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송준길의 문인으로 1648년(인조 26) 진사에 입격하고, 1650년(효종 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대교, 봉교, 세자시강원설서, 성균관 전적을 거쳐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병조좌랑을 지냈다. 이후 사간원정언과 세자시강원사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1656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등을 지내면서 대신들과 시폐(時弊)를 놓고 다툰 끝에 조정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함경도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7개 고을의 주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 중앙에 돌아와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1662년(현종 3) 잠시 여주로 물러나 앉기까지 홍문관부교리·교리, 사간원헌납, 경상우도염찰사, 이조정랑, 성균관직강 등을 지냈다. 1663년 이후 이조정랑, 홍문관교리·응교, 사간원사간, 사헌부집의, 제용감정(濟用監正), 사도시정(司䆃寺正), 의정부사인 등을 두루 역임하다가 1665년 전라도관찰사로 발탁되었다. 이어 장례원판결사, 사간원대사간, 승정원승지,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668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다시 평안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671년부터 형조판서, 대사헌, 의정부우참찬,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겸 총융사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충주에 내려가 지내다가 지금의 포항 흥해(興海)로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공조판서, 호조판서겸 선혜청당상,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서인 정권을 주도하였다. 1681년 3월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다. 이후 점차 외척으로서 정권을 오로지 한다는 비난이 일어 관직에서 물러난 후 타계하였다. 묘소는 여주시 여주읍 능현리 이다. 효종의 묘정과 장흥 연곡서원(淵谷書院)에 배향되었다. 경서에 밝아 <민문정유집(閔文貞遺集)> 10卷 10冊이 전한다.
■ 이민기(李敏琦 인천人 27세, 1646년~1704) 선생 : 자는 경징(景徵), 호는 만수재(晩守齋)이다. 父 이원욱(李元郁)이 일찍 별세하여 母 순창趙氏의 가르침 속에 자랐다.
휼륭하신 옛분들을 모시는 장흥군 연곡서원이네요.
장흥군의 역사인것 같기도 하구요.
덕분에 역사공부 잘하고 가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