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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고향 풍기 원문보기 글쓴이: 배규택
시보네 에세이 45
소백산 기슭에서 온 신령한 뿌리
풍기인삼 이야기
문을 열면 향이 먼저 들어온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다.
흙냄새인 듯, 약초 냄새인 듯,
그러면서도 어느 것과도 다른
소백산 아래 풍요로운 터 풍기
인삼가계의 문을 열 때마다
코끝에 안기는 그 냄새는,
그리운 냄새이고
사랑을 품은 향기 같다.
고향을 떠난 사람에게
그것은 일종의 시간 여행이 된다
눈을 감으면 소백산 자락 아래
해가 잘 드는 붉은 차양 아래,
황토 빛 인삼들이 포개져 있던
그 풍경이 떠오른다.
나는 그 냄새와 함께 태어났고,
그 냄새와 함께 자랐다.
그래서 그 냄새가 좋고 늘 사무친다.
풍기는 그런 내고향이다.
왜 하필 풍기인삼인가
인삼은 전국 여러곳에서 자라지만,
풍기 인삼은 다르다고 한다.
허풍이 아니다. 소백산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약방이다.
북위 36도에서 38도 사이,
낮은 뜨겁고 밤은 서늘한
이 산자락의 기온 차를 견디며
인삼은 파종부터 수확까지
꼬박 6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 긴 세월 동안
소백산 자락에서
생육 기간만 180일 —
다른 지역보다 훨씬 길게
햇빛을 받으며 자란다
서두르지 않는다. 급하지 않다.
빛과 바람과 일교차를
온몸으로 흡수하며
조금씩, 조금씩 속을 채운다.
그 결과는 숫자로 나타난다.
미국산 인삼에서
19종의 사포닌이 발견되고,
중국산 인삼에서 15종이 확인될 때,
풍기 인삼에서는
무려 36종의 사포닌이 검출된다.
사포닌은 인삼의 핵심 약효 성분이다.
수십 년간 이 땅 인삼경작자들이
경험으로 알고 있던 것을
현대 과학이 뒤늦게 증명해낸 셈이다.
육질도 다르다.
풍기 인삼을 약탕기에 넣고
몇 시간을 달여도 뭉그러지지 않는다.
다른 인삼들이 흐물흐물해질 때,
풍기 인삼은 끝까지 형태를 유지한다.
농부들은 이것을
"속이 찼다"고 표현한다.
빈속이 아니라는 뜻이다.
삶을 제대로 살아낸
뿌리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이다.
인삼밭에 오줌 누지 마시오
풍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반드시
가르치는 것이 있었다.
"인삼밭 근처에서는 절대
삿갓을 벗거나(볼일을 보거나)
오줌을 누면 안 된다.“
어린 시절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단순한 어른들의 엄포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금기에는
꽤 그럴듯한 사연이 있다.
오줌에는 질소 성분이
다량 함유돼 있는데, 인삼은
이 성분에 몹시 예민하다.
자칫 뿌리가 상하고
6년간 공들인 밭이 망가질 수 있다.
과학이 뒷받침하는 금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한때 농부들은
수확철이 되면 인삼밭
주변에서 아예 잠을 잤다.
도둑보다 무서운 것이
'밭머리에 몰래 볼일 보는 행인'이었다는
우스개가 지금도 전해진다.
조선시대, 인삼밭은 금고나 다름없었다.
한 뿌리 값이
쌀 몇 가마니와 맞먹던 시절—
밤이면 밭을 지키는 사람과
훔치려는 도둑들 사이에
숨 막히는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도둑이 들면,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뜻밖에도 장정이 아니라
중년의 부녀자들에게 향했다.
이유는 묘하게 현실적이었다.
인삼은 단순한 약초가 아니었다.
기운이 쇠한 남편의 몸을 일으키고,
메말라가던 기력을 되살려
다시 삶을 이어가게 하는 힘—
집안의 기둥을 다시 세우는
‘가장의 숨결’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혹시… 아낙네들이
몰래 캐다 먹인 게 아니겠어?”
누군가는 병든 남편을 위해,
누군가는 아이들의 생계를 위해,
또 누군가는
말 못 할 부부의 사정을 위해.
그 마음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도둑이라는 누명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어둡고 두려운 밤길을 나섰을까.
어쩌면 인삼 한 뿌리는
약이 아니라,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풍기 인삼의 효능을 애기하는
재미있는 사투리가 있다.
아이고 아지매요, 바깥 양반이
메가리가 한 개도 업어 가지고
낮이고, 밤이고 별 재미가 업니껴?
맴이 얼매나 아프고 속상할리껴
내사미 그마음 잘아니더
내가 바늘로 찌르면서 견디고 버티다
풍기인삼 덕분에 요새
아주 룰루랄라 하니더 왜
오늘고마 영감텡이 한태
풍기인삼 한번 따리 미기 보래요
아주 기가 맥히니더
대낄이래요 바로 저억에
표띠가 팍팍나고 사람이 고마
뭔 힘이 글쿠로 쎄지는동 몰래요
아지매, 아마 기절 초풍 할끼래요
하이튼 히안 얄라꿍해요
내사마 얼매나 좋은동 아주 시껍핸니더
내가 엉가이 좋아가지고 이렇게
남사시러운 줄도 모르고
야지랑 떨겐니껴
풍기인삼도 안먹어 보고 메가리 업시
고개 숙이고 양기가 부족하다는 동
그딴소리 하지 말고 ..........
알았지요 꼭 따리 미기 보고
효과 보거든 내한테 살짝
그 뜨거운 야기 부탁 하니더 ㅋㅋㅋ
그 시절 인삼은 약이면서,
사랑이었고,
걱정이었으며,
때로는 비밀이었다.
어쩌면 그 뿌리 하나에는
아내의 마음이 통째로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불을 지른 상인, 임상옥
인삼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조선 최고의 거상, 임상옥이다.
그가 청나라 인삼 시장에
물건을 가져갔을 때,
중국 상인들은 미리 짜고
가격 후려치기 담합을 벌였다.
어떤 조선 상인도 그들이
제시한 헐값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불매 동맹을 결성한 것이다.
앞이 막혔다. 물건은 쌓여가고,
숙박비는 날마다 늘어난다.
그때 임상옥이 한 일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인삼 꾸러미들을
광장 한가운데로 끌어내더니,
불을 질렀다.
"차라리 태워버리겠다.“
연기가 피어오르자
중국 상인들이 먼저 무너졌다.
고려 인삼이 사라진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어떤 협박보다 무서웠다.
결국 처음 제시 가격의 열 배를 주고
나머지 인삼을 사들였다.
이 한 장면은 훗날 드라마
'상도'에서 되살아나
수백만 시청자의 가슴을 울렸지만,
사실 그 원본은
풍기와 개성 사이 어딘가,
인삼 한 뿌리의 값어치를
온몸으로 믿었던 한 사내의
결기에서 시작됐다.
값은 결국 흔들리지 않는 자가
매기는 법이다.
짝퉁과 진품 사이
예나 지금이나
진짜가 있으면 가짜가 따른다.
조선시대에도 임금님께
가짜 인삼을 진상했다가
형벌을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도라지 껍질을 정교하게 다듬어
인삼 모양으로 만들거나,
아교로 부서진 조각들을 붙여
완전한 형태를 꾸미거나,
꿀에 절여 무게를 늘리는 방법까지
사기꾼들의 솜씨는
대단히 창의적이었다.
관리들이 골머리를 앓았다는 기록이
이해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인삼은
독립운동의 은밀한 동반자가 됐다.
인삼 행상으로 위장한 독립투사들이
정보를 나르고 항일 연설을 펼쳤다.
한복 차림으로
"이것이 진짜 고려인삼입니다" 라고
외치던 그 목소리 안에는,
단순히 뿌리를 파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나라를 잃어도 인삼의 이름만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오기,
혹은 자존심 같은 것이.
현대 과학이 밝혀낸 것들
오랫동안 '경험'과 '전설'에
기대왔던 인삼의 효능은 이제
하나씩 과학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이화여대 연구팀은
풍기 인삼의 사포닌이
뇌 속 아밀로이드 생성을 억제하고,
기억을 담당하는 신경 회로를
활성화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치매 예방과 인지 기능 개선에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코로나19 유행 시기에는
홍삼 추출물이 바이러스의
부착과 증식을 억제한다는
세포 실험 결과도 나왔다.
혈압 조절, 간 보호,
항암 작용, 피부 노화 억제까지
그 목록은 아직도 늘어나고 있다.
동의보감이 수백 년 전에 적어놓은
"신진대사 기능 강화"라는 문장이,
이제는 분자 단위의 논문으로
다시 쓰이고 있는 중이다.
물론 만병통치는 없다.
과도한 기대는 금물이다.
사상체질에 따라
맞지 않는 사람도 있고,
과다 복용은 오히려 독이 된다.
하지만 소백산 자락에서
6년의 시간을 버텨낸 한 뿌리가
우리 몸 어딘가에 조용히
손을 내민다는 사실은,
여전히 경이롭다.
향기의 기억
나는 지금도 가끔
그 향기를 꿈에서 맡는다.
소백산 자락 아래,
붉은 차양이 드리운 작은 인삼가게.
문을 여는 순간, 코끝을 스미듯 채우던
묵직하면서도 은은한 그 향.
여섯 해라는 시간이 흙과 햇빛,
그리고 서늘한 산바람을 머금고
천천히 스며들어 만들어낸 냄새였다.
풍기에는 인삼 향기 밴 샘물이
말없이 흘러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고 있는 듯 하다.
그 향을 떠올리면
그리움이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곱고 어여쁜 추억들이
물결처럼 마음 위에 번져간다.
맑은 샘물 같은 그 향기를
두레박 가득 길어 올려
한 모금, 또 한 모금
천천히 들이키고 싶어진다.
아,
그것이 바로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의 냄새다.
발길을 멈추고
코끝으로 깊이 들이마시던 그 향기,
그것은 소백산이 품어 보낸
고향의 따사로운 숨결이었다.
고향이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눈으로 보는 풍경이 아니라,
코끝에 남아 있는 냄새.
손끝에 남아 있는 감촉.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한 땅이 수백 년간 길러온 이야기.
풍기 인삼은 뿌리이면서 동시에,
그 땅 사람들이 대대로 쌓아온
삶 그 자체다.
소백산은 오늘도 그 뿌리를
천천히, 단단하게 키우고 있다.
2026년 4월 9일
소백산 기슭 풍기를 고향으로 둔 이가,
그 향기를 그리며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