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디플레이션 상태에 빠져들면) 헬리콥터로 공중에서 돈을 뿌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겠다."
미국의 중앙은행이라 할 수 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FRB) 의장 벤 버냉키(Ben Bernanke)가 2002년에 했던 말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그는 "돈을 뿌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약속을 벌써 3차례나 이행했다. 헬리콥터에서 뿌린 것이 아니라 미국 재무성 윤전기를 밤새도록 돌려 달러화를 찍어내는 방식으로.
미국만이 아니다.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중앙은행 마리오 드라기 총재 역시 지난 9월 '무제한 국채 직매입'이라는 강력한 돈 살포 정책을 꺼내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일본의 차기 총재로 유력시되는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 역시, 다음 달 총선에서 승리하면 "일본은행 윤전기를 돌려서라도 무제한으로 돈을 찍어내겠다"고 말해 '윤전기 아베'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런 정책을 고급스런 말로는 '양적 완화'라고 부르는데, 사실 이쯤 되면 거의 막가자는 수준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자들이 철의 법칙처럼 모셔오던 시장 원리, 즉 수요와 공급 법칙에 따라 각국 환율이 정해지도록 두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자국 화폐를 마구 찍어내는 방식으로 환율을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양적 완화 정책의 목표는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수적으로 환율을 만지작거릴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환율을 만지는 이유는 자국 산업의 수출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다. 자국 화폐가 시장에 많이 풀리면 그만큼 화폐 가치가 하락하게 되고, 이 경우 수입물가는 올라가지만 수출가격은 반대로 떨어지게 된다.
"현지에서 생산하고 현지에서 판매한다."
공황 이후 세계 자동차산업의 중요한 판도 변화를 단순하게 표현한 말이다. 그 이전까지 완성차업체의 생산은 주로 '무노조 저임금 지대'를 향했다. 그래서 중국과 인도에 세계 유수의 완성차 메이커가 공장을 짓고 생산을 늘렸고, 이곳에서 전 세계로 수출을 하는 방식이었다. 선적과 운반비용을 계산하더라도 값싼 임금이 이를 상쇄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황이 시작된 이후 변화가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변덕스러운 환율이 큰 문제였다. 값싼 임금만 믿고 생산을 늘리다가, 갑자기 해당 국가의 화폐 가치가 상승해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나라에서 팔릴 차를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환율이 변덕스럽게 변하더라도 큰 문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최대의 자동차 소비시장인 미국에 수출을 하던 나라들이 너도나도 공장을 미국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미국에 있던 공장이 값싼 임금을 찾아 아시아와 남미를 향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가 벌어진 것이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2009~2010년에 독일의 일간지 <슈피겔(Spiegel)>은 독일 제조업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현상을 '대탈출(Exodus)'이라 표현할 정도였다.
달러화($)와 유로화(?) 가치의 하락
아래 그래프는 네이버가 제공하는 환율 그래프 서비스를 활용해, 지난 5년간 원화 대비 달러화와 유로화의 가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그려본 것이다. 위쪽의 주황색 곡선이 원화 대비 달러화의 가치를 나타내고, 아래의 녹색 곡선은 유로화 가치를 나타낸다. 언뜻 쳐다보기만 해도 지난 5년간 환율이 얼마나 변덕스럽게 요동쳤는지를 잘 알 수 있다. 5년 동안 달러화는 무려 70%, 유로화는 45% 가까이 변동성을 보였으니 말이다.
ⓒ네이버
우선 공황의 출발점이었던 2008년 9월을 기점으로 2009년 말까지 달러화와 유로화 가치가 갑자기 치솟으며 고공행진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010년에 달러화는 잠시 치솟다가 다시 가라앉는 반면, 유로화는 지속적으로 하락하며 일정 선을 유지하게 된다. 2011년에도 달러화는 잠시 치솟다가 하락하는 반면, 유로화는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공황이 터진 직후 원화 대비 달러화와 유로화의 가치가 상승하는 것은 2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달러화와 유로화 자체의 가치가 상승한 것인데,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상대적으로 안전자산으로 인식되는 미국과 유럽의 화폐로 돈이 몰렸기 때문이다. 나머지 하나는 원화 대비 두 화폐의 가치가 특별히 상승한 것인데, 미국과 유럽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주식을 팔면 자국 화폐로 환전을 하기 마련인데, 이 때문에 달러화와 유로화 수요가 급증하므로 가치가 상승하게 된다.
그런데 2010년에는 유럽 재정위기가 터지면서 마찬가지로 안전자산이라 생각되는 달러화로 돈이 몰리게 되고, 유럽 주식시장에서 미국 투자자들이 빠져나가게 되므로 유로화 가치는 떨어지고 달러화는 상승하게 된다. 2011년 8월부터는 미국 재정위기가 터져 한국 주식시장에서 미국 투자자들이 빠져나가면서 원화 대비 달러화 가치가 갑자기 치솟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잠깐씩 급등하는 국면들을 제외하면, 두 화폐 모두 2009년 초에 최고점을 찍은 후 지난 2년 동안 지속적으로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몇 개월 사이만 살펴보면 큰 변동 없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달러화에 비해 유로화의 하락 속도가 더 빠른 편이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앞서 설명한 것과 연동해서 생각한다면, 2009년 내내 원화 대비 달러화와 유로화가 고공행진을 했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 한국의 수출 대기업들이 유리한 조건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2011년을 경유하면서 원화 대비 두 화폐가치가 떨어지면서 조건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미국과 유럽 모두 양적 완화 정책을 공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에, 달러화와 유로화 가치는 더욱 떨어지고 반대로 원화 가치가 올라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급기야 지난 22일 기획재정부는 긴급 브리핑을 열어 환율 방어에 나설 것임을, 즉 지속적인 원화 가치 상승 현상을 인위적으로 막아보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환율전쟁의 제2막이 열린 것이다.
GM이 오펠 살리기에 나선 것이 과연 우연일까?
이런 취지에서 최근 차세대 쉐보레 크루즈를 한국에서 생산하지 않겠다는 GM의 방침을 살펴보자. 냉정한 자본의 시각에서 보자면 매년 평균 10억 달러의 손실을 입는 GM의 유럽 법인 오펠은 매각하는 것이 속 편할 수 있다. 그런데 2009년 말 GM은 매각 양해각서까지 체결한 상태에서 돌연 매각을 철회하고 손실투성이 오펠을 유지하는 유턴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전략적 판단이 한몫하게 되는데, GM의 전 세계 법인들 중 중소형차 개발과 생산에 강점을 갖고 있는 곳이 딱 2곳 있다. 유럽 법인 오펠과 한국GM이다. 공황기에 중소형차가 각광을 받기 시작하자 오펠 매각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사실 이 얘기만 놓고 보면 한국GM의 운명 역시 오래전부터 오펠과 경쟁관계였음을 말해준다. 크루즈와 올란도 개발을 한국GM이 주도했지만, 엉뚱하게도 라이센스는 오펠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그러는 사이 환율 변동이 상당히 크게 벌어졌다. 아래 그래프는 지난 5년간 원화 대비 유로화의 변동만을 별도로 뽑아서 그려본 것인데, 2009년 3월에 1유로당 1979원이라는 최고점을 찍은 후 지난 3년간 지속적으로 하락을 거듭해 11월 26일 현재 1406원까지 떨어졌다. 최고점 대비 30%나 떨어진 것이다. 지난주에는 1380원대로 떨어지기도 해 최근 5년간 최저점(1343원)에 근접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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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칫한 엑소더스(Exodus, 대탈출)
2009년 한 해 동안 유럽의 수많은 제조업 공장들이 해외로 이전하는 '대탈출'을 감행했다. 완성차 공장이 움직이니 부품사와 철강업체도 따라나서는 형국이었다. 너무나 극심한 '고유로' 현상으로 수출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유로화 가치가 떨어지고 있고, 유럽중앙은행의 양적 완화 정책으로 이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굳이 유럽을 떠날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원화 가치가 절상되고 있어서 한국의 제조업이 생산을 해외로 이전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물론 재정위기 이후 유럽 시장이 너무나 쪼그라들어서 공장 철수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미국의 포드는 유럽의 공장 2개를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환율은 상대적인 개념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테면 최근 미국·유럽·일본이 모두 경쟁적으로 양적 완화 정책을 펼치고 있어서, 달러화·유로화·엔화 모두 화폐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미국이나 일본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제조업체들로서는 유로화 가치 하락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엔화나 달러화 대비 하락 속도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제조업체들의 경우에는 문제가 다르다. 유로화 가치의 하락은 곧바로 수출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몇 가지 사건은 주목해볼 만하다.
첫째, 이탈리아의 피아트(FIAT) 사례이다. 2008년 경제위기 직후 피아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공장을 철수할 수도 있다고 협박을 해댔고, 실제로 시칠리아의 공장 하나를 폐쇄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한 개 공장을 더 폐쇄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으나, 최근 갑자기 입장을 바꿔서 공장 폐쇄는 없다고 선언했다. 이탈리아 국내 생산 물량의 15%를 수출로 돌림으로써 공장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국내 생산 물량 일부를 수출로 돌린다는 말은, 수출 자체가 늘어나지 않는 이상 결국 해외에서 생산하던 물량 일부를 국내로 옮겨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의 해외이전이 한때 유행이었는데, 이제 반대로 해외 생산 물량을 국내로 가져온다고? 이러한 계획에 이탈리아 정부 역시 발 벗고 나서 피아트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프랑스의 푸조-시트로엥 사례이다. 지난 7월에 푸조는 파리 북부의 오네 공장을 폐쇄하겠다는 발표를 한 바 있다. 3000명 규모의 공장을 폐쇄하고 유럽 전역에서 8000명을 감원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자 최근 정권 교체에 성공한 사회당 올랑드 행정부가 공장 폐쇄 계획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동을 걸었다기보다는 '푸조 공장 살리기'에 나섰다. 프랑스 정부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푸조-시트로엥의 금융 부문 자회사인 방크PSA파이낸스(BPF)에 50억~70억 유로 규모의 지급보증을 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3년간 한국 돈으로 무려 10조 원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3년 전과 분명히 다른 흐름들이 유럽에서 포착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GM이 차세대 쉐보레 크루즈 생산에서 한국 공장을 제외하는 결정이 내려진다. 이미 수많은 외신들을 통해 한국의 생산 물량이 유럽의 오펠로 옮겨질 것이 확실시된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 쉐보레 크루즈 전기차. ⓒ뉴시스
크루즈는 신호탄에 불과하다
그렇다. 크루즈는 신호탄에 불과하다. 그저 한국GM 노조를 손봐주겠다는 수준을 넘어서, 전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물론 민주노조를 파괴하는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 절대로 놓지 않는 목표점이다. 그러나 또 다른 지점, 즉 어디에서 무엇을 생산하는 것이 이윤의 극대화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항목도 존재한다.
지난주에 갑자기 한국GM은 사무직을 포함해 직원 7000여 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접수한다고 발표했다. 올해 초 부장급 이상을 상대로 희망퇴직을 실시했던 것을 확대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현장의 하급관리직인 '공장'들까지 희망퇴직 대상으로 확대했다는 점이다.
2008년 경제위기 직후 한국GM(당시 명칭은 'GM대우')이 실시한 구조조정 공격은 희망퇴직이 아니었다. 2009년 4월에 부평공장의 1000명에 달하는 비정규직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우선 해고 반대"를 외쳤다. 하지만 이것도 상황이 달라졌다. 비정규직 해고를 건너뛰고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정규직을 향해 공격이 직선으로, 곧장 날아온 것이다.
한국GM은 구조조정 차원이 아니라 직원들이 원해서 실시하는 것이라 발표했지만, 순진하게 그 얘기를 믿어주고 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참으로 빠른 속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