타르코스는 주인공(알렉산드로스)의 본받을 만한 점과 오점 위주로 서술하고, 아리아노스는 왕실 연대기 작가처럼 원정군의 행동 중에 적나라한 부분은 묘사를 자제하며, 사건마다 그 역사적인 의의를 드러내려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장정의 전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대략의 윤곽을 되살리고, 그 역사적인 의미를, 알렉산드로스라는 인간의 생각과 계획에 대한 추정과 함께 음미해볼 수는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56년에 마케도니아의 왕자로 태어났으며, 부왕인 필리포스 2세(Philippos II, BC 382~BC 336)는 비범한 군사적 재능으로 약소국이던 마케도니아를 10여년 만에 강대국으로 키운 인물이었다. 그가 그리스 폴리스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리스 전부를 손에 넣은 카이로네이아 전투(기원전 338년) 때 알렉산드로스는 십대의 나이로 참전했다. 그리고 2년 뒤에 부왕이 암살되자(필리포스가 알렉산드로스의 모후인 올림피아스와 갈라서고 알렉산드로스의 친구들을 추방하는 등의 행동을 해서 부자지간에 사이가 매우 나빠져 있었기 때문에, 항간에는 알렉산드로스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일었다) 스무 살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성난 사자 같던 필리포스가 죽고 풋내기가 뒤를 이었다고 생각한 그리스의 폴리스들과 마케도니아 주변의 나라들은 저마다 들고일어났는데,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일단 유화책을 쓰자는 신하들의 대책에 알렉산드로스는 “무슨 말이냐. 지금이야말로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고 외쳤다. 이미 그때부터 주위의 말을 듣지 않고 가장 과감한 수법을 선택하는 기질은 확연했다고 할까. 아무튼 그의 모험은 성공해서, 2년 동안 남북을 오가며 적들을 쳐부순 결과, 흔들리던 마케도니아 왕국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특히 강력히 저항했던 테베에 가혹한 보복을 가해, 위대한 시인 핀다로스(Pindaros, BC 518?~BC438?)의 후예들을 제외한 주민 전체를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버렸다. 알렉산드로스는 나중에 이를 크게 뉘우치고는 테베의 생존자들이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다고 하는데, 플루타르코스 등은 그것이 이 젊은 영웅의 이중인격을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법의 정신]을 쓴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스키외처럼 이를 고도의 정치술이라 본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힘으로 제압하고, 하나를 골라 잔인무도하게 대함으로써 두루 본보기를 보이며, 한편 관대한 모습도 보여주어 “이 지배자에게 대항하는 일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패턴은 알렉산드로스의 생애 내내 반복된다.
아무튼 이제 그리스 세계가 다시 마케도니아 앞에 엎드렸음을 확인한 그는, 칼을 채 칼집에 꽂지도 않은 채 소리쳤다. “자, 이제는 동방으로 가자! 페르시아의 야만인들에게 복수할 때가 왔다!”
나라의 크기로나 인구의 숫자로나 그리스의 수십 배가 넘는 페르시아. 그런 대국을 정벌하겠다는 말은 언뜻 어이없게 들린다. 물론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는 두 차례나 페르시아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그것은 침략해온 적에 맞선 방어전이 아니었던가? 입장을 바꿔서 침략해들어가 싸웠을 때도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물리쳤다고 해서, 호찌민이 “이제는 태평양을 건너가자!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복수하자!”라고 외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러나 저 “아나바시스”를 돌이켜보면, 그리고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그렇게까지 무모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이란 중서부에서 일어난 페르시아는 불과 수십 년 만에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이집트까지 정복하여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했다. 그러나 그렇게 넓은 제국을 유지하는 일은 정복하는 일보다 어려운 법이다. 필리포스가 죽자마자 피정복자들이 들고일어났듯이, 정복자가 본고장으로 물러갔다 싶으면 언제 구세력이 힘을 모아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데, 판도가 넓은 만큼 제때에 대응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르시아는 “끝없는 정복”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가령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면 항복한 병력을 앞세워 시리아를 치고, 시리아를 손에 넣으면 시리아 군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을 공격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피정복자가 딴마음을 먹을 틈이 없으며, 새로운 정복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페르시아의 전쟁 영웅으로 부각되거나 함으로써 앞으로도 제국에 반기를 들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패턴은 페르시아 전쟁의 패배로 제동이 걸렸다. 그때부터 페르시아는 다른 방식으로 제국을 유지하려 했다. 즉 각지의 태수(사트라프, Satrap)가 평시에 지휘하는 병력을 최소화하고, 수도 주변에만 강력한 상비 병력을 둔 채로 제국민의 대다수를 생업에 종사하도록 한다. 지방의 군사력을 해체함으로써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없앤 것이다. 그렇게 늘어난 생산력으로 확보한 막대한 재원을 바탕으로 변방의 불순 세력과 외세를 회유하는 외교를 전개하며, 그래도 반란이나 침략이 발생하면 해당 지역의 사트라프에게 인근 지역의 병력을 몰아주어 한동안 방어하다가 중앙에서 온 주력군으로 물리친다. 말하자면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왜군을 상대하며 썼던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와 흡사한 방식으로 제국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병력이 모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신속하게 움직이는 적에게는 효과적이지 못하며, 병력이 모였다 해도 대부분 밭일 하다가 끌려나온 비전문 병력인데다 다양한 지역 출신들이라 서로 소통이 어렵고 규율이 서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따라서 잘 훈련된 정예병력 앞에서는 ‘오합지졸’이 될 소지가 높았다. 그런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 사건이 바로 기원전 5세기 말의 “아나바시스”였다. 비록 초기에는 전쟁 목표를 숨겼지만, 키루스가 이끄는 원정대는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거침없이 진격해왔다. 또 제국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구릉지대를 주로 이용했다지만, 다시 수천 킬로미터를 돌아나와 그리스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따라서 페르시아가 얼마나 약점 투성이인지가 만천하에 드러났던 것이다.
다만 원정군이 처음 발을 디디게 되는 소아시아만은 예외였다. 그리스와 접해 있고, 명목상으로만 제국에 충성하는 그리스 식민 도시들이 많았던 이 지역의 사트라프에게나 각 지방에는 상당 규모의 정예병력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기원전 334년에 알렉산드로스가 이스트무스 회합에서 ‘페르시아 원정군 총사령관’에 뽑히고, 페르시아 전쟁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 아래 헬레스폰트를 건넜을 때, 그에게 맞선 가장 완강한 저항은 소아시아의 그리스 계열 병력에게서 나왔다(본토에서도 전 그리스가 일치단결해 페르시아 타도에 나섰던 것은 아니며, 가령 스파르타는 반(反) 마케도니아 노선의 일환으로 알렉산드로스 원정을 방해하고 나섰다).
사자와 싸우는 알렉산드로스(왼쪽)를 묘사한 모자이크 그림.
어쨌든 아시아에 발을 디딘 알렉산드로스는 제일 먼저 트로이의 유적지에서 제례를 드리고 아킬레우스의 묘지로 알려진 곳에 분향했다. 그리스 연합군이 아시아의 트로이를 멸망시켰다는 전설적인 트로이 전쟁을 재현하겠다는 표시였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연합군인 보병 3만, 기병 4천 병력의 상당수는 용병이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케도니아 왕실 재산을 탕진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휴대 식량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던 듯한데, 30일이면 바닥이 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렵게 모은 만큼 병사들은 모두 정예였으며, 산악 지형에서 활약하도록 훈련받은 경보병대와 공성탑, 투석기 등을 다루는 특수부대, 의무대, 그리고 현지를 답사하며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한 학자들과 점술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우수하고 다양한 병종의 병력에다 필리포스 이래 갈고 닦은 선진적 전술, 전투에 앞서 반드시 첩자를 보내 적의 사정을 파악하고 싸움에 임했던 알렉산드로스 특유의 정보전, 그리고 세상 천지에 오직 알렉산드로스만이 발휘했던 초인적인 카리스마와 리더십은 앞으로 트로이 전쟁을 뛰어넘는 신화의 수립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아시아에 상륙한 지 며칠 만에 그라니코스 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전투에서, 페르시아 측은 세 명의 사트라프가 끌어모은 1만 여의 현지 병력에다 멤논이 지휘하는 약 8천의 그리스 용병단으로 맞섰다. 그리스 용병단은 용감하게 싸웠으며 알렉산드로스에게 육박하여 그를 거의 전사 직전까지 몰고 갔을 정도로(스피트리다테스라는 병사가 휘두른 도끼가 알렉산드로스의 투구를 두 조각으로 쪼갰지만, 제 2격을 날리려는 찰나 클레이토스가 달려와 해치웠다고 한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마케도니아-그리스 연합군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중군이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이는 동안 알렉산드로스의 기병대가 페르시아 군의 좌우익을 붕괴시켰으며, 이로써 졸지에 포위되고 만 용병대도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첫 전투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했던 전투에서 가까스로 이긴 알렉산드로스는 사르디스-에페소스-밀레투스-할리카르나소스의 순서로 소아시아 서해안 지대를 정복해 나갔으며, 334년과 333년 사이의 겨울에는 소아시아 중부로 진출하여 리디아와 프리기아를 손에 넣었는데, 이때 그의 전도유망함을 알려줄 두 가지 사건을 맞았다.
이수스 전투를 묘사한 로마 시대 폼페이의 벽화. 알렉산드로스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누군가의 단검에 의문의 부상을 입었다.
하나는 프리기아의 고르디움에서 “이것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정복하리라”는 전설이 있던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을 푼 일이고(정확히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칼로 두 동강을 냈다는 이야기는 아주 후대의 창작이며, 플루타르코스 등은 매듭을 연결한 못을 뽑아서 풀었다고 쓰고 있다), 다른 하나는 그를 패배 직전까지 몰았던 용병대장 멤논이 제2전을 준비하다가 병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용기백배한 그는 카파도키아의 바위 지대를 지나 타우루스 산맥을 넘었고, 333년 여름에는 ‘킬리키아 관문’이라 불리던 좁은 협곡을 통과해 소아시아 남동단의 킬리키아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리를 했던지 심한 병이 들어, 몇 달 동안 그곳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지체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Darius Ⅲ, ?~BC 330)는 뭘 하고 있었을까? 한편으로 병력을 모으고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돈을 앞세운 외교와 계략을 동원했던 것 같다. 알렉산드로스에게, 그리고 아마도 은밀히 당시 마케도니아의 제2인자였던 파르메니오에게 밀사를 보낸 그는 한편으로는 적당한 양보를 받고 전쟁을 끝낼 것을 사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알렉산드로스 진영의 교란 내지 알렉산드로스 암살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르메니오는 그라니코스 전투에 앞서 알렉산드로스에게 전투를 미룰 것을 건의했고(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엉뚱한 주장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킬리키아에서 몸져누워 있을 때는 충직한 의사 필리포스가 암살을 시도하고 있으니 그가 주는 약을 먹지 말라고 제보했으며(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의 약 덕분에 쾌차했다), 이수스 전투 이후에는 “제국을 양분하자. 유프라테스 강 서쪽 땅을 모두 알렉산드로스에게 준다. 대신 전쟁을 그치고 혼인으로 동맹국이 되자.”는 다리우스의 메시지를 전하며 받아들을 것을 종용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파르메니오였다면 받아들이겠지만, 알렉산드로스인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묘한 말로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333년 11월에 킬리키아로 대군을 몰고온 다리우스를 알렉산드로스가 이수스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했을 때, 그는 허벅지에 “단검에 찔린 부상을 입었다. 누가 어떻게 부상을 입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가까운 거리에서 왕에게 단검을 꽂았다면, 적보다는 동료의 소행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수스 전투로 알렉산드로스는 실질적으로 유프라테스 강 서쪽에서 거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는 파르메니오를 시리아로 보내 자기 진영에서 떨어트려 놓은 다음, 스스로는 페르시아의 중심부로 밀고 들어가는 대신 동지중해 연안을 남하하여 페니키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를 잇달아 손에 넣었다. 이들 나라는 저마다 오랜 문명을 가꿔왔으며, 페르시아의 힘에 굴복했으되 이 “서쪽 야만인들”과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페르시아가 처음에는 현지의 종교와 관습을 관용했으나, 제국의 힘이 기울면서는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한 페르시아의 문화를 강제하기까지 했으므로 반발은 갈수록 커졌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로 이 틈을 파고들어, “나는 침략자가 아닌 해방자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가루로 만들어 주겠다.”는 메시지를 동지중해 세계에 알리며 진군했다.
기원전 332년 1월부터 8월까지는 페니키아의 티레를 공략했다. 2백 척의 군선으로 바다를 메우고, 육지에서는 흙을 쌓아올려 만든 둑길로 공성기(攻城機)를 올려, 들이치고 또 들이친 끝에 마침내 성이 넘어가자 수천 명을 학살하고 수만 명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테베에서와 같이 “본보기”를 보인 것이다. 그 덕분인지 아무 저항 없이 맞아준 이집트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파라오의 칭호를 받았으며, “아문 신(이집트 최고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널리 선전하고, 나일 삼각주에 최초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건설했다. 그는 이후의 원정에서 이런 신도시를 70곳 가까이 세우게 된다.
이제 서부전선을 평정한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북상하고, 시리아를 거쳐 페르시아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장정에 돌입했다. 바빌론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다리우스는 그가 시리아 남단을 횡단해 바빌론으로 공격해올 것으로 예상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보다 북쪽 길을 택해서 아시리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를 종단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는 더 먼 길을 돌아가는 셈이지만, 남쪽 길을 택할 경우 사막을 횡단해야 하므로 지친 상태에서 적과 마주칠 것을 꺼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자 다리우스도 약 7만 명의 병력(기록마다 20만, 심지어 100만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하나 과장이 심하며, 7만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을 이끌고 북상했다. 페르시아 군은 그야말로 있는 병력 없는 병력을 긁어모아 만든 군대였다. 6만에 가까운 보병은 대부분 각지에서 동원한 농민들이라 전력이 약했으며, 왕실 근위대 2천 명과 그리스 용병 2천 명이 주력이었다. 1만에 가까운 기병은 페르시아, 메디아에서 시리아, 아르메니아, 스키타이, 인도에 이르기까지 20개 지역에서 모여들어 이루어졌고, 이밖에 전차 2백대에 코끼리도 15마리 포함되어 있었다.
기원전 331년 10월 1일, 이라크 북부의 가우가멜라와 아르벨라 마을 사이에서 양군은 맞붙었다. 알렉산드로스는 1만 2천의 팔랑크스(Phalanx) 중장보병을 핵심으로 하는 4만의 보병과 7천의 기병으로 싸웠다. 그런데 좌익을 담당한 파르메니오가 졸렬한 전투(!) 끝에 밀리면서 알렉산드로스의 진영이 두 동강이 나고 보급대가 적의 손에 떨어지는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아군을 공격하느라 흐트러진 적진을 뚫고 다리우스에게 직접 공격을 퍼부었다. 다리우스가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고, 이쪽 진영 깊숙이 들어왔다가 고립된 격이 된 적의 선발대를 다시 알렉산드로스가 맹타하면서 페르시아 군은 와해되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몽테스키외의 말처럼 “이수스 전투는 그에게 티레와 이집트를 주었다. 아르벨라(가우가멜라) 전투는 그에게 전 세계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