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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8월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청주]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신명 34, 1 - 12
† 복음 : 마태 18, 15 - 20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1917년
성모 신심 단체인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콜베 신부는 평생을 선교사로 살아가다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여기서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용소에서는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하는 벌이 있었다. 지목된 열 명
중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다며 울부짖자 콜베 신부는 그 사람을
대신하겠다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결국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굶겨 죽이는 아사 형벌을 받고 처절한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1년 지하
감방에서 선종하였다. 이러한 그를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다.
★ 주님께서는 모세를 느보 산에 오르게 하시어 약속의 땅을 두루 보여
주신다. 뒤이어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숨을 거둔다.
백성은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애도하고, 여호수아가 모세의 임무를
계승한다(제1독서).
★ 주님께서는 모세를 느보 산에 오르게 하시어 약속의 땅을 두루 보여
주신다. 뒤이어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숨을 거둔다.
백성은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애도하고, 여호수아가 모세의 임무를
계승한다(제1독서).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함부로 단죄할 것이
아니라 몇 단계의 신중한 처신을 요구하십니다.
첫 번째는 죄를 지은 형제와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라고 하십니다.
만일 이 단계가 없다면 죄지은 이가 자신의 잘못도 깨닫지 못한 채
죄인으로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분별 있는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다시 그 죄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
번째로는, 두 번의 타이름으로도 그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여러 사람 앞에서 잘잘못을 따지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이끌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세 단계를 거치고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를 더 이상 형제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처음부터
그를 단죄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러한
단계를 생략한 채 처음부터 여러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의 행동을
고발하고 그를 단죄합니다. 또는 자신에게 죄지은 형제와 단둘이
만나서 이야기는 전혀 하지도 않으면서 마음속으로 미워하기만
하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에 대하여 뒷소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죄지은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려면 그의 잘못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깨우쳐 줄 때에도 상대편의 인격을 존중하며 신중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8월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 18,15-20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
“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 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성무일도 ).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빛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그것을 일깨워 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바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충고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칭찬은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쓰지만 약이 되는 바른 충고를 해줄 수 있고 또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더더욱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고 하셨으니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형제가
되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성녀 안젤라
메리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고를 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남을
충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백옥같이
희게 만드시길 기도하면 주님은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쓴 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로 듣기를
희망합니다.
깊은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마주 오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것 역시 사람이랍니다. 사람이 제일 좋기도 하면서 제일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더없이 편하지만 틀어지면
그것만큼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내 기대와 상대의 바람,
그리고 허물조차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을 주고받기까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은 ‘무관심’이라는
시대적 유행병을 안타까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우리의
일차적 의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으로
치달아가던 1941년 아우슈비츠 감방에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내와 자식이 있습니다.”애원하며 매달리는 한 죄수를
위해 “저 사람을 위해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하고 ‘아사형’을
자처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한 감방에서 “증오는 파괴를
낳을 뿐이며 사랑은 창조를 낳는다.”고 사형수들을 위로하며 성가를
부르고 주님을 찬미하며 당신이 선택하신 길을 평화롭게 가셨습니다.
감방의 간수들에게도 큰 감동과 존경을 주었다고 하니 구약의 요셉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셨기에 그 어느 것도 그를
억압할 수 없었고 자유를 빼앗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차지하였습니다.
형제애를 몸소 실행하신 성인의 삶이 우리에게서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슬픔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구원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고통
안에서 기뻐하고 슬픔 안에서도 희망합니다. 시련이나 위기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죄악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에서든지 형제적 사랑으로 모두를 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한마음으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의 응답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군대있을 때 인상 깊었던 제 동기가 생각납니다. 이 군대 동기가
아직까지 기억나는 이유는 워낙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지요. 남들은 훈련병 기간 동안 1~2통도 받기 힘든
편지를 글쎄 애인으로부터 편지가 매일 2~3통씩 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 군대 동기는 아주 유명했지요. 그리고 6주간의 훈련이
끝나고 퇴소할 때 그 유별난(?) 애인이 왔는데, 이 둘은 남들이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애정 표현을 하더군요. 서로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자대 배치가 되고 얼마 뒤에 이 동기의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휴가 가서 둘이 헤어졌다고 하더군요. 평생 변함없는 사랑을
하면서 잘 살 줄 알았는데, 불과 몇 달도 안 되어서 갈라진 것이지요.
이 군대 동기를 보면서 내일 일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둘의 사랑만 있으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총 안에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즉, 주님의
은총이 둘의 사랑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 기도라는
대화를 통해 주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많은 이들이 원하는 성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기도를 힘없는 사람이 어쩔 수 없어서 외치는
하소연이라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도에는
나와 가정과 교회 그리고 이 사회를 주님의 사랑 안에서 충만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힘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기도가 우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 가정 안에서부터 언제나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힘없는 사람의 하소연이 아니라 주님의
응답을 끌어내는 가장 막강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기도의 응답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래’라는 응답, 둘째는 ‘안 돼’라는 응답, 셋째는
‘기다려’라는 응답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늘 첫째 ‘그래’라는 응답만을
요구하고 있지요.
특히 셋째의 응답을 받았을 때, 즉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그저 침묵 속에
있을 때는 저절로 불평불만과 각종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안에 주님의 사랑이 묻어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큰
잘못을 해서 야단맞을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아시면서도
침묵해주셨습니다. 그때 얼마나 큰 사랑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응답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만을 또 원하는 것만을 주시는 사랑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바라는 게 없어지는 순간 두려움도 사라진다(기욤 뮈소).
지금 강원도의 이렇게 멋진 곳에서 하루 잘 쉬고 있습니다.
응답된 기도
폭풍이 휘몰아치자 항해하던 배 한 척이 난파되었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지만 다행이도 파도에 밀려
해안에 도달한 두 사람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들이 도달한 곳은 무인도이었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기도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기도하기 전에 섬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한 사람은 이쪽 끝에 자리
잡아 기도하고 다른 한 사람은 저쪽 끝에 자리 잡아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누가 더 효험 있는 기도를 드리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쪽에 앉은 사나이는 먼저 먹을 것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무수히 많은 열매가 달린 나무를 발견하고는
열매를 따다가 굶주린 배를 채우며 기도에 응답한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 기도로 예쁜 처녀를 만나 결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며칠 후 그 기도가 응답된 듯 지나가던 배 한 척이 그 무인도 가까운
곳에서 난파되었고 그 배에서 한 예쁜 여인이 헤엄쳐 와서 무인도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기도한 대로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대쪽 사나이에게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쪽의 사나이는 신속한 기도의 응답에 신이 나서 다시 '이제
무인도를 벗어날 수 있도록 배를 보내 주십시오.' 하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배 한 척이 무인도에
상륙했습니다. 이쪽의 사나이는 기도응답에 감사하며 저쪽
사나이에게는 아무런 기도의 응답이 없었음을 알고는 저쪽 사나이는
하느님의 축복받을 위인이 못 된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연락하지 않고
그냥 남겨둔 채 떠나려 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왜 너는 저쪽 사나이를
버려둔 채 혼자 떠나려고 하는가?' 이 쪽 사나이는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축복이므로 자신이 누리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크게 꾸짖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런 소리 말아라. 저
사람의 기도가 없었다면 너는 아무런 축복도 누리지 못 했을 것이다.'
이쪽 사나이는 지지 않고 다시 물었습니다.
'저 사람이 무슨 기도를 했기에 나의 축복이 모두 그의 덕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하느님이 말씀했습니다. '저 사람은 너의 기도가 모두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느니라.“
과연 우리는 어떤 기도를 주로 합니까? 기도는 교만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나를 낮추고 내가 아닌 남을 위한 기도를
할 때,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신앙은 함께 가는 것이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이 함게 살 수 있고,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 혼자 살 수 있습니다.'
2013년 다해 8월14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1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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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개인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에 충실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교회 공동체의 움직임에는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인다.
하느님과 일대일의 관계에 무게를 두는 것은 분명 더할 나위 없는 옳은 태도이다.
하지만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고통 받는 이웃과 나누라 하신다.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어 나아가는데 힘을 모으라 하신다.
신앙은 분명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시작되고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
즉 기도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다.
하지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함께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교만한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기도라면 나를 잊은 타인을 지향하는 기도가 주를 이루기 마련이다.
그리고 기도로 얻어진 답을 구체적인 삶으로 실천해야만 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두 사람이라도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곳에는 주님께서 계시다 말씀하신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다.
미사나 예배가 아름다운 이유들 중 하나는 함께 마음을 모아 청한다는 데 있다.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리하여 보다 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우리이기를 바란다.
신앙은 함께 가는 것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사랑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
2013년 다해 8월14일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마태 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사랑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
수감된 형제들, 그리고 소년원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절실히 다가오는
한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저렇게 정이 많고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는 느낌입니다. '저렇게 순박하고 의리 있는
아이들이 과연 무슨 일로…' 하고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지요. 다들 어찌 그리 단순한지 모릅니다. 다들
어찌 그리 잘 생겼고 또 어찌 그리 마음 씀씀이가 관대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욱'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담장 바깥에 있는 우리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성격적 결함 중 하나가 한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스스로를 잘 조절해 나가다가도
단 한번에 점수를 다 깎아먹습니다. 평소에 그리도 여유있어 보이고
유유자적하던 우리지만 단 한순간에 내적 상태가 돌변하는 체험을
하지요. 딱 1분만 참았어도 되는데 그 순간을 못 넘깁니다.
한번 비위가 상하고 마음이 틀어지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면서 얼굴은 즉시 싸늘한 냉기를 띱니다.
머리 위에서는 연기가 무럭무럭 나는 느낌입니다. 라면이라도 끓일
수 있을 정도로 열을 받습니다.
그런 상태는 분명히 비정상 상태이지요. 그런 상태에서는 지능지수가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무조건 입 꼭 다물고 시간을 버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걸 또 우리는 못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 주워 담지 못할 말을 내뱉게 됩니다. 주변에 누가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따놓은 점수를 완전히 다 까먹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 인간들의 약점을 잘 간파하고
계셨기에 '뚜껑이 왕창 열리는' 긴박한 상황 앞에서도 한 박자를 늦출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논리적, 단계적, 이성적으로 접근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나를 핍박하는 사람, 내게 몹쓸 말을 하는 사람, 기본이 안 된
사람, 눈꼴사나운 사람, 덜 되먹은 사람,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분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단 목소리부터 가다듬어야겠지요.
심호흡을 몇번 하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면 좋습니다. 최대한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하면 좋습니다. 그것도 조용히, 그리고
개인적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차분하게, 그러나 솔직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순간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지요. 상황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는 용기,
참으로 소중한 덕입니다.
이웃의 부족함이나 약점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직면하는 노력,
이보다 더 큰 형제애는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지닌 한계를(특히 스스로 바라보지 못하는 취약점) 정확히
바라볼 수 있도록 지적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형제에게 충고하는 과정에서 미성숙한 대화기법이나 대화 문화로
많은 경우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성숙한 대화 문화, 바로 예수님의 대화기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논리적이면서도 단계적, 이성적 접근, 진정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공동생활에서 상처는 필연적이라고 보면 정답입니다. 괴로운
것이 상처지만 결국 상처를 통하지 않고서는 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공동체에서 받는 상처는 상호성장의 장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상처는 상호 성화를 실현하는 장입니다. 성령께서는 상처와 고통을
당신 활동 장소로 선택하십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당부를 이번 한 주간 묵상거리로 삼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제 우리 혀를 하느님께 봉헌했으니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다치게 하는 말, 형제 가슴에 비수를
던지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도록 합시다. 우리 혀는 이제 봉헌된
혀이니 매일 주님께 찬미 노래를 드립시다. 앞으로는 우리 혀로
거룩한 말씀만을 선포합시다. 격려와 위로의 말만을 사용합시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2013년 다해 8월14일
어제는 정말 더웠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은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구는 것도 좋겠습니다. 차가운 빙수를 먹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 용광로에서 쇠를 만드는 분들은 정말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더운 여름에는 ‘납량특집’같은 것을 방송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주로 귀신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세상이 귀신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인가 봅니다.
더위를 식히는 의미에서 예전에 있었던 추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고3때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모자라는 판에 친구들과 문산으로
놀러갔습니다. 남학생 4명과 여학생 4명이었습니다. 제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이름도 예쁜 ‘순정’이었습니다. 서부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친구 2명이 늦었습니다. 그때는 핸드폰도, 삐삐도
없던 때였습니다. 누가 기다렸다가 오겠느냐고 해서 저는 제가 남아서
함께 오겠다고 했습니다. 제 친구는 기차를 타고 먼저 갔고, 기차
안에서 제가 좋아하던 ‘순정’이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제가 기차를
탔고, 제 친구가 남아서 기다렸다면 ‘순정’이의 마음이 제게로 올 수도
있었는데…….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저는 마음을 잡고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제가 남아서 기다린 것이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동창 신부 중에 제가 존경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늘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을 하고, 가난난 이들과 함께 하고, 소외된 이들, 억울한
이들의 편에 서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와 함께 2년가량 자취를
했습니다. 손님이 와도 저는 시간이 되면 잠자리에 들어가는 편입니다.
그 친구는 늦은 시간까지 손님들과 대화를 하고, 마무리까지 다 한
후에 잠자리에 들어갑니다. 한식을 좋아하는 저를 위해서 청국장도
끓여 주고, 콩나물국도 끓여 주고, 유부초밥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본인은 매운 것을 잘 먹지 않는데, 매운 것을 좋아하는 저를 위해서
고춧가루도 듬뿍 넣어 주었습니다. 이번에 인사이동에는 ‘도시빈민
사목’을 신청했다고 합니다.
진화심리학적인 관점에서 100% 타인을 위한 삶은 생존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또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00%
자신만을 위한 삶도 생존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왕따
당하거나 배척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적당히 남을
배려하고, 적당히 자신의 것을 챙기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것이
생존할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 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의
겸손은 하느님을 위해서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느님을 위해서 계명은 물론, 작은 사랑까지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의 겸손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한
것도, 질병도,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죽음까지도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길은 오랫동안 기도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야만 가능한
길입니다.
오늘은 콜베 신부님 축일입니다. 그분은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남을 위해서
대신 목숨을 바친 신부님입니다. 말로 하기는 쉽고, 글로 쓰는 것은
가능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시간 공간을 초월한다는 개념
2013년 다해 8월14일
시간 공간을 초월한다는 개념은 서지만 실제 경험은 불가능합니다.
나이 없고 늙지 않는 사람, 동시에 여러 곳에 나타나 활동하는 사람.
모두 세상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들이라 다행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이 정말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친히 살아나신 건 시공 초월입니다.
그런 분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있겠다.’하신 말씀 맞을 겁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 18,20)”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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